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무어/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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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데뷔~1962년 마이너 대회
3.1. 조별 리그
3.2. 토너먼트
4. 1962년~1963년 마이너 대회
4.1.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62-63
5.1. 예선
6. 1963년~1966년 마이너 대회
6.1.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63-64
6.2. 타사 다스 나소잉스 1964
6.3.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64-65
6.4.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65-66
7.1. 조별 리그
7.2. 토너먼트
7.2.1. 8강전
7.2.2. 4강전
7.2.3. 결승전
8.1.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66-67
8.2.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67-68
8.3. 플레이오프
8.4. 토너먼트
9. 1968년~1970년 마이너 대회
9.1.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68-69
9.2.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69-70
10.1. 조별 리그
10.2. 토너먼트
11. 1970년~1971년 마이너 대회
11.1.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70-71
12. UEFA 유로 1972
12.1. 예선
12.2. 플레이오프
13. 1972년~1973년 마이너 대회
13.1.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71-72
13.2.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72-73
14.1. 지역예선
15. 1973년~은퇴


1. 개요[편집]


바비 무어의 국가대표 경력을 설명하는 문서이다.


2. 데뷔~1962년 마이너 대회[편집]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에서 론 그린우드 감독의 지휘 하에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던 한 소년이 있었다. '기술적인 하프백'이라는 특이한 플레이 스타일로 어느 정도 유명세를 얻고 있었던 그의 이름은 로버트 무어였다. 무어는 스물한번째 생일을 맞은 지 한 달 정도 지나서 대표팀에 발탁된다. 무어를 대표팀에 발탁한 감독은 월터 윈터바텀이었다. 1962년 5월 20일, 잉글랜드는 페루의 리마에 가서 페루 축구 국가대표팀과 월드컵 연습 경기를 진행했다. 무어는 이 경기에서 팀의 하프백으로 선발 출전하여 4-0 승리를 기록했다. 좋은 시작이었다.

3. 1962 FIFA 월드컵 칠레[편집]


무어는 월드컵 직전에 대표팀에 합류했다. 따라서 1961년에 열린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는 한 경기도 뛰지 않았다. 잉글랜드는 4경기에서 5골을 넣은 바비 찰튼, 2경기에서 3골을 넣은 지미 그리브스 등의 활약으로 포르투갈과 룩셈부르크를 누르고 본선에 올라왔다.

3.1. 조별 리그[편집]


잉글랜드는 헝가리, 아르헨티나, 불가리아와 같은 조에 속했다.

무어는 월드컵 전 딱 한 경기의 A매치를 치른 것이 전부였지만, 팀의 즉전력감이었기 때문에 첫 경기부터 곧장 투입되었다. 무어의 등번호는 16번이었다. 무어의 두 번째 A매치이자 첫 번째 월드컵 경기 상대는 10년 전 세계 최강팀이었던 헝가리였다. 경기 17분, 무어는 라요스 티치의 드리블을 가만히 보면서 따라가다가 순간적인 스피드를 당해내지 못하고 잠시 공간을 내주었다. 티치는 양 발을 잘 쓰는 선수였고, 왼발로 엄청난 중거리 슈팅을 때렸다. 잉글랜드는 그렇게 첫 경기부터 선제 실점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다 경기 60분에는 코너킥 상황에서 나온 그리브스의 슈팅을 필드플레이어인 사로시가 손으로 막는 바람에 페널티킥이 선언되었다. 론 플라워스가 이것을 마무리지으며 1-1 동점이 되었다. 그러나 10분 후 무어가 수비 진영에 없는 상황에서 골키퍼 스프링겟을 포함한 수비진 전체가 플로리안 얼베르트에게 완전히 돌파당하며 굴욕적인 실점을 내주고 말았다. 잉글랜드는 결국 패배했다. 당시 경기 하이라이트를 보고 싶은 사람은 이 유튜브 링크 참고 바람.

두 번째 상대는 아르헨티나였다. 잉글랜드는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좋은 플레이를 펼쳤다. 론 플라워스가 페널티킥으로 한 골을 만들어냈고, 찰튼이 멋진 중거리 슈팅으로 2-0을 만들었다. 후반전에는 그리브스가 한 골을 추가했다. 경기 81분 호세 산필리포에게 한 골을 얻어맞긴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3-1 승리였다. 무어의 월드컵 첫 승이기도 했다. 경기 하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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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커룸으로 돌아가는 잉글랜드 팀

세 번째 상대는 불가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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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발로 공을 처리하는 무어
무어는 빠지지 않고 출전했다. 양 팀은 수비적인 승부를 펼쳤고 0-0으로 비겼다. 이 경기에서 웬 개 한 마리가 난입하여 레이 윌슨과 바비 찰튼에게 쫓기는 재미있는 장면도 있었다. 잉글랜드의 최종 조별리그 순위는 2위였다. 승점은 3점으로 1승 1무 1패의 아르헨티나와 완전히 같았지만, 득실차에서 2점 앞섰기 때문이 잉글랜드가 8강에 진출했다.

3.2. 토너먼트[편집]


잉글랜드는 조별예선은 통과하지만 토너먼트에서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을 만난다. 브라질은 당시 펠레가 부상으로 이탈한 상태였기에 잉글랜드 입장에서 한번 맞붙어 볼 만한 상대였다. 브라질을 맞이한 잉글랜드는 론 플라워스를 센터백처럼 뛰게 하여 마리우스 노먼-론 플라워스-바비 무어로 구성된 수비진을 이끌고 나왔다. 레프트백과 라이트백은 당시 유럽 탑클래스로 평가받던 레이 윌슨과 지미 암필드였다. 충분히 브라질의 화력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경기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강아지가 난입하는 일이 있었다. 잉글랜드는 이 대회에서 강아지만 두 번을 봤다. 이 강아지는 지미 그리브스에 의해 붙잡혔다. 자세한 내용은 지미 그리브스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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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하무스, 자갈루 앞에서 그리브스가 서 있는 방향으로 슈팅하는 무어
잉글랜드는 디펜딩 챔피언을 상대로 잘 맞서 싸웠다. 가린샤의 첫 번째 골 이후 7분만에 제럴드 히친스가 동점골을 넣었다. 확실히 전반전이 끝날 때까지는 막상막하였다. 그러나, 후반전에는 정말 당하기만 했다. 갖가지 트릭으로 무장한 가린샤지지의 콤비 플레이에 완전히 중원을 장악당하고 측면은 측면대로 다 뚫렸다. 바비 찰튼이 그나마 몇 번의 드리블 성공과 태클을 보여주며 자존심을 살릴 뿐이었다. 무어는 조별리그에서 좋은 수비력을 보여주었지만 이 경기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경기 53분 바바에게 한 골을 허용하고 6분 후에는 가린샤에게 엄청난 중거리 슈팅 득점을 허용하며 패하고 말았다.

당시 잉글랜드는 축구종가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으나, 월드컵에서는 계속해서 실패했다. 조니 헤인스, 지미 암필드 등 유럽 최고 수준의 선수들을 데리고 있었고 20대 초반의 지미 그리브스, 참사에서 살아 돌아온 바비 찰튼 등 새로운 주축 선수들의 등장으로 인해 굉장히 잘 풀릴 것만 같았던 1962년 월드컵마저 8강에서 그친 것은 충격이었다. 축구종가로서 갖고 있던 자존심은 1950년대 초반부터 완전히 구겨지기만 했다. 때문에 다음에 자국에서 열리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는 꼭 우승을 해야 한다는 당면과제를 안게 되었다.


4. 1962년~1963년 마이너 대회[편집]



4.1.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62-63[편집]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은 영연방의 4개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이 10월부터 다음 연도 4월에 걸쳐 매 년 진행했던 대회이다. 1962년 국가대표팀에 데뷔한 무어에게는 1962-63시즌의 대회가 처음이었다. 무어는 10월 북아일랜드전, 11월 웨일스전에 참가하여 각 3-0, 4-1 스코어의 대승을 이끌었다. 스코틀랜드 역시 2전 전승을 기록하며 순항하고 있었다. 1962-63 시즌의 우승팀은 1963년 4월 경기의 결과에 따라 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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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전을 앞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그러나 잉글랜드는 공격적인 스타일의 레프트 하프 짐 백스터에게만 연이어 두 골을 얻어맞으며 2-1로 패했다. 스코틀랜드는 2연속 우승을 달성했고, 잉글랜드의 자존심은 날을 거듭하며 구겨지고 있었다.

5.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편집]



5.1. 예선[편집]


잉글랜드는 예선 1라운드에서 프랑스와 맞붙었다. 당시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시스템은 현재와 아주 많이 달랐다. 토너먼트 방식으로 4팀을 선발했는데, 32개국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었던지라 예선 1라운드부터 3라운드까지 전부 승리해야 했다. 한 라운드당 두 경기가 진행되었다. 1962년 10월 3일,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은 셰필드에서 프랑스와 1차전을 진행했다. 결과는 1-1 무승부였다. 1963년 2월에는 파리에 가서 원정 경기를 진행했다. 이번에는 5-2로 크게 패했다. 무어는 두 경기에 모두 출전했으나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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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로 패배하며 무너지는 잉글랜드

6. 1963년~1966년 마이너 대회[편집]


1963년 5월 29일,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무어는 처음으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주장직을 수행했다. 당시 무어의 나이 22세(생후 22년 47일)이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연소 주장 출전 기록으로 남아 있다. 무어는 클럽에서 주장직을 수행했으나 국가대표팀에서는 아직 부주장이었다. 부상으로 빠진 지미 암필드 대신 잠시 주장이 된 것이었고, 이후 암필드가 복귀하자 주장 완장을 다시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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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무어 vs 1963 FIFA XI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은 1963년 10월 23일에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등의 슈퍼스타들이 대거 포함된 FIFA XI 팀과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무어는 인상깊은 활약을 보여주었고, 잉글랜드는 FIFA XI를 상대로 2:1승리를 거두었다. 무어와는 별로 관련이 없는 이야기지만 이 경기에서 레프 야신은 그야말로 인생 경기를 펼쳤고, 이 경기에서의 활약은 야신의 발롱도르 수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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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소푸스트의 태클에 걸려 넘어지는 무어


6.1.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63-64[편집]


무어는 이번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도 모든 경기를 다 뛰었다. 1963년 10월에 열린 1차전은 카디프에서 열린 웨일스와의 경기였고, 잉글랜드는 4-0으로 가볍게 승리했다. 11월 경기는 북아일랜드와의 경기였다. 잉글랜드는 지미 그리브스와 테리 페인이 각 4골, 3골씩 득점하면서 8-3으로 승리했다. 그러나 1964년 4월에 열린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는 패배했다. 최종 승점은 4점이었고, 승점이 4점인 팀이 세 팀이었다. 웨일스 빼고 모든 팀이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가 끝나던 시점에서 국가대표팀 주장은 지미 암필드였다.

