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셀레우코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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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셀레우코스 전쟁
Roman–Seleucid war
파일:터키 갈라티아 3.png
기원전 192년의 소아시아 반도. 셀레우코스 왕조 및 그 동맹(적색), 로마 공화국 및 그 동맹(청색), 그리고 중립국(회색)
시기
기원전 192년 ~ 기원전 188년
장소
그리스, 에게 해, 소아시아
교전국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공화국
파일:external/ee1a27b17c61783105214ae23aa9a8dfb1c64f11225c4405656e1addaf25b2c0.png 페르가몬 왕국
파일:rhodos_mon_256.png 로도스
파일:attachment/mon_256_2.png 마케도니아 왕국
파일:akaian_league_mon_256.png 아카이아 동맹
파일:attachment/mon_256_5.png 아테네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카르타고 공화국
파일:masaesyli_emblem_256.png 누미디아 왕국
테살리아 동맹
보이오티아 동맹
파일:attachment/mon_256_12.png 셀레우코스 제국
파일:aitolian_league_mon_256.png 아이톨리아 동맹
파일:external/436a701f1ebef3a53c3c7e2ac6cc777e5961f6ef829d8f39f9db61a7931a3210.png 갈라티아 왕국
파일:cappadocia_mon_256.png 카파도키아 왕국
아타마니아인
엘리스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대 카토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길루스
파일:external/ee1a27b17c61783105214ae23aa9a8dfb1c64f11225c4405656e1addaf25b2c0.png 에우메네스 2세
파일:rhodos_mon_256.png 에우다모스
파일:rhodos_mon_256.png 팜필리다스
파일:rhodos_mon_256.png 차리클레이토스
파일:attachment/mon_256_2.png 필리포스 5세
파일:akaian_league_mon_256.png 디오파네스
파일:attachment/mon_256_12.png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
파일:attachment/mon_256_12.png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
파일:attachment/mon_256_12.png 제욱시스
파일:attachment/mon_256_12.png 안티파트로스
파일:attachment/mon_256_12.png 폴리크세니다스
파일:attachment/mon_256_12.png 아폴로니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_12.png 한니발 바르카
파일:aitolian_league_mon_256.png 토아스
아마닌드로스
결과
로마 공화국의 승리
영향
로마 공화국지중해 패권 확보, 셀레우코스 제국의 위축.

1. 개요
2. 배경
3. 경과
3.1. 아이톨리아 동맹의 공세
3.2. 안티오코스 3세의 그리스 상륙
3.8. 전쟁 말기
4. 결과
5. 주요 전투



1. 개요[편집]


기원전 192~188년, 로마 공화국페르가몬 왕국, 로도스, 마케도니아 왕국, 아카이아 동맹 등 로마의 주도권을 인정한 국가들과 셀레우코스 제국아이톨리아 동맹, 갈라티아 왕국, 카파도키아 왕국, 아타마니아인 등 셀레우코스 제국에 귀속되었거나 로마의 영향력 확대에 위협을 느껴 셀레우코스 제국과 손잡은 국가들이 맞붙은 대규모의 전쟁이다. 로마 공화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확보한 반면, 안티오코스 3세의 동방 원정으로 위세를 떨쳤던 셀레우코스 제국은 위축되었다.


2. 배경[편집]


기원전 203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였던 안티오코스 3세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주였던 필리포스 5세는 서로 동맹을 맺고, 지난해에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급사한 뒤 6살밖에 안 된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즉위하면서 입지가 위태로워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 왕국의 영역을 나눠가지기로 합의했다. 그 후 안티오코스 3세는 제5차 시리아 전쟁을 단행했다. 그의 군대는 기원전 202년 셀레우코스 제국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분쟁 지역이었던 코엘레 시리아의 중심지인 다마스쿠스를 공략했고, 기원전 201년에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여 가자를 점령했다. 한편 필리포스 5세는 사모스 섬을 점령하고 카리아를 침공했으며, 기원전 200년 여름 트라키아와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령과 독립 도시들을 정복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로마 공화국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여파에 시달려서 이집트를 도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기원전 200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장군 스코파스가 팔레스타인을 일시적으로 탈환했으나 안티오코스 3세의 반격으로 파니온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스코파스는 시돈에서 포위되어 장기간 농성하다가 기원전 199년 초여름에 항복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여세를 몰아 기원전 198년 코엘레-시리아와 유대를 정복했고, 기원전 197년에는 소아시아의 킬리키아, 리키아, 이오니아, 크산토스, 텔메소스, 에페수스를 정복했다. 그러던 중 필리포스 5세가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로마군에게 연이어 패배하면서 구원을 요청했지만, 안티오코스 3세는 굳이 마케도니아를 위해 로마와 대적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 마케도니아에 지원군을 보내지 말아달라는 로마 사절단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 대신 지난날 셀레우코스 제국에 속했다가 독립한 소아시아 서부와 트라키아를 공략하는 데 힘을 기울이기로 했다.

기원전 196년, 안티오코스 3세는 소아시아 서부의 도시국가들을 별다른 전투없이 복속시킨 후, 발칸 반도로 건너가 트라키아 일부를 점령하고 리시마케아를 트라키아의 새로운 수도로 삼으면서 둘째 아들인 셀레우코스 4세에게 이 지역의 관리를 맡겼다. 또한 로도스, 비잔티움, 갈라티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는 새로 정복한 영지 및 도시들이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는 한 자치를 누릴 수 있도록 해줬다. 특히 소아시아의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에 대한 무력 행사를 회피하고 자신은 정복자가 아니라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왔다고 선전했다. 다만 외교 정책은 전적으로 자신의 의사에 따르게 했으며, 위기 상황시 군대를 제공하고 기여금을 지불하도록 했다.

