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돈나(가수)/생애 및 활동

덤프버전 :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마돈나(가수)

1. 개요
2. 데뷔 이전
3. 커리어
3.1. 1980년대
3.2. 1990년대
3.3. 2000년대
3.4. 2010년대
3.5. 2020년대
3.6. 연기 활동


1. 개요[편집]


마돈나의 일생 및 커리어를 다룬 문서이다.


2. 데뷔 이전[편집]



파일:external/marieclaire.media.ipcdigital.co.uk/Madonna.jpg

어린 시절의 마돈나

자동차의 본고장인 디트로이트에서, 제너럴 모터스에서 일하던 엔지니어인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인 아버지와 프랑스캐나다 사람이었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이탈리아 계 집안이었으므로 가톨릭의 영향을 받았다.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은 중산층 가정이었다.[1] 다만 어머니가 5살 때 돌아가셨고 이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디트로이트에서는 어린 시절을 흑인들과 같이 지냈다고 한다. 덕분에 흑인 배우들과 염문설이나 흑인 인권에 대하여 꽤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어릴 적 동네 흑인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던 점이 컸다고 한다.[2][3]

마돈나는 학창 시절에 의외로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었고 아이큐가 140이라는 설도 있다. 그녀도 훗날 자신의 학창시절을 "늘 무언가를 찾는 외로운 소녀였을 뿐 반항적인 학생은 아니었다. 나는 되도록이면 주위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신경을 썼지만 겨드랑이 털을 제모하지 않았고 평범한 소녀들처럼 화장을 하지도 않았다. 다만, 공부를 열심히 했고 좋은 성적을 받았다. 나는 특별한 '누군가'가 되고 싶었다."라고 회상했다. 마돈나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발레 강습을 시켜주었으며[4] 춤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은 결과 마돈나는 미시건 대학교에 무용 전공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다만, 가수로서 커리어를 쌓아나가기 위해 1978년 뉴욕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다니던 대학을 자퇴했다.

3. 커리어[편집]



3.1. 1980년대[편집]



파일:madonna1983.jpg

1집 《Madonna》 활동 시절

1978년 단돈 35달러를 가지고 뉴욕에 입성한 마돈나는 백댄서와 밴드 활동을 하며 기본기를 닦았다. 그녀는 훗날 "내가 뉴욕에 왔을 때 나는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 본 거였어. 심지어 택시도 처음이었지. 나에겐 모든 게 다 처음이었어. 주머니엔 35달러밖에 없었어. 그건 내가 그 전까지 했던 모든 일 중에 가장 용감한 일이었지."라고 뉴욕에 도착했을 당시를 회고했다. 당시 마돈나는 돈이 없는데 배는 너무 고파서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했다고 고백한 바 있으며[5] 이 당시 돈이 없어서 10달러를 받고 찍은 누드사진 때문에 유명해진 후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사진을 보면 근육없는 평범한 소녀 몸매의 갈색 머리[6]의 전형적인 이탈리아 여성이다. 2013년 마돈나는 당시 성폭행당한 것을 고백했다.

1979년에 저예산 영화 '상처뿐인 과거'(A Certain Sacrifice)에서 주연을 맡으며 연예계에 데뷔했다. 그녀는 창녀 역할을 맡았으며 출연료로 겨우 100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영화는 엉성한 완성도 때문에 개봉조차 못하고 봉인되었다가 1985년 그녀가 가수로서 대박을 거두자 제작사와 비디오 발매사가 마돈나의 영화 데뷔 주연작이라고 신나게 광고를 때리며 개봉하였다. 영화는 오로지 마돈나의 풋풋한 20대 시절 모습을 보는 것 말고 장점이 전혀 없다라는 악평을 들었지만 당시 센세이션한 인기를 누리던 마돈나의 이름값으로 초반부터 5만 장이 넘는 비디오를 팔아치워 제작비 100배 이상 수익을 거둬들였다. 마돈나는 이 영화를 질색해서 영화 제작자가 자신의 이름으로 영화를 홍보하기 시작하자 영화의 판권을 사서 비디오 발매를 막으려고 했으나 해내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1986년에 마돈나 데뷔작이라고 홍보하며 세신영상에서 비디오로 발매했다.



첫 번째 싱글 〈Everybody〉 뮤직비디오

1982년, 마돈나는 첫 싱글 "Everybody"를 발매하여 가수로서 정식으로 데뷔하였고 해당 싱글은 나이트클럽에서 나름 반응을 얻는다. 당시 싱글표지에는 가수 사진이 없고 노래가 약간 RnB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리스너들이 마돈나를 흑인 가수인줄 알았다는 일화도 있다. 노래를 듣다보면 보컬이 약간 흑인같다 그러자 마돈나는 "Everybody"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여 자신의 얼굴을 만천하에 공개하였다. 마돈나의 두 번째 싱글 "Burning Up"은 호주 차트 20위 안에 들었다.

이후 1983년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 Madonna가 발매된다. 빌보드 200에서 190위부터 차트인한 Madonna 앨범은 발매 직후엔 인기가 아주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꾸준히 중상위권에서 버틴 결과 1년 뒤에 최고 순위 8위를 기록하게 된다. 최종적으로는 965만장 가량이 팔렸다. 마돈나는 앨범의 8곡 중 5곡을 단독으로 작곡하며 그다지 펑크 앨범 제작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소속사에게 본인의 실력을 입증한다. 시간이 많이 흐른 현재는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입을 모아 호평하고 있는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다.

세 번째 싱글 "Holiday"부턴 여러 나라 차트의 탑텐에 진입한 것은 물론, 미국 본토에서도 반응이 와서 16위에 안착했고 후속 싱글 "Borderline"은 마돈나의 빌보드 첫 탑텐에 진입한 노래이자 가장 오랜 기간 차트인한 노래이다. 미국에서는 "Lucky Star'가 마지막으로 싱글컷되었고, 4위까지 순위가 오르는 등 팝계에 이름을 알릴 초석을 다진다.


2집 《Like A Virgin》 활동 시절




1984년 VMA에서 선보인 〈Like A Virgin〉 무대

1984년에 발매된 2집의 리드 싱글 Like a Virgin으로 마돈나는 처음으로 빌보드 핫 100 1위에 올랐다. 특히 1984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Boy Toy라고 새겨진 벨트와 웨딩 드레스, 그리고 머리를 헝클며 바닥에 몸을 문대는 Like A Virgin 공연은 당시 엄청난 파격이었으며, 마돈나의 베스트 퍼포먼스 중 하나로 꼽히곤 한다. 이 공연의 여파로 노래와 마돈나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치솟게 된다. 오늘날까지도 마돈나를 상징하는 히트곡을 꼽자면 단연 Like A Virgin이 꼽힌다.[7] 참고로 1980년대는 여성의 입에서 Virgin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금기를 깨고 파격적인 행위였다. 하물며 마돈나는 Virgin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들어가는 노래를 직접 부르며 무대까지 펼쳤으니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몰고온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다.