6.2. 타사 다스 나소잉스 1964[편집]


무어는 1964년 5월 클럽에서 FA컵을 들어올리며 최고로 기분 좋은 시즌을 보냈다. 타사 다스 나소잉스 역시 1964년 5월에 열렸다. 조니 헤인스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주장직을 역임하던 라이트백 지미 암필드가 부상당한 이후 무어가 잉글랜드의 주장 완장을 완전히 이어받고 나서 맞이한 첫 번째 대회이기도 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브라질이 개최한 대회였고, 잉글랜드 외에도 포르투갈, 아르헨티나가 초청되었다. 펠레, 에우제비우 등 많은 스타 선수들이 참가한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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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전을 앞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잉글랜드는 이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최고의 선수들을 내보냈다. 첫 번째 경기는 브라질전이었는데, 주전 골키퍼 고든 뱅크스가 부상으로 불참했다. 그래도 나머지 선수들이 그대로 출전한 만큼, 많은 사람들은 명승부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5-1로 대판 깨지고 말았다. 다음 경기는 포르투갈전이었다. 포르투갈전부터는 뱅크스가 복귀했다. 그 결과, 한 골씩 주고받으며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세 번째 경기인 아르헨티나전에서는 알프레도 로하스에게 한 골을 얻어맞으며 1-0으로 패배했다.

잉글랜드는 포르투갈과 함께 공동 3위를 기록했다. 1, 2위는 각각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차지했다. 당시의 남미 축구가 얼마나 강했는지 대충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이 대회가 브라질에서 열린 대회였으니 남미 선수들이 유럽 선수들에 비해 좋은 컨디션에서 뛸 수 있는 상황이긴 했지만...


6.3.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64-65[편집]


무어는 1964-65 시즌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부터는 주장으로 참가했다. 1964년 10월에 열린 첫 경기는 벨파스트에서 진행된 북아일랜드와의 경기였다. 북아일랜드에는 이제 막 18세가 된 축구천재 조지 베스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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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 테리 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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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와 베스트
잉글랜드는 그리브스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원정에서 3-4승리를 거두었다. 11월에 열린 두 번째 경기에서는 웨일스 국가대표팀을 런던으로 불러서 경기를 진행했다. 이 경기에서 무어는 부상으로 빠졌고 론 플라워스가 대신 주장완장을 찼다. 잉글랜드는 홈 팬들의 열띤 응원 속에서 2-1 승리를 거두었다.

무어는 1964년 말에 고환암 수술을 받았다.

한참 지나 1965년 4월에 열린 세 번째 경기 상대는 스코틀랜드였다. 이 경기에서는 무어가 복귀해 주장완장을 찼다. 이안 세인트 존과 데니스 로에게 한 골씩 얻어맞으며 무승부에 그쳤다. 세 경기동안 승점 5점을 쌓은 잉글랜드는 1964-65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4시즌 연속으로 스코틀랜드에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는 씁쓸한 기록을 떠안게 되었다.

6.4.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65-66[편집]


무어의 A매치 경기수는 어느새 30경기를 넘어섰다. 무어는 1965-66 시즌에도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 참가했다. 1965년 10월의 첫 번째 경기 상대는 웨일스였다. 잉글랜드는 웨일스를 상대로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승리를 챙기지 못했다. 11월에 열린 두 번째 경기의 상대는 북아일랜드. 만만찮은 상대였지만, 잉글랜드는 2-1 승리를 챙겼다. 세 번째 상대는 스코틀랜드였다. 경기는 글래스고의 햄든 파크에서 열렸다. 경기 18분, 제프 허스트의 국가대표팀 데뷔골이 터졌다. 그리고 로저 헌트가 경기 34분에 추가골을 넣었다. 스코틀랜드 또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경기 41분, 잉글랜드 진영의 왼쪽 측면에서 데니스 로를 향해 날카로운 크로스가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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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로의 뒤에서 헤더를 저지하려는 무어
데니스 로는 이런 것을 놓칠 선수가 아니었다. 이 장면은 골로 연결되었다. 잉글랜드는 점수차를 벌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결과, 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로저 헌트가 골을 넣었다. 이후에는 지미 존스톤이 한 골을 집어넣고 바비 찰튼이 도망가는 점수를 냈다. 경기 81분에 지미 존스톤이 한 골을 더 집어넣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결국 잉글랜드가 4-3으로 승리했고,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상대 4년 연속 무승이라는 지긋지긋한 기록을 끝냈으며, 2시즌 연속으로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단독 우승을 차지했다.

7.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편집]


잉글랜드는 월드컵 직전, 그러니까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네 차례의 연습 경기를 진행했다. 상대는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폴란드였다. 이 중 핀란드전에서는 무어가 휴식을 취했고, 무어 대신 지미 암필드가 주장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암필드는 핀란드전 이후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무어는 다음 경기부터 복귀했다. 암필드는 핀란드전 이후의 부상 때문에 빠졌고, 따라서 무어는 원래처럼 주장직을 수행했다. 암필드가 나간 자리에는 조지 코헨이 들어왔다.

무어는 알프 램지 감독이 개발한 '윙이 없는' 4-1-3-2 전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선수였다. 무어는 연습 경기에 실험적인 태도로 임하며 공격 가담을 적극적으로 시도했고,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오슬로에서 열린 노르웨이 원정 경기에서는 직접 중거리 슈팅으로 한 골을 터뜨리며 팀의 1-6 대승을 이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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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의 골
전술은 대성공이었다. 무어는 덴마크전과 폴란드전에서도 전부 뛰었다. 이 두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전부 무실점을 거두었다. 포백 라인의 수비수 네 명이 전부 화끈하게 오버래핑을 실시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알프 램지의 '윙리스' 전술은 아주 혁신적인 전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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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국가대표팀[1]
위 그림이 바로 잉글랜드가 1966년 월드컵에서 사용했던 '윙어가 없는 4-1-3-2 전술'이다. 윙어가 없는 전술이기 때문에, 포백 모두의 엄청난 활동량을 요한다. 특히 우측면의 조지 코헨은 윙어나 다름없는 역할을 맡았다. 무어는 최후방에 머물러 있다가 수시로 공격에 가담했다. 무어와 짝을 이룬 잭 찰튼은 세트피스 상황에서 공격수처럼 깊게 공격에 가담했다. 레이 윌슨은 균형 잡힌 플레이를 펼쳤다. 그리고 중원의 스타일스는 어마어마하게 뛰어다니면서 상대방 핵심 선수를 대인 마킹했다. 바비 찰튼은 어마어마하게 많이 뛰어다니는 프리롤 미드필더로 기용되었다. 앨런 볼은 잦은 드리블로 잉글랜드의 플레이에 다양성을 불어넣었다. 나머지 세 선수는 그냥 평범하게 그 포지션에 주어진 역할을 수행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의 첫 경기는 7월 11일이 되어서야 진행되었다. 다른 월드컵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늦은 시기에 개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알프 램지 감독은 기자들 앞에서 큰 포부를 밝혔다.

"잉글랜드는 1966년 월드컵에서 우승할 것입니다."'

알프 램지


7.1. 조별 리그[편집]


잉글랜드는 1966년 월드컵 개최국이었기에 지역예선을 치르지 않고 바로 본선 조 배정을 받았다. 잉글랜드는 우루과이, 프랑스, 멕시코와 같은 1조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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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전 라인업
첫 경기는 우루과이전이었다. 양 팀의 수비는 막강했다. 무어가 이끄는 잉글랜드의 수비나 네스토르 곤살베스가 이끄는 우루과이의 수비나 장난 아니게 탄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잉글랜드는 찰튼을 중심으로 경기를 주도하며 위협적인 장면을 만들어냈지만, 결국 득점을 완성하지 못하며 0-0 무승부에 만족해야 했다. 잉글랜드가 전력을 풀가동하고 나왔으며, 잉글랜드 축구의 '성지' 웸블리에서 열린 경기라는 것을 생각하면 석연찮은 결과였다.

다음 경기 역시 웸블리에서 열렸다. 멕시코와의 경기였는데,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바비 찰튼의 결승골과 로저 헌트의 추가골로 2-0승리를 거두었다. 잉글랜드의 수비진은 결코 뚫리지 않았다. 무어는 시도때도없이 팀 공격작업에 가담하여 날카로운 패스로 상대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놀라운 전술이었다.

1조의 여섯 경기는 우루과이와 프랑스의 맞대결을 제외하고 모두 웸블리에서 열렸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맞대결도 웸블리에서 진행되었다. 프랑스 선수들은 웸블리의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게다가, 8년 전 스웨덴에서 프랑스의 4강 진출을 이끌었던 쥐스트 퐁텐레몽 코파는 이미 은퇴하고 없었다. 프랑스는 이빨 빠진 호랑이었고, 잉글랜드는 지속적인 리빌딩을 통해 이빨을 갈아끼운 사자였다. 두 명의 바비가 맹활약을 펼치는 가운데 프랑스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잉글랜드는 시종일관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며 프랑스를 2-0으로 꺾었다. 심지어 바비 찰튼의 정당한 골이 오프사이드로 취소되는 일이 있었음에도 2-0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그만큼 잉글랜드는 좋은 팀이었다.

