보타이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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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tai Culture

1. 개요
2. 발굴
3. 형질인류학적 연구
4. 언어
5. 원시 인도유럽인과의 관계



1. 개요[편집]


보타이 문화는 기원전 3700년경에서 기원전 3100년경까지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북부에서 번성했던 선사 시대 문화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을 가축화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2. 발굴[편집]


1980년에 소련고고학 연구진들이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1]의 이만부를릭 강 유역에서 최소 153개에 달하는 수혈주택[2]들을 발굴하면서, 보타이 문화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유적지에서는 의 뼈가 출토되었고, 또한 이 말을 잡는데 쓰인 것으로 보이는 도 발견되었다. 그래서 발굴 초기에는 이 말이 사냥당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이후에 출토된 토기에서 암말의 젖이 담겨있던 흔적이 발견되면서 유적지에서 발굴된 말들이 가축화되었음이 밝혀졌다.

발굴된 유적과 유물을 통해 추정된 바에 의하면, 보타이 문화의 주민들은 수렵채집민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들이 길렀던 은 현존하는 유일한 야생마인 몽골야생말의 조상으로 추정되는데, 보타이 문화에서 기르던 말들의 일부가 모종의 이유로 야생으로 되돌아간 사례로 추정된다[3]. 이들은 유목민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말을 식용 이외에 수송용으로 이용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3. 형질인류학적 연구[편집]


보타이 문화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골들을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보타이 인들은 고대 북유라시아인의 분파인 서부 시베리아 수렵채집민(Western Siberian hunter-gatherers, WSHG)과 관련이 깊다고 한다. 이들은 기원전 5000년경에 오늘날의 러시아 튜멘 주를 중심으로 한 우랄 산맥 일대에서 거주했던 이들이다. WSHG 이외에도 오늘날의 유럽 방면으로 이주한 고대 북유라시아인의 분파인 동부 수렵채집민(Eastern Hunter-Gatherers, EHG)[4]과 현대 동아시아인의 조상인 고대 동아시아인(Ancient East Asian, AEA)이 일부 혼혈된 집단이라는 사실이 형질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5]. 그리고 기원전 3500년경에는 가까운 곳에 있던 쿠르간 문화원시 인도유럽인과도 만나서 혼혈을 이루었음이 밝혀져있다.


4. 언어[편집]


보타이 문화의 주민들이 문자를 사용한 증거는 전무하고, 외부의 기록도 없기때문에, 이들의 언어는 재구가 불가능하다. 허나, 이들의 언어가 무슨 어족에 속하는지를 추정해내는 연구가 이뤄진 바는 있는데, 핀란드언어학자인 아스코 파르폴라는 우랄어족 핀우그르어파조어인 원시 우그르어로 을 뜻하는 *lox가 보타이 문화의 언어에서 차용한 어휘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민속학자이자 언어학자인 블라디미르 나폴스키흐는 이 가설을 반박하고, 해당 어휘는 원시 토하라어로 가축이라는 뜻의 *l(ə)wa의 차용어라고 주장했다[6]. 이외에 조지아의 언어학자인 타마즈 감크렐리드제는 원시 예니세이어로 종마를 *ʔɨʔχ-kuʔs라고 하고 인도유럽조어로 길들인 말을 *H₁ek̂wos라고 한다는 점에서, 보타이 문화의 언어가 예니세이어족에 속할 가능성을 제안했다[7].


5. 원시 인도유럽인과의 관계[편집]


기원전 3500년경에 보타이 문화의 주민들은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유럽 러시아의 남부에 이르는 지역에 살았던 원시 인도유럽인과 조우하여 어느정도 혼혈을 이루었는데, 이때 원시 인도유럽인들이 사육 기술을 도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이들은 원주지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기마 유목 문화인 쿠르간 문화를 건설했는데, 보타이 문화의 주민들과는 달리 말을 식용으로 쓰는데 그치지않고, 마차를 발명하면서 말을 본격적으로 운송용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원시 인도유럽인들은 유라시아 각지로 급속도로 확산하여, 중앙아시아에서는 박트리아-마르기아나 문화를 형성하였고, 이후 인도 아대륙 북부 및 유럽, 이란 등지에 정착하여 문화적, 언어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북인도인이란인, 현대 유럽인의 조상이 되기도 했으며, 일부는 오늘날의 동튀르키스탄까지 가서 현지의 고대 북유라시아인계 선주민들을 정복하고 토하라인의 조상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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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의 카자흐스탄.[2] 땅을 파낸 뒤, 그 위에 지붕을 올린 형식의 집.[3] 인간에 의해 가축화된 동물이 도로 야생화된 사례는 몽골야생말 이외에도 소수의 사례가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호주의 토착 들개인 딩고가 있다. 이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정착할 시에 데려온 들이 야생화되면서 생겨난 생물종이다.[4] 원시 인도유럽인과도 연관된 인족 집단으로, 이들과 고대 북유라시아인의 혼혈인들이 바로 원시 인도유럽인이다.[5] Jeong, Choongwon; Balanovsky, Oleg; Lukianova, Elena; Kahbatkyzy, Nurzhibek; Flegontov, Pavel; Zaporozhchenko, Valery; Immel, Alexander; Wang, Chuan-Chao; Ixan, Olzhas; Khussainova, Elmira; Bekmanov, Bakhytzhan (June 2019). "The genetic history of admixture across inner Eurasia". Nature Ecology & Evolution. 3 (6): 966–976.[6] Napolskikh, Vladimir (1996). "Происхождение угорского названия лошади". 32 (2): 116–118.[7] Blažek, Václav. 2019. Toward the question of Yeniseian homeland in perspective of toponymy. 14th Annual Sergei Starostin Memorial Conference on Comparative-Historical Linguistics. Moscow: RSUH. Quote: The preceding arguments lead to the conclusion that Yeniseians still lived in the steppe region of Central Asia including Kazakhstan in the first centuries of CE and certainly earlier. Northern Kazakhstan, namely the area of the Botai43 culture, was probably the place where the wild horse (Przewalsky-horse, i.e. Equus ferus przevalskii Poljakoff) was already in the mid 4th mill. BCE domesticated (cf. Bökönyi 1994: 116; Becker 1994: 169; Anthony 1994: 194; Outram 2009: 1332-35). The creators of this culture were totally specialized in breeding of horses (133.000 horse bones were found here already in the early 1990s!). The proximity of the Yeniseian *ʔɨʔχ-kuʔs "stallion" and Indo-European *H1ek̂u̯os "(domesticated) horse" is apparent and explainable through borrowing. If the Indo-European term cannot be transparently derived from IE *ōk̂u- "swift" = *HoHk̂u-, while the Yeniseian compound "stallion" = "male-horse" is quite understandable, the vector of borrowing should be oriented from Yeniseian to Indo-Europ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