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트리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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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자크 카르티에와 식민지 시대
3. 영국령 캐나다
4. 산업화와 확장
5. 쇠퇴
6. 현대



1. 개요[편집]


몬트리올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이다. 과거 프랑스령 캐나다의 중심지였던 몬트리올은 오래도록 캐나다 제1의 도시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현재는 여러 번의 실각과 타 도시의 선전이 겹치며 위상이 많이 내려온 상태지만, 여전히 토론토와 함께 캐나다의 양대 도시로써 자국을 대표하고 있다.

몬트리올은 식민 지배국들이 원주민들과 가죽 거래를 위해 세운 도시인 퀘벡 시토론토와는 달리, 순전히 원주민들의 개종을 위해 세워진 선교 도시였다. 몬트리올의 옛 지명 빌 마리(Ville-Marie) 역시 마리아의 도시라는 뜻이다. 따라서 천주교의 영향이 오랜 기간 지속되어 왔으며, 이는 언어적 차이와 함께 캐나다의 다른 지방과의 문화적 차이를 야기했다.


2. 자크 카르티에와 식민지 시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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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 도래 이전 오슐라가 요새의 모습
몬트리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건 수천년이 넘었다. 17세기 유럽인들의 도착 이전 몬트리올에는 이로쿼이 연맹, 그중에서도 세인트 로렌스 이로쿼이족(St. Lawrence Iroquoians) 사람들이 몬트리올 섬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다. 이들은 일반적인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달리 농경 사회를 이루었고, 마을 주변에 요새를 지어 정착지를 보호했다.

한편 1535년 프랑스의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는, 1년 전 그가 발견한 뉴펀들랜드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일대의 탐험을 계속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로 떠나게 된다. 카르티에 일행은 대서양과 뉴펀들랜드를 지나 어느 날 세인트로렌스 강 안쪽의 스타다코나(Stadacona)[1]에 도달하게 된다. 카르티에 일행은 현지에 살던 이로쿼이 연맹 사람들에게 이곳이 어디냐고 묻는다. 원주민들은 그들의 언어로 간단하게 "마을이다."(카나타; Kanata)라고 대답했으며, 그걸 지명으로 알아들은 카르티에 일행은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 전부를 카나다(Canada)라고 명명한다. 이게 지금의 캐나다 국호가 된다. 스타다코나를 떠나 세인트로렌스 강 안쪽으로 항해를 계속한 카르티에 일행은, 몬트리올 섬 위의 마을 오슐라가(Hochelaga)에 도달한다. 카르티에는 오슐라가가 자리한 섬 중간의 산에 몽루아얄(Mont Royal)[2]이란 이름을 붙이고, 자신이 발견한 땅과 원주민들의 특성, 언어를 메모한 뒤 스타다코나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간다.

카르티에의 오슐라가 방문과 함께 세인트로렌스 강과 몬트리올이 프랑스에 알려지자, 1611년 또 다른 탐험가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이 몬트리올 방문해 모피 교역소를 세우고 플라스 루아얄(La Place Royale)이란 이름을 붙인다. 샹플랭은 또한 지금의 몬트리올 섬 일대를 프랑스 고위 관료의 이름을 따 빌므농 섬(Lille de VIllmenon)이라 부른다. 1639년, 누벨프랑스 원주민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전하고자 했던 제롬 르 루아예르 드 라 도베시에르(Jérôme le Royer de la Dauversière)이름 한번 길다의 주도로 빌므농 섬에 몬트리올 노트르담회(Notre Dame Society of Montreal)가 설립된다. 도베시에르는 이후 1642년에 몬트리올 섬 남쪽에 정착지 빌 마리(Ville-Marie)[3]를 세우고, 고위 군인이었던 폴 쇼메데 드 메종뇌브(Paul Chomedey de Maisonneuve)를 고용해 빌 마리의 총독으로 임명한다. 이듬해 빌 마리는 이로쿼이 부족의 습격을 받으며 잠시 휘청했지만, 머지않아 더 많은 이주민들이 메종뇌브를 따라 빌 마리로 향하며 안정을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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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마리에 세워진 첫 교회
17세기 후반 빌 마리를 비롯한 몬트리올 일대는 누벨프랑스의 모피 교역소로 번성했으며, 이에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에 빌 마리 외에 다른 정착지가 여럿 생겨난다. 당시 프랑스인들의 정착지 확장을 위해 주변에 살던 모호크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을 정도. 그러나 수시로 찾아오는 원주민들의 습격 탓에 몬트리올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으며, 1685년에는 아예 이로쿼이족이 영국과 합동 공격까지(!) 감행해 프랑스인 마을을 습격하며 많은 인구를 잃기도 했다. 이로쿼이족의 몬트리올 습격은 1701년,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누벨프랑스와 맺은 협정과 함께 잦아들었다. 다시 평화가 찾아온 몬트리올은 기존에 모피 무역과 함께 누벨프랑스 일대 농업의 중심지로 거듭난다.