윌슨-무어-찰튼-코헨-뱅크스가 이끄는 잉글랜드의 수비력은 훌륭했다. 고든 뱅크스는 100%의 선방률을 자랑했으며, 조별리그 3경기 내내 한 골도 내주지 않았다. 조별리그에서 잉글랜드가 보여준 모습은 그야말로 '무적'이었다. 잉글랜드가 월드컵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잉글랜드 사람들은 슬슬 기대하기 시작했다.

7.2. 토너먼트[편집]



7.2.1. 8강전[편집]


조별리그 3차전 프랑스전에서 잉글랜드의 간판 공격수 지미 그리브스가 부상을 당해 8강부터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이 공백을 어떻게 메워야 하나 말이 많았고, 무어의 웨스트햄 동료 제프 허스트가 그리브스의 공백을 메우게 되었다.

경기는 35분경까지 양 팀의 거친 파울 속에서 매우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아르헨티나는 강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서독인 주심 루돌프 크라이틀라인이 갑자기 아르헨티나의 주장 안토니오 라틴에게 퇴장을 명령한 것이다. 라틴이 경기 내내 파울을 여러 차례 범하긴 했으나 퇴장당할 정도로 심한 파울을 저지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퇴장 명령이 날아왔고, 라틴은 영문도 모른 채 경기장을 빠져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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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게 퇴장당하는 라틴
무어는 그저 경기가 재개되길 원했고, 5분 넘게 항의를 이어가며 경기 시간을 잡아먹는 아르헨티나 선수들에 대해 주심이 확실한 조치를 취해 주기를 바랐다. 규정대로라면, 경기가 재개될 경우 잉글랜드가 프리킥 찬스를 얻는 상황이었다. 무어는 아르헨티나 선수들에게 둘러싸인 주심에게 다가갔고, 잉글랜드의 주장으로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침착하게 전하려 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주심의 대답이 아닌 아르헨티나 수비수 로베르토 페레이로의 손바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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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을 맞는 무어

"바비 무어는 계속해서 프리킥을 차기 원하고 있습니다."(Bobby Moore wants to take a free kick and get on with it.)

케네스 윌스턴홀름(BBC 캐스터)

무어는 아무 잘못이 없었음에도 뺨을 맞았다. 그럼에도 아무런 보복을 하지 않고 매우 침착하게 대처했다.

몇 분이 더 지난 후에 비로소 경기가 재개되었다. 라틴은 언짢은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나가기 직전, 코너 플래그에 있던 유니언 잭을 잡고 한 번 비틀어 쥐면서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이자 든든한 주장이었던 라틴이 빠지자 아르헨티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무어는 후방에서 날카로운 패스들로 공격수들을 지원했다. 아르헨티나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경기 78분까지 잘 버텼다. 그러나 제프 허스트에게 통한의 헤더골을 허용하며 패했다.

경기 종료 후, 알프 램지는 극히 격노하며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고, 양 팀 선수들이 유니폼을 교환하려 하자 그것을 빼앗아 들며 유니폼을 바꾸지 못하게 했다. 아르헨티나가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경기의 주심을 맡았던 루돌프 크라이틀라인은 안토니오 라틴의 퇴장 사유를 '폭력적인 언행'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루돌프 크라이틀라인은 서독 사람이었고, 잉글랜드 선수들과 아르헨티나 선수들 모두 크라이틀라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크라이틀라인 역시 영어와 스페인어를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잉글랜드의 잭 찰튼에게도 구두주의를 주었다는데, 잭 찰튼은 그 사실을 다음 날 경기 리포트를 보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즉, 루돌프 크라이틀라인 주심은 양 팀 선수들 모두와 말이 안 통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근거를 들어 퇴장을 선언했으니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경기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주심과 선수 간에 확실한 경고 표시 수단이 없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래서 1970년 월드컵부터는 선수 보호 목적까지 겸하여 옐로/레드 카드 제도가 도입되기에 이른다.

7.2.2. 4강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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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 콜루나와 무어
4강에서는 포르투갈을 만났다. 포르투갈은 에우제비우라는 슈퍼 클래스의 공격수 덕에 돌풍의 팀 북한을 간신히 꺾고 올라온 상태였다. 잉글랜드는 포르투갈보다 좀 더 우세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마리우 콜루나와 자임 그라샤로 구성된 포르투갈의 중원은 조별리그에서 브라질마저 잡아먹은 막강한 중원이었지만, 찰튼이 이끄는 잉글랜드의 중원에는 당해내지 못했다. 패스를 공급받지 못한 에우제비우는 바비 무어와 잭 찰튼 그리고 노비 스타일스를 상대로 매우 고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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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 vs 에우제비우

"에우제비우는 공을 가지고 필드 바깥쪽으로 빠지는 플레이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바비는 그를 경기에서 완전하게 지워 버렸다."[2]

조지 코헨

무어가 공수양면으로 포르투갈 진영을 뒤흔드는 대활약을 펼치는 가운데 찰튼 역시 2골을 때려넣었다. 경기 82분 잭 찰튼의 어이없는 핸들링 파울로 내준 페널티 킥 상황에서 에우제비우에게 실점하며 잉글랜드의 무실점 기록은 442분[3]에서 마감되었다.

잉글랜드는 포르투갈을 상대로 좋은 경기를 펼치며 2-1 승리를 거두었다. 남은 것은 결승전 뿐이었다.

7.2.3. 결승전[편집]


결승전 상대는 소련을 꺾고 올라온 서독이었다. 경기 12분, 잉글랜드는 혼전 상황에서 헬무트 할러에게 선제골을 내주었다. 대회 첫 선제 실점이었다. 잉글랜드에게는 충격적인 실점이었다.

그러나 무어는 낙담하지 않고 침착하게 팀을 이끌었다. 6분 후, 무어가 공을 가지고 오버래핑하던 도중에 오베라트의 태클에 걸려 넘어졌다. 프리킥을 얻어냈고, 무어는 페널티 박스 중앙으로 뛰어 들어가던 제프 허스트를 슬쩍 쳐다보더니 바로 오른발로 정확한 패스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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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점골을 어시스트하는 무어
서독의 간판 스트라이커이자 주장이었던 우베 젤러는 이후 무어와 잭 찰튼을 상대로 공중볼을 단 한 차례도 따낼 수 없었다. 잉글랜드가 공격하면 서독이 막고 계속해서 역습을 이어가는 형세로 경기가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후반 78분, 잉글랜드의 코너킥 상황에서 서독의 수비수 회트게스가 클리어링을 시도하다가 넘어지며 공중으로 공을 띄워버렸다. 공은 애매한 곳으로 튀어나왔다. 잉글랜드의 미드필더 마틴 피터스가 이것을 놓치지 않고 골을 만들어냈다. 의심의 여지없는 서독의 실수였고, 완벽한 득점이었다. 잉글랜드는 2:1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기 89분, 논란의 장면이 하나 발생한다. 서독의 마지막 프리킥 찬스에서 오베라트의 슈팅이 코헨을 맞고 튀어 혼전 상황이 발생했다. 여기에서 서독의 지그프리트 헬트는 왼발로 강한 슈팅을 때렸는데, 이게 카를하인츠 슈넬링어의 팔에 명백하게 맞고 굴절되어 볼프강 베버에게 흘렀다. 무어와 뱅크스 등 잉글랜드의 선수들은 당연히 이것을 목격했고 곧바로 핸들링 파울이 아니냐며 항의했으나, 주심은 이를 무시했고 베버가 바로 골을 넣었다. 무어는 격노했고, 주심을 따라가서 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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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의

"바비 무어는 그 때 나와 완전히 똑같은 행동을 했다. 우리는 주심에게 달려갔다. 보다시피, 그건 핸드볼이었다. 그런데 골이 선언되었다. 그의 팔에 맞았다! 우리에게 프리킥이 주어졌어야 했다. 우리는 우승을 목전에 두고 있었는데 주심이 그것을 흘려보냈다. 바비 무어는 무척 화를 냈다. 그건 파울이었다. 어쨌든, 주심은 골을 선언했다."[4]

고든 뱅크스[5]

흔히 잉글랜드가 이 월드컵에서 심판들을 매수해 편파판정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말도 안 되는 판정으로 불이익을 받은 것은 서독이 아니라 잉글랜드였다. 잉글랜드의 1점차 승리로 끝날 수 있었던 경기는 그렇게 동점이 되었다.

잉글랜드 선수들은 절망에 빠졌다. 무어는 눈앞에서 승리를 놓친 동료들이 사기를 완전히 잃지 않도록 열심히 팀을 독려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쥐고 있는 팀의 맏형 잭 찰튼에게 다가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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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빠진 선수들을 독려하는 무어

"빅 재키는 경기 중 바비에게 욕을 들었던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해요. 특별히 그런 비난을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바비가 잭에게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다시는 그 지랄(effing) 하지 마.""

제프 파월, 바비 무어의 공식 바이오그래퍼[6]

그리고 정규 시간이 종료되었다. 휴식시간이 주어졌고, 잉글랜드의 감독 알프 램지는 선수단을 전부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이미 한 번 이겼다. 가서 한 번 더 이기고 돌아와라."

램지의 이 말은 심판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인해 동점이 되었을지언정 경기 내용은 분명 잉글랜드가 앞섰다는 것을 선수들에게 분명히 알려주고자 한 말이었다. 양 팀 선수들이 땀을 닦고 잠깐의 휴식을 취한 후, 곧 연장전이 시작되었다.

버저비터 동점골을 넣은 서독 선수들의 사기가 급상승했으나 잉글랜드 선수들은 절대 밀리지 않았다. 연장 6분, 또 논란의 장면이 터진다. 제프 허스트의 슛이 골포스트를 맞고 골라인 근처에 떨어졌다. 이를 정확히 보지 못한 주심은 처음에는 골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부심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골로 인정했다. 서독 선수들은 주심과 부심을 둘러싸고 2분 가까이 항의를 이어갔다. 하지만 주심의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고, 잉글랜드가 다시 한 번 앞서가게 되었다. 서독 선수들은 동점골을 넣기 위해 분전했으나, 연장전까지 계속되는 경기 탓에 체력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였다. 이 때는 선수 교체 제도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지친 선수를 바꾸어 줄 수도 없었다. 종료 시간이 임박할수록, 서독 선수들은 동점골을 넣기 위한 의지를 잃었다. 경기에서 앞서가고 있던 잉글랜드 선수들은 비교적 쌩쌩한 상태를 유지했다.

