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선/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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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김희선의 활동을 서술한 문서
2. 데뷔[편집]
"그때 김희선 씨는 워낙 인기가 많았었던, 뭐 지금도 그러시지만, 그때는 완전 인기가 최,최,최고였거든요. 그냥 원탑이었죠. 경쟁이 안되는. 그냥 김희선. 근데 다행히 저는 그 친구가 학교 후배여서 다행히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다행히." - 김석훈
"김희선 하면 딱 그냥 한 단어 원탑. 그리고 거기서 하나 더 대면 유행. 모든 유행을 다 시켰어." - 강호동[1]
1992년 혜성여자고등학교 재학 당시에 '고운 얼굴 선발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 김희선은 타고난 얼굴 덕에 처음부터 탄탄대로였다.[2] 연기 학원에 등록하러 갔더니, 연기 배우기 전에 대회부터 나가보라는 추천을 받았다.[3] 결과는 대상. 학생 잡지 '주니어'의 표지 모델로 얼굴을 비추자 곧바로 CF업계의 섭외 요청이 이어졌고, 각종 광고 모델로 출연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첫 광고는 1993년 출연한 롯데삼강(現 롯데푸드) 꽃게랑.[4]
같은 해인 1993년 SBS 청소년 드라마 《공룡선생》을 통해 배우로 데뷔했고, 이어 1994년 KBS 2TV 추석특집극 《춘향전》[7] 에서 최초의 고교생 춘향이 되었다. 이듬해에 SBS 추리 드라마 《이(李)가사 크리스티》에 출연하여 처음으로 성인 연기를 선보였다. 1995년 학생 연기에서 성인 연기로 넘어가자 불과 19세의 나이에 단숨에 톱스타로 등극했고, 이로써 김희선 시대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그 첫 시작은 '김희선' 이라는 이름 석 자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KBS 2TV 미니시리즈 《바람의 아들》이었고,[8] KBS 2TV 주말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과 연작 드라마 《컬러 시리즈 - 화이트》로 이어졌다. 김희선은 압도적인 미모에 자신만의 통통 튀는 신세대 이미지와 매력을 더해 김희선 신드롬을 일으키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국가적으로는 초대 한국-프랑스 명예친선대사로 선정되는 영예도 안았다. 당시 장 폴 레오 주한프랑스대사는 "동서양이 혼합된 김희선의 얼굴은 거의 ‘예술’"이라며 김희선의 외모를 극찬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9] 그녀가 출연했던 드라마들의 시청률은 《웨딩드레스》(32.5%), 《세상 끝까지》(33.5%), 《프로포즈》(35.6%), 《안녕 내 사랑》(35.9%), 《해바라기》(38.8%), 《미스터Q》(45.3%), 《머나먼 나라》(47.2%), 《토마토》(52.7%).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시청률 30%를 넘긴 작품이 8편이라는 점은 역대 배우 중에서도 본좌급이다.
특히 당시 주요 언론사에서 뉴스, 드라마, 가요프로, 쇼프로 등을 통합해 상위 10개의 프로그램을 주간 시청률 순위표 형태로 게재하던 것이 방송국에 큰 부담감과 경쟁심리로 작용하고 있었는데, 김희선은 죽은 시청률도 살리는 미다스의 손으로 통했다. 김희선이 K사로 가면 K사가 1위, S사로 가면 S사가 1위를 한다거나 월화드라마를 찍으면 월화드라마가 살고, 수목드라마를 찍으면 수목드라마가 사는 식이었다. 참패를 거듭하던 kbs2에게 거의 1년 만에 월화 흥행작을 안겨준 프로포즈,(후속으로 프로포즈와 비슷한 포맷의 청춘드라마 '스타'를 방영했으나 최고 시청률 10%대로 대실패해 조기종영했다.),[10] , 경쟁 드라마들은 고작 최고 시청률 10% 중반으로 종영하는 반면에[11] 시청률을 33.5%나 올린 정통멜로 세상 끝까지, sbs에 1년 만에 주간 순위표에 드는[12] 흥행작을 안겨준 미스터Q가 대표적이다. 또한 mbc 수목드라마 해바라기가 38.8%로 의학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반면 그 후속작들은[13] 연이어 극심한 시청률 부진을 겪었는데, 그다음 김희선의 후속작 안녕 내 사랑은 전작 버프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기어이 30%를 넘겼다.