그 해 10월 발매된 마돈나의 2집 Like A Virgin은 세계적으로 2,10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면서 마돈나는 단숨에 월드스타로 올라선다. 대중음악의 황금기인 90년대 음반들에 비교하면 2000만장이 큰 숫자로 체감이 안될 수도 있는데, 마돈나의 Like A Virgin은 여가수의 앨범이 최초로 전세계 2000만장이 넘은 앨범이며, 미국내 최초로 500만장 인증을 받은 여가수의 앨범이다. 마돈나는 이 당시 빌보드 연말결산 아티스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앨범의 히트는 데뷔한지 2년 밖에 안 된 여가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었고, 이때 파격적인 퍼포먼스와 패셔너블한 스타일로 많은 마돈나 워너비들을 양산해내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뮤직비디오와 무대에서의 마돈나 스타일인 탈색한 헤어, 과하고 화려한 악세사리는 당시 따라하지 않은 여성이 없다고 할 정도로 유행이었다. 한편 인기를 얻는데는 성공했지만, 파격적인 행보 탓에 당시 보수적인 연예계와 언론에서 큰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래미에서 단 한 부문에도 지명되지 못한 것만 봐도 당시 평론가들의 평가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1집과 같이 후대엔 작품성과 상징성이 인정받아 재평가되긴 했지만.



두 번째 싱글 〈Material Girl〉 뮤직비디오

1985년 초엔 "Material Girl"이 싱글컷된다. 이 곡은 빌보드 2위까지 올라가며 히트쳤고, 각종 뮤지컬 및 TV 프로그램에 삽입된 곡이기 때문에 의외로 현 세대에게까지도 가장 익히 알려진 마돈나의 노래 중 하나이다. 싱글 "Angel"과 "Dress You Up"도 가수의 인기에 힘입어 빌보드 Top 5에 진입했다.

마릴린 먼로와 제인 러셀이 출연한 50년대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속 먼로가 부르는 '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를 오마주한 뮤직비디오는, 물질적인 세상 속에서 돈이 최고라고는 하지만 결국 주도적으로 사랑을 선택하는 모습을 그려냈으며, 한편으로는 뮤직비디오의 모습 그대로 대중음악계의 마릴린 먼로가 되겠다는 포고이기도 했다.

1985년, 비전 퀘스트의 사운드트랙으로 수록된 발라드 트랙 "Crazy for You"로 2번째 빌보드 핫 100 1위를 거머쥐었으며 마돈나 최고의 명곡을 뽑자면 반드시 언급되는 "Into the Groove"는 피지컬 발매를 안한 탓에 빌보드 핫 100에는 진입하지 못했지만 유럽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며 차트 최상위권에 랭크되었다.

또한 마돈나는 같은해 'The Virgin Tour'라는 북미 투어를 진행했는데, 신인 솔로 여가수로서는 압도적인 티켓 파워를 보여주었다. 무명 시절 찍은 누드 사진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도 이 시기이며, 이에 마돈나는 '나는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당한 방식으로 돈을 번 것인데 무엇이 잘못됐냐'며 비난 여론에 당당한 태도로 맞섰다. 이후 의 공연으로 유명한 Live Aid에서 훌륭한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다.


파일:madonna1986.jpg

3집 《True Blue》 활동 시절



첫 번째 싱글 〈Live To Tell〉 뮤직비디오

1986년 3집의 리드싱글 "Live To Tell"은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고 평단 역시 지금까지 공개된 그녀의 발라드 중 최고라고 호평했다. 두 번째 싱글 "Papa Don't Preach" 역시 1위에 올랐다. 10대 낙태에 관한 내용으로 다시 한번 화제를 집중시켰고, 이 노래가 당시 미국 젊은 여성들의 낙태율에 영향을 줬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이 시기의 '마돈나 신드롬'은 대단했다.

1986년 여름 3집 True Blue가 발매되었다. 총 2250만장이 팔린 것으로 추산되며, 그 해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자 가장 많은 국가에서 1위를 차지한 앨범, 80년대 가장 많이 팔린 여가수의 앨범이라는 타이틀까지 따내었다. 또한 미국 가수가 최초로 UK 앨범차트에서 1위로 데뷔하는 등, 마돈나가 본격적으로 글로벌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계기가 된 앨범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1986년 RIAA에서 발표하는 가수 수입에서 마돈나는 브루스 스프링스틴, 라이오넬 리치, 휘트니 휴스턴 등 쟁쟁한 가수들을 이기고 1위에 올랐다.#

후속 싱글 "True Blue"가 3위, "Open Your Heart"는 1위, "La Isla Bonita"[8] 역시 4위를 차지하며 전작에 이어 싱글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1987년엔 마돈나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Who's That Girl>의 개봉과 함께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이 발매되었다. 영화는 폭망했지만 OST 싱글 Who's That Girl과 Causing A Commotion이 각각 1위, 2위를 달성하는 등 쾌거를 이루었다.



1987년 Who's That Girl Tour에서 선보인 〈Who's That Girl〉 무대

1987년, 마돈나는 데뷔 4년만에 투어 Who's That Girl World Tour로 스타디움 투어를 돌기 시작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남자 솔로 또는 밴드 투어가 대부분이었던 당시 여자 가수로는 독보적이었으며, 일본에서는 마이클 잭슨보다 먼저 스타디움 투어를 하며 가공할만한 인기와 파급력을 나타냈다. 프랑스 파리 공연에선 한번에 13만명의 관객이 운집함에 따라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여가수의 단일 공연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훗날 Consequence Of Sound에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콘서트 투어 4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당시가 가히 마돈나의 진정한 리즈 시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앨범에서 자켓과 노래 뮤직비디오는 유명 사진작가 허브 릿츠(Herb Ritts)[9]와 작업했는데 Like A Virgin 때보다는 스타일이 조금 더 다듬어지고 단정해진 것을 알 수 있다.