3. 영국령 캐나다[편집]


1756년, 승승장구하던 몬트리올에게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는 악재가 닥친다. 전쟁 초기 프랑스는 루이 조제프 드 몽캄(Louis-Joseph de Montcalm) 장군을 앞세워 영국군의 침략을 잘 방어해내지만, 초반의 부진에도 흔들리지 않은 영국군에 의해 아브라함 평원에서 쥐어터지며 퀘벡 시까지 빼앗긴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프랑스군은 보드레이유 후작(Marquis de Vaudreuil)의 지휘 하에 몬트리올로 돌아가 전력을 보강한 뒤 이듬해 생트푸아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퀘벡 시를 다시 되찾는다. 그러나 영국군은 퀘벡 시에서 끈질긴 버티기에 들어갔고, 이어 키브롱 만 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찾아온 영국 해군의 도움과 함께 프랑스군을 격퇴한다. 퀘벡 탈환과 함께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온 영국군은 1759년, 프랑스군 최후의 보루였던 몬트리올을 점령하며 퀘벡 전역을 차지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1763년 파리 조약을 체결해 공식적으로 퀘벡을 제 손에 넣는다. 1775년 미국 독립 전쟁으로 퀘벡 전역이 잠시 미군에게 점령당하는 일도 있었지만 몬트리올만큼은 전장의 혼란을 피해 갔다. 한편 미국 독립 전쟁에서 패한 영국은, 1791년 헌법(Constitutional Act of 1791)의 제정과 함께 영국령 북아메리카 잔여 영토를 재편한다. 영국은 세인트로렌스 강의 흐름을 따라 프랑스계가 주류였던 몬트리올과 퀘벡 일대를 하류 캐나다(Lower Canada)라고 이름붙였고, 반대편의 영국계 지역은 상류 캐나다(Upper Canada)로 부른다. 19세기 초 몬트리올은 스코틀랜드잉글랜드 출신 이주민들과 독립 전쟁에서 도망나온 왕당파까지 가세하며 영국계 인구의 숫자가 부쩍 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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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을 진압하는 영국군[4]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웬수같은 영국에게 빼앗긴 프랑스계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당시 영국은 영국령 북아메리카 지역에 부총독(Lieutenant Governor)을 파견해 지역 행정을 처리했었고, 파견된 부총독은 원하는 사람들로 내각을 이뤄 행정을 보조하게 했다. 여기에 현지 주민들로 구성된 의회가 부총독에게 민의를 전달하는 구조였지만, 실질적인 주권은 전부 부총독과 장관들에게 있었다. 문제는 집권 세력, 부총독이 영국인이다보니 그 내각도 전부 영국계로만 채워졌던 것. 프랑스인들은 소수의 영국인들이 자신들을 제치고 권력을 독점하는 꼴을 참을 수 없었고, 결국 1837년 몬트리올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당시 반란은 이웃 나라 미국의 지원까지 받으며 제법 끈질기게 이어졌지만, 주권국가인 영국의 진압 아래 무참히 짓밟혔다. 반란 이후 영국은 하캐나다의 프랑스계를 영국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프랑스어를 금지하는 등 문화적 탄압에 나선다.

그러나 반란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반란의 불씨는 영국 정부의 귀에도 흘러들어갔고, 놀란 영국 정부는 제1대 더럼 백작 존 램턴(John Lambton)을 캐나다에 파견해 식민지 통치의 문제를 보고하도록 했다. 명을 받고 캐나다를 둘러 본 백작은 영국으로 돌아가 더럼 보고서(Durham's Report)를 발간한다. 더럼의 보고서는 영국 정부의 양캐나다 통합 정책을 지지함과 동시에, 현지의 민심을 무시하는 식민지 정부와 프랑스어 탄압 정책은 지속적인 반란을 낳을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었다. 보고서의 내용을 잘 귀담아 들은 영국 정부는 1841년 하-상캐나다 정부를 통합한 다음 현지 주민들로 내각과 의회를 구성한다. 또한 탄압 정책도 완화시켜 몬트리올의 프랑스계들이 다시금 프랑스어를 쓸 수 있도록 했다.


4. 산업화와 확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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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시기 몬트리올의 전경
모피 무역 위주였던 몬트리올의 경제는, 산업혁명을 맞으며 대량 생산과 운수업 중심으로 재편된다. 세인트로렌스 강을 끼고 있어 대서양으로의 진출이 용이했던 몬트리올은 캐나다 동부의 주요 항만이 된다. 1836년에는 퀘벡 최초의 철도 노선이 개통되며 몬트리올에도 철도 시대가 열린다. 1858년에는 그랜드 트렁크 레일웨이(Grand Trunk Railway)의 주도로 토론토와 온타리오 일대로 향하는 철도가 세워진다. 캐나다 철도 시대의 도래와 함께 확장을 거듭했고, 1880년 캐네디언 퍼시픽(Canadian Pacific)의 본사를 유치하며 전성기를 맞이한다. 한편 1840년대 몬트리올 시는 세인트로렌스 강에 상수도 펌프를 설치하여 오래도록 시의 골머리를 썩히던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한다.