경기 119분, 무어의 마지막 인터셉트 이후 서독 선수들이 전의를 상실한 상태에서 주심이 휘슬을 불지 않고 경기를 계속 재개시켰다. 무어는 전방에 대기 중이던 제프 허스트에게 좋은 롱패스를 날렸다. 서독 수비수들은 120분 가까이 경기장을 엄청나게 뛰어다닌 상태였기 때문에, 전방에 머무르며 체력을 비축해놓았던 허스트를 스피드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서독 선수들이 따라붙기를 포기했고, 오픈 찬스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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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y think it's all over!"

"허스트가 달려나갑니다... 몇몇 사람들이 경기장에 들어왔습니다. 저 사람들, 경기가 완전히 끝난 줄 아는군요..."

"...끝났습니다! 네 번째 골입니다!"

케네스 윌스턴홀름, 결승전을 중계하던 BBC 해설자[7]

몇몇 관중들은 기쁨에 겨워 휘슬이 울리기도 전에 경기장에 난입했다. 그리고 허스트의 골이 터짐과 동시에 경기가 종료되었다. 종합 스코어 4-2. 잉글랜드가 월드컵을 우승한 다섯 번째 국가로 이름을 남기는 순간이었다. 잉글랜드의 캡틴 무어는 팀의 모든 선수 중 가장 먼저 단에 올라 엘리자베스 2세와 악수한 뒤 트로피를 직접 건네받는 영광을 누렸다.[8] 그리고 길을 따라 필드로 내려온 후 동료들 어깨 위에 올라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역사적인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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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 리메컵을 든 무어
잉글랜드의 캡틴 무어는 25세 109일의 나이로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월드컵에서 우승한 팀의 주장 중 최연소 선수라는 타이틀을 가져왔다. 이 기록은 12년 후 다니엘 파사레야가 경신했다. 파사레야의 나이는 25세 31일로, 무어보다 단 78일 빨랐다.

무어는 활약상을 인정받아 엘 그라피코 등의 매체에서 선정한 올스타팀에 이름을 올렸다. FIFA에서 공식적으로 최우수 선수를 선정한 기록은 없지만, 무어는 영국 내에서 Player of the World Cup 이라는 이름의 트로피를 받는 한편, 축구선수로서는 최초로 1966년 'BBC 올해의 스포츠인'으로 선정되는 등 이 월드컵을 빛낸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참고로 월드컵 결승전 한 경기에서 두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한 수비수는 지금까지도 무어가 유일하다.[9]

여담으로, 경기 종료 직전 BBC 해설위원 케네스 윌스텐홀름이 날린 'They think it's all over...'이라는 멘트는 한동안 영국 내에서 엄청난 유행을 탔다. 같은 이름의 TV 시리즈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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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무어 in 1966 FIFA World Cup

8. UEFA 유로 1968[편집]


유로 1968 예선은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매년 영연방에서 진행되었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이 유로 1968의 예선 라운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1966-67 시즌, 1967-68 시즌의 결과를 종합하여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팀이 유로 1968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방식이었다.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참가 팀은 기존과 같았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

8.1.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66-67[편집]


먼저 1966-67 시즌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잉글랜드의 첫 경기 상대는 북아일랜드였다. 잉글랜드는 로저 헌트와 마틴 피터스의 골로 0-2 승리를 챙겼다. 11월 웨일스전은 웸블리에서 열렸고, 홈 관중들을 업은 잉글랜드가 허스트의 멀티골에 힘입어 5-1 대승을 거두었다.

1967년 4월 스코틀랜드전은 역사에 남을 명경기였다. 웸블리에서 열린 경기였고, 아주 빠른 템포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유로 1968 본선 진출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경기였던만큼 양 팀 팬들의 함성 역시 장난이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이 링크로 들어가서 풀경기를 보자. 아주 재미있는 승부였다.(footballia.net) 무어를 비롯해서 앨런 볼, 바비 찰튼, 데니스 로, 짐 백스터, 바비 레녹스, 고든 뱅크스 등 양 팀의 모든 선수들이 자신들의 특징적인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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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무어 vs 스코틀랜드
위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무어는 아주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잉글랜드의 2-3 패배를 막지 못했다. 스코틀랜드의 골키퍼 로니 심슨이 어마어마한 활약을 펼친 것이 주된 이유였다. 심슨은 양 팀 선수를 통틀어 가장 많은 3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선방들을 보여주며 스코틀랜드의 승리를 이끌었다. 참고로 심슨은 셀틱 FC의 주전 멤버였고, 한 달 후에 조크 스타인의 지휘 하에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했다. 유럽 구단 중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한 '리스본의 사자들'의 일원이었다는 말이다.

잉글랜드는 1966-67 시즌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2승 1패를 기록했다. 1위 자리는 2승 1무를 기록한 스코틀랜드에 내주었다. 잉글랜드의 유로 본선 진출에 또 빨간불이 켜졌다. 유로 1968 본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다음 시즌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이것을 꼭 만회해야 했다.

8.2.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67-68[편집]


1967-68 시즌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은 유로 1968 플레이오프 진출자를 결정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기존보다 단축된 기간 동안 개최되었다. 1967년 10월, 잉글랜드의 상대는 웨일스였다. 웨일스 원정에서 찰튼, 피터스, 볼이 한 골씩 득점하며 0-3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같은 날 열렸던 북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기에서는 북아일랜드가 스코틀랜드를 잡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로써 두 팀의 점수는 역전되었다.

11월 경기에서 잉글랜드의 상대는 북아일랜드였다. 웸블리에서 허스트와 찰튼이 한 골씩 집어넣으며 2-0승리를 챙겼다. 스코틀랜드 역시 글래스고에서 웨일스를 2-1로 꺾었다. 결국, 다음 해에 열리는 마지막 경기에서 유로 플레이오프 진출팀이 결정되는 상황이 되었다.

스코틀랜드와의 경기는 1968년 2월에 글래스고에서 열렸다. 정말 중요한 경기였던만큼 양 팀은 최정예 멤버들을 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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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기 직전에 발매된 10페이지 정도 분량의 소개 책자
용호상박의 경기를 펼치던 중, 경기 20분경 마틴 피터스의 선제골이 터졌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존 휴즈가 39분에 동점골을 터뜨렸다. 경기 중 스코틀랜드는 한 차례 더 골망을 갈랐으나 골키퍼 고든 뱅크스를 향한 차칭 파울이 선언되어 득점이 무산되었다. 경기는 그대로 흘러갔고, 결국 더 이상의 득점 없이 종료 휘슬이 울렸다. 1-1 무승부였다. 경기 하이라이트(Youtube)

무어는 그렇게 난생 처음으로 유로 본선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았다.

8.3. 플레이오프[편집]


플레이오프 상대는 조별 예선에서 아일랜드, 체코슬로바키아, 터키를 누르고 올라온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프란시스코 헨토, 아만시오 아마로 등의 스타플레이어가 있었고, 전체적으로 봐도 잉글랜드와 비슷한 수준의 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첫 번째 경기는 1968년 4월 3일 웸블리에서 열렸다. 십만 명이 꽉 들어찬 웸블리 스타디움은 잉글랜드의 첫 유로 진출을 원하는 홈 팬들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경기는 아주 팽팽했다. 경기 80분까지도 그 흐름을 종잡을 수 없었다. 해결사는 찰튼이었다. 프리킥 상황에서 무어가 찰튼에게 공을 건네 주었고, 찰튼이 한번 툭 치고 스페인 수비수를 제친 뒤 강력한 중거리 슈팅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경기는 그대로 종료되었다. 잉글랜드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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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주장 파코 헨토와 악수하는 무어
그러나 2차전도 남아 있었기에 방심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2차전은 스페인 축구의 성지 마드리드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당시 기록상으로 무려 120,000명의 관중이 경기를 보러 왔다고 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극적인 역전으로 잉글랜드에게 승리를 거두고 지난 대회에 이어 유로 본선에 진출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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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전 하이라이트
스페인 사람들의 바람대로 경기는 스페인이 주도했다. 무어는 발이 빠른 스페인 선수들을 1:1 수비로 저지하기 어려워했고, 헨토와 아만시오의 날카로운 크로스를 경기 내내 막느라 크게 고전했다. 결국 아만시오가 경기 47분경에 골을 터뜨렸다. 잉글랜드는 실점했지만 금방 침착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 결과 8분만에 마틴 피터스에게 절호의 찬스가 왔고, 피터스는 멋진 헤더 슈팅으로 골망을 갈랐다. 점수는 1-1이 되었다.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잉글랜드가 본선 토너먼트에 진출하게 되는 상황. 경기 81분에는 공격진영에 올라와 있던 수비수 노먼 헌터가 추가 득점을 만들어내며 1-2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남은 10분은 조용하게 흘러갔고, 경기는 종료되었다.

합산 스코어 3-1로 거함 스페인을 꺾은 잉글랜드는 역사상 최초로 UEFA 유로 본선에 진출했다.