파일:madonna1989.jpg

4집 《Like A Prayer》 활동 시절

1989년, 마돈나는 숀 펜과의 이혼을 발표하는 동시에 4집의 리드싱글 "Like A Prayer"로 컴백한다. 뮤직비디오에선 예수와의 성적인 분위기 묘사, 십자가를 불태우는 행위[10] 등 신성 모독 묘사로 크게 논란이 되었으며 당시 최고로 인기있는 가수만 계약할 수 있다던 펩시와의 계약도 해지되었을 정도로 파문이 컸지만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Like A Prayer"는 마돈나의 7번째 빌보드 1위곡이자 대표적인 히트곡이 된다. 록 음악가스펠 사운드를 기반으로, 5분 19초의 긴 러닝타임동안 계속해서 반전이 일어나는 굉장히 드라마틱한 구성을 가진 이 노래는 마돈나 최고의 명곡을 선정할 때 거의 100% 1위에 뽑힐 뿐만 아니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노래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될 정도로 음악성을 인정받았고, 이 곡을 Like a Virgin을 제치고 마돈나 최고의 노래로 뽑는 팬들도 있다.

이후 발매된 4집 앨범 Like A Prayer 역시 높은 완성도로 극찬을 받았다. 마돈나의 개인적 삶을 음악적으로 잘 표현해내 이전보다 한층 더 성숙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앨범 판매량은 1500만장 정도로 떨어졌지만 페미니즘에 있어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Express Yourself"가 빌보드 2위까지 올랐으며 "Cherish", "Keep It Together", 영국 차트 5위권에 진입한 "Dear Jessie" 등 히트 싱글은 꾸준히 나왔고 1980년대 끝자락에 접어들면서 그녀는 80년대 가장 성공한 연예인 반열에 들어있었다.


3.2. 1990년대[편집]




1990년 VMA에서 선보인 〈Vogue〉 무대

흔히 1990년대 초반은 마돈나의 암흑기로 알려져 있지만, 1992년 Erotica 전까지는 슈퍼스타로서의 명성을 유지했다. 1990년대의 첫 활동을 알린 Vogue는 빌보드 1위를 기록한 것은 물론, 마돈나의 대표곡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반드시 꼽히는 명곡이다. 1990년 9월 열린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선보인 'Vogue' 공연은 마돈나의 레전드 공연 중 하나로 자주 거론된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마이크도 없이 아주 당당한 립싱크 공연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호평을 받는 대단한 무대이다. MTV에서 선정한 역대 최고 공연 2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한편, 1990년 4월부터 진행된 Blond Ambition World Tour에서 남자 댄서들과의 각종 검열삭제스런 퍼포먼스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종교 단체에서 들고 있어났는데, 이 당시에는 무려 교황까지 나서 콘서트 보이콧을 선언했을 정도. 그러나 콘서트의 여왕답게 결과는 대박. 티켓이 불티나게 팔린 것은 물론이고 당시로선 혁신적인 무대 장치로 퀄리티 면에선 모두가 입을 모아 호평했다. '마돈나 워너비'로 불리는 거대한 팬덤 덕분에 한동안 콘서트 투어로 마이클 잭슨이나 롤링 스톤스같은 남자 가수들에게 대적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여가수였다.



첫 번째 싱글 〈Justify My Love〉 뮤직비디오

같은 해 11월 베스트 앨범 The Immaculate Collection이 발매되었다. 마돈나 커리어 최다 판매이며 역대 솔로 아티스트 최다 베스트 앨범 판매량인 2800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한다. 앨범 싱글 Justify My Love는 뮤직비디오의 선정성 논란으로 mtv에서조차 방송금지 되었으나, 이러한 논란이 매우 이슈가 되며 빌보드 1위, Rescue Me는 9위를 기록했다. Rescue Me는 당시 여자 가수로는 가장 높은 데뷔 순위 빌보드 차트 15위로 데뷔했다.

1991년 아카데미상에서 팝의 여왕 마돈나와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함께 손을 잡고 참석해 매우 화제가 되었으며, 같은 날 마돈나가 공연한 무대도 호평을 받았다.

마돈나는 본인이 출연한 영화 그들만의 리그의 OST "This Used To Be My Playground"를 1위에 올려놓으며[11] 당시로선 가장 많은 빌보드 1위곡을 가진 여가수에 등극했었다.

1992년 여자 가수로는 최초로 음반 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타임 워너와 합작으로 매버릭이라는 음반 회사를 차린 것이다. 당시 6,000만 달러라는 파격적인 계약금을 받았다.

매버릭에서 출시한 첫 상품은 바로 지금 봐도 충격적인 그 유명한 누드집 "SEX"였다. 현재까지도 유례없는 최고의 탑가수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화보집을 냈으니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게 단순히 남성들에게 소구하는 섹시 화보집이 아니다. 1920년대 활동했던 디타 파를로라는 배우를 본 따 '디타 부인'이라는 얼터 에고를 형성해 여러 섹슈얼리티들을 마돈나 본인의 시선에서 노골적으로 탐구한 물건이었기 때문. 사실상 현존하는 모든 성적 취향을 다 담은 물건으로, 단순한 이성애/동성애를 묘사하는 차원을 떠나 집단난교, 골든사워, 스카톨로지, 수간 등을 의미하는 듯한 사진들이 담겨있다.[12]

전 세계 언론들은 마돈나를 비판•조롱하고 연일 매장 수준의 악의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이 누드집 사건으로 인해 마돈나는 언론과 대중의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이미지는 매우 나빠졌다. 훗날 이 섹스책은 문화학적 특히 페미니즘적 측면에서 재평가를 받기는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업적으로는 대성공을 거뒀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발매 금지 됐지만 일본에서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루 만에 50만 부, 3일 만에 150만 부가 팔리는 대박을 쳤는데 당시 하루 최다 판매 책 기록까지 세울 정도였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추가 출판도 가능한 상태였지만, 마돈나가 중단해버렸다. 덕분에 구하기 어려운 희귀한 책이 되어버렸다.[13]


파일:madonna1993.jpg

5집 《Erotica》 활동 시절

섹스책과 동시 발매한 5집 Erotica에서는 음악적으로도 대놓고 섹스 콘셉트를 민다. 앨범 표지부터 심상치 않은 이 앨범은 이전보다 노골적으로 마돈나가 성생활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으로, BDSM과 동성애, HIV/AIDS 등을 다룬다. 누드집으로 나빠질 대로 나빠진 여론에도 마돈나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이어 나갔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리드 싱글 Erotica 뮤직비디오는 섹스책 촬영 당시의 오프슛 영상으로 만든 것으로서, 책에 비해 수위는 낮지만 여전히 SM 등의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에 새벽 시간대에만 방영될 수 있었다. 나빠진 이미지에 이러한 행보는 불난집에 부채질하는 것과 똑같았다. 리드 싱글만 냈다하면 무조건 1위는 먹고 들어갔던 과거와는 달리 3위에 그쳤다.