한편,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한 뒤 필리포스 5세와 평화 협상을 한 끝에 필리포스 5세가 그동안 정복했던 그리스, 일리리아, 카리아 등지에서 마케도니아군이 철수하고, 150여 년간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지였던 테살리아에서도 완전히 철수하며, 필리포스 5세의 차남인 데메트리오스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1,000탈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내용의 템페 협약을 성사시켰다. 이후 플라미니누스는 그리스인들에게 자유를 주고 로마군은 완전히 철수한다고 선언해 전 그리스인들의 환호를 받았다. 로마군은 약속대로 대거 철수했지만, 아크로코린토스, 칼키스, 에레트리아 등 3개 요충지에는 일부 병력이 남았다. 그러다가 안티오코스 3세가 트라키아에 진출하자, 로마 원로원은 철수를 연기하고 플라미니누스를 그리스 총독에 계속 앉히기로 했다.

플라미니누스가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게 해주겠다고 선언했다는 소식을 접한 소아시아 서부의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은 로마에 의지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특히 스미르나, 람사쿠스,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는 로마 공화국에 사절을 보내 셀레우코스 제국을 물리쳐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로마 원로원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이끄는 사절단을 에페소스에 머물고 있었던 안티오코스 3세에게 보내 트라키아에서 철수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부터 빼앗은 모든 영토를 돌려주며, 소아시아 서부의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이 자유를 누리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안티오코스 3세는 트라키아는 본래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역이었으니 그곳을 회복하는 건 정당하다고 주장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는 이미 평화 협상을 하는 중이니 로마가 상관할 바 아니라고 밝혔다. 또한 소아시아 서부의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은 자신이 이미 해방시켰으며, 그들을 관리하는 건 자신의 권한이라고 답하고 로마 사절단을 돌려보냈다. 그 후 안티오코스 3세는 자신의 딸 클레오파트라 1세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시켜 이집트와의 제5차 시리아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때 그는 자신이 일전에 패배한 장소인 라피아에서 결혼식을 올리도록 했는데, 이는 자기가 코엘레-시리아를 정복했음을 전 지중해 세계에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기원전 195년, 플라미니누스는 아르고스에서 철수하기를 거부하는 스파르타의 참주 나비스를 응징하기 위해 아카이아 동맹, 테살리아 동맹, 페르가몬 왕국, 로도스의 지원을 받으며 전쟁을 단행했다. 5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스파르타로 진군한 플라미니누스는 나비스 휘하의 병력 15,000명을 격파하고 스파르타 시를 포위했다. 나비스가 사절을 보내 화해하자고 요청하자, 플라미니누스는 아르고스와 모든 해안 도시들을 버리고 용병을 해산하며, 함대를 로마에 넘기라고 요구했다. 나비스는 동의하려 했지만, 휘하 부대가 반발하자 어쩔 수 없이 거절했다. 이후 로마군이 공세를 퍼부은 끝에 스파르타 시에 침입하자, 나비스는 비로소 항복하고 플라미니누스가 내건 조건을 따랐다. 플라미니누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나비스를 참주로 계속 두기로 하고, 아카이아 동맹에 스파르타를 포함시켰다. 그 후 로마 원로원은 그리스인들과 맺은 약속을 지키겠다며 발칸 반도에 파견되었던 군대를 대부분 철수시켰지만, 칼키스와 데메트리아스에 일부 병력을 여전히 주둔시켰다.

이 무렵, 로마에서는 숙적인 한니발 바르카가 안티오코스 3세와 힘을 합쳐 로마를 도모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긴장한 로마 원로원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퀸투스 테렌티우스 쿠리오를 카르타고로 파견해 한니발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한니발은 사전에 눈치채고 페니키아의 시돈으로 망명한 뒤 안티오코스 3세를 찾아갔다. 안티오코스 3세는 명장인 한니발을 극진히 대접하고 자신의 고문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로마 공화국과 셀레우코스 제국간의 관계는 한층 더 냉각되었다.

기원전 194년, 플라미니누스는 안티오코스 3세가 트라키아에서 물러나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국경으로 받아들인다면, 로마는 그가 소아시아를 지배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제국의 고토인 트라키아에서 철수할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소아시아의 일부 도시에서 철수할 의사가 있음을 내비쳤다. 기원전 193년,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등으로 구성된 로마 사절단이 안티오코스 3세를 찾아가서 한니발 바르카를 로마에 인도하고 그리스에 일절 간섭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무시당했다.

이렇듯 양국간의 협상이 매년 이뤄졌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사이, 아이톨리아 동맹이 로마에 반기를 들고 셀레우코스 제국과 손을 잡는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했다. 그들은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때 로마와 힘을 합쳐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에게 대적했지만, 테살리아로 영역을 확대하려던 계획이 로마의 반대로 무산되자 격분했다. 여기에 로마가 데메트리아스 및 칼키스에 군대를 여전히 주둔시키는 것은 장차 그리스를 정복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의심했다. 아이톨리아 동맹의 스트라테고스인 토아스는 안티오코스 3세와 동맹을 맺고, 로마의 간섭을 배제한 뒤 세력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해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이에 플라미니누스는 아이톨리아 동맹의 대표자 회의에 참석해 모든 모순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제안했지만, 아이톨리아 동맹은 그리스의 해방을 위해 안티오코스 3세를 초대하기로 결의했다. 결국 기원전 192년, 아이톨리아 동맹이 공세를 개시하면서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경과[편집]



3.1. 아이톨리아 동맹의 공세[편집]


기원전 192년 봄, 아이톨리아인들은 테살리아의 데메트리아스 공략에 착수했다. 그들은 로마군이 계속 주둔한 것에 반감을 품은 데메트리아스 민중들의 호응에 힘입어 데메트리아스를 성공적으로 장악하고 로마군을 내쫓았다.(데메트리아스 공방전) 뒤이어 에우보이아의 칼키스 공략을 위해 파견된 아이톨리아 군인들은 칼키스 망명자들의 지원을 받아 도시에 진입하려 했지만, 칼키스의 이웃 도시들인 에레트리아와 카리스토스가 군대를 급파해 이를 저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제1차 칼키스 공방전)

