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 앗 딘 마흐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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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알레포의 아타베그
2.3. 다마스쿠스 정복
2.4. 시르쿠의 출정과 이집트 정복
2.5. 살라흐 앗 딘과의 갈등과 최후
3. 평가



1. 개요[편집]


장기 왕조의 군주.

십자군 전쟁 시기에 활약한 것으로 유명한 이슬람 군주이다. 아버지인 이마드 앗 딘 장기의 사후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장기 왕조의 새로운 군주로 군림했다. 훗날 그의 뒤를 이어 집권한 살라흐 앗 딘이 "살라딘"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듯이, 누르 앗 딘 또한 유럽권에서는 일명 "누레딘"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장기 왕조의 혼란을 수습하며 많은 업적을 세웠다. 십자군 국가 중 하나였던 안티오키아 공국의 공작 푸아티에의 레몽과 싸워 그를 전사시켰고, 아버지가 평생 동안 노렸으나 끝내 얻지 못했던 다마스쿠스를 평화적으로 정복하였으며, 최후에는 심복인 명장 시르쿠의 활약에 힘입어 이집트파티마 왕조까지 정복함으로써 거대한 세력권을 거느리게 되었다. 말년에 시르쿠의 조카였던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일으킬 기미를 보이자 이를 진압하려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2. 생애[편집]



2.1. 알레포의 아타베그[편집]


누르 앗 딘은 이마드 앗 딘 장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기록이 거의 없으며, 아버지인 장기가 죽은 후에야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에 학자와 신자들과의 토론을 즐겼고, 이슬람의 교리를 엄격히 준수하는 등 바른 성품으로 유명했다. 외모는 얼굴이 거무스레했고 이마가 넓었으며 수염이 적은 편이었는데 눈빛은 인자하여 근엄한 분위기를 풍겼다고 한다.

1146년 9월, 장기가 자바르 성을 공략하던 중 진중에서 암살당하자 그 영토는 분할되어 장기의 장남인 사이프 앗 딘 가지는 이라크의 모술을 차지했고, 차남인 누르 앗 딘은 시리아의 알레포와 에데사를 차지했다. 그 직후에 누르 앗 딘은 안티오키아 공국을 공격했다.

그해 10월, 조슬랭 2세에데사 백국의 옛 영토를 급습하여 점령하였다. 그러자 11월, 누르 앗 딘은 군사를 거느리고 역공을 가하여 조슬랭 2세의 군대를 몰아내 에데사를 다시 정복했다. 당시 에데사에 살던 아르메니아 기독교도들이 조슬랭 2세와 내통하여 그가 에데사를 점령하는 것을 도운 일이 있었는데, 이에 분노한 누르 앗 딘은 에데사의 기독교도들을 학살했으며 아녀자들은 노예로 팔아버렸다.

1147년, 누르 앗 딘은 십자군 국가들의 위협을 막기 위해 다마스쿠스의 아타베그이자 아버지의 오랜 라이벌이었던 무인 앗 딘 우누르와 동맹을 맺었고 그 징표로 우누르의 딸과 혼인했다. 그 해에 누르 앗 딘은 안티오키아 공국을 공격하여 여러 도시를 빼앗았다.


2.2. 제2차 십자군 원정[편집]


한편 유럽에서는 장기가 에데사 백국을 멸망시켰다는 소식에 에데사 탈환을 목표로 하는 제2차 십자군이 조직되고 있었다. 이 원정에는 유럽 제일의 강대국이었던 프랑스의 국왕 루이 7세와 그의 아내인 아키텐의 여공작 엘레오노르,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콘라트 3세 등의 쟁쟁한 군주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러나 1147년 10월, 콘라트 3세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니케아에 상륙한 후 프랑스군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으로 안티오키아를 향해 진군하던 중 도릴라이움에서 튀르크 군대에게 포위당해 대패를 당했다. 마찬가지로 1148년 초, 육로를 통해 안티오키아로 진격하던 프랑스 군대 또한 라오디케아에서 튀르크 군대의 공격을 받아 거의 몰살당했다. 따로 동로마 함대를 고용해 해로로 이동하던 루이 7세가 막상 안티오크에 상륙하자 프랑스 군대는 전멸하여 극히 일부만 안티오키아에 도착했을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본래의 목표였던 에데사의 탈환은 물건너갈 판이었다.

