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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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정몽구
(2000 ~ 2020)
2대
정의선
(20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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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선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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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그룹 제2대 회장
정의선
鄭義宣|Chung Eui-sun


파일:현대자동차_정의선.jpg

출생
1970년 10월 18일 (53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거주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본관
하동 정씨 (河東 鄭氏)
직업
기업인
종교
개신교[1]
현직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현대자동차 대표이사 회장
대한양궁협회 회장
아시아 양궁 연맹 회장
전북 현대 모터스 구단주
학력
경복초등학교 (졸업)
구정중학교[2] (졸업)
휘문고등학교 (졸업 / 81회)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경영학 / 학사)
샌프란시스코 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 석사)
재산
약 28억 달러 (한화 약 3조 6960억 원)[3]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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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정몽구, 어머니 이정화
형제자매
누나 정성이, 정명이, 정윤이
배우자
정지선[1]
자녀
장녀 정진희(1996년생)[2]
장남 정창철(1998년생)[3]
차녀 정진아(2003년생)
병역
전시근로역 (담낭절제술)[4]
신체
171cm


1. 개요
2. 생애
3. 경영 능력
4. 활동 내역
5. 경력
7. 여담
8. 스포츠
9.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대한민국기업인. 현대자동차그룹 제2대 회장.

전북 현대 모터스 구단주, 대한양궁협회 회장, 아시아 양궁 연맹 회장직 등도 겸임한다.


2. 생애[편집]


1970년 10월 18일,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초대 회장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휘문고등학교(81회),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그 후 영어를 익혀야 한다는 정주영 명예 회장의 권유로 곧바로 미국으로 유학, 샌프란시스코 대학교에서 MBA를 마치고 일본 기업인 이토추 상사(伊藤忠商事)[4]에서 2년 근무했다.

1995년, 삼표그룹 정도원 회장의 장녀인 정지선과 결혼했는데 혼맥을 맺기 위한 정략혼이라기보다는 어릴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가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사귀기 시작했다고 한다.[5] 여담으로 정의선의 사촌동생인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과 동명이인인데 본관은 다르지만 성과 이름이 같다 보니 결혼할 당시 집안의 반대가 있었으나 정주영 명예회장이 허락해 결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슬하에 1남 2녀가 있으며 부부 간의 금슬이 상당히 좋다고 한다.

1994년, 이미 현대정공에 입사한 상태였으나 본격적인 경영 수업은 1999년에 현대자동차 구매실장(이사대우)으로 시작했고 이후 영업지원사업부장(상무), 국내영업본부장(전무), 현대기아차 부사장, 기아차 사장 등을 거쳐 2009년에 현대자동차그룹 부회장이 되었다. 2020년에는 아버지이자 초대 회장 정몽구의 자리를 물려받아 제2대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됐다.


3. 경영 능력[편집]


연령대가 비슷한 기업가들 중에서 매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인 정주영, 큰아버지 정몽필, 아버지 정몽구, 작은아버지들인 정몽근, 정몽우, 정몽헌, 정몽준, 정몽윤, 정몽일과 같은 상에서 아침밥을 먹으면서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았고[6] 자가 범위 내에서 성공한 기획들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피터 슈라이어를 기아 디자인 총괄 부사장으로 영입해서 기아의 디자인 수준을 끌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DESIGN? KIA!'라는 광고 캠페인 등의 브랜드 마케팅을 전개함으로써 기아에 대한 이미지를 제고한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또한, 현대자동차그룹의 프리미엄 브랜드인 제네시스의 성공적인 론칭과 성과의 배후에 정의선의 리더십이 크게 작용했고, 추후 현대자동차그룹의 경영권 승계에 가장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평가받았다.

반면, PYL 개발을 주도했지만, 매우 저조한 실적을 거둬서 빛이 바래기도 했다. 그래도 다른 성과들로 차고 넘치게 만회했으니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신차 발표회에 발표자로 나서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은 선임행정관이 2014년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자필 메모에서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의 경영능력이 검증되지 않았다고 언급하며 "기아 내부에선 현대차로 자리를 옮긴 정의선 부회장에 대해 언제 돌아오냐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쓰여있을 정도로 이재용과 비교하며 정의선의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엄하게 손자를 교육했던 정주영도 생전에 어린 정의선을 보고 물건이라면서 언젠가 중책을 맡을 것이라 자주 이야기했고, 정의선을 매우 총애했다고 한다.

2018년에 수석 부회장으로 승진했는데, 아버지 정몽구가 아무리 정력적으로 활동하기는 해도 80대의 고령인 데다가 건강도 다소 약화된 면이 있었다. 그리고 2020년 10월 14일, 자신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현대자동차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10대 재벌 총수 중에서는 구광모 LG 회장에 이어 두 번째로 젊다.