그 해 여름, 아이톨리아인들은 로마에 맞서 스파르타를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스파르타의 참주 나비스는 아카이아 동맹에서 탈퇴하고 기테이온 항구를 장악했지만, 로마의 중재 제안을 받아들여 아카이아인들과 화해하려고 했다. 이에 아이톨리아 파견대는 나비스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구실로 스파르타로 진군한 뒤 합동 작전 중에 나비스를 살해하고 스파르타를 장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인들이 지도자를 살해한 것에 분노해 봉기를 일으켜 아이톨리아군을 모조리 죽이거나 사로잡아 노예로 팔아버리는 바람에 무산되었고, 이후 스파르타는 아카이아 동맹에 합류했다.(나비스의 암살)

한편, 로마 원로원은 데메트리아스가 아이톨리아군에 넘어갔다는 소식에 격분해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를 데메트리아스에 파견해 당장 철수하지 않으면 데메트리아스를 무력으로 탈환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아이톨리아인들은 로마가 데메트리아스 뿐만 아니라 자신들까지 무력으로 정복하려 들 거라 여기고, 안티오코스 3세에게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현재 그리스에서 유일한 친 셀레우코스 세력인 아이톨리아 동맹마저 로마에 넘어가게 내버려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리스로 건너가 직접 진군하기로 마음먹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안티오코스 3세는 이런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한니발에게 로마를 어떻게 상대할 지를 물었다. 한니발은 자신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충분한 경험을 쌓았다며, 10,000명의 정예병으로 카르타고로 가서 그곳을 장악한 뒤 이탈리아로 진군한다면, 로마는 자신을 두려워 해 셀레우코스 쪽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게 될 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이톨리아 동맹의 스트라테코스였고, 현재는 셀레우코스 제국과 아이톨리아 동맹 간의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토아스가 안티오코스 3세에게 진언했다.

"한니발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그를 카르타고에 보냈다간 로마를 상대로 승리한 뒤, 폐하와의 관계를 끊을 겁니다."

결국 안티오코스 3세는 한니발의 제안을 따르지 않기로 했다. 리비우스는 이에 대해 한니발의 계획은 매우 유용했지만 안티오코스 3세가 그의 위명을 질투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3.2. 안티오코스 3세의 그리스 상륙[편집]


기원전 192년 말, 안티오코스 3세는 보병 10,000명, 기병 500명, 전투 코끼리 6마리를 이끌고 데메트리아스에 상륙해 로마에 적대적인 의원들의 영접을 받고, 아이톨리아 동맹의 스트라테고스로 선출되었다. 그 후 안티오코스 3세는 칼키스를 동맹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3,000명의 병력을 칼키스로 먼저 보내고 나머지 군대를 이끌며 뒤를 따라갔다. 500명의 로마군 및 아카이아군이 칼키스를 구원하고자 이동했는데, 아카이아인들은 제 시간에 칼키스에 도착했지만 로마군은 한발 늦었고, 셀레우코스군은 에우리포스 운하 반대편에 있는 칼키스 소유의 요새를 점령했다. 뒤늦게 도착한 로마군은 에우보이아 섬의 다른 지역으로 건너갔지만, 셀레우코스군이 압도적인 숫자를 앞세워 공격하자 오래 버티지 못하고 대부분 죽거나 포로로 전락했으며 나머지는 칼키스로 퇴각했다. 이후 안티오코스 3세가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칼키스에 도착하자, 로마-아카이아 연합군과 친 로마파 정치인들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고, 칼키스 시는 안티오코스 3세에 항복했다.(제2차 칼키스 공방전)

하지만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주겠다는 안티오코스 3세의 주장에 지극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스에 남아있는 로마군은 얼마 되지 않았고 로마 정부로부터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의 부당한 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안티오코스 3세야말로 그리스를 정복하려고 여기에 왔다는 의심이 강했기에, 다들 그에게 가담하기를 꺼렸다. 다만 그리스 북부의 도시국가인 아타마니아의 국왕 아마닌드로스는 자신의 처남인 메갈로폴리스의 필리포스를 마케도니아의 국왕으로 등극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여겨 안티오코스 3세와 동맹을 맺었고, 엘리스는 아카이아 동맹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려면 안티오코스 3세를 도울 필요가 있다고 여기고 셀레우코스 제국 지지를 표명한 후, 1,000명의 셀레우코스 군인들을 도시 내부에 수용했다.

기원전 192/191년 겨울, 셀레우코스-아이톨리아 연합군은 로마 덕분에 마케도니아 왕국으로부터 독립했던 테살리아 동맹을 침공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테살리아의 도시 대다수를 공략했지만 라리사 공략은 악천후로 인해 실패하고 칼키스로 돌아갔다.(라리사 공방전) 그는 함대를 본토로 보내 추가 병력을 수송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그리스에 대한 자신의 애착을 보여주기 위해 칼키스 출신의 여인과 결혼했다. 한편, 로마 원로원은 안티오코스 3세가 그리스로 건너가서 군사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2개 로마 군단과 15,500명의 라틴 동맹군을 브루티움에 집결시킨 뒤 기원전 191년 봄에 아폴로니아로 파견했다. 이들의 지휘관인 마르쿠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는 로마 편에 선 마케도니아 국왕 필리포스 5세와 함께 테살리아 탈환 작전에 착수했다.