두 번째 싱글 Deeper And Deeper은 8위를 찍으며 겨우 탑텐에 들었다. 앨범 판매량도 급감해 앨범차트 2위에 그쳤으며 685만장이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뒀다. 그에 반해 5집 콘서트 투어 The Girlie Show World Tour는 정교하고 화려한 볼거리와 티켓 파워를 자랑하며 이전 투어를 뛰어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14] 콘서트 역사상 처음으로 '쇼' 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높게 평가받으며, 해외에서도 추가 공연과 매진을 연이어 벌어지는 등 신드롬을 일으켰다. 다만 콘서트에서 성행위를 표현하거나 노출이 심한 댄서들의 복장 등 수위 높은 퍼포먼스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994년 마돈나는 그녀의 어그로를 비난하고 조롱하던 언론 중 하나였던 데이비드 레터맨의 토크쇼에 직접 출연해서 또 한번 사고를 친다. 각종 섹드립을 치고 샤워 중에 오줌 싸는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무려 14번이나 fuck이라는 단어를 쓰는 등 제대로 깽판을 치는 바람에 이는 당시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이 검열된 방송이 되었고 이 건으로 데이비드 레터맨은 별도 사과를 해야 했다.[15]


파일:madonna1994.jpg

6집 《Bedtime Stories》 활동 시절

마돈나 본인도 5집 실패의 원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1994년 6집 Bedtime Stories에서는 부드럽고 차분한 완전히 다른 R&B 사운드의 앨범을 가지고 나왔다. 리드 싱글 Secret은 빌보드 3위에 올랐다.

두 번째 싱글 Take a Bow는 7주 연속 1위와 연간 차트 8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뒀다. 앨범은 앨범 차트 2위를 기록했고 5집보다 조금 많은 75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Take A Bow에 성공에 힘입은 마돈나는 이어서 본인의 발라드 베스트인 Something To Remember를 내놓는다. 그동안 섹시 가수로서의 면모가 강했지만 이 앨범을 통해 차분하고 정적인 새로운 마돈나를 선보이며 인기 부활에 조짐을 알렸다. 이 앨범은 전세계 10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데이빗 포스터와 작업한 리드싱글 You'll See는 빌보드 차트 6위, UK 차트 5위에 오르기도 했다.



1997년 Academy Awards에서 선보인 〈You Must Love Me〉 무대

1996년 출연한 뮤지컬 영화 에비타는 마돈나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우선 이때 보컬 트레이닝에 힘써 이전보다 눈에 띄게 가창력이 좋아졌다. 마돈나가 출연한 영화 중 1985년작 '수잔을 찾아서(Desperately Seeking Susan)'과 함께 정말 몇 안되는 좋은 평을 들은 영화이며, 골든 글로브아카데미상에서 수상까지 했다.


파일:madonna1998.jpg

7집 《Ray Of Light》 활동 시절



1998년 BBC National Lottery Show에서 선보인 〈Frozen〉 무대

1998년엔 7집 리드싱글 Frozen이 빌보드 2위 및 각종 국가의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부활의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마돈나는 메인스트림 가수로는 처음으로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도입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얼마 후 발매된 7집 앨범 Ray Of Light가 발매되자 마돈나는 80년대에 견줄만한 인기 가수로 완전히 재기하게 된다. 앨범은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면서 1600만 장 가량의 판매량을 기록했고, 유럽에서만 무려 700만장의 인증을 받아내기도 했다. 북미에서의 추이는 유럽에 비해 약한 편이었으나 데뷔 15년 차 중견 가수가 차트 최상위권에서 놀았다는 것은 매우 대단한 성과이다.

당시 딸을 출산한 후 요가와 명상, 신비주의 종교 등에 빠져 있던 마돈나는 스스로도 영적인 세계에 관심을 보이고 예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러한 관심과 불교철학 등 동양적인 정신문화를 바탕으로 자아성찰적인 곡들을 담아 냈다. 전체적으로 몽환적이고 세련된 앰비언트/일렉트로니카 사운드와 앨범의 테마는 조화가 잘 되었고, 활동 기간 내내 이미지 변신을 해오던 마돈나 본인으로서도 40대의 나이에 들면서 성숙하고 신비로운 이미지 구축을 통해 새로운 리스너층도 유입되는 등, 제 2의 전성기를 연 앨범이다.

앨범의 높은 완성도로 마돈나는 아티스트로서 완벽하게 인정받았다. 당시 일렉트로닉계의 탑이었던 아이슬란드 가수 비요크의 최고의 앨범 《Homogenic》과 비교될 정도였다고 하니... 롤링 스톤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500" 순위 중 367위에 오르는가하면 VH1의 "100대 명반" 리스트에도 이름을 올렸다. 데뷔때부터 마돈나를 외면해왔던 그래미상조차도 3관왕에 오르는 상을 건네주며 인정했다. 마돈나 역시 결과물에 만족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으며, 자아 성찰을 할 수 있었던 프로젝트였다고 밝혔다.



1999년 Grammy Awards에서 선보인 〈Nothing Really Matters〉 무대

80년대 가장 성공한 여가수였기에 90년대 마돈나는 상대적으로 인기가 하락했다고 볼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90년대에도 마돈나보다 성공한 여가수는 빌보드 차트기준으로 2명밖에 없었다.[16]그 외에 다른 국가들의 차트를 살펴보면 마돈나는 90년대에도 여전히 가장 인기많은 여가수 중 한명이었다.


3.3. 2000년대[편집]




파일:madonna2000.jpg

8집 《Music》 활동 시절

2000년 9월 18일 8집 Music을 발매한다. 일렉트로닉 장르의 연장선이며, 좀더 북미스러운 일렉트로닉을 만들었다. 첫 주 42만 장을 팔아 Like a Prayer 이후 11년만에 빌보드 200 1위에 올랐으며, 세계적으로 1,07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평단으로부터 역시 호평을 받았다. 동명의 리드 싱글 Music은 빌보드 핫 100 1위를 포함해 20여개 국가에서 1위를 차지하며 히트했다. 2000년 그해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싱글이었으며,# 마돈나의 대표하는 노래로 반드시 꼽힌다. 현재까지 마돈나의 마지막 빌보드 1위 싱글이기도 하다.