8.4. 토너먼트[편집]


4강전 상대는 유고슬라비아였다. 월드컵 우승팀인 잉글랜드만큼의 전력은 아니더라도 각 포지션별로 월드 클래스의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는 난적이었다. 경기는 매우 팽팽했으며 잉글랜드가 약간 우세한 모습을 보였다. 양 팀은 굉장히 거칠게 경기했다. 경기를 통틀어 20개가 넘는 파울이 나왔고, 양 팀의 크랙인 앨런 볼드라간 자이치는 엄청나게 걷어차였다. 그러나 주심은 거친 행위를 전부 묵인했다. 경기 중 앨런 볼을 향한 살인적인 태클을 본 무어가 크게 분노하는 장면도 있었다. 아래 영상 1분 30초경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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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무어 vs 유고슬라비아
경기 87분, 드라간 자이치가 순간적으로 무어의 마킹에서 벗어나 공을 받아냈고, 공중에 뜬 공을 바로 붕 띄워서 뱅크스의 머리 위로 넘겼다. 월드컵에서 엄청난 방어력을 보여주었던 뱅크스도 이런 상황에서는 별 수가 없었다. 결국 실점했다. 거함을 상대로 경기 막판에 앞서가게 된 유고슬라비아의 선수들, 팬들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고슬라비아 선수들의 거친 걸어잠그기가 이어졌다. 잉글랜드의 수비형 미드필더 앨런 멀레리는 지고 있는 상황에서 다리를 걷어차이자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고, 보복성 파울을 범해 퇴장당하고 만다. 주심의 판정에 좀 씁쓸한 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무어는 남은 시간동안 매우 높은 위치에 올라가서 동점골에 기여하고자 했으나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주심의 종료 휘슬과 함께 유고슬라비아가 결승 진출권을 가져갔다. 4강에서 탈락한 것은 월드컵 챔피언 잉글랜드에게 있어서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이었다. 3, 4위전에서는 이것을 어떻게든 만회해야 했다.

3, 4위전에서 맞닥뜨린 상대는 1960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1964년 대회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한 전통의 강호 소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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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무어 vs 소련
하지만 소련은 잉글랜드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특히 무어가 엄청난 경기력을 보여주었는데, 혼자 14개의 인터셉트를 기록하고 태클도 7개나 성공시키는 괴물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평소처럼 엄청난 퀄리티의 패스들도 뿌려 주었다. 소련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유효슈팅 두 개를 기록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잉글랜드는 점유율을 계속해서 유지했고, 그 결과 찰튼이 전반전에 한 골을 득점했다. 후반전에도 경기 양상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제프 허스트가 완벽한 1:1 찬스를 잡았고, 첫 번째 슈팅은 골키퍼에게 막혔지만 두 번째 슈팅은 그대로 골망을 갈랐다.

결국 잉글랜드는 처음 참가한 대회에서 최종 3위를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무어는 두 경기 모두에서 환상적인 실력을 보여주었고, 공식 올스타 팀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선정되었다.


9. 1968년~1970년 마이너 대회[편집]



9.1.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68-69[편집]


매 시즌마다 10월, 11월, 4월에 걸쳐 열렸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68-69 시즌에는 선수들의 시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시즌이 완전히 끝난 후 진행하는 방식으로 새롭게 개편되었다. 1968-69 시즌의 경기는 모두 1969년 5월에 열렸다.

잉글랜드의 첫 상대는 북아일랜드였다. 북아일랜드는 영연방 내에서 강한 축은 아니었지만, 희대의 선수 조지 베스트가 버티고 있어 만만찮은 상대였다. 벨파스트 원정 경기를 치르게 되었고, 경기장의 분위기는 압도적이었다. 베스트가 공을 잡을 때마다 관중석에서 오빠부대의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절대 과장이 아니다. 엄청난 함성이었다. 직접 이 경기를 보면 당시 베스트가 누렸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잉글랜드 수비수들은 베스트를 막느라 상당히 고전했다. 하지만 무어만큼은 난공불락의 수비를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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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무어 vs 북아일랜드
결국 잉글랜드가 3-1 승리를 거두었다.

두 번째 경기 상대는 웨일스였다. 웸블리에서 열린 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웨일스의 로널드 데이비스가 경기 18분만에 선제골을 넣었다. 잉글랜드 선수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반전은 그대로 종료되었고, 후반전이 시작한 지 13분이 지난 시점에서 바비 찰튼이 동점골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14분 정도 지나서 프랜시스 리가 결승골을 득점했다. 또 잉글랜드의 승리였다.

언제나 최대의 난적은 스코틀랜드였다. 그러나 1968-69 시즌의 대회에서는 잉글랜드가 확실히 더 나았다고 할 수 있다. 웨스트햄 3인방 중 무어를 제외한 두 명, 즉 피터스와 허스트가 각자 두 골씩 득점하며 4-1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는 기분 좋게 또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타이틀을 챙겼다. 2연속 우승이었다.

9.2.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69-70[편집]


전 시즌과 마찬가지로, 1969-70 시즌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역시 시즌을 피해서 진행되었다. 1970년 6월에 월드컵이 열릴 예정이었으므로 정규시즌은 좀 더 앞당겨진 시점에 종료된 상황이었다. 4월 15일에 리그가 종료되었고, FA 컵을 제외하면 모든 대회가 끝난 상태에서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이 열렸다. 웨스트햄은 애시당초 리그, 컵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놓친 상황이었으므로, 무어는 부담 없이 국가대항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첫 경기는 웨일스전이었는데, 폴란드계 선수 딕 크제비츠키에게 한 골을 허용하며 불안하게 출발했다. 프랜시스 리의 동점골 덕에 승점 1점을 챙기는 데에는 성공했다.

두 번째 경기는 북아일랜드전. 아주 기념비적인 경기이기도 했다. 10년 가까이 동고동락한 대표팀 동료 바비 찰튼이 드디어 국가대표팀 100번째 출장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 경기에서는 특별히 찰튼이 무어 대신 주장완장을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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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번째 A매치를 축하받는 찰튼
피터스와 베스트가 한 골씩 주고받았으며, 허스트가 경기 57분 앞서가는 골을 득점했다. 경기를 완전히 매듭지은 것은 찰튼이었다. 찰튼은 경기 81분에 멋진 골로 득점을 만들어내며 본인의 100번째 A매치를 자축했다.

다음 경기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열렸다. 당연히 상대는 스코틀랜드였다. 양 팀은 수비적으로 경기를 진행했고, 그 결과는 0-0 무승부였다.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가 나란히 승점 4점을 얻으며 우승 트로피를 공유했다. 무어는 홈 챔피언십이 끝나자마자 코앞으로 다가온 월드컵을 바쁘게 준비했다.

10.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편집]


잉글랜드는 전 대회 우승팀 자격으로 예선 없이 월드컵 본선에 올랐다. 잉글랜드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 두 차례의 평가전을 진행했는데, 그 상대는 콜롬비아, 에콰도르였다. 남미 팀을 상대하며 현지에 빨리 적응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잉글랜드는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다운 경기력을 보이며 두 경기에서 모두 무실점 대승을 거두었다. 무어는 두 경기 모두에서 뛰었다.

그런데 월드컵을 코앞에 둔 기간, 갑자기 무어와 찰튼, 그리고 앨런 볼이 호텔 근처의 귀금속 상점에서 금 팔찌를 훔친 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명 보고타 팔찌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영국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잉글랜드 축구의 아이콘인 무어가 월드컵 참가를 못하게 된다면 정말 큰일 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 수상 해럴드 윌슨이 개입하기까지 했던 대사건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바비와 다른 바비가 모두 체포되었음에도 포커스는 온통 무어에게 맞춰져 있던 것으로 보였다는 점이다."

제프 허스트

실제로 모든 언론은 찰튼과 볼은 가만 두고 무어만 공격했다. 찰튼과 볼은 비교적 주목을 덜 받았고, 그래서 멕시코행 비행기에 무리없이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어는 정치적으로도 엮이면서 정말 힘든 시기를 보냈다. 여러 가지 말들이 돌았고 무어는 가택 연금을 당했다. 교도소까지 갈 뻔했지만, 다행히 월드컵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조건부로 풀려나 개인 단위로 멕시코행 비행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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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행 비행기에서 진행한 기자와의 인터뷰
그리고 잉글랜드의 국가대표팀 엔트리에 가까스로 이름을 올린다.[10] 이후 무어와 찰튼은 완전한 무죄였음이 밝혀졌다.

밥은 절대 불평하지 않았다. 멕시코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가? 멕시코에서 그는 공격당했다. 나는 그 때 아래층으로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앨런 볼, 바비 무어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카드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가게가 많았고, 기다리는 줄이 끔찍하게 길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줄로 갔다. 그는 손가락으로 다양한 상품들을 가리키며 "이게 좋겠다."라고 말했다. 바비 무어, 바비 찰튼, 앨런 볼이 함께 움직였다. 그들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상품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원하는 상품을 가리킨 뒤 "이게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무어는 당황해서 "뭐야, 뭐야?"라는 말만 내뱉었고, 그 남자는 무어에게 "팔찌."라고 말했다. 그들이 체포된 이유는 그들이 나간 뒤 팔찌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체포된 밥은 3주 동안이나 보고타에 머물러야 했다. 멕시코 월드컵 시작 직전에, 3주 동안이나, 팔찌를 훔친 혐의로. 그는 마침내 팀에 돌아왔고, 돌아온 후에도 그간 있었던 모든 일들에 대해 단 한 마디의 나쁜 말조차 하지 않았다.#

잭 찰튼

당연하지만, 무어는 월드컵 준비 기간을 통째로 날려먹었다. 잉글랜드는 주장이 없는 상태에서 훈련해야 했다. 큰 악재였다.

10.1. 조별 리그[편집]


본선 조별리그에서 브라질,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와 한 조가 된다.

잉글랜드의 첫 상대는 루마니아였다. 무어는 좋은 수비를 보여주며 팀의 1-0 승리를 이끌었다. 공격진영을 향해 롱패스를 바로 날리는 것이 일반적인 무어의 스타일이었다면, 이번 월드컵에서는 숏패스를 통한 빌드업까지 확실하게 장착하고 나온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택연금에서 막 풀려나온 선수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실력이었다.

두 번째 경기의 상대는 1962년에 잉글랜드를 탈락시켰던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은 지역예선에서 전승을 기록하고 월드컵 무대에 온 팀이었다. 은퇴했던 펠레까지 돌아와 완전히 적응한 상태였고, 아주 강했다. 잉글랜드 역시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팀을 세계 최강의 국가대표팀으로 간주하였다.# 그야말로 빅 매치였다.

"그는 훈련도 준비도 없이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지 며칠밖에 안 된 시점에서 브라질을 상대해야 했다."