테살리아에 남겨진 셀레우코스군 수비대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테살리아의 북동쪽 지역은 탐필루스에게 빠르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필리포스 5세의 마케도니아군은 테살리아 서부의 펠린나 시에 자리잡은 아타마니아인들의 저항에 부딪쳤다. 이후 기원전 191년 집정관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가 1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건너와서 탐필루스의 군대와 합류한 뒤 펠린나 시로 가서 마케도니아군과 합류하자, 펠린나 시는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펠린나 공방전) 그 후 필리포스 5세는 아타마니아를 침공했고, 국왕 아마닌드로스는 저항을 포기한채 암브라시아로 망명했다. 또한 글라브리오는 테살리아 남부에 잔존한 셀레우코스군 수비대를 몰아내고 테살리아 전역을 탈환했다.


3.3. 테르모필레 전투[편집]


로마군과 마케도니아군이 테살리아 재장악에 착수하는 동안, 안티오코스 3세는 아카이아 동맹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아카이아 동맹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라이벌인 아이톨리아 동맹이 안티오코스 3세와 손잡은 것에 반감을 품고 그를 적대했다. 결국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안티오코스 3세는 칼키스로 돌아간 뒤 로마군에 대적할 채비에 착수했다. 여기에 10,000명의 셀레우코스군이 소아시아 해안가에서 함대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셀레우코스 함대가 로마-페르가몬-로도스 연합 함대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묶여 있기만 했다. 한편 아이톨리아 동맹 측은 필리포스 5세의 자국 영토 침공을 우려해 4,000명만 보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군이 30,000여 명인데 비해 전력이 미약한 것을 보고 회전을 벌이지 않기로 마음먹은 후, 테르모필레 협곡에 자리를 잡았다. 셀레우코스군은 테르모필레 동쪽 입구에 주둔했고, 아이톨리아 동맹군 2,000명은 협곡의 서쪽 입구인 헤라클레이아 시에 주둔했으며, 나머지는 산길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얼마 후, 글라브리오는 30,000명의 로마군을 이끌고 헤라클레이아 시 인근에 도착했다. 그는 아이톨리아군을 유인하기 위해 주변 지역을 황폐화시켰지만, 아이톨리아인들은 헤라클레이아에 계속 남았다. 이에 글라브리오는 일부 병력만 남겨서 헤라클레이아를 계속 포위하게 한 뒤, 본군을 이끌고 테르모필레 협곡으로 진격했다. 그러다가 안티오코스 3세 휘하의 셀레우코스군과 아이톨리아 동맹의 연합군이 협곡을 수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대 카토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에게 각각 2,000명의 분견대를 맡겨 우회로를 통해 적군의 후방으로 접근하도록 했다.

대 카토는 분견대를 이끌고 야밤에 신속하게 이동해 아이톨리아군 배후에 있었던 고지를 장악한 뒤 날이 밝자마자 아이톨리아군을 습격해 조기에 몰아냈다. 반면에 플라쿠스는 길을 좀처럼 찾지 못하고 헤매는 바람에 전투가 끝날 때까지 참여하지 못했다. 글라브리오는 두 개 분견대를 보낸 뒤 협곡을 막고 있는 셀레우코스군을 향해 공세를 개시했다. 셀레우코스군은 수적으로 열세했지만, 유리한 지형을 선점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버텼다. 그러나 대 카토가 우회로를 통해 후방으로 침투하자, 전의를 급격하게 상실하고 패주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500명 밖에 안 되는 병력만 수습하여 칼키스로 도주했고, 많은 병사들이 로마군에 사살되거나 생포되었다. 수천 명 가량의 셀레우코스군은 로마군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후퇴한 뒤 주군인 안티오코스 3세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안티오코스 3세는 그들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채 소아시아로 철수했다.

글라브리오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를 격파한 뒤 아이톨리아군이 주둔한 헤라클레이아 시를 공략한 후 포키스, 보이오티아, 에우보이아 등 여러 도시의 복종을 받아내고 그들을 온건하게 대했다. 다만 미네르바 성소에 안티오코스 3세의 동상을 세운 코로니 주민들에게는 무거운 벌금을 매겼다. 이후 아이톨리아 동맹쪽으로 눈길을 돌린 글라브리오는 나프팍토스 시를 포위 공격했다.(나프팍토스 공방전) 2개월 간의 포위전이 이어지던 중,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포위된 자들이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성벽 바로 앞에 걸어갔다. 성벽에 모인 나프팍토스의 군중들은 그에게

"우리를 구원해달라"

고 간청하기 시작했다. 플라미니누스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손짓했지만, 글라브리오에게 로마 공화국의 동맹인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가 그럴듯한 구실로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는 동안, 포위전에서 자신의 힘을 낭비할 가치가 없다고 설득했다. 글라브리오는 이에 설득되었고, 플라미니누스의 중재에 따라 나프팍토스 주민들과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글라브리오는 뒤이어 아이톨리아 동맹에게 안티오코스 3세와 동맹을 끊고, 로마의 보호를 받으라고 권고했으나 무산되자 라미아를 기습적으로 공략한 후 암피사를 포위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기원전 190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가 형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함께 13,000명 가량의 병력을 모아 발칸 반도로 넘어오자 그에게 임페리움을 넘기고 로마로 돌아갔다.


3.4. 코리코스 해전[편집]


글라브리오가 발칸 반도에서 안티오코스 3세와 아이톨리아 동맹을 밀어붙이는 동안, 로마 원로원은 셀레우코스군이 발칸 반도에 추가로 넘어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해상을 봉쇄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레가투스 가이우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에게 퀸퀘레메(quinquereme: 5개의 노를 갖춘 갤리선) 81척, 소형선 24척을 맡겨 에게 해로 파견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 해군이 페르가몬 해군과 합세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플리크세니다스에게 200척의 함선을 맡겼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제국의 함대는 해상전의 경험이 부족했으며, 70척만이 퀸퀘레메에 저항할 수 있는 대형선이고 나머지는 전투력이 부족한 소형선이었기 때문에 쉽사리 해상전을 벌일 수 없었다.