당시 안티오키아의 공작이었던 푸아티에의 레몽은 루이 7세에게 알레포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기가 죽은 후 그 세력이 분할되었고 알레포 만을 다스렸던 누르 앗 딘의 세력은 알레포는 물론 모술까지 지배했던 아버지의 힘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경건한 성격의 루이 7세는 경박한 성격의 레몽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루이 7세의 아내 엘레오노르는 레몽의 주장 대로 알레포를 공격하지 않겠다면 이혼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분노한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를 연금한 후 안티오키아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했다. 그 곳에서 루이 7세는 용병을 고용해 군세를 회복한 콘라트 3세와 합류했고, 프로방스에서 소집된 프랑스의 십자군까지 합류하였다.

1148년 6월 24일, 루이 7세와 콘라트 3세는 아크레에서 예루살렘의 귀족과 성직자들을 소집함으로써 십자군 사상 최대의 규모를 갖춘 연합군을 결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다음의 공격 대상을 걸정해야 했는데, 본래의 탈환 목표였던 에데사는 거론되지 않았다. 에데사를 차지한 누르 앗 딘의 본거지인 알레포를 공격하는 방안도 있었으나 이미 그 문제로 레몽과 다투고 아내와 파혼까지 하게 된 루이 7세는 이를 거부했다. 이들은 엉뚱하게도 예루살렘 왕국의 우방이었던 다마스쿠스를 공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다마스쿠스가 예루살렘과 누르 앗 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고, 더욱이 얼마전에 다마스쿠스의 아타베그 우누르가 자신의 딸을 누르 앗 딘과 혼인시켰다는 점 때문에 이들을 의심하는 여론이 거세졌기 때문이다. 그들 딴에는 다마스쿠스가 누르 앗 딘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이를 점령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해 7월 24일, 십자군은 다마스쿠스를 공격했으나 수풀과 나무가 우거진 곳에 숨어있던 복병들의 공격을 받았다. 싸움이 길어지자 십자군은 어리석게도 물과 그늘이 있는 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진지를 옮겼으나 당연하게도 군사들은 갈증과 더위에 시달렸다. 십자군 지휘부는 뒤늦게 후회하곤 처음에 진을 쳤던 곳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때마침 군대를 거느리고 나타난 누르 앗 딘과 그의 형인 사이프가 길목을 막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로 시작되었던 2차 십자군은 망신과 굴욕만을 남긴채 물러나야 했고, 예루살렘 왕국와 다마스쿠스의 우호 관계만 파탄나고 말았다. 패전의 망신 속에 루이 7세 등의 십자군 지도자들도 하나 둘 안티오키아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그렇게 2차 십자군이 와해된 후인 1149년 6월, 레몽은 아사신 세력과 손을 잡고 누르 앗 딘의 본거지인 알레포를 공격하려 했으나 이나브 요새에서 누르 앗 딘에게 패하여 살해당했다. 레몽의 머리는 은상자에 삼겨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보내졌다.


2.3. 다마스쿠스 정복[편집]


1149년 11월, 누르 앗 딘의 형인 사이프 앗 딘 가지가 사망하자 동생인 쿠틉 앗 딘 마우두드가 뒤를 이어 모술의 에미르가 되었다. 쿠틉은 형인 누르 앗 딘과 화해하며 그에게 복종했고 모술은 사실상 누르 앗 딘의 세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누르 앗 딘은 옛 장기 왕조의 영토였던 모술과 알레포 및 에데사 등을 하나의 세력권으로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쿠틉은 누르 앗 딘이 이끈 여러 군사원정에 참전하여 형을 도왔다.

한편 그해 8월에 오랜 세월 동안 다마스쿠스를 수호하던 우누르가 죽고 전임자인 마흐무드의 아들 무지르가 뒤를 이어 아타베그가 되었다.[1] 강력했던 우누르의 사후에 다마스쿠스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심약한 무지르는 군사적인 보호를 받기 위해 십자군들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쳤다. 이로 인해 다마스쿠스의 민심은 점차 무지르를 떠나기 시작했다.

