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국(야구)/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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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김종국의 지도자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KIA 타이거즈 코치[편집]


은퇴식을 치른 후 KIA 타이거즈의 코치로 보직을 변경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코치 생활을 시작한 이후 2군 작전주루코치로 있었다가 2012년 백인호 코치 2군행의 반대급부로 1군 작전코치로 올라왔다. 전임자가 워낙 무능했던 탓에 평가는 좋은 편이다.

2012년 7월 26일 넥센 히어로즈전에서 더위를 먹었는지 정신줄을 놓은 주루 지도를 하여 까이기도 했다. 그래서 백인호를 잇는 백종국, 백남자라는 별명을 획득했다. 이 무렵에 당시 수석코치였던 이순철에게 덕아웃 앞에서 질책을 당하는 모습도 방송화면이 잡혔다.

2013 시즌도 특별한 홈 주루사 없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시즌 후 팀의 부진에 의한 1, 2군 코치진 전폭 교체에도 살아남았으며 일부 KIA 팬들은 감독 수업이나 제대로 받게 연수 보내달라고 원성 중이다.

2014 시즌에도 별 나쁜 평은 없었으나, 이대형의 도루 개수가 적은 것과 도루 성공률이 높지 않은 것이 코칭능력의 한계라는 지적도 있다. 그리고 이듬해 이대형은 kt로 이적하게 된다

2015년 7월 25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2개의 판단미스로 인하여 선수들이 주루를 하다가 아웃당하며 박정수의 홈 첫 승을 날려버리게 되었다. 그 결과 롯데 박세웅에게 첫 승을 헌납하게 되며 팀이 아쉽게 패하였다.

2016 시즌에는 은근히 선수들의 도루가 적어지고 뇌주루가 많아졌는데, 이것에다 자꾸 3루에서 세워서 득점력이 낮아졌다. KIA의 노답타선과 결합되어 만루잔루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4월 16일 경기에서 기아선수들 주루의 총체적 난국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5월 5일 경기에서는 나지완이 김종국의 제지를 씹고 희생플라이 득점에 성공했고, 5월 6일 경기에서 역시나 뇌주루코칭으로 김호령을 아웃시켜 버렸다.

5월 15일 경기에서 김호령의 안타에서 가뜩이나 느린 이범호를 돌렸다가 아웃 시켰다. 한동안 답답했던 경기는 안보였으나, 7월 12일 3대 2 한 점차 경기에서 주력이 느린 브렛 필서동욱의 2루타 때 돌리다가 죽였다. 다시 잠잠하더니 9월 8일 NC전에서 이해못할 선풍기질로 3루 주자를 홈에서 아웃시켰다.

2017 시즌엔 리그 분위기 상 도루를 많이 하지 않는 분위기라서 예전보다 실수는 줄어들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주루코칭 미스가 보였다.

6월 14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최형우의 2루타 때 1루 주자 버나디나를 무리하게 돌려 아주 여유롭게 아웃되었다. 애초에 버나디나는 홈인은 힘들 걸 파악했는지 3루까지 슬슬 뛰고 있었고 그걸 보면서도 롯데 유격수가 공을 잡은 상태에서 돌려버린 것이다. 게다가 무리하게 주루하다가 홈에서 강민호의 스파이크에 손가락이 밟혀 부상을 입은 건 덤이다. 다행스럽게도 구단 공식 트위터에서는 버나디나에게 이상은 없다고 말했다. 반대로 시즌 초에는 버나디나가 김종국의 제지를 쿨하게 무시하고 과감하게 홈으로 쇄도하여 득점에 성공했었다.

8월 12일 김민식의 에러 타구 때 2루주자 이범호를 무리하게 돌려 아웃시켰다.

2019년 김경문 감독 체제로 새롭게 출발하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작전코치로 선임되면서 2019 WBSC 프리미어 122020 도쿄 올림픽까지 대표팀의 코치도 겸직하게 됐다.

2019년 8월 24일 SK전 3대4로 뒤진 9회초 1사 2루 상황에서 안치홍의 좌익수 앞 짧은 안타 때 2루주자 오정환을 무리하게 돌려 홈에서 아웃시켰고, 이날 판독센터와 함께 팀 6연패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021년 5월 20일부터 마크 위더마이어가 잔류군 코치로 내려가면서 1군 수석코치를 맡게 되었다. 기존의 주루코치는 정성훈이 맡게 된다.