2000년 David Letterman Show에서 선보인 〈Don't Tell Me〉 무대

두 번째 싱글 "Don't Tell Me"는 빌보드 4위까지 오르며 흥했고 "What It Feels Like For A Girl" 역시 주요 국가 차트 상위권에 올랐다. 2001년 6월부터 9월까지 진행한 월드 투어 Drowned World Tour는 7,600만 달러의 수익을 냈는데, 2001년 솔로 가수 투어로 1위에 해당하는 성공을 거뒀다.



〈American Pie〉 뮤직비디오

2001년 돈 맥클린의 대표곡 American Pie를 리메이크해서 발표했는데, 호평과 동시에 2001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중 하나가 되었다.

2002년 007 어나더데이의 OST를 불러 탑텐에 진입시켰다. 데뷔 20년이 다 되어가던 연차에서도 놀라운 음악적 성과를 거두던 시기였지만 영화 면에서는 마돈나의 출연 영화 중에서도 최악으로 꼽히는 <스웹트 어웨이>가 개봉하기도 했다.



첫 번째 싱글 〈American Life〉 뮤직비디오 원본

연이은 일렉트로닉 앨범의 성공을 일궈냈지만 2003년 4월 21일 9집 American Life를 발매하면서 마돈나는 다시 한 번 추락한다. 일단 앨범의 퀄리티에 대해서도 평이 갈렸지만 앨범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마돈나의 행보이다. 당시 미국은 9.11 테러 사건 등으로 국민들과 정부 모두 무력 사용의 목소리가 컸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반대로 마돈나는 리드 싱글 American Life 뮤직비디오에서 자국 대통령인 조지 W. 부시를 묘사한 사람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미국인들을 비판했다. 전쟁의 참혹함을 보고 즐거워하는 미국인들을 묘사한 것과 마돈나가 던진 수류탄을 받아 거기서 나오는 불로 담배를 피우는 부시 묘사까지 했으니.. 당연히 현지에서는 난리가 났다. 대중과 언론, 시민단체 모두가 손모아 매국노 취급을 당하는 등 비난이 거세지자 뮤직비디오 원본을 공개하지 않고 전세계 국기 배경으로만 이루어진 수정본을 공개하는 것으로 한발 물러섰다. 유럽권에선 완전히 망했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고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330만 장이라는 역대 최저 판매량을 기록하며 활동을 끝냈다.

다만 2010년대 들어 이라크 전쟁이 돈먹는 하마가 되고, 이라크 전쟁 항목에서 볼 수 있듯 명분이 마땅찮은 전쟁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등 이라크 전쟁에 대한 평가가 바뀌어감에 따라, 해당 앨범에 대한 평가도 상당히 바뀌어가게 된다. 앨범 발매 20주년인 2023년엔 빌보드, 롤링스톤 같은 매거진에서 해당 앨범의 20주년 기념 기사를 여럿 내보낼 정도. 앨범과 뮤비 공개 당시의 공격적이었던 대중들의 반응 역시 상당히 많이 바뀌었다. 오랜 기간 활동한 마돈나에게도 격세지감이 느껴질듯.

이런 반응 때문인지 마돈나는 2023년 4월, 싱글 'American Life'의 감독판을 전격적으로 유튜브에 공개했다.



2003년 VMA에서 선보인 〈Like A Virgin>과 <Hollywood〉 무대

American Life 활동 시기 또 하나의 레전드 퍼포먼스를 만들어냈는데, 2003년 MTV VMA에서 후배 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키스 퍼포먼스를 선보여 큰 화제를 모았다. 당시 포스트 마돈나로 한참 극부상하고 있던 두 가수가 그것도 마돈나와 키스했다는 사실은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때 마돈나는 스피어스, 아길레라 두 명과 모두 키스를 했는데 카메라가 스피어스와의 키스만 보여줘서 마돈나, 스피어스만 언론의 집중을 받았고 정작 아길레라는 이렇다할 주목조차 받지 못했다. 관중석에 있던 저스틴 팀버레이크, 비욘세, 에이브릴 라빈, 에미넴 등 200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들의 리액션 보는 것도 재미있다는 의견도 많았다.

저조한 성적의 앨범과 별개로 투어 Re-Invention World Tour는 1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기록했고, 당시 솔로 여가수 1위 기록을 본인의 투어로 다시 한번 경신해내며 마돈나의 강력한 티켓 파워를 보여주었다.


파일:madonna2005.jpg

10집 《Confessions On A Dance Floor》 활동 시절

2005년, 미국을 떠나 유럽에서 작업한 10집 Confessions On A Dance Floor가 폭발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재기에 성공하였다. 앨범 판매량은 900만 장[17]에 메타크리틱 점수 80점으로, 상업성과 작품성을 모두 잡은 명작이다. 모든 수록곡이 댄스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2곡의 모든 노래가 물흐르듯 자연스레 이어지는 것이 특징인 앨범이다. 빌보드에서는 "팝의 여왕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마돈나가 예전에 했었던 80년대 디스코 컨셉을 재해석한 앨범이기 때문. 리드 싱글 Hung Up은 ABBAGimme! Gimme! Gimme에서 샘플링한 노래로, 직접 ABBA에게 전주곡을 사용할 수 있도록 비행기까지 타고 가서 부탁해 허락을 받아오는 데 성공했다. 노래는 곧 세계를 휩쓸었는데, 가장 많은 국가에서 1위를 한 싱글이라는 기록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었다. 반면 미국에서는 폭발적인 디지털 판매량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사건으로 7위에 그쳤다.



두 번째 싱글 〈Sorry〉 뮤직비디오

당시 빌보드는 라디오의 비중이 컸기 때문에 순위 상으로는 부진을 면치 못했지만 "Sorry", "Get Together" 등의 싱글들이 미국 밖에서 성공했다. 2006년 그래미에선 베스트 일렉 앨범 상을 수상했다.

이후 마돈나는 대대적으로 큰 투어를 계획했고 2006년 5월부터 Confessions Tour를 시작한다. 120만 명의 관객, 1억 9,000만 달러에 이르는 역대 여가수 투어 1위 기록을 모두 갈아치우며 대성공을 거둔다. 팬들 사이에서도 가장 퀄리티 좋은 투어로 자주 꼽히는 투어이다.