4. 활동 내역[편집]


  • 2019년 4월 25일, 조양호 한진 회장이 별세하자, 빈소를 찾아가서 조문했다. #

  • 2020년 10월 28일, 이건희 삼성 회장이 별세하자, 빈소를 찾아가서 조문했다. #

  • 2021년 5월 24일, 경기 화성시 현대, 기아차 기술연구소를 방문한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를 만났다. #




5. 경력[편집]


  • (1999년 ~ 2002년) 현대자동차 국내영업본부 영업담당 겸 기획총괄본부 기획담당 상무
  • (2002년 ~ 2003년) 현대자동차 국내영업본부 부본부장 전무
  • (2003년 ~ 2005년) 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7] 기획총괄본부 부본부장 겸 기아자동차 기획실장 부사장
  • (2005년 ~ 현재) 대한양궁협회 회장
  • (2005년 ~ 현재) 아시아 양궁 연맹 회장
  • (2006년) 세계경제포럼, 차세대 지도자
  • (2008년 ~ 2009년) 기아자동차 해외 담당 사장
  • (2009년 ~ 2018년 9월) 현대자동차 기획 및 영업 담당 부회장
  • (2019년 3월 ~ 현재) 현대자동차 대표이사
  • (2018년 9월 ~ 2020년 10월) 현대자동차그룹 총괄 수석 부회장
  • (2020년 10월 ~ 현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6. 가족 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범현대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여담[편집]


  • 대기업 회장 중에도 목소리가 상당히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듣고 보면 깜짝 놀랄 정도다. 실제로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가 정의선 회장에게 외적인 부분(목소리)을 칭찬한 바 있다.

  • 현대글로비스 일감 몰아주기나 현대자동차 PYL 프로젝트의 실패에 대해서는 비판이 있었지만 뛰어난 능력을 입증[8]하며 리더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 아버지 정몽구대한민국 육군 병장으로 만기제대한 것과 다르게 정의선 본인은 담낭 절제술이라는 큰 수술을 받은 병력이 있어 병역면제를 받았다. 정의선의 어머니 이정화는 2009년에 향년 71세로 담낭암으로 사망했는데, 아마도 정의선의 담낭이 약한 것도 모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족력일 가능성이 높다. 기본적으로 현대가 자체가 병역과 관련해서는 깨끗한 편이고, 정의선 본인 역시 이런 가족력이 감안되어서인지 병역 문제로 발목이 잡힌 적은 없다.[9]

  • 한화그룹의 후계자 김동관도 그렇지만, 이 쪽도 사진들을 보면 탈모가 상당히 심하다. 다만 김동관은 부친 김승연대머리 수준으로 벗겨졌다면 정의선은 정몽구가 80대의 고령임에도 머리숱이 상당히 풍성한 것과 대조된다. 현대가에서 탈모 유전자는 정주영의 친동생 정세영 쪽에 있는데, 희한한 것은 정주영의 손자들 대에서 탈모가 보인다는 것이다. 정의선은 물론 정일선과 정경선도 나이대에 비해 이마가 조금 넓은 편이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금수저 재벌급들은 돈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아무리 탈모가 와도 이런 치료는 전혀 하지 않는 듯 하다. 근데 이것도 사실은 이유가 있는데, 탈모약 자체의 부작용을 재벌들이 상당히 꺼린다고 한다. 혈족경영위주의 대기업 특성상 많은 자식들이 후계자로 필요한데, 탈모약의 대표적인 부작용인 성욕 감퇴나 어지럼증 등은 워커홀릭형 오너 일가들에게는 가장 크고 예민한 문제 중 하나다. 비단 재벌 뿐만 아니라 유럽의 왕족들도 그러한 이유로 탈모약을 먹지 않고 민간치료요법 위주로만 나선다고 한다. 사실 심는다는 선택지가 있긴 하지만, 이명박을 보면 알 수 있듯 모발이식도 15~20년 뒤에는 결국 다시 빠지기 마련이라, 정의선 같이 이른 나이에 탈모가 온 경우에는 모발이식도 정답이 아니다.

  • 2020년 10월 26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빈소에 조문을 갔다. 재계 총수 중에서는 가장 먼저 왔고, 이틀 후인 28일에는 영결식에도 참석했는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도 친분이 두텁다.

  •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아르헨티나 vs 독일 경기 때 직관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힌 적이 있다. 현대자동차가 월드컵 공식 스폰서이기 때문에 대기업 회장 자격으로 관전 온 것으로 보인다.

  • 실제 성격이 차분하고 겸손한 것으로 알려졌다.


