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H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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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 당사에서 농성벌이는 YH무역 여공들.

발생 일시
1979년 8월 9일 (목)
~ 1979년 8월 11일 (토) 02시경
발생 장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도화동 556[1]
신민당사
사건 주체
시위측
YH무역 노동조합 (지부장: 최순영)
신민당 (총재: 김영삼)
진압측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2]
서울특별시 경찰국 (국장: 치안감 이순구)[3]
서울특별시 소방본부 (국장: 소방정감 류봉식)[4]
참가 인원
시위측
187명[YH무역여공][신민당]
진압측
전투경찰 및 사복경찰 1000~2000명
발생 이유
YH무역 경영진의 무리한 사업 확장 및 횡령
이후 급작스러운 사업장 폐쇄
사건 결과
국가에 의한 폭력적인 노동자 시위 진압
YH노조원과 당직자, 기자에 대한 폭행, 체포
사망
1명[5]
부상
미상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101작전 이후와 영향
5. 뒷이야기
6. 관련 문서
7. 대중매체에서
8. 여담
9. 참고 자료
10. 둘러보기 틀



1. 개요[편집]


1979년 8월 9일 가발 업체였던 YH[6]무역의 여성 노동자 190여 명이 회사 운영 정상화와 노동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서울특별시 마포구 도화동 신민당사[7]에서 농성을 벌인 사건이다. 'YH 여공 신민당사 점거 농성 사건'이라고도 한다.

해당 사건으로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의 총재 직무가 정지되었고 뒤이어 국회의원직 제명으로 이어지면서 부마민주항쟁을 촉발시켰다. 부마항쟁은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는 10.26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기 때문에 YH 사건을 유신정권 붕괴의 효시로 많이 평가한다.


2. 배경[편집]



YH무역 면목동 공장의 준공식 장면이 담긴 대한뉴스. 영상 24초 부분부터 등장한다.
YH무역은 1966년 10여명의 사원으로 출발한 가발회사로 가발 수출의 호경기와 정부의 수출 지원 정책에 힘입어 창립 4년만인 1970년에 종업원 3,000명의 대한민국 최대 가발업체, 수출 순위 15위의 대기업으로 급성장하였다. 그러나 YH무역은 회사 창립자 장용호 회장과 그 동서인 진동희 사장[8]이 경영하면서 미국으로 외화를 반출시키기도 하였고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고용하는 것은 물론 노골적인 불법 해고, 부당 전직 및 전출, 감봉 등의 행위를 자행했다.[9]

회사의 처사에 견디다 못한 가발업체 여성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1975년 3월 담당 감독의 독단적 인사이동 등 제반 문제로 건조반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작업을 거부하였고 이를 계기로 5월 24일 전국섬유노조 YH지부를 결성했다. 이에 앞서 회사 측은 건조반 조장이었으며 YH노동조합 결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김경숙·박금순·이옥자·전정숙 등을 해고하였고 최고참인 최순영에게 강원도 하청공장으로 출장 명령을 내렸다. 회사의 방해로 설립신고를 한 달 만에 겨우 마친 노동조합은 조직 강화 활동과 사내 질서 안정을 기한다는 취지로 대의원대회를 비롯한 기숙사 자치회 구성, 소그룹활동, 교육, 수련회 등을 가지며 회사와 지속적으로 노사협의를 시도했다. 노조는 1975년 12월 50%의 상여금 지급을 성취하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의 경영상태는 무리한 사업 확장 등으로 악화되어 은행 부채가 급증하였고 이에 회사는 공장 이전, 위장 휴업 등의 형태를 취하면서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노동조합은 1978년 5월 9일 제3차 정기대의원대회를 개최하였고 회사의 위장 휴업 등을 지적하면서 농성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1979년 3월 29일 회사는 결국 부채와 적자 운영,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 등의 이유를 제시하면서 4월 말로 폐업한다는 공고를 붙였다.[10] 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4월 6일 긴급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회사 정상조업을 위한 대책과 사업장 폐쇄가 불가피한 상황에 대한 대비, 타업체의 인수 및 고용 승계 등 대책을 협의하기로 하였다. 노조는 결의문을 통해 폐업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극한투쟁도 불사한다고 경고했다. 회사나 관계 기관들은 회사정상화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노동자들은 7월 25일 긴급대의원대회를 열어 7월 30일까지 정상화 해결이 없으면 조합원 총회를 열기로 결의하였다. 7월 30일까지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되지 않았고 이에 노동자들은 7월 30일 조합원 총회를 열고 회사정상화를 요구하면서 야간 농성에 돌입하였다.