급성장한 몬트리올은 주변의 행정구역을 하나 둘 흡수하기 시작한다. 1883년에는 몬트리올 일대 최초 정착지였던 오슐라가를 합병했으며, 다년간 인근 도시들을 합병하다 1910년 10개, 1918년에는 3개를 합병하기에 이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몬트리올은 북미에서 가장 개방적인 도시였다. 당시 이웃 미국인들은 금주령이 떨어진 자국을 떠나 카바레, 도박장 등 유흥업소가 흥행하던 몬트리올로 넘어오곤 했다. 1930년대 대공황이 터지며 도시가 잠시 휘청이기도 했지만, 곧이어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특수를 맞아 다시 빠르게 성장한다.


5. 쇠퇴[편집]


캐나다의 태동기부터 줄곧 최대 도시 자리를 유지하던 몬트리올은 토론토의 급성장과 함께 자리를 위협받기 시작한다. 실제로 당시 토론토 증권거래소의 거래량이 몬트리올을 넘어서고, 몬트리올보다 십 년은 빠르게 인구 100만 명을 찍는 등[5] 점차 캐나다의 종주도시 지위를 넘보기 시작한다. 토론토는 인근의 미국 중서부와 함께 중공업 기반을 다지며 입지를 넓혀 나갔다. 세인트로렌스 수로(Saint Lawrence Canal)의 개통과 함께 대서양~온타리오 간 화물이 몬트리올을 지나쳐 가게 된 건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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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엑스포 캐나다관의 모습
한편 몬트리올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몬트리올은 이견 없는 캐나다 최대의 도시였고, 1967년에는 엑스포와 함께 최초의 지하철 노선을 개통하며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노력했다. 또한 한동안 정체되어 있던 시 경계도 1963년 리비에르 데 프레리를 흡수하며 다시 차근차근 넓혀 나간다.

그러나, 몬트리올은 1970년대 전반에 걸쳐 나타난 여러 번의 악재와 함께 본격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당시 몬트리올과 퀘벡은 조용한 혁명(Révolution tranquille)과 함께 주 전체에 만연했던 구시대적, 가톨릭적 관습의 뿌리를 뽑아내고 있었고, 장차 퀘벡 독립운동의 출발에 큰 영향을 끼친다. 동시에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퀘벡 자유당(Parti libéral du Québec, PLQ)이 집권하면서 주 내부 경제 주도권을 영국계로부터 빼앗고 프랑스어 사용을 장려하는 등, 과거의 영화를 되찾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정책은 몬트리올 내의 영어권 기업들이 토론토로 빠져나가는 계기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토론토의 부상에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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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개막식 행사 도중 행진하는 캐나다군
자존심을 지키고 싶던 몬트리올은 1976년 올림픽 유치를 준비하지만, 계속되는 퀘벡 독립운동으로 몬트리올 및 퀘벡과 으르렁대던 중앙 정부가 예산을 지원해 줄 리는 없었다. 결국 몬트리올은 얼마 없는 시 재정을 쥐어짜며 올림픽을 유치한다.[6] 여기에 직전 올림픽 당시 터진 뮌헨 올림픽 참사 탓에 보안 예산이 40배로 뛰어버린 건 덤. 올림픽이 끝난 이후 몬트리올은 사상 최대의 적자와 함께 파산 직전에 놓였고, 한동안 크나큰 부진을 면치 못한다. 1980년에는 퀘벡 독립운동이 투표 부결과 함께 실패로 돌아갔고, 1989년에는 몬트리올 대학교 공학부 여성 재학생들을 상대로 한 총기난사가 터져 14명이 사망하자 시는 더욱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올림픽과 연이은 악재의 여파로 몬트리올의 성장률은 토론토, 밴쿠버 등 다른 캐나다 도시들과 비교해 크게 뒤쳐지기 시작한다.


6. 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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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다운타운의 스카이라인
부진하던 몬트리올을 반등시켜 준 요소는 산업 구조 재편과 문화 산업이었다. 1990년대 말엽 몬트리올은 오래된 기업이 떠난 자리에 새 기업들이 들어서고, 관광객들이 늘어나며 새로운 문화시설이 생겨났다. 기회를 잡은 몬트리올 시는 몬트리올 지하철의 새 노선을 개통하고, 순환도로를 지으며 사회기반시설 확충에 나선다. 이러한 노력이 빛을 발해 IATA, ICSID, UIS(유네스코 통계 연구소) 등 여러 국제기구들을 유치하는 데 성공한다. 21세기 몬트리올은 토론토의 뒤를 이어 제2 도시로서의 위상을 확고하게 다졌고, 세계 각지의 불어권 출신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도시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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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의 퀘벡 시 일대다.[2] 훗날 몬트리올의 어원이 된다.[3] 성모 마리아의 도시라는 뜻. 선교도시로 출발한 몬트리올의 기원을 잘 드러내는 이름이다.[4] 그림은 몬트리올 인근의 생-듀스타슈(Saint-Eustache)에서 벌어진 반란을 나타낸다.[5] 몬트리올의 인구는 1951년에 100만명에 도달한다.[6] 보다 못한 캐나다 정부가 재정 지원을 조금 해 주긴 했다. 물론 턱없이 모자랐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