결국 폴리크세니다스는 로마 해군과 페르가몬 해군이 합세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그 대신 에페수스에 있는 해군 기지에 가까이 머물면서, 최근에 로마 사절단의 설득을 받아들여 로마와 동맹을 맺기로 한 로도스 함대가 살리나토르와 추가로 합류하는 것만은 막으려고 했다. 살리나토르는 에우메네스 2세가 파견한 페르가몬 해군과 합세하면서 105척의 퀸퀘레메와 소형선 50척을 갖췄다. 기원전 191년 가을, 그는 로도스 함대와 합세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다. 폴리크세니다스는 코리코스 앞바다에서 저지선을 구축했지만, 살리나토르는 코리코스 해전에서 셀레우코스 함대의 측면을 돌파해 23척의 적선을 파괴하고 저지선을 돌파했다.

그 후 폴리크세니다스는 에페수스 항구로 피신했고, 살리나토르는 로도스 함선들과 합세해 총 130척의 대형 함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해군이 에페수스의 방비를 굳건히 하고 한 발자국도 바다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공세는 하지 않고 로도스 함대에게 에페수스 봉쇄를 맡긴 후, 자신은 로마 및 페르가몬 함대와 함께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가서 로마군이 소아시아로 건너가는 것을 돕기로 했다. 한편, 안티오코스 3세는 코리코스 해전에서 아군의 함대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에페수스로 전령을 보내 폴리크세니다스에게 새로운 대형 선박을 대거 건조하라고 지시하고, 한니발 바르카에게 시리아와 페니키아에서 두 번째 함대를 모아서 에페수스에 고립된 셀레우코스 해군의 함대를 구원하라고 지시했다.


3.5. 에우리메돈 해전[편집]


기원전 190년 봄, 70척의 대형 함대를 구축한 폴리크세니다스는 로도스 함대 36척이 방심한 채 사모스 섬의 파노르모스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틈을 타 야습을 감행해 가까스로 탈출한 7척을 제외한 모든 선박을 파괴하거나 나포했다.(파노르모스 해전) 한편 로마 해군의 살리나토르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소아시아 해안에 있는 셀레우코스군의 기지인 아비도스 공략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다가 폴리크세니다스가 로도스 함대를 격멸했다는 소식을 접한 살리나토르는 다시 남쪽으로 항해했고, 셀레우코스 함대는 에페수스 항구로 이동했다. 당시 폴리크세니다스는 로도스 함대를 대거 빼앗은 덕분에 90척의 대형 함선을 갖췄지만, 로도스 측이 새 함선을 파견했기 때문에 로마 연합 함대가 120척의 대형 함선을 갖추게 되면서 여전히 수적으로 열세였다.

얼마 후, 신임 법무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길루스가 살리나토르로부터 임페리움을 인계받고 연합 함대를 이끌었다. 그는 처음에 셀레우코스 제국의 항구도시인 카리아와 리키아를 연이어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에우메네스 2세에게 페르가몬 함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장악하게 하고, 자신은 에페수스에서 농성하고 있는 셀레우코스 함대와 대치했다. 한편, 한니발은 노가 여러 개인 대형 선박을 최대한 끌어모아 셉티레메(septireme: 7개의 노를 갖춘 대형 선박) 3척, 헥싸레메(Hexareme: 6개의 노를 갖춘 대형 선박) 4척, 퀸퀘레메 30척, 3단노선 10척 등 총 47척의 함대를 이끌고 셀레우키아 피에리아 항구에서 출항하여 소아시아 남부 해안을 따라 항해해 에페수스에 고립된 셀레우코스 함대를 구하려고 했다.

명장 한니발이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도스 해군 사령관 에우다모스는 13척의 전함을 사모스 섬에 집결시킨 뒤 남하했다. 도중에 팜필리다스가 지휘하는 두 번째 로도스 함대가 합세하면서, 그들의 함대는 퀸퀘레메 34척, 3단노선 4척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파셀리스에 도착하여 한니발을 저지할 준비를 하다가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창궐한 전염병이 로도스 선원들에게까지 퍼지자 에우리메돈 강 어귀로 피신했다. 얼마 후, 시데에 도착한 한니발은 척후선을 통해 로도스 함대가 에우리메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을 무찌르고 북상하기로 했다. 로도스 함대 역시 아스펜도스 시의 시민들로부터 한니발 휘하의 셀레우코스 함대가 시데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해전을 준비했다.

기원전 190년 8월, 한니발이 이끄는 셀레우코스 함대와 로도스 함대가 격돌했다. 한니발은 함대를 절반으로 나눠서 자신은 바다쪽으로 향하는 편대를 이끌었고, 셀레우코스 귀족 아폴로니우스는 육지 쪽으로 향하는 편대를 지휘했다. 이에 맞서 싸우는 로도스 함대 측에서는 에우다모스가 해상 쪽으로 향하는 편대를 지휘했고, 팜필리다스는 중앙 편대를 지휘했으며, 에우다모스의 부관이었던 차리클레이토스는 육지 쪽으로 향하는 편대를 지휘했다. 전투가 막 시작되었을 때, 로도스 함대 사이에 혼선이 일어나면서 바다쪽 편대에 속한 6척의 선박 만이 한니발 편대 절반과 대적하면서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해상전 경험이 풍부한 로도스 선원들은 6척의 선박을 오른쪽으로 빠르게 조종해 나머지 함대가 뒤따라 교전할 수 있게 했다.