누르 앗 딘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1150년에 다마스쿠스를 포위하였으나 그들로부터 복종의 맹세를 받았을 뿐 아무런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다마스쿠스의 민심을 공략했다. 이 해에 누르 앗 딘은 에데사의 백작이었던 조슬랭 2세를 사로잡아 그를 맹인으로 만든 후 그를 종신토록 알레포에 감금했다. 조슬랭은 결국 죽을때까지 석방되지 못했다.[2] 이듬해인 1151년에도 누르 앗 딘을 다마스쿠스를 포위했으나 공격하지 않았다.

1154년 4월, 무지르의 심복인 나짐 앗 딘 아이유브[3]가 누르 앗 딘의 휘하에 있던 자신의 동생 시르쿠와 협상을 맺었고 마침내 누르 앗 딘은 다마스쿠스에 무혈입성하게 되었다. 이는 위대한 정복자로 칭송받았던 아버지 장기도 이뤄내지 못한 쾌거였다. 그 보상으로 아이유브는 다마스쿠스의 아타베그에 임명되었다.

2.4. 시르쿠의 출정과 이집트 정복[편집]


1163년, 이집트파티마 왕조의 와지르(재상)였던 샤와르가 디르감과의 정쟁에서 패한 후 누르 앗 딘에게 망명하였다. 샤와르는 누르 앗 딘에게 자신의 와지르 직위를 회복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정작 누르 앗 딘은 이 문제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예루살렘 왕국의 아모리 1세가 카이로를 노리고 있음을 알게 되자 누르 앗 딘의 마음도 바뀌었다. 허약해진 이집트가 아모리 1세의 손에 넘어가는 사태를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하여 샤와르는 자신이 다시 정권을 회복하게 되다면 막대한 액수의 세액을 바칠 것을 약속했고, 누르 앗 딘의 심복인 용맹한 시르쿠 또한 이집트 원정을 재촉했다.

1164년 4월, 마침내 누르 앗 딘과 시르쿠는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방향으로 출정했다. 누르 앗 딘이 팔레스타인 북부로 진격하여 아모리 1세와 예루살렘 군대의 관심을 끄는 동안 시르쿠는 신속하게 이집트의 카이로로 진격하여 디르감을 제거하고 다시 샤와르를 와지르에 앉혔다. 그러나 시르쿠의 군사력에 겁을 먹은 샤와르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도리어 시르쿠를 이집트에서 추방한 후 그해 7월에 아모리 1세와 작당하여 그를 빌베이스에서 포위하였다.

누르 앗 딘은 포위당한 시르쿠를 구하기 위해 십자군의 후방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에 따라 누르 앗 딘은 군대를 거느리고 안티오키아의 하림 요새를 포위했다. 이 전투에서 누르 앗 딘은 하림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3세,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 등의 연합군을 격파하여 이들을 포로로 잡았을 뿐 아니라 하림까지 함락시켰다.[4] 이 소식을 들은 아모리 1세는 철군할 수 밖에 없었고, 그해 10월에 시르쿠와 협상을 맺어 동시에 이집트를 떠났다. 이후 샤와르는 누르 앗 딘과 시르쿠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아모리 1세와 동맹을 맺었다.

1166년, 시르쿠가 다시 이집트를 침공하자 이듬해인 1167년, 아모리 1세 또한 이집트로 출정하여 시르쿠와 맞섰다.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가 이를 중재하자 두 사람은 조약을 채결했고, 십자군은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를 점령했다.

1168년 10월, 샤와르가 십자군에게 바치는 막대한 연공 때문에 이집트 내에서도 여론이 악회되자 아모리 1세는 다시 이집트를 침공했다. 보다 못한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 알 아디드가 누르 앗 딘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이듬해인 1169년 초에 시르쿠는 누르 앗 딘의 명을 받아 세번째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이 싸움에서 시르쿠는 아모리 1세를 격퇴하고 누르 앗 딘은 이집트를 장악하게 되었다. 여러번 누르 앗 딘과 시르쿠를 통수쳤던 샤와르는 결국 처형당했고, 그 해에 시르쿠는 이집트의 와지르가 되어 인생의 절정기를 누렸으나 그해 3월에 식중독으로 급사했다. 당시 그를 따라 이집트 원정에 종군했던 시르쿠의 조카 살라흐 앗 딘이 뒤를 이어 와지르가 되어 이집트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누르 앗 딘은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의 와지르가 된 것을 축하했으며, 또한 그를 이집트 주둔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2.5. 살라흐 앗 딘과의 갈등과 최후[편집]


1170년, 그 동안 모술을 지배해왔던 누르 앗 딘의 동생인 쿠틉 앗 딘 마우두드가 사망했다. 쿠틉은 비록 형식상으로 누르 앗 딘에게 복종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모술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쥐고 있었다. 누르 앗 딘은 그런 동생이 사라지자 조카인 시아프 앗 딘 가지 2세에게 명목상으로 모술의 지배권을 주었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모두 자신이 차지했다.