3. 전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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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의 주간 조업, 야간 농성이 계속되던 가운데 8월 6일 회사는 일방적으로 폐업 공고를 내고 7일에는 기숙사 식당까지 폐쇄했으며 퇴직금·해고수당을 8월 10일까지 수령하지 않으면 법원에 공탁한다고 공고하였다. 이에 YH 노동자들은 야당인 신민당에 호소하기로 결정하였다.[11]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이들의 호소를 받아들여 흔쾌히 신민당사를 집회 장소로 내주는 한편 당직자들을 동원해 주변을 감시하는 경찰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YH무역 여성노동자 187명은 8월 9일 마포구 신민당사에서 회사 정상화와 노동자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농성 투쟁을 시작하였다. 8월 10일 노동자들은 긴급결사총회를 열어 YH무역을 은행관리기업으로 인수할 것과 장용호 회장을 소환할 것, 기업 정상화와 생계대책을 강구할 것 등을 결의하면서 계속 농성하였다.

박정희와 여권은 YH 사건의 배후에 김영삼 총재가 있다고 확신했는데 신민당 당사를 40시간 동안이나 노조 농성자들에게 내준 것 자체가 그렇다. 이런 와중에 신민당에 내분이 일었다. 조일환씨 등 신민당 간부 3명이 김영삼의 총재직 당선은 무효라며 서울지방법원에 직무정지가처분 신청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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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8.9.10:00시경, YH회사 200여명이 회사 내 문제해결을 요구하며 신민당사에 집결하여 농성을 벌임으로서 발단이 됐습니다. 8.10.10:00경, 김계원과 김재규가 강제해산을 결의했습니다. 사람들이 투신을 하면 그물망, 매트리스 등의 안전장구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는 숫자가 부족함으로 며칠간 연기하자는 실무자들의 건의가 있었지만 김재규 부장의 강행지시로 안전대책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8.11.02:00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 해산한 적이 있습니다.”

1979년 11월 18일, 계엄군법회의 당시 김정섭 중앙정보부 3차장보의 진술


8월 11일 새벽 2시 김효은 서울시경 기동대장이 지휘하던 1,000여 명의 경찰 기동대가 이른바 ‘101작전’을 개시하고 신민당사에 난입하여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강제 연행하였다. 작전은 23분만에 종료되었지만 그 23분 동안 이들을 막는 신민당원들과 집회 참가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으며 마음대로 건물을 부수고 사무실로 쳐들어가서 관계자들까지 닥치는 대로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21살 여공 김경숙(당시 노조 집행위원)이 사망하고 신민당 의원과 당원, 취재 중이던 기자, 신민당사에서 일하던 용역, 경비들까지 경찰에 무차별 구타당하여 중경상을 입었다. 심지어 김영삼 신민당 총재박권흠[12] 대변인까지 경찰에 폭행당해서 갈비뼈가 골절되고 얼굴이 뭉개졌으며 박용만 의원은 다리가 부러지고 황낙주 원내총무가 어깨를 얻어맞았다. 김영삼 총재는 구속까지는 되지 않았으나 상도동 자택에 끌려나가는 수모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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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진입을 막다가 형사들에게 강제로 끌려나가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
참고로 신민당사에서 상도동 자택으로 끌려가는 동안
형사들에게 모욕적 언사를 들어 가면서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이날 경찰은 노조 지부장 최순영 등 여공 172명과 경찰의 강제 연행을 제지하던 신민당 당원 26명을 강제로 연행하였다. 정부는 YH무역 노조의 신민당 농성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인명진·문동환 목사, 이문영 전 고려대 교수, 시인 고은 등 8명을 구속한 후 도시산업선교회를 배후로 지목했다.