한편, 차리클레이토스가 이끄는 로도스 편대는 다이크플루스 전법[1]을 통해 셀레우코스 함대의 육상 편대를 공격했다. 그 결과 아폴로니우스의 함대 대부분은 심하게 손상되어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한니발은 그 동안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해 에우다모스의 해상 쪽 편대를 서서히 압도하고 있었지만, 아군이 패주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즉시 철수했다. 이 에우리메돈 해전에서 10척의 로도스 선박이 손상을 입었고, 셀레우코스 함대 1척이 나포되었으며, 20척이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한니발은 자신의 함대 대부분을 보존했지만 함선을 수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에페수스에 고립된 폴리크세니다스의 함대와 제 때에 합류할 수 없게 되었다.

3.6. 미오네소스 해전[편집]


한니발이 큰 손실을 입은 함대를 수리하기 위해 남쪽으로 물러난 후, 폴리크세니다스는 소아시아의 많은 폴리스들이 로마 편으로 꾸준히 가담하는 모습에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러던 기원전 190년 9월, 로마 함대 사령관 레길루스가 로마군이 소아시아로 진입하는 것을 돕기 위해 함대 일부를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파견했다. 여기에 로도스 함대도 수리가 필요한 함선들을 본국에 보내면서, 에페수스 봉쇄를 담당하는 로마-로도스 연합 함대의 숫자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폴리크세니다스는 이 기회에 적의 봉쇄를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폴리크세니다스가 지휘한 셀레우코스 함대의 전함은 89척인데 비해, 봉쇄를 수행하는 로마 함대의 전함은 58척, 로도스 함대의 함선은 22척이었다. 수적으로는 셀레우코스 함대 측이 다소 유리했지만, 선원들의 숙련도는 적군보다 많이 부족했다. 따라서 폴리크세니다스는 정면으로 해전을 벌이기보다는 기습을 선호했다. 그러던 중 레길루스가 셀레우코스 제국 측으로 붙은 테오스 섬을 징벌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폴리크세니다스는 테오스 섬 부근의 은신처에 매복했다가 적 함대가 테오스 섬의 좁은 북쪽 항구로 들어가려 할 때 기습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폴리크세니다스가 모르는 사이, 한 농민이 레길루스를 찾아와서 셀레우코스 해군이 테오스 섬 근처의 바다에 숨어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레길루스는 더 안전한 남쪽 항구로 빠르게 항해했다. 폴리크세니다스는 적이 예상과는 달리 남쪽 항구로 이동하자 즉시 추격했다. 로마-로도스 연합 함대는 미오네소스와 코리코스 반도 사이로 이동하는 동안 적의 맹렬한 추격을 받아 잠시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전투 대형을 갖춘 함대들이 버티는 사이, 다른 함대들이 해협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후 로마 함대의 오른쪽 측면이 셀레우코스 함대의 우측면을 공격하자, 수적으로 우월한 셀레우코스 전함들이 이들을 에워싸려고 했다. 당시 로도스 편대는 좌측면에 포진했고 셀레우코스 함대와의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아직 교전하지 않았다. 에우다모스는 로마의 우측 편대가 위급해진 것을 보고 부하들에게 연합 함대의 중앙 편대 후방을 지나쳐서 로마 우익 편대를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이로 인해 셀레우코스 우익 편대는 로도스 함대의 역습에 직면했다. 로도스 선원들은 불에 잘 타는 기름을 담은 통에 불을 질러서 적선에 내던지는 방식으로 공격해 셀레우코스 함대의 선원들에게 공포를 퍼트려서 물러서게 만들었다. 한편, 로마의 중앙 편대는 셀레우코스 중앙 편대를 성공적으로 돌파한 뒤 셀레우코스 함대의 우익 편대 후방을 요격했다. 폴리크세니다스는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아직 해전에 참여하지 않았던 셀레우코스 좌익 편대만 이끌고 철수했고, 나머지 함대는 궤멸되었다.

셀레우코스 함대는 미오네소스 해전에서 29척이 침몰하고 13척이 나포되는 참사를 겪었다. 반면 로마-로도스 연합 함대의 손실은 침몰 2척, 나포 1척에 불과했다. 폴리크세니다스는 남은 47척을 에페수스에 정박시켰고, 로마 해군은 에페수스 앞바다에서 무력 시위를 벌인 뒤 키오스로 가서 손상된 선박들을 수리했다. 이후 레길루스는 집정관 스키피오에게 에게 해를 완벽하게 통제했다는 소식을 전했고, 30척의 로마 선박과 로도스 함대를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보내 로마군을 수송하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로도스 함대는 카스텔로리조에서 한니발의 함대를 봉쇄했고, 레굴루스의 남은 로마 함대는 포카이아 공략에 성공했다.


3.7. 마그네시아 전투[편집]


미오네소스 해전의 승리로 에게 해의 패권이 로마에게 완전히 넘어간 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는 아이톨리아 동맹과 6개월 간의 휴전 협약을 체결한 후 로마군을 레길루스가 보낸 함대에 싣고 소아시아로 이동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갈수록 불리해지는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비티니아 왕국에 동맹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로마군에 사절을 보내 트라키아, 이오니아, 아이올리스에서 철수하며, 로마가 전쟁을 치르는 데 들인 비용의 절반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루키우스 스키피오는 타우루스 산맥까지의 모든 소아시아 영역을 포기하며,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안티오코스 3세에게 요구했다.

셀레우코스 왕실의 사절이었던 헤라클리데스는 루키우스 스키피오의 원정에 레가투스의 자격으로 동행하고 있었던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접근해,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생포된 그의 아들 루키우스를 몸값없이 석방하고, 스키피오 본인에게는 최대한 많은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스키피오는 아들을 석방한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면서도 돈을 받기를 거절하고, 대신 아래의 조언을 해주겠다고 대답했다.

"모든 조건에 동의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로마인과 싸우지 마시오. 왕이 우리 군대의 아시아 진출을 막지 못했고, 속박될 뿐만 아니라 안장에 얹혀진 지금, 동등한 조건으로 평화 제안을 하는 것은 실패로 끝날 것이며, 스스로에게 속는 짓이오."