제프 허스트, 다큐멘터리 Bo66y에서

경기가 시작된 지 10분만에 잉글랜드에 매우 큰 위기가 찾아온다. 우측면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기막힌 파워의 땅볼 스루패스를 날렸고, 자이르지뉴는 그것을 받아서 펠레에게 크로스를 올렸다. 무어는 자이르지뉴가 드리블해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다가갔지만 중앙을 향해 매우 정확한 크로스가 날아가자 크게 당황했다. 펠레는 엄청난 도약력으로 머리에 공을 맞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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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스의 선방
그리고 뱅크스가 역사에 남을 선방을 보여주며 이것을 막아냈다. 무어는 박수를 치며 뱅크스에게 다가갔고, 펠레의 헤더를 막았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한 채로 얼어 있는 뱅크스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농담을 건넸다.

"바비 무어가 나에게 다가와서 고개를 숙이고는 이렇게 말했다. "가능하면 그런 건 잡아 봐. 멍청한 코너킥을 내 주면 안 돼" 하하하하..."

고든 뱅크스, 다큐멘터리 Bo66y에서[11]

이 선방 이후 거짓말처럼 잉글랜드의 사기가 오르더니, 브라질보다 우세한 경기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잉글랜드가 마음 놓고 공격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에는 무어의 공이 컸다. 무어는 브라질의 총공세를 죄다 묶어버렸고, 펠레조차도 무어를 뚫어내지 못하고 쩔쩔맸다. 게다가 브라질의 중원에는 제르송이 없는 상태였기에 브라질의 공격은 더욱 풀리지 않았다. 양 팀이 몇 번의 공방을 주고받다가 점수가 나지 않은 채 그대로 전반전이 끝났다.

첫 번째 경기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박살내버린 브라질이었지만 무어와 뱅크스를 상대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런 브라질에게 딱 한 번 더 절호의 찬스가 찾아왔다. 경기 56분, 토스탕이 순간적으로 무어와 뉴튼의 압박에서 벗어나 페널티 박스 중앙의 펠레에게 크로스를 제공했다. 펠레는 슛을 하지 않고 오른쪽의 자이르지뉴에게 약한 패스를 주었다. 펠레의 센스가 빛나는 장면이었다. 대놓고 1:1상황이 되었고, 뱅크스가 빠르게 뛰어나왔지만 자이르지뉴의 슈팅이 좀 더 빨랐다. 잉글랜드의 대회 첫 번째 실점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잉글랜드는 실점한 지 몇 분 안 된 시점에서 다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잉글랜드의 공격 작업이 무위에 그치고 아우베르투의 롱패스를 이어받은 자이르지뉴가 어마어마한 스피드로 달려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완벽한 역습 상황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비슷한 상황에 세 명을 연달아 제치고 골을 만들어냈던 자이르지뉴였기에 경기장에 있던 잉글랜드 팬들은 경악했다. 자이르지뉴의 앞에는 무어밖에 없었다. 무어는 자이르지뉴 앞에서 침착하게 뒤로 슬슬 물러나면서 태클 타이밍을 노렸다. 무어의 노련한 수비 덕에 자이르지뉴의 스피드가 줄어들었고, 이 덕에 다른 잉글랜드 수비수들이 빠르게 복귀할 수 있었다. 자이르지뉴와 무어는 서로 마주 본 채 페널티박스 안까지 들어왔다. 그리고 무어는 태클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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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태클

"자이르지뉴가 달려 들어오기 시작했고, 1:1 상황이었다. 자이르지뉴는 그 월드컵에서 모두를 박살내버린 바 있었다. 그는 하프라인을 넘어 바비에게 돌진하고 있었고, 나는 생각했다. '오 세상에, 1:1 상황이야. 이건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야.' 바비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타이밍을 찾았을 때, 바비는 미끄러져 들어갔다. Boom."[12]

해리 레드냅, 다큐멘터리 Bobby에서

그야말로 완벽한 태클이었다. 관중석에서는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무어는 이 장면 이후에도 몇 번이나 환상적인 장면을 보여주었다. 제프 허스트와 앨런 볼 등 잉글랜드의 선수들도 수많은 찬스를 잡았지만 앨런 볼의 슈팅은 골대를 맞혔고 허스트의 슈팅은 바닥에 깔리며 벗어났다. 결국 잉글랜드는 운이 없게도 득점을 올리지 못했다. 펠레를 비롯한 브라질 선수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고, 심판에게 경기를 빨리 끝내라는 제스처를 보여주기도 했다. 결국 그대로 경기가 종료되었다. 잉글랜드의 아쉬운 1-0 패배였다. 펠레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무어에게 다가갔다. 둘은 서로를 끌어안았고, 기자들이 둘을 둘러싸며 플래시를 펑펑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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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와 유니폼을 교환하는 무어

"이 사진은 이미 전 세계에 퍼졌다. 나는 그 사진이 보여주는 가치들이 축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승패에 상관없이 보여주는 우정 같은 것 말이다. 우리는 이것을 다른 선수들에게 전해야 하며, 다음 세대에도 전해야 한다. 그는 내가 상대해 본 수비수 중 가장 평판이 좋은 선수이다. 매우 영리했고, 우리의 경기를 읽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정말 열심히 뛰었고 찰거머리 같으면서도 정직했다. 내가 아는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다. 최고의 수비수이다."[13]

펠레, 다큐멘터리 Bobby에서

무어는 경기 내내 단 한 차례의 파울도 범하지 않았다. 이 경기는 바비 무어가 축구에서 '수비'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전 세계에 제대로 보여준 경기였다고 할 수 있다. 여담으로, 무어가 이 경기에서 펠레와 교환한 유니폼은 2004년에 영국 런던 크리스티 경매소에서 한화 1억 3000만원의 가격에 낙찰되었다.

무어는 다음 경기인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어김없이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고, 잉글랜드는 또 무실점 승리를 거두었다. 루마니아전과 마찬가지로 스코어는 1:0이었다. 잉글랜드는 2승 1패 2골 1실점을 기록했다. 조 2위였고, 8강 진출권을 따냈다.

10.2. 토너먼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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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직전, 우베 젤러와의 악수
8강에 올라가게 된 잉글랜드는 고든 뱅크스의 식중독으로 인한 전력의 누수를 감내하고 서독과 맞붙게 된다. 전력이 온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는 2-0 리드를 가져가는 데 성공했고, 서독 선수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후 페널티킥이 주어져야 마땅한 상황이 세 번이나 나왔지만 아르헨티나인 주심은 잉글랜드 선수들에게 불리한 판정을 계속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잉글랜드가 우세했기 때문에 알프 램지 감독은 찰튼을 체력 안배 차원에서 교체하기로 한다. 때마침 베켄바워가 중거리 슈팅으로 만회골을 넣었는데, 이 과정에서 고든 뱅크스 대신 나온 골키퍼 피터 보네티의 다이빙이 다소 아쉬웠다.

찰튼은 이 득점과 함께 콜린 벨과 교체되었고 베켄바워의 골과 함께 서독의 사기가 전체적으로 상승하여 경기는 한 치 앞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14분 후, 서독의 주장 우베 젤러가 감각적인 백헤더로 골을 만들어냈다. 이 또한 보네티의 늦은 대응이 아쉬웠다. 뱅크스였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슈팅이었다. 무어는 전후반 통틀어 태클 3회, 슛 블록 2회, 인터셉트 10회, 롱패스 10회를 성공시키는 등 공수양면으로 맹활약했다.

경기는 연장전으로 흘러갔고 무어는 연장전에서도 인터셉트 5회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연장전 중후반에 게르트 뮐러가 천재적인 위치 선정으로 앞서가는 골을 넣는다. 무어는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세 번의 실점 상황 모두 수비수들의 실수보다는 피터 보네티의 늦은 반응이 실점 이유였다. 이후 잉글랜드는 동점골을 위해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서독 선수들이 하나둘씩 드러눕기 시작했고 주심은 10분여간 이어진 서독의 침대축구 파티[14] 를 묵인했으며 연장 22분 베켄바워의 악질적인 백태클을 그냥 넘어갔다. 제대로 된 판정이 나왔다면 베켄바워는 퇴장이었고 당연히 페널티킥이 주어져야 했다.

아르헨티나인 주심의 얄궂은 휘슬이 울리고 경기는 끝이 났다. 비록 8강에서 도전을 멈춰야 했지만 이번 대회는 전 대회보다 무어의 강력한 수비력을 보여줄 수 있었던 무대였다. 그 수비력은 무어가 8강 탈락에도 불구하고 대회 최우수 선수로 거론되었으며 1970년 발롱도르 2위에 오른 것으로 증명할 수 있겠다. 무어는 대회 4경기를 진행하는 동안 단 1개의 파울밖에 범하지 않는 깔끔한 수비를 펼쳤다. 가장 놀라운 것은, 누명을 뒤집어쓰고 일생일대의 논란에 휩싸이며 월드컵 준비 기간을 통째로 날려먹었음에도 이런 괴물 같은 실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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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V 월드컵 중계진에 합류한 무어
여담으로, 무어는 대회 탈락 이후 영국 ITV 월드컵 중계진에 합류하여 남은 월드컵 경기들의 해설위원을 맡은 바 있다. 4강 이전까지는 빌리 라이트가 해설을 진행했었다. 1970년 월드컵 4강전, 결승전 ITV의 해설을 듣다 보면 휴 존스 캐스터의 멘트 중간중간에 무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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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무어 in 1970 FIFA World Cup

11. 1970년~1971년 마이너 대회[편집]


월드컵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1970년 8월, 익명의 괴한이 바비의 아내 티나를 납치하여 10만 파운드를 요구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1970년 월드컵 이후 바비 찰튼이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잉글랜드는 그의 후계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맨체스터 시티의 콜린 벨, 에버튼의 앨런 볼 등이 찰튼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중원을 이끌 유력한 후보였다. 둘은 이후 어느 대회에서든 중점적으로 기용되었다.