특히 진압 직전 김영삼의 모습이 압권이었는데 이순구 서울시경국장이 전화를 걸어 총재를 바꾸라고 고압적으로 말하자 김영삼은 건방지다며 전화를 끊어 버렸고 진압 작전이 시작되자 신민당사 밖에 2000명의 경찰이 몰려온 상태였음에도 이를 지휘하던 허웅 서울마포경찰서장에게 다가가 "네놈이 저 여공들을 모두 죽이려 하냐! 뭐 이런 게 다 있어?"라는 말과 함께 싸대기를 날렸다고(!). # 한편 양일동이 당수였던 민주통일당도 경찰의 진압을 비난하면서 이 투쟁에 동참하였다.

4. 101작전 이후와 영향[편집]


신민당과 민주통일당은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깝다"라는 플랜카드를 걸고 김경숙 사인 규명과 책임자 문책 등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였으며 미국 국무부에서도 "경찰의 강제해산 조치는 분명 지나치고 가혹하다"는 성명을 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이 반발하자 미국 국무부는 "국무성은 지난번 성명의 입장을 고수한다. 한국 당국이 관련자를 징계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 바란다."는 논평을 다시 내보냈다.

이에 같은 당의 조일환 등이 법원에 제출한 총재직 제명안이 가결되자 감정이 격화된 김영삼은 NYT와의 인터뷰에서 "The time has come for the United States to make a clear choice between abasically dictatorial regime, increasingly alienated from the people, and the majority who aspire to democracy. (국민들로부터 유리된 소수의 독재 정부냐,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이냐, 둘 중 하나를 미국 정부가 선택해서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것이다.)"는 발언을 하였고 이를 문제삼은 공화당은 김영삼의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게 되었다.

결국 신민당 내부의 배신과 법원의 호응, 공화당의 날치기 통과가 일사불란하게 차례대로 이어지면서 1979년 10월 4일 김영삼은 국회의원에서 제명되었다. 이러한 거대 야당 총재의 국회의원 제명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일이며 이후에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런 일은 없었을 정도로 사상초유의 사태였다. 김영삼 총재는 국회의원에서 제명된 직후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성명문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지금까지 정치권에서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

김영삼의 국회의원 제명은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이었던 부산지역 민심을 건드렸고, 이 민심은 부마민주항쟁을 촉발하였다. 또 부마민주항쟁은 김재규의 10.26 사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니 학계에서는 사실상 YH 사건이야말로 유신체제 종식의 방아쇠 역할을 한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5. 뒷이야기[편집]


이 사건으로 희생된 김경숙 노동자의 시신은 사망 이틀 뒤 경찰의 입회 하에 유족들에게 인계되어 강남시립병원에서 3분만에 장례를 치른 후 화장해서 무등산 자락에 뿌렸다. 연행됐던 여성 노동자 230명은 버스로 귀향 조치되어 경찰들은 부모에게 '딸조심'을 강요했고 이들은 고향 집에 가택연금되거나 부모에 의해 강제결혼되는 일도 다반사였기 때문에 사건 이후 평범한 삶을 살게 되었지만 1987년 들어서야 정기 모임을 열기 시작했다.(참고)

노동운동계의 대부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더불어민주당전순옥 비례대표 의원은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YH 사건과 숨겨진 뒷이야기를 꺼냈다. 중앙정보부가 깊게 개입되어 있었으며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시위를 잔인하게 진압해서 살해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물론 김경숙 씨도 마찬가지다.

사건의 원흉인 ‘YH무역’의 당시 본사 건물은 서울특별시 중랑구 사가정로49길 53 (면목동)[13], 사가정역 인근에 지금도 남아있으며 ‘원진재단 부설 녹색병원’이라는 이름으로 골조는 그대로 둔 채 외장과 내장을 리모델링해서 사용 중이다.[14] 실제로 병원을 이용해 보면 전에 가발 공장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깔끔한 건물 외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천장과 병원답지 않은 동선(많은 문턱 및 미로 같은 구조)을 가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위와 같은 사연에 기인한다.

또 당시 경찰의 손에 죽어간 김경숙이 사용한 기숙사 건물도 남아 있는데 병원 북쪽에 위치한 야외 주차장의 관리소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는 주차장 확장을 위해 해당 건물은 철거된 상태며 주차장 왼쪽으로는 당시 부속건물로 사용된 본관만큼이나 큰 규모의 별관도 남아 있다. 외관만 봐선 전혀 과거의 상흔을 느낄 수 없는 현재의 녹색병원이고 과거 YH무역 본사였던 건물과 달리 기숙사와 별관은 최소한의 개보수만 이루어진 채로 과거의 상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2015년에 서울시는 도화동 구 신민당사 자리(현 SK HUB Green) 근처 인도에 김경숙 노동자가 사망했음을 알리는 동판을 새겼다.

