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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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노동운동의 역사를 나라별 및 지역별로 나누어 소개하는 문서이다.

참고로 이 문서에서 소개될 노동운동의 역사는 대부분이 근대 이후이다. 왜냐하면 본격적인 노동운동의 시작은 자본주의산업혁명이 도래한 19세기부터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들어서 비로소 노동자자본가의 계급이 형성되었고 이들 간의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노동운동이 발호하였다. 노동운동은 공장이 세워지고 노사관계가 확립된 모든 지역으로 파급되어 노동자 혹은 지식인, 학생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또한 노동자들에 의해 노동조합이 건설되어 노동운동의 조직성과 활동성이 커졌다. 여기에 대해 국가와 자본은 극렬한 탄압을 가했고, 노동자들은 여기에 대응하여 치열한 노동운동을 벌여야 했다. 그러므로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자들의 조직과 투쟁, 그리고 국가와 자본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으로 요약할 수 있다.


2. 대한민국[편집]




2.1. 구한말 ~ 일제강점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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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밀대에서 농성 중인 노동운동가 강주룡
원산 총파업 당시 집결한 한인노동자들

(황해도 옹진군 암기농장의) 여공의 생활은 실로 참담합니다. 임금은 불과 이십전 내지 사십전입니다. 아침에 출근이 좀 늦으면 오전씩 벌금을 받고, 점심 시간에 좀 늦으면 십전, 코를 한번 잘못 풀어도 오전 내지 십전, 너무 곤하여 잠깐 조는데도 으레 십오전씩... 어떠한 때에는 임금보다 벌금이 많게 되어... 더 심하면 구타까지도 능사로 하여 온다 합니다.

동아일보 1927년 10월 21일자


우리는 결속력으로 대항할 것이요, 결코 완력으로써 맹동하지 말 것. 방금 우리는 금주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쟁의를 핑계로 음주하지 말 것. 우리는 항상 규율을 정연하게 하여 진용을 문란하게 하지 말 것. 식료품, 기타 생활비를 가급적 절약하여 지구전에 대비할 것. 일시 명동으로 인하여 무의미한 희생을 않도록 할 것.

원산 총파업 당시의 행동 지침


경성 트로이카경성 콤그룹은 독립운동 단체로만 유명하지만 사실 선진적인 노동운동 단체이기도 했다.

처음 1~2년은 식사만 제공받을 뿐 무보수로 18~19시간 혹사당하며 (중략)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한달에 한번밖에 외출할 수 없고 외출할 때는 감독자가 따라 나간다. (중략) 그녀들은 언제나 80도 이상의 더운 곳에서 일하며 바람이 통할 구멍조차도 없는 곳에서 혹사되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알기 힘들지만 나의 경험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알고 있었던 5년 이상의 직공 8명 중에서 지금은 단지 2명밖에 있지 않고 6명은 모두 죽었던 것이다! 내가 일찍이 죽어야 할 사람만을 알았던가?

이재유가 묘사한 당시 여성 노동자의 노동환경


① 민족적 계급적 정치적 투쟁의 자유

② 파업 농민의 행동에 대한 경찰 군대의 탄압 반대, 파업 농민투쟁의 자유, 노조 농조 기타 모든 근로자 조직에 대한 무제한의 자유, 부르조아지주에 대한 노동자 농민 투쟁에 조정제도를 적용하는 것과 관헌 재판소 경찰 등이 간섭하는 것 반대.

③ 모든 사형제도의 철폐.

특히 정치범에 대한 사형 절대반대.

경찰횡포에 의한 모든 희생자와 정치범의 즉각 석방.

치안유지법, 출판법, 제령 제7호, 폭력행위취체법 철폐.

④ 근로자의 출판집회언론 등의 무제한의 자유.

정치적 대중집회와 데모의 완전자유, 모든 경영내에서 경영위원회를 창립할 자유, 경영위원회의 승인.

프롤레타리아 자위단의 창설.

⑤ 소작료 지불의 거절, 지주 부르조아에 의한 농민수탈반대.

지주 고리대금업자 은행 크러스트 금융조합에 대한 농민의 모든 차금의 전멸.

잡세 지불거부, 수리조합비 지불거부.

⑥ 노동자 농민을 탄압하는 모든 법령의 철폐.

형평사에 대한 진정한 동정, 부인의 완전한 평등권, 모든 민족적 차별의 철폐.

⑦ 반노예적 농노조건 반대.

기숙사제적 속박 반대[1]

.

노동자 및 청년에 대한 노예제도의 낡은 형태인 년기계약제의 반대[2]

.