또한 김희선은 거리를 완전히 장악한 스타였다. 협찬도 아닌 상품들이 오로지 김희선의 스타성만으로 40억 100억의 매출 신화를 달성하는가 하면, 김희선이 머리에 핀을 꽂는 모양조차 선풍을 일으켰다.[14] 협찬의 개념을 넘어 새로운 '사조'를 거의 매 작품마다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수년간 끊나지 않는 신드롬을 구가하여 이미 방송가에서는 신드롬을 넘어 '김희선 신화'라는 용어까지 사용되고 있었다. 드라마 작가 김수현을 제외하고 당시에 신화라는 용어를 쓰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김희선이라는 슈퍼스타를 계속 주인공으로 쓰는 건 드라마의 플롯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략) 물론 김희선의 ‘파괴력’을 감안한 것은 인정한다.”
[인터뷰]「토마토」연출 장기홍PD
이같은 현상은 김희선 개인으로선 톱스타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과정이었으며 사회적으론 '김희선 신드롬'같은 용어까지 생길 정도로 그의 말투와 버릇, 패션 등을 모방하고자 하는 청소년들의 폭발적인 호응이 뒤따랐다.
(중략)
'김희선 신화'가 이번에도 이어질지 주목된다.
그만큼 당시 김희선은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며, 그녀가 출연하는 드라마는 무조건 대박 취급을 받았다.《미스터Q》나 《토마토》 같은 대박 작품들은 거의 김희선의 힘으로 시청률을 끌어낸 것이며 《토마토》에선 상대역의 신인 배우 김석훈을 띄워주기도 했다. 《미스터Q》로는 1998년 SBS 연기대상에서 대상까지 수상했다. 만 21세에 수상해 방송 3사 통합 문근영과 함께 최연소 대상 수상 기록인데, 2020년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15]
김희선은 1990년대 말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역대 대중문화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는 단기적 인기를 누린 것으로 여겨진다. 표에서 김희선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한 김국진이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경우 아예 논외의 존재들이며,[17] 2위인 최진실과도 그 격차가 3배 가까이 난다는 점에서 전성기의 충격을 짐작할 수 있다. 위의 표를 보면 영화 분야에서 심은하의 인기 점유율도 만만치 않지만, 영화는 연속극에 비해 저명도가 한참 낮은 편이다 보니[18] 체감 인기도는 김희선에게 심은하는 물론이고 어느 영화 배우들도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사실상 그 시점에서 미녀 스타 김희선의 인기 독주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그녀를 예뻐하던 최진실의 후계자가 된다. 미녀 배우의 위상이라는 면에서는 황신혜가 있었지만 김희선이 라이징 스타가 될 시점에 황신혜는 점점 저무는 해에 가까웠고, 무엇보다 황신혜의 필모그래피는 김희선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종합한다면 인기 배우로서의 최진실의 위상[19] , 미녀로서의 황신혜의 위상을 모조리 이어받은 슈퍼 스타 여배우.
최진실을 제외하고 1990년대에 활동한 여배우들은 물론이고 1990년대 중후반에 누린 그녀의 전성기와 비견가능한 2000년대 이후의 여배우는 없다. 설날과 같은 명절에 연예인 최초로 김희선 이름 석 자로 만든 예능 프로그램이 2년 연속으로 제작 및 편성되고, 최초로 드라마 자체가 배우 개인에게 맞춤제작되는 일이 있었을 정도면 그녀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한국갤럽 설문조사에서 여자 탤런트 1위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50년간 활동한 탤런트 영화배우 가수 개그맨 코미디언 진행자를 통합한 설문조사(건국 50년 최고 연예인)에서조차 무려 4위를 기록했다.[20] 배우 중에서는 국민 아버지라 불리는 국민배우 최불암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득표를 한 것이고, 여자연예인 중에서는 배우 가수 대선배들을 뛰어넘은 최고 득표이다. 놀라운 것은 이게 불과 22세의 나이에 이룬 성과라는 점이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때가 토마토 이전이라는 사실이다.[21] 이처럼 김희선의 인기는 세대 통합적, 전국민적이었다.