이 병원과 원진재단도 내막을 보면 상당히 가슴아픈데 바로 유명한 원진레이온 사태가 알려진 뒤 그 직업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과 가족들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병원과 재단이기 때문이다. 위에 나왔듯이 YH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를 생각하면 슬픈 인연이다.

이 사건의 빌미를 제공했던 장용호 대표(미국인)는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족들과 여생을 보내다가 2023년 향년 95세로 사망했다.(미주한국일보 기사)[15] YH사건 이후 35년만의 단독인터뷰 진압 작전을 주도했던 이순구 서울시경국장은 사건 이후 경찰대학장, 한일조경 회장 등을 맡다가 1986년 2월 8일 향년 60세로 사망했으며 김효은 시경 기동대장은 문민정부 시절인 1993년에 경찰청장까지 올랐으나 이후 경질되었다.(KBS 기사)


6. 관련 문서[편집]




7. 대중매체에서[편집]




8. 여담[편집]


  • YH무역 노조 지부장을 포함한 사건의 당사자들은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 사망 당시 분향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

  • 2021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공개한 당시 현장에 투입됐던 한 전경의 고백에 따르면 "사복들처럼 과격하진 않아도 저희 전경 기동대원 중에서도 머리채를 잡거나 가슴 등을 부여잡거나 했다. YH 여공들의 농성 같은 경우 닥치는 대로 진압해도 좋다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하여도 국민에게 파급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당시 시위 진압 분위기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대학생 시위는 안전을 강조하는 분위기였다면 노동자(여공) 시위는 마구잡이로 진압해도 괜찮다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 2020년 12월에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김경숙 열사의 일기 총 13권을 복원해냈는데 그녀의 일기는 2003년과 2009년에 길문숙과 최순영이 각각 기증한 것이다. 이들 사료 중 노동자 시절 일기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

9. 참고 자료[편집]


  • KBS1 <역사저널 그날> 2020년 12월 8일 방영분

10. 둘러보기 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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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대
2020년
오리온 직원 투신자살 사건(3.)B / 이천 물류센터 화재 사고(4.)A / 광주 재활용업체 20대 청년노동자 사망사고(5.)A / 군산 공무원 갑질사건(8.)B G / 아이린 갑질 사건(10.)B G / 강아지 택배 무고 사건(12.)G
2021년
카카오 직원 유서 논란(2.)? / 평택항 대학생 사망 사고(4.)A / 고덕 그라시움 택배 사건(4.)G / 네이버 직원 자살 사건(5.)B / 광주 학동 붕괴 사고(6.)A / 동작구 새우튀김 사건(6.) A G / 2021년 서울대학교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8.)A / 여수 현장실습 고교생 사망사고(10.)A
2022년
삼표산업 채석장 붕괴 매몰 사고(1.)A / 광주 화정 아이파크 붕괴 사고(1.)A / 연세대 청소노동자 쟁의(3.)L X / 록사나 그림작가 착취사건(8.)G X / 평택 SPL 제빵공장 직원 기계끼임 사망 사고(10.15.)A / 안성 물류창고 신축현장 붕괴사고(10.21.)A / 샤니 성남공장 직원 손가락 끼임사고(10.23.)A / 봉화 광산 붕괴 사고(10.26.)A / 농심 부산공장 끼임 사고(11.2.) / A 의왕 코레일 직원 사망 사건(11.5.)A / 안전운임제 일몰제 폐지 요구 파업L Na
2023년
윤석열 정부의 주 69시간 근무제 추진 논란(3.)Na 서대문구 엘리베이터 수리 기사 추락사 사건(6.)A 코스트코 하남점 주차장 직원 폭염 사망 사건(6.)A 대구 염색산업단지 황산 누출 사고(7.)A 성남 샤니 제빵공장 직원 기계끼임 사망 사고(8.8.)A