부인, 청년의 이중착취반대.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부인아동의 공연 은묵의 매매제에 대한 형벌

⑧ 부르조아적 산업합리화 반대

성인에 대한 하루 7시간 노동제

16세 미만의 소년에 대한 4시간 노동제

18세 미만의 청년에 대한 6시간 노동제

유년노동금지

1주 40시간제

1주 1회의 임금 전액 지불의 휴일과 1년 1회의 임금 지불의 2주간 휴가

⑨ 임금의 전반적 인상

아내가 있는 노동자의 최저생활비 기준에 의한 최저임금 확립

임금에서 공제 선취의 금지

임금지불의 지체에 대한 형벌

⑩ 부르조아 부담의 실업 질병 재해 노약 사망의 국가보험의 즉각 실시.

이재유이관술이 만든 《적기》의 슬로건[3]



2.2. 해방 이후 ~ 1950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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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창립대회
1946년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창립대회


2.3. 1960년대 ~ 1970년대[편집]


파일:합법화 투쟁에 나선 교원노조.jpg
교원노조의 합법화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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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아름다운 청년 전태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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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전태일의 분신자살 (재연 장면)
영정을 껴안고 우는 어머니 이소선 여사

평화시장 내의 피복가공 공장은 4백여 개나 되는데, 이들 대부분의 작업장은 건평 2평 정도에 재봉틀 등 기계와 함께 15명씩을 한데 넣고 작업을 해 움직일 틈이 없을 정도로 작업장은 비좁다. 더구나 작업장은 1층을 아래위 둘로 나눠 천장의 높이가 겨우 1.6m 정도밖에 안돼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인데 이와 같이 좁고 낮은 방에 작업을 위해 너무 밝은 조명을 해 이들 대부분은 밝은 햇빛 아래서는 눈을 똑바로 뜰 수 없다고... (중략) 이 밖에도 이들은 옷감에서 나는 먼지가 가득 찬 방안에서 하루 종일 일해 폐결핵, 신경성 위장병까지 앓고 있어 성장기에 있는 소녀들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향신문 1970년 10월 7일자


근로기준법을 보장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전태일이 분신자살하면서 외친 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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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방직 똥물 사건의 피해 여성
YH 사건 당시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여성노동자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외침


"100억 불 수출을 달성했다고 거리는 들떠 있는데 저희들은 왜 이렇게 외로워야만 합니까. 다들 잘 살게 되었다는데, 모두들 경제가 성장했다고들 하는데 저희들은 왜 이렇게 배가 고픕니까... 알 수가 없습니다... 저희들은 누구를 위해 일해 왔으며 또 일해야 합니까?

1978년 원풍모방 노동자 장남수의 한탄



2.4. 1980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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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사건 당시 거리에 운집한 광부들과 가족들
구로동맹파업 당시 사무실을 점거한 노동자들

4월 21일부터 4일 간에 걸쳤던 사북 광산노동자들과 주민들의 대규모 항쟁은 그들의 삶과 생활을 위협하고 있던 노동조건의 개선, 최저 생활비 보장, 직업병 등에 대한 구제책 마련, 노조 민주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의 실현 등을 보지 못한 채 일시적인 사건수습 차원에서 끝을 맺었다.... 그러나 광산노동자들의 목숨과 맞바꾸고 있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살인적 임금구조가 개선되지 않는 한, 노동자들의 최소한의 생존 요구인 노동조합민주화와 이를 위한 제도적 개선 및 노동정책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사북항쟁은 계속될 노동자 항쟁에 서막에 불과할 것이다.

황인오, 「사북사태 진상보고서」 맺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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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중 최루탄에 의해 사망한 노동자 이석규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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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계열사 소속 노동자들의 봉기
1989년 세계노동절 100주년 한국노동자대회


2.5. 1990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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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회원들의 행진
1991년 의문사한 노동자 박창수의 시신을 탈취하는 백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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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창립대회
1996년 노동법 날치기 당시 총파업 보도기사


2.6. 2000년대 이후[편집]




3. 중국[편집]




4. 일본[편집]




5. 미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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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마켓 사건 기록화
러들로 학살 직후의 광부 천막촌

우리도 이제 노동일은 않을테야 / 일해 봐도 보람도 없는 그런 일은 않을 테야 / 겨우 연명할 만큼 주면서 생각할 틈조차 안 주다니 / 진절머리 난다네 / 우리도 햇빛을 보고 싶다네 / 꽃내음도 맡아보고 싶다네 / 하나님이 내려주신 축복인데 우린들 아니 볼 수 없다네 / 우리는 여덟 시간만 일하려네 / 조선소에서 공장에서 그리고 점포에서 / 우리는 힘을 길러왔다네 / 이제 우리는 여덟 시간만 일하세 / 여덟 시간은 휴식하고 / 남은 여덟 시간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 보세

1886년 5월 1일, 노동자들이 시가행진 때 부른 노래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가난과 불행과 힘겨운 노동으로 짓밟히고 있는 수백만 노동자의 운동을 없애겠다면 말이다. 그렇다.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앞에서 뒤에서, 사면팔방에서 불꽃은 꺼질 줄 모르고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들불이다. 당신이라도 이 들불을 끌 수 없으리라.