당시의 유행을 선도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출연한 드라마에서 착용한 액세서리는 다음날이면 번화가나 중고등학교 근처 팬시점에 김희선 ㅇㅇㅇ 라는 식으로 등장하여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모 드라마에서 들고 다니던 요요, 소위 머리 곱창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머리밴드, 머리띠, 실핀 등. 그때는 협찬문화가 활발하지 않던 시대였고, 곱창밴드와 머리띠의 경우도 본인이나 스타일리스트가 그냥 산 것이었기 때문에 협찬 마케팅도 당연히 없었다.[22] 그런데 그게 전국을 휩쓰는 기현상이 있었던 것. 곱창밴드 하나만으로 당시 매출 40억 원을 기록한 사실은 전설로 남아있으며, 문화적으로 패션을 분석하는 서적에까지 등장했다.출처 머리띠는 서울에서만 100억의 매출을 올렸다고 알려져 있다. 심지어 김희선이 머리에 핀을 꽂는 모양까지 선풍을 불러일으켜, 일명 '김희선 X자 실핀'이 1999년 액세서리 시장에서 전 매출의 90%를 차지했다.[23] 7부, 9부 바지를 시대의 유행으로 안착시킨 것도 김희선이었다.# 브릿지 염색도 마찬가지. 특히 《토마토》 방영 당시 남성들의 로망은 흰색 스키니 진에 하얀 자전거를 탄 생머리 여성으로 이는 극중에 등장하는 김희선의 모습이었다. 덕분에 근처 공원에는 이런 스타일의 여성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세기말의 한 해를 결산하는 패션계 키워드에도 '머리띠부터 바지까지 모든 패션을 유행시킨 김희선', '김희선 바지' 등이 등장했다. 유일하게 포함된 연예인의 이름이었다. 한마디로 김희선은 자신이 브랜드 그 자체였다.## 심지어 토마토 화분까지 유행시켰으니.
3. 2000년대[편집]
수많은 최초와 최고의 기록을 가진 김희선은 2000년대에도 기념비적인 자취를 남기는데, 한류라는 유행어가 가장 광범위하게 확산하게 된 계기로서 KCI등재 논문에 기록된 사실이 그것이다. 김희선은 2001년 6월 중화권에서 상당한 권위를 자랑하는《아주주간》의 표지모델[25] 이 되었다. 김희선을 '표지모델'로 한 해당 주간지는 무려 8페이지에 걸쳐 김희선의 단독 인터뷰와 함께 한류 현상을 소개했는데, 학계에 따르면 이것이 '한류'라는 유행어가 가장 광범위하게 유행하게 된 최초의 사건이다.[26][27]
'한류'라는 유행어가 중화권 지역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유행하게 된 계기는 중화권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홍콩 중문 주간지 '아주주간(亞洲周刊)'이 2001년 6월 24일에 배우 김희선을 표지 모델로 하여 '文化驚艶,兩岸三地,韓流滾滾'라는 주제로 특집을 발간한 데 있었다고 보인다.
한홍석, '한류' 현상으로 본 중국에서의 한국 대중문화 수용[28]
2000년대 초반 김희선은 큰 시련을 겪기도 했다. 2000년부터 약 2년간 사진작가 조세현과 관련된 누드집 고소 파문을 겪은 것이다. [29] 김희선과 조세현 사이의 오해에서 비롯된 해프닝으로 판명났지만[30] , 당시에 이 사건으로 인해 김희선은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았다.
2001년 순정만화 같은 멜로 영화 《와니와 준하》에서도 좋은 평을 받았다. 당시에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회자되는 작품으로 한국 영화계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감성을 확인할 수 있는 명작으로 꼽힌다. 김희선은 이 작품에서 평단의 상당한 호평을 이끌어냈고, 2000년에 이어 2년 연속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김희선의 최고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김희선의 위상은 국내뿐 아니라 한류스타로서도 압도적이었는데, 이같은 사실은 2001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출간한 「중국영화산업백서. 1」에서도 논의되었다. 해당 서적에는 '《아주주간》의 표지모델' 관련 내용[31] 을 비롯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되었다. 현재 중국에서 원하는 한국영화는 '한마디로 김희선 같은 스타가 나오는 상업성 있는 영화'이다[32] , 중국인들은 《비천무》를 '남한 최고의 미녀 김희선 출연'이라는 내용으로 홍보하였다[33] , 중국에서 《비천무》는 '김희선의 높은 인지도'로 인해 화제가 되었다[34] 등. 이처럼 자신의 이름값 하나만으로 영화를 수출시킬 정도로 김희선은 독보적인 위상을 떨쳤다. 《비천무》는 국내에서도 전국 200만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그해 관객순위 2위를 기록했다.[35]
김희선의 중화권 인기는 객관적 수치를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2004년 한류관광의 해를 맞이해 한국관광공사가 실시한 한류관광실태조사[36] 를 보면 김희선이 압도적인 1위를 점하고 있다.
- 그렇다면 현재 중국시장에서 원하는 한국영화는 어떤 영화인가? 중국전영집단 산하 영화수출입공사에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담당하고 있는 쾅샤오린은 한 마디로 “김희선, 장동건 같은 스타가 나오는 상업성 있는 영화”라고 정의한다.
