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 알 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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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 알 사이드
نوري السعيد


파일:Nuri_al-Said_Photo.jpg

이름
누리 알 사이드
출생
1888년 12월
오스만령 이라크 바그다드
사망
1958년 7월 15일 (향년 69세)
아랍 연방 바그다드
정당
언약당, 입헌통합당

1. 개요
2. 생애
3. 젊은 시절
4. 총리가 되다



1. 개요[편집]


누리 알 사이드는 이라크의 정치인이자 무려 8번이나 이라크의 총리를 지낸 정치인이다.

2. 생애[편집]



3. 젊은 시절[편집]


누리는 1888년 12월, 북 카캅스에서 터키로 이민 한 체첸인 혈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터키에서 보냈고, 1906년 이스탄불 군사 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참모 장교 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군사 장교 생활을 시작했고, 1912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하였고, 자파르 알 아스카리 장군 지휘하의 게릴라 작전을 펼쳤으며, 1915년에는 영국군을 상대로 싸웠다.

하지만 이후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혀, 아랍 봉기당시 전향하여, 파이살 1세휘하에서 싸웠다. 이후에는 잠시동안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한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의 운전사가 되었다. 이후에는 파이살 1세휘하에서 있었던 다른 사람들처럼, 새로운 정치 엘리트가 되었다.
파일:FeisalPartyAtVersaillesCopy.jpg
파리 강화 회의 당시 파이살 1세 대표단[1]

4. 총리가 되다[편집]


누리는 1930년 영국에 위임을 받아 총리로 처음 임명된 이후 하심 가문하에서 이라크의 주요 정치인이였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오늘날 이라크 국가를 형성한 주요 정책 결정에 관여하였다. 1930년 그의 첫 임기 동안 그는 영국-이라크 통행권 조약에 서명했는데, 이는 영국의 군대를 이라크에 주둔시키고 군대가 이라크를 통과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권리를 부여하고 영국의 통제권을 합법화했다.[2]

이 조약은 명목상 이라크 내정에 대한 영국의 개입을 어느정도 줄였지만, 이 조약은 이라크가 영국의 경제적 또는 군사적 이해관계와 충돌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졌다. 이 협정은 위임통치령이 1932년에 막을 내림에 따라 명목상으로 이라크 왕국의 독립으로 이어졌다. 당시 이라크는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와 같은 반 영국, 민족주의를 외치는 정치인들과 국민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누리는 반대로 영국의 이라크에 더욱 개입을 유리하게 하는 정책을 펼치는 등등, 그래서 국민들의 지지가 매우 낮았다.

친영국 정책떼문에 적이 너무 많았던 누리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었고 한번은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의 쿠데타 떼문에 탈출, 두번째는, 압둘 카림 카심쿠데타 떼문에 이라크를 탈출해야 했다[3]. 1958년 군주제가 전복되었을 때, 그는 차대 총리감으로 매우 인기가 없었다. 친영국적인 그의 정책은 이라크의 변화된 사회 상황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라크 빈곤과 사회적 불의가 만연했고 누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부유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탄압의 길을 택한 정권의 상징이 되었다.

이후 7.14 혁명 다음 날인 1958년 7월 15일, 그는 여장을 하고 탈출을 시도했으나 반군에게 들켜버려 총에 맞아 피살당했다. 그는 매장되었으나 성난 이라크인들은 그의 시체를 꺼내 목을 매달고 토막을 쳤으며, 끝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버스에 묶어 바그다드 거리에 끌고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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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루스탐 하이다르 이라크 왕국 경제 장관, 누리 알 사이드, 파이살 1세,
로사리오 피사니 프랑스군 대위(파이살 1세 뒤),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영국군 대령, 미확인 (파이살 1세의 노예로 추정), 타신 카드리 대위.)
[2] 심지어 이때 영국은 기름까지 뺏어갔다.[3] 하지만 이때는 실패하여 피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