이 해에 이르러 살라흐 앗 딘 또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집트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불안하다고 생각했던 그는 자신의 친족들을 이집트로 불러들여 자신을 도와줄 것을 청했다. 이때 그의 아버지인 아이유브도 살라흐 앗 딘에게 합류했다.[5] 이처럼 살라흐 앗 딘은 점차 이집트 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작업에 착수했고 그 과정에서 내시장 네자흐를 비롯한 자신의 반대세력들을 숙청해나갔다.

1171년, 마침내 이집트의 실권을 거의 장악한 살라흐 앗 딘은 파티마 왕조의 시아파 신앙을 수니파 신앙으로 교체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그에 따라 파티마 왕조 내에서도 수니파 종교 교육이 실시되기 시작했고, 이 소식을 들은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몹시 기뻐하며 누르 앗 딘에게 예복과 아바스 왕조를 상징하는 검은 기를 비롯한 선물을 건네주었다. 물론 살라흐 앗 딘 또한 이런 선물을 받았다. 이는 시아파 신앙을 대표했던 파티마의 칼리프 알 아디드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이었으나, 이때 알 아디드는 병석에 누워 사경을 헤메고 있었기 때문에 살라흐 앗 딘이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한채 2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6] 알 아디드의 죽음과 함께 파티마 왕조의 수도인 카이로는 살라흐 앗 딘의 수중에 들어가 파티마 왕조는 사실상 철폐되었고 그 왕족들은 남녀로 구분되어 엄격한 감시하에 수용되어 여생을 보내야 했다.

이처럼 살라흐 앗 딘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누르 앗 딘은 점차 살라흐 앗 딘에 대한 의심을 키워나갔다. 더욱이 1173년에는 누르 앗 딘과 살라흐 앗 딘의 사이를 중재해주던 살라흐 앗 딘의 아버지 나짐 앗 딘 아이유브가 낙마 사고로 사망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급기야 누르 앗 딘이 살라흐 앗 딘의 위세를 꺾고 그를 이집트에서 축출하기 위해 군대를 모으기 시작하면서 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로서는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일으키고 있다고 의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인 1174년 5월 15일, 누르 앗 딘은 56세의 나이로 갑자기 발병한 후두염으로 사망했다. 아무리 그의 나이가 50대 고령이었다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는데, 그도 그럴듯이 그는 불과 몇 일 전만 하더라도 측근들과 함께 말을 달리며 인생의 불확실함에 대한 철학적 토론을 나눌 정도로 건강했기 때문이다.

누르 앗 딘의 사후에 그의 지위를 계승한 후계자는 불과 11세에 불과한 어린 아들 앗 살리흐 이스마일이었다. 강력한 군주인 누르 앗 딘이 갑자기 사라지고 어린 술탄이 등장하자 장기 왕조는 급격히 분열되어 쇠퇴하기 시작했다. 살라흐 앗 딘은 이런 혼란을 틈타 1174년에는 다마스쿠스에 입성하며 스스로를 이스마일의 섭정이라 자처했으며 1175년에는 누르 앗 딘의 조카인 모술의 시아프 앗 딘 가지를 격파했고 1176년에는 누르 앗 딘의 미망인[7]과 혼인하여 시리아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1181년에 이스마일이 어린 나이로 요절하고 그 사촌인 이마드 앗 딘 장기 2세가 뒤를 이어 알레포를 차지했으나 그 또한 1183년에 죽었고 결국 알레포 마저 살라흐 앗 딘의 손에 넘어갔다. 이렇게 해서 장기 왕조는 사실상 망했으나 누르 앗 딘의 바람대로 레반트와 이집트에 걸쳐 십자군에 대항할 이슬람 통일 정권이 구축되었다. 장기 왕조의 잔당들은 누르 앗 딘의 형이 상속받았던 모술과 이라크 북부에서 아이유브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3. 평가[편집]