- 상해동방영시배급공사의 리창용 사장은 <비천무>의 경우 ‘남한 최고의 미녀 김희선 출연’, ‘한국 최고의 인기만화 각색’이라고 선전해서 역시 괜찮은 흥행성적을 기록한 바 있다고 밝혔다.
- 2001년 6월말 경에 나온 홍콩의 《아주주간》-중국어권에서 상당한 권위를 자랑하는 뉴스주간지-의 표지모델은 한국의 인기스타 김희선이다. 또 무려 8페이지에 달하는 지면을 할애하여 김희선과 장동건의 단독 인터뷰를 싣고, 한류라는 문화현상에 대해 전반적인 소개를 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중국영화산업백서. 1」(2001)
2003년 브라운관에 4년만에 컴백한 김희선은 당대 최고 톱스타답게 또 한번 출연료 1위 기록을 경신한다. 회당 1500만원 출연료의 첫 포문을 열게된 것이다.
톱스타 김희선(26)이 회당 1500만 원의 사상 최고 출연료를 받으며 오는 8월부터 방송될 SBS TV 16부작 미니시리즈에 출연한다. 지난 99년 (MBC TV) 이후 4년 만의 드라마에 복귀.
TV 컴백 작품은 일본의 인기 TV 드라마 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제목은 아직 미정이다.
지금까지 드라마 회당 출연료 최고액은 SBS TV 에서 전도연이 받은 회당 800만 원으로, 김희선은 그 두 배 이상인 초특급 대우를 보장 받았다. (중략) 구본근 SBS 드라마 책임프로듀서는 24일 “김희선이 최근 SBS와 출연계약을 맺었다. 출연료는 사상 최고액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2003년 선보인 《요조숙녀》가 그해 SBS 미니시리즈 중에서 2위 (1위는 올인이다.) 시청률을 기록하며 선방을 했으나, 원작인 일본 드라마 《야마토 나데시코》의 주연 배우 마츠시마 나나코의 명연기와 비교되는 발연기로 혹평을 받았으며, 원작에 못 미치는 허술한 스토리 때문에 실패작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어서 김희선이 거절한 작품들이 대박을 치는 반면에 실제 선택한 《슬픈 연가》, 《스마일 어게인》 등의 성적은 저조해 이전과 같은 파급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한편 2005년《슬픈연가》는 드라마 전체가 한편의 뮤직비디오 같은 구성으로 매니아층을 형성했으며, 국제적으로는 일본의 후지 TV 초청으로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일본의 국민스타 초난강으로부터 "만약 드라마를 만들게 된다면 주인공으로 출연 섭외를 하고 싶다. 연인이 되어 달라."는 이색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 초난강, 김희선에 ‘연인사이’ 깜짝 러브콜
김희선이 거절한 작품들이 대박이 나면서 작품을 보는 눈이 없다고 조롱을 받기도 했는데, 당시 김희선 정도 위치의 배우라면 못해도 어지간한 미니시리즈 섭외 요청은 다 들어온다. 그리고 원래 캐스팅이란 것이 A급 배우에게 먼저 요청이 가다가 불발되면 그 다음 급 되는 배우들에게 가는 식으로 이어진다. 김희선은 한 시대를 평정한 스타였는데, 1순위로 작품 섭외가 안 들어오면 그게 더 이상한 일.게다가 김희선이 거절한 이유들을 보면 대부분 시기상 안 맞거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발된 케이스가 대부분이다. 작품 보는 눈이 없다고 무작정 까기에는 무리가 있다.
"승아 역의 경우, 김희선씨에게도 제안이 들어갔는데 결혼 생활 때문에 당분간 연기활동을 안하고 싶다고 했다더군요.
2005년 성룡과 함께 한 영화《신화-진시황릉의 비밀》에서 여자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중국 역대 최고의 오프닝 흥행 기록을 세웠다. 또한 근래 10년 동안 성룡의 작품 중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터라 중화권 거의 모든 언론들이 영화의 흥행 성공 요인으로 김희선을 뽑기까지 했다.#
해외 활동과 국내에서 다양한 작품을 병행하려 시도했었는데 여자 배우치고는 어린 나이에 결혼하면서 CF를 찍는 것 외에는 6년이라는 긴 휴식기에 들어간다. 2007년 10월 김희선은 31세의 나이에 다소 일찍 결혼식을 올리며 유부녀 대열에 합류했다.[38] 2009년 1월 20일 딸을[39] 출산하면서 육아에 전념하게 됐고 자연스레 오랜 공백기가 생겼다.