3. KIA 타이거즈 감독[편집]


파일:김종국_기아감독.jpg

2021년 11월 1일, 맷 윌리엄스 감독이 경질되자 가장 유력한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고 결국 12월 5일, KIA 타이거즈의 제10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1][2] 계약기간은 3년, 계약금은 3억, 연봉은 2억 5천만원이다. KIA 타이거즈에서만 10년 가까이 코치 생활을 해 팀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며, 주루코치, 작전코치, 수석코치라는 다양한 코치직을 역임했다는 점에서 구단 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 KBO는 처음부터 프런트와 방향성이 같은 내부 승진 감독 선임이 대세인데[3] 팀 전력의 재건(속칭 리빌딩)이 절실한 KIA도 이러한 대세를 따라 내부 승진 출신 김종국을 선임했다.

본인은 명가 재건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은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기대감도 크다며, 선수단에게 근성있는 플레이를 주문해 팬들에게 사랑받는 팀을 만들겠다며 포부를 밝혔다.

맷 윌리엄스 감독 시절 당장의 성적 내기(속칭 윈나우) 기조를 무리하게 유지하면서 원래 의도했던 팀 재건이 2년이나 뒤로 밀린 팀 상황을 고려할 때 막중한 임무를 첫 감독 경력부터 맡게되었다.

그리고 김성한 이후 무려 21년만에 타이거즈 원클럽맨 감독이 되었다. 김종국은 요미우리식 순혈에 제대로 부합하는 감독이며, 출신지가 전라북도 군산시인 김성한과 달리[4] 김종국은 출신지마저 해태-KIA의 연고지인 광주광역시 토박이로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을 제외하면 한 번도 광주를 떠난 적이 없으며, 선수 & 코치로써 차근차근 올라와 감독에 까지 오른 순도 100% 순혈이다. LG 트윈스류지현 감독처럼 연고지 출신까지 일치하는 사례이다.[5] 일본 주니치 선수 생활 & 삼성 감독 경력으로 완전 순혈로 보기엔 애매한 선동열을 포함해도 10년만의 프랜차이저이다.[6] 다만 김종국의 커리어는 리그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의 조건에는 못 미친다는 건데, 그래도 10여년간 주전 내야수로 타이거즈의 센터 내야를 지킨 선수이고, 원클럽맨으로서 프랜차이즈 스타에 준하는 성적은 내었다. 더불어 도루왕과 골든글러브도 수상한 경력이 있고, 당해에 국가대표에도 차출되어 아시안 게임 금메달도 목에 걸었다.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팀에서 꼭 필요한 선수였음은[7] 부정할 수 없다. 거기다 구단주인 정의선의 고려대 후배라는 점도 있다.성골도 이런 성골이 있을 수 있을라나 그러나 코치로서 보여준 능력조차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팀내 정치질로 승자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평이다[8] 광주 출신이라는 것, 단순히 타이거즈에서 오랜 기간 소속되었다는 이유[9]그리고 고려대 출신로 감독 선임이 된거 아니냐는 우려가 크다. 그리고 이는 현실로 드러났다


3.1. 2022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종국(야구)/2022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맹타를 휘두르는 팀을 데리고 고작 5할 승률을 선보이며 5위에 그쳤고, 결국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KT에 패하며 첫 시즌을 마쳤다.

3.2. 2023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종국(야구)/2023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위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였다.

3.3. 2024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종국(야구)/2024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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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초 2000년대 활약한 타이거즈 선수 출신이자 KIA로 구단명이 바뀐 뒤 뛰어본 선수 출신 감독이 되었다.[2] 김종국 감독이 말하기를 12월 4일, 대표이사로부터 연락이 왔다고 한다.[3] 특히 2020년 NC가 내부 승진 출신 이동욱을 앞세워 우승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또한 두산, 키움, 삼성 등이 일찌감치 확실한 내부 시스템이 자리잡혀서 내부 승진 출신 감독으로 성적을 뽑아내왔다는 점도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명장의 탁월한 지략으로 우승하는 시대는 지나갔고, 마찬가지로 지도력이 상식적 수준에조차 미달하는 졸장이 아닌 이상 시스템이 더 중요하다는 것. 최근 2021 한국시리즈를 우승한 kt wiz 감독 이강철도 KIA, 넥센, 두산에서 오랜 코치생활의 경험을 앞세워 kt의 시스템을 재정립하여 3년만에 통합우승을 이루어내었다.[4] 단 김성한이 신인으로 입단하던 당시엔 전북도 어엿한 해태 연고지였다.[5] 흥미롭게도 둘다 키스톤 콤비 출신이다.[6] 선동열도 광주 토박이라 주니치 선수, 삼성 감독 등의 경력만 없었다면 이 조건을 완벽히 충족시킨다.[7] 2000년대 초중반 KIA의 간판은 이종범, 장성호였다.[8] 스토브리그에서 재송 드림즈의 코칭스태프들은 차기 감독직을 본인이 먹기 위해 파벌싸움과 정치질을 기본으로 일삼는다.[9] 다들 알겠지만 타이거즈 우승 감독 중 타이거즈 선수 출신은 없다. 당연히 한국시리즈에 간 감독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