A: 산업재해 / B: 직장 내 괴롭힘 / G: 갑질 사건 / L: 노동운동 / X: 노동착취 / Na:국가조직 연루 및 개입 / ?: 사건 경위 불명



문서가 있는 대한민국의 국가폭력 사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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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해방기
(1941~1982)선감학원A C / (1946)정판사 위조지폐 사건F T P / (1946)대구 10.1 사건R M / (1947~1954)제주 4.3 사건R M

1공화국기

3공화국기

4공화국기

5공화국기


6공화국기

A: 납치, C: 강제수용, F: 누명, M: 민간인 학살, R: 폭동적 시위진압, P: 정치탄압, S: 검열, T: 고문, H: 서브컬처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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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1년 기준 5호선 공덕역 1번 출구 'SK허브그린 오피스텔' 자리[2] 고건 전 국무총리의 회고에 따르면 YH무역 사건에 대한 강경진압을 지시한 당사자가 김재규였다고 한다. # 이에 반해 대통령비서실 정무제2수석비서관이었던 고건 자신과 치안본부 제3부장 유흥수 치안감은 반대했으나 정권 내 2~3인자인 김재규의 강한 주장에 그러한 반대가 먹혀들 일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3] 1926~1986.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졸업 후 경찰에 입문, 1959년 총경으로 승진한 후 대전경찰서장, 서울중부경찰서장, 경상북도경찰국장, 내무부 치안본부 제2부장, 경찰대학 교장을 역임. 2021년 기준으로 '제31대 서울특별시경찰청장'으로 대우하고 있다.[4] 2021년 기준으로 '제5대 서울소방재난본부장'으로 대우하고 있다. 근무기간은 1978년~1981년.[YH무역여공] [신민당] [5] 사망자 김경숙(YH무역 여성 노동자). 유족의 동의 없이 부검을 끝내고 신속한 화장을 종용하는 등 국가에 의한 조직적인 사건 은폐 시도가 있었다. YH노조 김경숙 사망관련 조작의혹 사건에 대한 결정문(PDF)[6] 회사 설립자 장용호의 영어 이니셜에서 유래했다. 기사[7] 현 SK HUB Green 자리.[8] YH 무역 장부에서 돈을 빼돌려 1974년 설립된 YH해운의 대표로 취임했다.[9] 장용호는 동서 진동희를 사장으로 앉히고 가족들과 1970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미국에서 YH 제품을 수입하여 판매하는 회사를 설립한 한편 호텔과 백화점 등을 지어 막대한 부를 쌓았다. 사장이 된 진동희는 1970년 장부상으로는 노동자들에게 상여금을 준다고 해 놓고는 10억 원을 빼돌려 그 돈으로 1973년 대보해운 주식회사를 차렸다. 같은 해 장용호는 미국에서 YH 가발 300만 불어치를 외상으로 사들인 후 3년이 지나도록 돈을 갚지 않았다. 막대한 외화가 해외로 빼돌려진 것이다. 여성 노동자들의 피땀 어린 노동으로 벌어들인 돈은 이렇게 자본가들의 주머니 속으로 고스란히 들어갔고 YH무역은 서서히 기울어갔다. 이때부터 사측은 여성 노동자들을 해고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들어 박정희 정부가 더이상 경공업이 아닌 중화학 공업을 통한 경제성장으로 방향을 튼 것과도 맞물렸다.[10] 회사의 빚이 늘어난 것은 정부로부터 은행 이자의 절반밖에 안 되는 수출 특혜금융을 받아 오리온전자를 인수하고 새한칼라 주식 40퍼센트를 인수하는 등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가 경영에 실패했기 때문이다.[11] 여담으로 처음 노동자들이 신민당 당사를 찾아갈 때는 목욕 바구니를 들고 왔다고 한다. 만약 경찰에게 들킬 경우 기숙사 내 샤워실이 단수되어서 목욕탕에 가러 나왔다고 둘러대기 위한 수단이었다고.[12] 정작 전두환이 집권하자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였다.[13] 지번: 면목3.8동 568-1.[14] 공장 폐쇄 직후 서울기독병원으로 사용된 것을 인수하였다.[15] 해당 기사의 내용은 그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16] 전순옥 의원이 필리버스터 중에 사건의 내막을 진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