11.1.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70-71[편집]


1970-71 시즌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도 1969-70 시즌과 마찬가지로 프리 시즌 기간에 열렸다. 1970-71 시즌 각국의 리그가 종료된 후 개최되었는데, 유로 1972 예선과 겹친 시점에서 진행된지라 일정 자체가 상당히 빡빡했다. 1971년 4월 21일에는 그리스를 상대했고, 5월 12일에는 몰타를 상대했다. 무어는 두 경기 모두에 출전해 승리를 거두었지만 사람인지라 몸이 피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5월 15일에 벨파스트 원정에서 북아일랜드에 0-1 무실점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 경기는 3일 후에 열릴 예정이었다. 무어가 잉글랜드 내에서 아무리 중요한 선수여도 일주일동안 세 경기를 치르게 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알프 램지 감독은 무어를 휴식시켰다. 이 경기에서는 무어 대신 콜린 벨이 주장완장을 찼다#. 잉글랜드는 웸블리에서 웨일스를 상대로 0-0 무승부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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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vs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와 웨일스도 만만찮은 상대지만, 홈 챔피언십 최고의 볼거리는 역시 매 대회 마지막마다 열리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경기였다. 5월 22일 경기였고, 무어는 선발팀에 복귀했다. 이 경기에서 앨런 볼과 무어 등 베테랑 선수들이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토트넘 소속의 공격수 마틴 치버스가 두 골을 득점하는 등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3-1 승리를 이끌었다.

잉글랜드는 또 우승을 차지했다.


12. UEFA 유로 1972[편집]



12.1. 예선[편집]


유로 1972 조별 예선전에서 잉글랜드는 스위스, 그리스, 몰타와 같은 조에 속해 6전 5승 1무를 기록하며 압도적인 성적으로 최종 예선에 진출한다. 잉글랜드는 이미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헬무트 쇤 감독 휘하에서 귄터 네처프란츠 베켄바워를 중심으로 '람바참바 팀'을 구축한 서독 정도를 제외하면 잉글랜드의 적수는 없었다.

12.2. 플레이오프[편집]


그런데, 하필이면 최종 플레이오프에서 그 서독을 만났다. 잉글랜드는 무척 긴장했다. 서독 선수들도 잔뜩 긴장해 있었다. 잉글랜드와의 상대 전적이 당시까지 2승 2무 10패로 압도적인 열세였으며, 특히 잉글랜드의 홈에서 펼쳐지는 경기는 단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서독의 핵심 멤버 두 명이 경기 시작 전에 이런 대화를 했을 정도이다.

귄터 네처: "프란츠, 우리가 한 5골보다 적게 내주고 경기를 끝내면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프란츠 베켄바워: "그렇겠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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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 vs 베켄바워 in Wembley Stadium
아니나 다를까 웸블리 경기에서 무어는 환상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이 날 무어가 보여준 패스 능력의 클래스는 상대팀 주장 베켄바워보다 한 수 위였다. 서독 수비진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롱패스를 엄청나게 많이 날렸다. 그러나 서독 역시 준비를 많이 하고 나왔다. 귄터 네처와 베켄바워를 중심으로 팀을 구성한 헬무트 쇤 감독의 전술이 잘 맞아 떨어졌고, 잉글랜드를 상대로 좋은 경기를 보여주었다. 전반전은 0-1으로 서독이 한 점 앞선 상황에서 끝났다.

후반전 역시 막상막하였다. 경기 77분 프랜시스 리가 동점골을 득점하며 1-1 동점을 만들었다. 그러나, 동점골을 넣은 지 몇 분 안 된 시점에서 잉글랜드에게 대위기가 찾아온다. 무어는 뛰어들어가는 지그프리트 헬트를 저지하기 위해 다소 깊은 태클을 시도했다. 공을 먼저 건드렸지만, 공은 그대로 앞으로 지나갔다. 소유권을 완전히 가져오지 못한 상황에서 헬트가 무어의 다리에 걸려 넘어졌다. 반칙이었다. 주심은 단호하게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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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가 이 경기에서 유일하게 실수한 장면
고든 뱅크스가 네처의 페널티킥을 완벽하게 읽어냈지만 손 맞고 골대 맞고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게르트 뮐러에게 한 골을 추가실점하며 1:3으로 패배했다.

서독 홈구장에서 펼쳐진 2차전. 이날 잉글랜드가 입은 유니폼은 1966년에 자국에서, 1970년에는 멕시코에서 입었던 유니폼과 동일한 빨간색이었다. 잉글랜드는 1966년의 좋은 기억을 재현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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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 vs 베켄바워 in Olympiastadion
이 경기에서는 양 팀이 모두 철통같은 수비를 선보였고, 결국 무득점으로 경기를 마쳤다. 그 결과 서독이 최종점수 3:1로 유로 1972 본선에 진출했고, 플레이오프에서 올라온 나머지 팀은 벨기에, 헝가리, 소련이었다. 잉글랜드를 어렵게 이겼던 서독은 본선 두 경기에서 게르트 뮐러 혼자 4골을 때려박으며 손쉽게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제프 허스트, 고든 뱅크스 등 월드컵 우승의 주축이었던 일부 선수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1972 예선전 이후 국가대표팀을 떠났다. 이로써 찰튼, 무어, 뱅크스가 이끈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첫 전성기는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13. 1972년~1973년 마이너 대회[편집]



13.1.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71-72[편집]


잉글랜드가 웸블리에서 서독에게 충격패를 당해 유로 본선 진출이 좌절된 후 맞이한 1971-72 시즌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은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매 시즌 그랬듯 재미있는 경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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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의 클리어링
먼저 웨일스전. 무어는 이 경기에서 골대로 들어가는 공을 허벅지로 터치하며 끊어내는 등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결과는 3-0 승리. 당시 30대에 접어든 무어의 후계자를 찾아야 하는 시점이었는데, 그 유력한 후계자 후보 중 한 명이었던 전천후 수비수 엠린 휴즈가 이 경기에서 득점을 올리는 등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선수들과 1966년의 영웅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잉글랜드의 팀 플레이는 훌륭했다.

무어는 다음 경기인 북아일랜드전에서 결장했다. 무어와 뱅크스 대신 콜린 토드와 피터 실튼이 출전했다. 잉글랜드의 세대 교체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무어와 뱅크스가 없는 잉글랜드는 귀신같이 0-1의 스코어로 패했다. 그것도 웸블리에서 말이다. 잉글랜드는 여전히 1966년의 영웅들을 필요로 했다. 어느덧 무어&뱅크스는 국가대표팀을 위해 100경기 가까이 뛴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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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vs 스코틀랜드
램지는 결국 다음 경기에서 무어와 뱅크스를 선발 명단에 포함시켰다. 스코틀랜드전은 아주 재미있는 경기였다. 고든 뱅크스의 선방쇼가 빛났으며, 경기 내내 흥미진진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앨런 볼의 결승골로 잉글랜드가 승리했고, 승점 4점을 기록하여 스코틀랜드와 같은 승점을 기록했다. 결국 홈 챔피언십 타이틀을 계속해서 유지하게 되었다.

13.2.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72-73[편집]


1973년 발렌타인 데이에 펼쳐진 스코틀랜드와의 친선 경기에서 5-0승리로 본인의 100번째 A매치를 장식했다. 무어는 빌리 라이트, 바비 찰튼에 이어 FIFA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세 번째 잉글랜드 선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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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번째 A매치를 기념하여 축구 꿈나무 100명과 함께 사진을 찍는 무어
무어가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그 시점에서 대표팀에 남아있던 1966년 우승 멤버는 무어 자신과 웨스트햄 동료 마틴 피터스, 앨런 볼까지 세 명 뿐이었다.

하지만 위의 경기는 어디까지나 친선전이었고,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은 따로 진행되었다. 잉글랜드는 1974년 월드컵 예선에서 웨일스를 상대로 1승 1무라는, 다소 께름칙한 성적을 거둔 상태에서 홈 챔피언십에 참여하게 되었다. 잉글랜드의 첫 상대는 북아일랜드였다. 무어는 이 경기에 출전했다. 경기는 구디슨 파크에서 열렸고, 기록상 홈 팀은 북아일랜드였다. 잉글랜드는 마틴 치버스의 멀티골에 힘입어 1-2승리를 거두었다. 무어는 3일 후 웨일스와의 경기에도 참여했다. 잉글랜드는 웸블리에서 3-0 승리를 거두며 홈 팬들을 만족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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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vs 스코틀랜드
4일 후 웸블리에서 열린 스코틀랜드와의 경기는 박빙이었다. 양팀이 서로 치고받는 양상으로 흘러간 경기였다. 경기 54분, 마틴 피터스가 해결사 면모를 보여주며 득점에 성공했다. 잉글랜드는 1-0 리드를 가져갔고, 훌륭한 수비력으로 무실점을 그대로 지켜냈다. 승리였다.

잉글랜드는 3전 전승을 기록했다. 또다시 우승을 차지하며 6연속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14. 1974 FIFA 월드컵 서독[편집]



14.1. 지역예선[편집]


1974년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잉글랜드는 폴란드, 웨일스와 같은 조에 속했다. 잉글랜드는 홈 챔피언십이 열리기 전 웨일스를 상대로 이미 1승 1무를 기록해둔 상태였다. 하지만 폴란드의 성적도 아주 좋았다. 때문에, 6월에 열리는 폴란드 상대 2연전에서는 무조건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월드컵에 나갈 수 있었다. 경기는 1973년 6월 6일 폴란드에서 열렸다. 잉글랜드는 역사상 처음으로 노란색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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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초의 노란색 유니폼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폴란드의 로베르트 가도하가 경기 7분만에 프리킥 득점을 터뜨린 것이었다. 잉글랜드는 분전했으나 폴란드의 수비력은 강했다. 후반전이 시작한 지 2분 후, 무어는 폴란드 공격수 브워지미에슈 루반스키에게 공을 빼앗기고 말았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루반스키는 엄청난 스피드를 자랑하며 실튼을 뚫어내고 스코어 2-0을 만들었다. 추가골을 득점한 폴란드는 걸어잠그기 모드에 돌입했고, 몇몇 선수들은 침대축구를 시전했다. 잉글랜드 선수 대부분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에도 싸움닭 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던 앨런 볼은 로이 맥팔란과의 경합 이후 바닥에 쓰러진 레스와프 치미키에비치의 멱살을 잡아 퇴장당하기도 했다. 잉글랜드는 그렇게 원정에서 패하고 돌아왔다. 무어는 자신이 패배에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고, 며칠 동안 큰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의 얼굴은 상당히 붉어졌고, 그는 고뇌에 빠져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렸다. 우리는 어느 날 산책을 나갔는데, FA 관계자들을 만났다. 우리는 바비가 공원 벤치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잠도 못 자고 외출도 하지 못하고 밖에 나가지도 못한 채, 벤치 위에서 부랑자처럼 누워 있었다."[15]

나이젤 클라크, 저널리스트

월드컵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폴란드와의 2차전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했다. 2차전에서 알프 램지 감독은 무어에게 휴식을 주었다. 무어는 이날 벤치에 앉아서 회의감을 느꼈다. 그리고 램지에게 자신의 역할에 대해 질문했다.