누르 앗 딘은 술탄으로서 백성들에게 공정과 자비를 베풀었으며 신앙심 또한 깊었기에 세간으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이 점은 지나치게 엄격하고 무자비한 성격 때문에 부하의 손에 암살당한 아버지 장기와는 대비된다. 그에 대해 존경심을 표한 사람들 중에는 무슬림들 뿐 아니라 십자군들도 있었다. 티루스의 윌리엄은 누르 앗 딘에 대해 "누라디누스는 공정하고 슬기로우며 신실한 군주였다"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평소의 생활상도 공정하고 법정에 출두할 일이 있다면 일반 백성들과 같은 방식으로 질의에 응답했으며 군주로서의 예우도 거절했다.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에 대해서는 세금을 줄이고 공금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았기에 거대한 세력을 거느린 군주였음에도 매우 검소했다.

그는 단순히 선정을 베푸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행정에서도 재능을 발휘하여 성채, 대학, 수도원, 병원 등의 시설을 짓는데 많은 투자를 했으며 휘하에 거느린 봉건 군대를 세심하게 관리했고, 장수들의 봉토를 세습화하여 분배하는 한편 각각의 봉신들이 언제든 자신의 부름에 응할 수 있도록 인명과 무기대장 또한 꼼꼼하게 정리했다.

군사적 능력 또한 아버지인 이마드 앗 딘 장기에 뒤지지 않아서 그는 다른 무슬림 세력과 십자군 국가들을 상대로 수 차례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전략적인 능력은 여러 전투에서 검증되었는데, 겉으로는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는 척 하면서 시르쿠가 이집트를 공략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고, 또한 시르쿠가 십자군들에게 포위당하자 이를 구원하기 위해 안티오키아를 공격하여 아모리 1세에게 철군을 강요했던 것이 그 예이다. 전사로서도 뛰어나서 전투에 나서면 선봉에 나서기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개인적인 용맹함 또한 충만했다.

아버지인 이마드 앗 딘 장기의 사후에 분열된 장기 왕조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된 이슬람 정권을 구축하여 훗날 십자군에 대항할 발판을 만든 것 또한 그의 중요한 업적이었다. 비록 그의 사후에 장기 왕조가 유력한 후계자를 내지 못하고 급속도로 쇠퇴하여 살라흐 앗 딘의 아이유브 왕조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으나 그 또한 누르 앗 딘이 쌓아올린 성과에 기초한 바가 적지 않았다.
[1] 우누르도 처음에는 다마스쿠스를 통치하던 부리의 신하였다. 부리가 죽은 후 그 아들인 마흐무드마저 살해당하자 우누르가 일종의 섭정으로서 다마스쿠스를 통치해왔던 것이다.[2] 조슬랭 2세는 옥중에서 9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1159년에 죽었다.[3] 시르쿠의 형이자 살라흐 앗 딘의 아버지이다. 과거에 누르 앗 딘의 아버지 장기가 그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진 후 그를 등용했으나 다마스쿠스의 포로가 되어 그 곳에서 관직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4] 이때 누르 앗 딘에게 포로로 잡혀 알레포의 감옥에 수감된 레몽 3세는 그 곳에서 이슬람의 문화를 익혔고 특히 아라비아어를 공부해서 출소한 후에는 이슬람 교도들의 내부 정황과 전략을 잘 이해하는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그는 훗날 살라흐 앗 딘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당시에 자신의 식견을 잘 살려서 예루살렘 국왕인 기에게 조언을 했으나 어리석은 기는 이를 무시하고 무모한 작전을 고집했다. 결국 기가 하틴의 뿔 전투에서 참패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당하자 레몽은 화병에 걸려 숨지고 만다.[5] 살라흐 앗 딘은 자신의 이집트 와지르의 직위를 아버지에게 건네줄 것을 제안했으나, 아이유브는 아들이 잡은 행운을 가로채고 싶지 않다고 거절하며 대신 재무상의 직위에 만족했다.[6] 살라흐 앗 딘은 다 죽어가던 파티마의 칼리프가 면담을 요청하자 자신을 해치려는 음모가 있다고 의심해 거절했으나, 파티마의 칼리프가 죽은 후에야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찾았음을 알게 되자 뒤늦게 후회했다고 한다.[7] 앞서 언급한 우누르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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