파일:madonna2009.jpg

11집 《Hard Candy》 활동 시절



첫 번째 싱글 〈4 Minutes〉 뮤직비디오

2007년 마돈나는 데뷔부터 수십 년간 함께해왔던 워너 브라더스와 계약을 끝내고 1억 2,000만 달러의 계약금과 함께 공연 위주 기획사인 라이브 네이션과 계약했다. 2008년 3월에는 11집 Hard Candy를 발매했다. 팀벌랜드, 넵튠스 등 미국 팝적인 요소를 가득 담은 대중성을 신경 쓴 앨범으로 작품성은 미묘한 평을 받았으나 상업적으로 중박 이상의 성적을 기록했다.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리드 싱글 4 Minutes는 21개국에서 1위에 올랐으며, 미국에서도 3위까지 올랐다. 이전 싱글들의 처참한 미국 성적을 생각해보면 성공적이었다. 앨범 역시 37개국 앨범 차트 1위, 총 판매량 365만 장을 기록했다.

원래 마돈나는 21세기 들어서 티켓값을 올리기 위해 아레나 규모로 콘서트를 여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때부터 스타디움 공연의 비중을 대폭 늘리면서 굉장히 커진 투어 스케일을 보였는데, Sticky & Sweet Tour는 총 4억 달러라는 엄청난 수익을 기록했다. 어떤 여가수도 10년이 넘도록 깨지 못하고 있는 기록이며, 여가수 최고 수익은 물론, 남녀 통틀어서도 역대 열손가락안에 들어가는 성공적인 투어이다.



첫 번째 싱글 〈Celebration〉 뮤직비디오

2009년에는 베스트 앨범 Celebration이 발매되었다. 리드 싱글로 Celebration을 발매했다.


3.4. 2010년대[편집]


2010년대 들어 데뷔한지 수십 년이 지나고 음악 시장과 주류 장르의 급격한 변화로 메인스트림에서 멀어졌지만, 월드 투어에 집중하며 레전드 다운 행보를 이어간다. 2012년 2월 3일 12집 MDNA의 리드 싱글 Give Me All Your Luvin'을 발매하며 2010년대 커리어의 첫 포문을 열었다. 당시 메인스트림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두 여래퍼 MIA니키 미나즈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발랄한 분위기의 대중성을 끌어올린 곡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특색 없는 평범한 팝 노래에 슈퍼볼 하프타임쇼을 노골적으로 노린듯한 치어리더 컨셉으로 혹평이 잇따랐다.



2012년 마돈나가 선보인 Super Bowl Halftime Show 무대

싱글 발표 이틀 후에 슈퍼볼 히프타임쇼 퍼포머로 출연했다. Vogue, Music, Like a Prayer 등 과거 히트곡과 함께 신곡 무대를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다. 함께 합동무대에 선 LMFAO의 레드 푸는 마돈나 들다가 저승 인사하는 줄 알았다고 후일담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니까 언니 근육량 좀 어떻게... ~~그래서 근육질 여성을 선호하는 알렉스 로드리게스와도 사귀었다. 슈퍼볼 효과로 과거 노래들 모두 판매량이 증가하였으며 Give Me All Your Luvin'은 빌보드 핫 100 10위에 올랐다. 하지만 단지 슈퍼볼 효과는 한 주에 불과해 다음주 37위로 수직하락하였다. 그나마 연차가 차 히트싱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10위까지 올랐다는 것에 의미있는 듯하다. 이 싱글로 마돈나는 80년대, 90년대, 00년대, 10년대에 빌보드 HOT 100 탑텐곡을 만든 아티스트가 되었다.

3월 2일에는 12집의 두 번째 싱글 Girl Gone Wild를 발매했다. 션 오프리를 포함한 다수의 남자 모델, 우크라이나 남자 댄스 그룹 카자키를 출연시키는 등 뮤직비디오는 나름 호평받았나, 노래 자체로는 몇년 전부터 유행하던 일렉팝 노래로 큰 호응을 이끌어내진 못했다. 빌보드 핫 100 100위권 진입에 실패하고 버블링 언더 차트 6위로 마감했다. 같은 달 3월 23일 12집 MDNA가 발매되었다. 첫 주 35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빌보드 200 1위로 데뷔한다. 전작을 훨씬 웃도는 높은 판매량이었지만, 콘서트 투어 번들 전략이 먹혀들어간 것으로, 2주차에는 48,000장으로 하락해 86% 감소라는 역대급 낙폭을 기록했다. 앨범 자체도 마돈나가 그동안 해왔던 것들을 답습한 중구난방의 앨범이라 혹평을 들었으며 커리어 하락세를 막지 못했다.

앨범 자체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한 활동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투어는 대성공을 거뒀다. 2012년 5월부터 시작한 MDNA Tour는 3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고, 2012년 그 해 가장 높은 수익을 거둔 투어였으며, 역대 여가수 투어 3위에 해당하는 성공을 거뒀다. 이를 바탕으로 1억 2,500만 달러를 벌어들여 2013년 아티스트 수익 1위를 기록했다.

2014년 말 한창 13집 작업 중 데모 곡들이 유출되었다. 이에 마돈나는 단단히 화가 났는지 인스타그램에 핸드폰 던져 박살낸 사진을 올리고, "유출은 예술 강간이며 테러."라는 글을 올리며 분노를 표하는 등 SNS로 한바탕 하셨다. 결국 같은 달 13집 Rebel Heart의 리드 싱글 Living For Love를 공식적으로 발표한다. 이후 그래미와 브릿 어워드 퍼포먼스를 한다고 발표하며 이전과는 다르게 적극적인 프로모션 행보를 보인다. 브릿 어워드에서는 공연 중 뒤로 넘어지는 사고[18]가 발생해 나름 이슈도 되었지만, 이 곡은 빌보드 핫 100 진입도 못하고 싱글 활동을 접었다. 두 번째 싱글은 'Ghosttown'이었으며, 아이하트라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테일러 스위프트가 기타를 맡으며 합동 무대를 펼쳐서 잠시 화제가 되었다.

세 번째 싱글 'Bitch I'm Madonna' 는 디플로가 프로듀싱을 맡았으며, 한창 핫한 니키 미나즈 피처링을 대동하고 뮤직비디오에는 비욘세, 칸예 웨스트, 케이티 페리, 리타 오라, 마일리 사이러스, 크리스 락, 알렉산더 왕 등 미국 내에서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대거 출연했음에도 불구하고 핫 100 차트 84위로 기록을 마감했다. Bitch I'm Madonna는 가장 나이 많은 여자 가수의 신곡이 빌보드 차트에 진입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최고 기록 싱글차트 84위, 앨범 판매량 전세계 합쳐 100만 장. 이후 늘 그렇듯 앨범 활동은 슬슬 접고 월드 투어를 시작해 돈이나 싹쓸이 하는듯하다. 특히 Rebel Heart 투어에서는 22년만에 호주를 방문하고 동남아시아, 대만 등 그동안 가지 않았던 국가에도 방문한다고 확정지었다. 당시 대한민국도 투어 스케줄에 포함되어있었으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취소되었다.