4. 2010년대[편집]
김희선은 6년의 공백기를 거친 후, 복귀작으로 SBS 드라마 《신의》를 선택했고, 2012년 8월에 첫방송되었다. 이전의 《슬픈 연가》의 캐릭터와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이고, 오랜만의 컴백작이라 기대를 모았으나 성적은 좋지 않았다. 10% 정도의 시청률로 나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오랜만의 컴백치고는 저조한 성적이었다.
드라마가 종영된 이후, SBS 힐링캠프에 출연하며 오랜만에 토크쇼 나들이에 나섰고, 이듬해 강심장 후속으로 편성된 화신 - 마음을 지배하는 자의 MC로 발탁됐다. 과거 버라이어티쇼 진행 경력이 있어서인지 순조롭게 적응 중이었으나, 시청률이 갈수록 좋지 못하자 김구라와 봉태규까지 투입하며 메인 MC에 변화를 주고 한국 역대 예능 토크쇼 사상 최초의 생방 토크쇼를 선보이는 등 실험을 해보기도 했지만 끝내 3~4%대의 시청률로 종영했다.
KBS 2TV 드라마 《참 좋은 시절》으로 무려 16년여만에[40] 주말드라마에 출연했다. 이번 작품은 2014년 2월부터 그해 8월까지 방영되었고, 상대역은 꽃보다 할배로 한층 주가를 올리던 이서진으로, 거기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고맙습니다》등의 히트 작품을 쓴 이경희 작가까지 투입되면서 상당한 상당한 기대를 받았지만, KBS 주말드라마 불패신화를 깨버린 데다 경쟁사 MBC 개막장 드라마 왔다 장보리에 시청률이 밀려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최고 시청률은 초반의 30.9%, 평균 시청률은 24%대를 기록하며 주말 드라마치고는 사람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쓸쓸히 퇴장했다. 하지만 김희선의 연기는 꽤나 호평을 받았고, 이 작품으로 2014 아시아태평양 스타 어워즈에서 최우수 연기자상을 수상했다.
2015년 MBC 드라마 《앵그리맘》로 곧바로 차기작품을 선택한 김희선은 일진 출신의 억척스러운 엄마 조강자 역을 연기했다. 딸로 출연한 김유정과는 실제 23살 차이로, 김희선의 첫 엄마 역할이었다. 드라마 전반을 뛰어다니며 모성과 액션을 소화했다. 비록 시청률은 낮았지만 '역시 김희선'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연기력도 한층 좋아졌다는 반응도 많이 얻었는데, 드라마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연기 칭찬만 들었던 드라마는 처음이라며 김희선 본인도 무척 만족해 했다.
연기는 배우가 한 인물의 성격, 행동 등을 표현하는 일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배우 자신이 그 배역과 겹칠 때 뜻하지 않게 정확해진다. (중략) 김희선 만큼 ‘여신’ 이후의 삶을 잘 아는 사람은 없지만, ‘여신’이 아닌 위치에 서려고 하지도 않았던 배우. 정확히 <품위 있는 그녀>의 우아진이 바람난 남편과 그의 정부와 공방전을 벌일 때조차도 지혜롭고 아름다웠던 이유다.
동시대의 인기 스타들이 작품 출연에 몸을 사리거나 CF로만 모습을 비추는 것에 비해 꾸준히 여러 드라마에 도전하고 있다. 본인 스스로가 연기에 대한 욕심이 있고 열심히 한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 있다. 20대 초반 이미지로 먹고 살았던 시기는 오래전에 끝났음에도 지금까지도 드라마의 제목이 곧 김희선인 타이틀롤 배우로[41] 활약할 수 있는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스타성과 본인의 연기력 덕분이다. 정확히 말하면 화면 장악력이라는 거대한 재능에 더해 차근차근 쌓아온 연기력 덕분이다. 2018년 현재 연기로 김희선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연차가 쌓이며 완성형 배우로 성장한 케이스이다.
5. 2020년대[편집]
2020년 SBS 편성, 웨이브 오리지널로 기획된 앨리스에서 1인 2역을 맡아 호연했다. 실험적인 SF장르임에도 초반에는 웰메이드로서 굉장한 반응을 이끌었고, 4주 연속 미니시리즈 통합 1위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전개가 기괴해졌지만, 마지막회까지 동시간대 1위 시청률은 놓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20, 30, 40대를 모두 오가는 독특한 역할이라는 점에서, '미모에 쏠리는 관심을 오히려 연기에 이용하는 영리한 배우'라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