그러나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의 요구가 지나치다고 여기고 전투를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기원전 190년 12월에 벌어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는 우익에 배치된 기병대를 이끌어 로마군 좌익을 빠르게 돌파하고 적의 진영을 향해 돌격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빠르게 수습한 뒤 진영 바로 앞에서 셀레우코스군의 기병대를 저지했다. 그 사이에, 에우메네스 2세가 이끄는 로마-페르가몬 연합군 우익 부대가 셀레우코스군의 좌익 부대를 완벽하게 붕괴시킨 뒤 중앙에서 로마 군단병들과 교전하고 있었던 셀레우코스군의 팔랑크스를 공격했다. 게다가 전투에 투입된 전투 코끼리들이 로마군 경보병들의 필룸 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도주하다가 셀레우코스군의 팔랑크스 진형을 흐트러뜨렸다. 결국 팔랑크스 부대는 궤멸되었고, 안티오코스 3세는 아파메이아로 도주해 잔여 병력을 수습했다.

그러나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16,000명에 달하는 팔랑크스가 전멸하는 참담한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전투를 이어가는 것은 무리였다.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인들에게 휴전을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500달란트와 인질 20명을 제공했다. 루키우스 스키피오는 이를 받아들였고, 양자는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은채 1년여 동안 평화 협상을 벌였다.


3.8. 전쟁 말기[편집]


마그네시아 전투가 벌어지던 무렵인 기원전 190년 12월, 아이톨리아 동맹은 6개월 간의 휴전 협약이 만료되자마자 공세를 재개해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가 아타마니아와 아이톨리아 동맹의 국경 도시들에 배치했던 수비대를 몰아내고, 아마닌드로스를 아타마니아 왕에 복위시켰다. 그러나 기원전 189년 봄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가 이끄는 로마군 35,000명이 아이톨리아로 접근한 데다가 마그네시아 전투의 참패 소식이 전해지자, 아이톨리아 동맹은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들은 노빌리오르에게 평화 협상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노빌리오르는 군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에 이를 뿌리치고 암브라키아를 포위했다.

그러나 많은 공성 무기를 동원하여 맹공을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암브라키아 수비대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공략에 실패하자, 노빌리오르는 아테네의 중재를 받아들여 아이톨리아 동맹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아이톨리아 동맹은 로마에 200달란트를 즉각 배상하고, 6년 이내에 300달란트를 추가로 지불하기로 했다. 또한 아이톨리아 동맹은 연합을 유지하는 대가로 로마인이 정복했거나 우호적인 동맹을 맺은 도시를 합병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리하여 암브라키아는 약탈을 받지 않아도 되었지만, 노빌리오르는 도시 안으로 들어가서 조각상과 그림 여러 점을 빼돌렸다.(암브라키아 공방전) 그 후 평화 협약이 적용되지 않은 케팔로니아 섬에 상륙해 사마 시를 4개월간 공격한 끝에 함락시키고 그곳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삼았다.(사마 공방전) 이에 케팔로니아 섬의 다른 도시들이 노빌리오르에게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복종했다. 그 후 다음 선거를 조직하기 위해 로마에 잠시 들린 노빌리오르는 뒤이어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방문해 스파르타와 아카이아 동맹으로부터 로마와 우호 관계를 이어가겠다는 약조를 얻어냈다.

한편, 루키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를 대신하여 소아시아의 로마군 지휘를 맡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는 소아시아에 부임하던 중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목표를 다른 곳에 두기로 했다. 이윽고 에페소스에 도착하여 루키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로부터 대략적인 현지 상황을 전해듣고 인수인계한 뒤, 병사들에게 안티오코스 3세와 동맹을 맺고 마그네시아 전투에 지원군을 보낸 켈트인들을 응징하기 위해 그들이 모여 사는 갈라티아를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만리우스 불소는 페르가몬 왕국과 연합한 뒤 소아시아 남서부 전체를 통과하며 각 도시로부터 배상금을 받았다. 이후 피시디아 지역으로 가서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이었던 셀레우코스 4세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았다. 그런 후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프리기아 남부의 키비라 시에 접근했다. 이 도시의 참주였던 모아게트는 15달란트의 뇌물을 건네 불소를 회유하려 했지만, 그는 500달란트를 요구하며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으면 모아게트의 모든 소유물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모아게트는 지속적으로 흥정을 벌인 끝에 100달란트만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그 후 키비라에서 북상한 불소는 갈라티아 서부에 있는 톨리스토보기족의 영토를 침공했다. 그는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고 페시노우스와 고르디온을 공략했다. 적군은 로마군을 피해 아내와 자식들을 올림푸스 산으로 피신시켜 그곳을 요새화했다. 그러나 불소는 3면에서 산을 협공해 큰 어려움 없이 적을 물리쳤다. 퀸투스 클라우디우스 콰드리가리우스에 따르면, 이 올림푸스 산 전투에서 최대 40,000명의 갈라티아인이 죽었다고 한다. 한편 발레리우스 안티아스는 10,000명이 죽었다고 했으며,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40,000명 가량의 갈라티아인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고 기록했다.