2016년 빌보드 뮤직어워드 피날레에서 스티비 원더와 함께 친구였던 프린스 로저스 넬슨의 추모공연을 했다.# 또한 호주 멜버른에서 Tears of a Clown이라는 공연을 했는데 마돈나가 광대로 분장했다. 12월 7일에는 제임스 코든의 인기 코너 카풀 가라오케에 출연했다. 2016년 빌보드에서 올해의 여성으로 선정되었다. #

워너와 결별한 이후 계약한 라이브 네이션과의 계약 조건이 10년간 3장의 앨범을 발매하는 것이다. 2018년 5월 멧 갈라에서 신곡 'Beautiful Game'[19]을 공개하였다. 그간 최신 유행 장르의 프로듀서들과 작업해왔던 것과는 달리, 2000년대 초 Music, American Life 앨범을 작업했던 프로듀서 미르와이스 아마드자이(Mirwais Ahmadzai)와 작업할 예정이라고 하며, 전작과는 달리 다수의 프로듀서가 아닌 소수의 프로듀서와만 작업할 것이라고 밝혔다.



마돈나의 새로운 캐릭터 Madame X

2019년 4월 17일 핫한 신인인 라틴 팝 가수인 말루마와 함께 작업한 리드 싱글 Medellín이 발매되었다. 초반에는 차분한 분위기로 전개되다가 중반부터 댄스비트가 등장하는 방식으로, 마돈나 특유의 댄스 음악에 대한 감각과 라틴 팝의 분위기가 잘 어우러진 음악성에 호평이 많다. 리드 싱글 Medellin을 필두로 한 앨범명이 Madame X로 밝혀졌다. 앨범 컨셉은 자유를 위해 싸우는 스파이, 마담 X.

3.5. 2020년대[편집]


2020년 1월 마돈나는 데뷔 40주년 월드 투어를 발표한다. 투어명은 The Celebration Tour로, 2023년 7월 15일 밴쿠버부터 시작해 2023년 12월 1일 암스테르담까지 이어진다. 아쉽게도 아시아 지역은 투어에서 제외되었으며 마돈나의 나이로 미루어볼 때 이러한 대규모 월드 투어는 사실상 마지막일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 팬들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3.6. 연기 활동[편집]



파일:external/images-na.ssl-images-amazon.com/MV5BMTIzMzA5NjIzOF5BMl5BanBnXkFtZTYwOTA2NTI5._V1_UY1200_CR102,0,630,1200_AL_.jpg

영화 《수잔을 찾아서》[20]의 포스터

가수 외에 연기자로도 활동해 상당한 영화에 많이 나왔다. 국내에서는 《딕 트레이시》, 《그들만의 리그》가 알려졌으나 마돈나 본인의 연기력도 사실 좋은 편은 아닌 데다가 골든 라즈베리만 피하는 데에 의의를 둬야 할 판이었다. 게다가 "90년대 영화배우 중 가장 많은 라즈베리 상을 수상한 여배우"라는 불명예까지 떠안는 수모도 겪었다. 라즈베리 시상식의 안방마님.

위에 나온 대로 데뷔작은 1979년 듣보잡 시절에 겨우 100달러를 받고 나온 저예산 영화 '상처뿐인 과거'(A Certain Sacrifice)였으나 제작자도 개차반이라고 봉인했다가 마돈나가 인기를 끌자 데뷔작이라고 신나게 광고를 때리며 비디오로만 내서 대박을 거둬들였지만........마돈나 본인에게는 굴욕인 영화였다. 그래도, 인기를 끌기 시작하던 1985년에 2번째 영화로 주연으로 나온 수잔 세이들먼 감독의 《수잔을 찾아서》는 비평도 좋았고 흥행도 꽤 성공했으며 마돈나는 이걸로 골든글로브 영화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조연인 로잔나 아퀘트는 영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그밖에도 아벨 페라라 감독의 《위험한 게임》, 제임스 폴리[21] 감독의 《화려한 유혹》같이 헐리웃에서 예술적 감독으로 알려진 이들 영화에도 자주 나왔다. 당연히 이 영화들은 흥행으로는 거리가 멀다 보니 잘 알려지지 않기에 마돈나의 영화는 무조건 육체적으로 들이댄다는 편견으로도 희생이 되었던 셈.[22] 그런 영화에 '육체의 증거'[23][24]의라든지 '스웹트 어웨이'[25][26]같은 영화가 있다.



1997년 Golden Globes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마돈나

그 밖에도 1991년작인 진실 혹은 대담[27]이란 다큐멘터리 영화로 호평을 받은 것[28]을 비롯하여 1996년작 뮤지컬영화 《에비타》에서 제법 호평을 받으며 골든 글로브 뮤지컬, 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006년에는 뤽 베송의 애니메이션 영화[29]아더와 미니모이에서 목소리 연기를 하기도 했지만 영화 자체의 평이 좋지 않았고 흥행하지는 못했다.



2012년 Golden Globes에서 주제가상을 수상한 마돈나

2011년, 본인이 직접 감독한 영화 《W.E》가 개봉했고, 수록곡 〈Masterpiece〉로 골든글로브 주제가상을 받았다. 물론 영화에 대한 평은 그저 그렇다. 007 20번째 작품인 어나더 데이에선 주제가를 부르는 한편, 펜싱 교관인 베리티 역으로 카메오 출연을 한 적도 있다.