헤이마켓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어거스트 스파이즈(August Spies)의 최후 진술


미국 노동운동은 마르크스주의아나키즘이 양대산맥으로 존재할정도로 이들의 영향이 매우컸다. 특히 대표적인 미국의 노동조합IWW는 반스탈린주의적 미국식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미국 사회당출신의 유진 데브스와 같은 인물과 IWA에도 있던 아나키스트엠마 골드만등의 인물 그리고 기독교 사회주의자였던 도로시 데이도 있을 정도로 미국 노동운동사에서의 사회주의의 영향은 정말 막대하였다. 특히 원 빅 유니온[4] 이라는 IWW 특유의 노동조합적 사상또한 큰 영향을 남겼다.

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중반까지 이어지던 혁명적 생디칼리슴적 노동운동은 국가의 강대한 탄압과 1,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애국주의의 발흥으로 이들의 세력은 매우 약해졌다. 특히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붉은 공포(Red Scare)[5]로 일컬어지는 반사회주의 기조 때문에, 사회주의 세력이 큰 쇠락을 겪었다. 사회주의 세력 전반을 지도하고있던 뎁스는 방첩법 위반으로 체포되었고, IWW는 정당세력과의 협력을 거부하다 자멸했고, 아나키스트들은 강경파 테러리스트 루이지 갈레아니의 트롤링으로 주 탄압대상이 되어 전멸했다. 좌익 세력이 한차례 궤멸을 겪은뒤, 이들은 1924년 로버트 M. 라폴레트의 진보당이나 산별조직회의같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하지만 진보당은 지지부진한 활동 끝에 구성원들이 공화당, 민주당으로 흩어져버렸고[6] 산별조직회의는 남부에 노동조합 세력을 확장하려는 '딕시 작전(Operation Dixie)'이 실패하고 기존 기득권의 견제를 받아 결국 보수적인 노동조합 미국노동총연맹과 합칠 수밖에 없었다.

현대 미국의 노동운동은 미국노동총연맹과 산별조직회의가 합친 AFL-CIO, 그리고 개별 노조로는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국제운전사형제단을 중심으로 하고있다. 국제운전사형제단은 지도자인 지미 호파와 마피아간의 커넥션, 부패등으로 말이 많기도했다. 한편 노동운동을 뒷받침해주던 세력은 좌익에서 민주당으로 옮겨갔다. 대표적인 친노동 민주당 정치가는 미국의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 버니 샌더스, 그리고 2022년 미국 상원의원 선거에서 오하이오 상원의원 후보로 출마했던 팀 라이언 전 하원의원.

6. 영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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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다이트 운동 기록화
1888년의 성냥공장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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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광부 파업 당시 대치하는 시위대와 경찰
파업 광부들과 성소수자들과의 연대투쟁

그 외 차티스트 운동도 영국 노동사, 아니 세계 노동운동사의 중요한 사건이다.

7. 프랑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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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바리케이트를 쌓는 파리코뮌

8. 독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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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극우파 군인의 쿠데타에 항거하는 총파업 시위대

9. 동유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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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연대노조의 자유화 운동

10. 서유럽[편집]




11. 남유럽[편집]




12. 북유럽[편집]




13. 북아메리카[편집]




14. 라틴아메리카[편집]




15. 동아시아[편집]




16. 서아시아[편집]




17. 남아시아[편집]




18. 중앙아시아[편집]




19. 북아프리카[편집]




20.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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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재유가 묘사한 당시 여성 노동자의 환경 중 기숙사에 속박당하는 처지와 관계된다.[2] 요즘으로 치면 비정규직 반대와 비슷하다.[3]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p323~324[4] One Big Union. 단일 산업 노동조합쯤 되며 IWW 조합 아래의 산별노동조합들이 산업 민주주의를 통해 체제를 개편하자던 사상. 그 특성상 노동조합의 자가관리를 요구하였고 생디칼리슴의 영향이 컸었다.[5] 이때의 붉은 공포를 1차 붉은 공포라 부르는데, 2차 붉은 공포는 우리가 익히 잘아는 매카시즘이다.[6] 대표적으로 라폴레트의 아들 라폴레트 주니어는 공화당으로, 훗날 부통령이 되는 헨리 A. 월리스는 민주당으로 이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