전투 3일 후, 앞서 로마에 복속 의사를 밝혔던 테크토사게스족의 부족장 에포소그나토스가 불소에게 앙카라 인근에서 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은밀히 노약자들을 할리스(크즐으르마크) 강 너머로 피신시키고 불소를 회담장에 유인한 뒤 암살하려고 했다. 별다른 의심 없이 소수의 기병대만을 대동하고 회담장으로 향하던 만리우스 불소는 갈라티아 기병대의 습격을 받고 죽을 뻔했지만 식량을 구하러 나섰던 로마군 병사들이 구원에 나선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 후 테크토사게스족은 마가바 산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또다른 부족인 타비온족과 연합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총 50,000명 가량의 갈라티아인들이 결집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은 적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 막대한 전리품을 확보했다. 갈라티아인들이 평화 협상을 요구하는 사절단을 보내오자, 그들을 에페소스로 보내 추가 협상을 하게 한 뒤 가을에 접어들자 군대를 겨울 숙영지로 이끌었다.(마가바 산 전투)

기원전 189년 말과 188년 초, 만리우스 불소는 에페소스에서 소아시아의 여러 공동체에서 보낸 사절단을 맞이했다. 그들은 갈라티아인을 물리친 불소에게 감사를 표하고 황금 화환을 선물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는 불소에게 2,500달란트의 배상금을 줬고, 카파도키아 왕국의 국왕 아리아라테스 4세는 지난날 안티오코스 3세를 지원하여 로마를 대적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600달란트를 바쳤다. 봄이 되자 페르가몬 왕국의 영토 내에 셀레우코스군이 유일하게 주둔하고 있었던 팜필리아로 로마군을 진격시켜 그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압박해 관철시켰다. 그 후 기원전 188년 여름, 안티오코스 3세와 로마 사절단 간의 아파메이아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4. 결과[편집]


파일:터키 갈라티아 4.png
기원전 188년 아파메이아 평화 협약으로 로마 공화국의 동맹인 페르가몬 왕국과 로도스를 중심으로 재편된 아나톨리아 반도

기원전 188년에 체결된 아파메이아 평화 협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1. 셀레우코스 제국은 트라키아와 타우루스 산맥까지의 소아시아를 포기한다. 다만 시리아와 직접 접해있는 킬리키아는 칼리카드노스 강까지 제국의 소유로 남는다.

2. 셀레우코스 제국은 로마 공화국의 동맹국에게 해를 끼치는 외교 정책을 벌일 수 없다.

3. 셀레우코스 제국은 로마 공화국에 은 15,000달란트를 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한다. 2,500달란트를 즉시 지불하고, 남은 돈은 12년 동안 나누어 지불한다.

4. 셀레우코스 함대는 10척으로 제한하며, 사르페돈 곶까지만 항해할 수 있다. 또한 전투 코끼리를 소유할 수 없으며, 갈라티아 용병을 고용할 수 없다.

5. 한니발 바르카 등 로마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인도하며, 안티오코스 3세의 막내 아들인 안티오코스를 로마에 인질로 보낸다.

6. 페르가몬 왕국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결정적인 기여를 한 점을 인정하여 리카오니아 전체, 프리기아, 무시아, 리디아, 이오니아, 시필루스, 카리아 지방, 마이안드로스 강 유역에 걸치는 소아시아 영토를 가진다.

7. 로도스는 해전에서 지대한 공헌을 한 점을 인정하여 리키아와 카리아 남부를 수여받는다.

8. 전쟁 이전이나 전쟁 중에 로마와 동맹을 맺은 소아시아 도시국가들은 독립을 유지한다.

이리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주요 영토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국 각지를 돌며 여러 신전들을 털어갔는데, 이로 인해 패전으로 뒤숭숭한 민심이 더욱 악화되었다. 여기에 기원전 210년 안티오코스 3세의 동방 원정 때 일시적으로 복종했던 아르메니아, 파르티아, 박트리아 등도 모두 독립을 선포했다. 이에 안티오코스 3세는 다시 동방 원정을 떠나기로 하고, 기원전 187년 원정군을 꾸려 셀레우키아를 출발했지만, 자그로스 산맥의 바알 신전을 약탈하던 중 암살자의 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이후 그의 후계자들인 셀레우코스 4세안티오코스 4세는 제국의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했지만, 안티오코스 4세의 사후에 벌어진 내전이 장기화되면서 셀레우코스 제국은 급격하게 쇠락했다.

반면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 2세는 로마 공화국이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소아시아 영토 대부분을 뜯어낸 뒤 자신들에게 넘겨준 덕분에 소아시아의 최강국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비티니아 왕국의 국왕 프루시아스 1세는 페르가몬 왕국과 적대 관계를 형성하는 한편, 한니발 바르카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한니발은 훗날 로마군에 대항하여 자신의 군대를 육성할 수 있도록 비티니아군을 강화시키기로 마음먹은 후, 프루시아스 1세가 이웃 왕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한니발은 해군을 이끌고 페르가몬 왕국의 함대와 교전했다. 그는 모든 종류의 파충류들로 가득찬 도자기 그릇들을 페르가몬측 전함에 던져 적을 혼란에 빠뜨린 뒤 맹공을 퍼부어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에우메네스 2세는 로마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며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기원전 181년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이끄는 로마 사절단은 비티니아에 방문해 양국의 분쟁을 해결했다. 이때 플라미니누스는 한니발이 아직 살아있는 것에 분노하여 로마에게 가장 큰 해악을 끼친 숙적을 은닉한 것에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결국 비티니아 왕은 로마인들에게 한니발을 넘겨주기로 했고, 한니발은 자신을 잡으러 사람이 왔다는 걸 알게 되자 평소 소지하고 있었던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한편, 그리스의 아카이아 동맹은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에 참전한 결과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통일을 완성했고, 로마에 굴복한 아이톨리아 동맹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동맹들은 로마가 구축한 체제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외교 정책을 독자적으로 수립하는데 많은 장애가 있었다. 이후 로마의 간섭이 갈수록 심해지자 두 세력 모두 로마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훗날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하자 로마군에 맞서 싸우는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의 국왕 페르세우스를 은밀히 지원했다. 로마는 이 일에 경각심을 품고, 그리스를 향한 전쟁을 지속적으로 감행해 모조리 복속시킨 뒤 직접 지배 방식으로 전환했다.

5. 주요 전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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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iekplous: 일렬로 늘어서서 적 선박 사이의 틈새를 돌파하면서 적선의 측면과 후미를 공격하는 전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