2023년 현재는 연기쪽보다 제작자에 집중하고 있다.마돈나 전기 영화 연출을 마돈나 본인이 맡는다고 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3 08:58:12에 나무위키 마돈나(가수)/생애 및 활동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마돈나가 디트로이트에서 성장한 시기인 1960년대~70년대까지는 아직까지 자동차 산업이 괜찮게 유지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당시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은 디트로이트를 지탱하는 중산층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다만 70년대부터 미국 자동차 산업이 몰락하면서 많은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이 대거 해고를 당하면서 빈곤층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만약 마돈나가 계속 디트로이트에 머물렀다면 상당히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2] 현재 말라위에서 입양한 흑인 아이를 두 명 키우고 있다. 기사 참고로 기사를 쓴 사람은 그 유명한 신동립이다. 신동립답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돈나 가슴 부분에 특정부위가 비친다. 기사는 입양으로 시작되었으나 결국 마돈나의 섹스 파트너 얘기로 끝맺었다.[3] 80년 초반, 미국 유명가수들이 총집합하여 에티오피아 기아 문제를 후원하던 앨범 《We are The World》에 참여하지 않아 욕도 먹었는데 그 당시 마돈나는 이런 이벤트 때만 잠깐 관심을 가지는 것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면서 이전부터 미국 흑인 빈민가에 기부하였던 일을 이야기한 바 있다.[4] 처음에는 피아노 강습을 받게 해주려는 의도였지만 그녀가 발레를 배우고 싶다고 이버지에게 설득하여 발레 교습소에 들어갔다고 한다.[5] 먹을 게 넘쳐나서인지 미국은 쓰레기통에 버리는 음식이 상태가 엄청 깨끗한 경우도 허다하다. 거지도 아님에도 버려지는 음식 반대하는 모임에서 이런 음식을 모아 먹기도 하는데 겉으로 보면 버린 게 아닌 수준이다.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현태준이 미국에 가서 목격한 것을 봐도 노점상에서 파는 프레첼을 사먹은 어느 사람이 한 입 먹더니 맛없다며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더란다. 대신 이건 어디까지나 뉴욕 중에서도 엄청나게 부유해서 돈 쓰기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이 사는 소수 동네들의 얘기다. 먹을게 없는 거지나 극빈층 사람들이 일부러 그런 동네들까지 찾아가서 쓰레기통을 찾아 주워먹는 거지, 모든 뉴욕 전역이 깨끗한 음식을 많이 버리는 건 아니다. 뉴욕도 가난한 동네나 부랑자가 엄청 많은 지역이다. 잘못 알고 그런 곳에 있는 쓰레기통 음식을 주워먹으면 안 되므로 주의.[6] 마돈나는 금발이 아니다. 대표적인 'fake blonde(가짜 금발)' 연예인 중 하나.[7] 마이클 잭슨에게 Billie Jean, 프린스에게 When Doves Cry가 있다면 마돈나에게는 Like a Virgin이 있다는 말이 생길 정도.[8] 2021년 2월 기준, 마돈나의 유튜브 뮤직비디오 중 조회수가 가장 높다. 스페인어 제목에서 볼 수 있듯, 라틴 팝 풍의 노래로, 마돈나가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인기를 얻는데 큰 기여를 한 곡이다.[9] 사망했지만 2017년 한국에서 사진전이 열린 적이 있다.[10] 우리나라로 치면 태극기를 불태운다고 생각하면 된다고.[11] 노래 자체가 대단한 히트곡이라기보다는 마돈나의 인기가 1위의 주요 요인이었다. 마돈나 본인이 이 곡을 공연하거나 언급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기도 하다.[12] 물론 직접적인 행위를 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가령 골든샤워를 묘사하는 씬은 마돈나의 하반신에 파트너 모델이 얼굴을 파묻고 얼굴앞에 취수대가 놓여있는 식이고, 스카톨로지는 마돈나가 대야 위에 쭈그리고 앉아 대변을 보는 듯한 모습을 촬영했다.[13] 이 섹스책은 2018년 김생민의 영수증에서 나르샤(브라운아이드걸스)들고 나온 적도 있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가 미국 공연을 갔을 때 한 후미진 성인숍에 놀러갔는데, 이 책이 공교롭게도 딱 4권 남아있어서 구입했다고……. 나르샤의 발언이 정말 사실이라면 운이 정말 좋았던 듯.[14] 하지만 미국에서의 여론은 여전히 좋지 않아서 단 5회의 공연만 진행되었다.[15] 그래도 훗날 화해했고, 마돈나는 이후에도 레터맨 쇼에 많이 나갔다.[16] 빌보드 차트 기준으로만 따지자면 아예 남녀통합 1,2위가 머라이어 캐리자넷 잭슨이었다. 90년대 미국에서는 컨템퍼러리 R&B가 강세였고, 거기에 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라 밀린거지 결코 그녀의 인기가 부족하다고 볼 수 없다.[17] 2000년대 중반부터 디지털 다운로드의 증가로 앨범 시장이 축소한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세일즈 파워인 셈이다.[18] 망토를 너무 꽉 묶어서 제 때 풀지 못해 뒤로 심하게 넘어졌다. 다행히 운동으로 관리를 많이해서인지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19] Madame X 앨범에서 'Dark Ballet'라는 이름으로 완성되었다.[20] 당시 마돈나의 인기가 높은 데다가, 평가도 좋아서 450만 달러로 2800만 달러를 벌어서 대박을 쳤다. 마돈나의 배우로서 대표작 중 하나이자 출세작.[21] 비평이 괜찮은 감독이었으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를 연출하게 된다. 마돈나의 뮤직비디오 연출도 많이 맡았다.[22] 모든 영화가 그렇지는 않고, 《수잔을 찾아서》, 《딕 트레이시》, 《그들만의 리그》, 《에비타》 처럼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한 영화도 있다. 특히 《에비타》에서는 연기의 평도 좋았다.[23] 2019년 현재까지 마돈나가 배우로 출연한 작품은 30편 가까이 되는데 그 중에 노출로 들이댄 영화는 이거 하나밖에 없다. 마돈나 입장에선 엄청 억울했을 듯[24] 영화 자체는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원초적 본능의 짝퉁 영화로 평가는 매우 좋지 않다.[25] 1974년작인 귀부인과 승무원이란 이탈리아 영화를 리메이크했는데 원작이 국내에서 무자비하게 자르고 번역도 개판으로 한 채로 그냥 에로틱 영화로 나와 억울하게 오명을 당했지만 상당한 호평을 받은 영화인지라 리메이크작은 평이 안 좋았다.[26] 이 작품의 감독이 마돈나의 전 남편이었던 가이 리치였다.[27] 한국 개봉 당시 33분이 잘려나갔다! 덕분에 국내 개봉 당시 쌍욕이 터져나왔고 결국 서울 관객 3만 명이라는 참담한 흥행을 거뒀는데 당시 로드쇼 같은 영화 월간지에서 삭제된 장면을 공개하며 영화 등급, 검열을 호되게 비난했다.[28] 영화평론가 듀나는 이 영화에 대해 '설마 이 영화가 진짜 다큐멘터리라고 믿는 분들은 안 계시겠죠.'라고 평한 바 있다.[29] 사실 실사와 애니메이션아 같이 들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