바비 무어: 오늘 내가 벤치에 앉은 것은 내가 더 이상 대표팀에 필요하지 않아서인가요?

알프 램지: 물론 아니지. 난 내년 월드컵에서 팀을 맡아줄 너 같은 주장이 필요해.

무어 대신 완장을 찬 피터스는 주장 역할을 잘 수행했다. 웸블리 관중들의 열띤 응원 속에서 잉글랜드는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경기 57분경에 폴란드 원정에서 겪은 악몽이 데자뷰처럼 되풀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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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뷰

"바비 무어가 실수하는 것을 보았다면, 당신은 그가 다시는 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인생을 걸고 보증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어에게 결함이 생기면 그것은 곧 제거되었다. 컴퓨터에 생긴 작은 오류가 지워지듯이. 하지만 끔찍한 아이러니가 있다면, 무어가 아닌 노먼 헌터가 그 실수를 되풀이했다는 것이다."[16]

제프 파월

수비수 노먼 헌터가 지난 경기에서 무어가 보여준 실수를 반복했던 것이다. 헌터는 하프라인 근처에서 그제고슈 라토에게 공을 빼앗겼다. 여기에 더해 피터 실튼의 유명한 옆구리 캐칭실수가 이어지며 어벙벙하게 선제 실점을 내주었다. 이후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잉글랜드의 앨런 클라크가 페널티킥으로 동점골을 넣었다. 하지만 폴란드의 골키퍼 얀 토마제프스키가 말 그대로 미친 선방쇼를 보여주는 통에 유효슈팅을 열 개 가까이 기록하고도 한 개의 골밖에 기록하지 못했다. 경기는 끝나갔다. 폴란드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경기를 뛰었다. 잉글랜드가 한 골이라도 더 넣는다면 월드컵 진출권을 잉글랜드에 내주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벤치가 술렁였다.

바비 무어: 케빈을 투입해요. 케빈을 투입하세요...

알프 램지: 너무 늦었어...

바비 무어: 아닙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케빈은 할 수 있어요. 왼쪽에 공간이 있잖아요. 케빈은 이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출처

램지는 무어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종료를 2분 남겨 둔 시점에서 국가대표팀 기록이 전무한 공격수 케빈 헥터가 경기장에 투입되었다. 무어의 예견은 정확했다. 케빈 헥터는 잉글랜드의 마지막 코너킥 찬스에서 골키퍼 토마제프스키보다도 높게 점프했고, 빈 골대를 향해 헤더 슈팅을 날렸다. 그런데 골키퍼가 없는 공간에는 수비수가 있었다. 결국 이 슈팅마저 골라인을 넘지 못했다. 이 찬스를 마지막으로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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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병상련의 처지

"아마도 나는 그 마지막 휘슬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난 고개를 숙였고, 터벅터벅 걸어나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끝이야, 노먼. 너의 국가대표팀 생활은 끝났어.' 그 때, 바비가 그곳에 있었다. 그는 팔로 내 몸을 감싼 채 무엇인가 이야기했다. 지금은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내가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노먼 헌터, 다큐멘터리 Bobby에서

조 1위는 그대로 폴란드가 차지했다.

잉글랜드는 탈락했다. 무어의 월드컵 도전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무어의 나이는 어느덧 서른셋을 바라보고 있었다. 1974년 월드컵은 잉글랜드가 모든 힘을 다 쏟아붓고도 월드컵에 나가지 못한 첫 사례였다. 더군나나 같은 월드컵 때 영연방 내 최대의 라이벌 스코틀랜드가 월드컵 진출에 성공했으니 이만한 굴욕도 없었을 것이다. 알프 램지 감독의 굳건했던 지위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15. 1973년~은퇴[편집]


무어는 1973년 11월 14일 이탈리아전에서 자신의 108번째 A매치를 진행하고 바비 찰튼의 106경기 출전 기록보다 두 경기 많은 출전을 기록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최다 출전 기록자[17]로 이름을 남긴 뒤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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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도 빛났던 캡틴
무어는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경기 종료 몇 분만을 남겨두고 파비오 카펠로에게 골을 허용하며 0-1로 패했다.

여담이지만, 국가대표팀에서 무어가 실제로 완장을 차고 뛴 경기는 108경기 중 1973년 말미에 치른 2경기가 전부이다. 당시에는 주장 완장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무어 말고도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처럼 주장 완장을 대놓고 차지 않는 선수가 많았다.

무어는 국가대표팀 은퇴 이후에도 클럽에서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특히 2부 리그 소속의 풀럼을 FA컵 결승으로 이끈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래서 1976년 유로 예선을 앞두고 무어가 대표팀에 복귀할 수도 있다는 여론이 상당했다. 그러나 무어는 이를 거절했다. 무어가 없는 것의 영향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잉글랜드는 또 체코슬로바키아에 밀리며 유로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FA의 기록에 따르면 무어는 국가대표팀에서 108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득점했다. 옐로카드와 레드카드가 도입된 이후 A매치 28경기에 출전했는데, 레드 카드는커녕 옐로 카드조차 단 한 장도 받지 않았다.
[1] 이것은 결승전 라인업이다. 잉글랜드의 원래 플랜대로라면 제프 허스트 대신 지미 그리브스가 있어야 했다. 앨런 볼마틴 피터스는 모든 경기에 다 나오지는 않았다. 이언 캘러한, 존 코넬리가 로테이션으로 이들과 번갈아 가며 뛰었다. 중계화면상에는 앨런 볼이 오른쪽 공격수로 표시되어 4-3-3 포메이션으로 표시되었다.[2] Eusebio was never allowed to turn, at all, except to play the ball out wide. Bobby played him completely out of the game. Bobby knew that the players knew what they were doing, but if somebody made a mistake, he made sure that he was around or somebody was around to rectify. 다큐멘터리 Bobby에서[3] 당시에는 경기 추가시간이 없었다. 있다고 해도 심판 재량으로 몇십 초를 더 주는 정도.[4] Bobby Moore did exactly the same as I did. We were going like this to the referee. You know, it's a handball. It's given them the goal. His arm! it's a free kick for us. We were winning. Got the World Cup and he lets that go. Bobby Moore was that angry. It's a foul. Anyway, he gave the goal.[5]
팔에 살짝 맞고 등에 맞았거나, 등에 맞고 손에 맞은 것으로 보인다. 여튼 팔 어딘가에 맞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6] Big jackie says it's the only time that Bobby ever swore at him in the course of the match. Jack doesn't particularly want to accept the blame, but Bobby turned around and said "Don't ever effing do that again."[7] "And here comes Hurst. He's got... some people are on the pitch, they think it's all over. It is now! It's four!"[8] 여담으로, 바비 무어는 이 때 자신의 손이 120분 간 혈투로 인해 흙과 잔디로 더러워져 있다는 것을 의식하여 단상을 장식하는 벨벳에 손을 닦고 여왕과 악수했다.[9] 월드컵 결승전 통산 최다 어시스트 기록자는 두 경기에서 세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한 펠레이다.[10] 이 사건의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이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11] Bobby Moore walked over to me, leaned in, and say "Try and get hold of him, for Christ's sake." "No silly corners." Ha Ha Ha Ha...[12] and Jairzinho had been murdering everyone in 1970 World cup. And he's running at Bobby from just over the halfway line and, I thought, "Oh, my God, one against one, he's clean in." And he just waited and waited. And Bobby slid in... When his timing was right. Boom.[13] That photo has gone around the world. I think it was very important for football. We demonstrate that it's a sport. Win or lose, the example, the friendship. you must pass these on to other players, to the next generation. He was one of the most honest defenders I've played against. He was very intelligent, with a knack for reading our play. He played really hard, marked well, but was always honest. He was one of the best players I've ever known. The best defender.[14] 특히, 그 출중한 똘끼로 아직까지 그 명성이 전해오는 서독 골키퍼 제프 마이어가 고의적으로 잉글랜드 선수와 충돌한 이후 경기장에 뻗어버리려 한 시도가 있었는데, 참으로 개그거리였다. 너무 티 나게 아픈 척을 해서, 같은 팀인 베켄바워조차 빨리 일어나라고 재촉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3초만에 일어났다는 게 포인트.[15] The first time I'd see him even come close to losing it, he was pacing up and down, quite red-faced and agonising over it. We went for a walk one day and we met these FA counsellors and they'd found Bobby fast asleep on a park bench. Couldn't sleep, gone out, went out, laid there like a tramp on a bench.[16] Having seen Bobby Moore make one mistake, you could guarantee, with your life, that he would never do the same thing again. It would be removed, that little, tiny glitch of the computer would have been deleted and by terrible irony, Norman Hunter replicated that mistake.[17] 이후 피터 실튼, 데이비드 베컴, 스티븐 제라드, 웨인 루니가 차례로 이 기록을 깼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A매치 기간을 보장해 주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절대적인 A매치의 수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무어의 기록도 아주 대단한 기록이다. '주장으로서 가장 많은 경기를 소화한 잉글랜드 선수'라는 기록의 소유자이기도 한데, 빌리 라이트의 기록과 타이 기록이다. 완장을 차고 90경기를 소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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