8. 스포츠[편집]


야구 종목을 제외하고 양궁, 특히 축구 방면으로 상당한 투자를 하는 한편, 하는 일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선수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분야를 막론하고 대한민국 프로 스포츠 팀 가운데 대단히 이례적으로 구단주-프런트-감독의 영역을 확실히 해서 다른 쪽에 개입하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고 본연의 일에만 집중하는 방향으로 스포츠단을 이끌어 가며 축구 팬들에게 호평을 받는다. 사실상 국내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 때문에 당연하게 나오는 현대차·기아에 대한 혹독한 비판 여론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는 효과도 있는 듯하다. 그리고 현대자동차그룹은 이런 투자를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 홍보에 잘 써먹는 기업 중 하나다.


8.1. 양궁[편집]


2005년부터 대한양궁협회 9대 회장에 취임했다. 현대그룹 차원에서도 아낌없는 지원을 펼친 전례와 마찬가지로 선수와 협회원들에게 뛰어난 대우와 철저한 준비로 호평을 받았는데, 일례로 2012 런던 올림픽 때 양궁 경기장이 선수촌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라 선수들이 이동하며 컨디션을 흐트러뜨릴까봐 아예 경기장 근처 호텔방을 잡아 선수들을 묵게 해주고 따로 한식당에서 도시락까지 주문해 제공했다고 한다. 2016 리우 올림픽 때는 선수들의 모든 경기를 지켜보고 직접 단체사진까지 찍어줬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도 양궁 대표팀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금메달 4개를 수확하는데 일조했다. # 이후에는 김제덕부터 양궁 선수들에게 '○○쿵야'와 같이 야채부락리의 캐릭터 이름 닉네임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덕질 만족도 최상이라고 '회장쿵야', '현대쿵야'라는 별명이 생겼다. 올림픽이 미뤄지자 만일 올림픽이 취소된다면 올림픽 양궁과 비슷한 규모의 국제대회를 개최해주겠다고 맹세해서 양궁 선수들이 긴장을 유지하도록 했다고 한다.


8.2. 전북 현대 모터스[편집]


지방 중소구단에 불과하던 전북이 2006년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괄목할 임팩트를 주는 것에 주목하고 축구 지원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2010년대 빅클럽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2009년부터 전북이 리그 최종 순위 1-3-1-2-3-1-1-2-1-1-1-1-1-2이란 호성적을 기록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강팀으로 거듭난 것 역시 이런 철저한 역할 분담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전북이 롯데에게 전하는 교훈(2014년) 특히 2014년부터 공식 대회(K리그1, FA컵, AFC 챔피언스 리그 등) 10년 연속 우승을 거두고 있어 괄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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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전북이 최초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자 최강희 감독을 만난 자리에서 "뭐 필요한 것 없냐?"고 물었고, 최강희 감독은 클럽하우스를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이철근 단장에게 건립을 지시했다. 더구나 기왕 짓는 김에 최고로 짓자고 세계 유수의 클럽들을 견학하며 필요한 정보를 수집했고 2013년 완공한 율소리 클럽하우스는 국내를 넘어 아시아에서도 최고 수준의 시설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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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는 이동국이 전북 소속으로 100골을 기록하고 다섯째까지 출산하는 경사를 맞은 기념으로 스타렉스 리무진을 선물했다. 직접 면담을 가진 이동국은 본인의 예상보다도 전북 팀과 본인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다고 전했다.

2016년 전북이 10년 만에 아시아 챔피언에 복귀하며 모기업의 복덩이 역할을 다시 한번 해냈고, 이에 따라 구단주인 정의선의 투자는 더욱 증대할 것으로 보인다.

2020년 11월 1일 이동국의 은퇴식에도 킥오프 때부터 은퇴식까지 끝까지 자리를 지켰으며, 직접 이동국에게 감사패와 함께 현대 스타리아를 선물했다. 전북 팬들은 "KBO 리그택진이형[10]이 있다면 K리그에는 갓의선이 있다."#고 할 정도로 좋은 평판을 받는 구단주다.

2021년 박지성을 전북 현대의 어드바이저로 위촉하는 과정에서 박지성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 전북 현대 구단을 세계적인 팀으로 만드는 데 동참해 줄 것을 부탁하는 등 구단주로서는 이례적으로 직접 나서며 삼고초려를 성공시켰다.#

2021년 전북 현대K리그1 우승을 전주 월드컵 경기장에서 함께했다.

파일:Screenshot_20230410_080249_YouTube.jpg

으로 리로 임한 감독, 팀은 폭망


하지만 2023년에는 평가가 깎이고 있다. 3년 내내 경기력, 결과 뭐 하나 발전 없이 퇴보만 거듭하는 김상식 감독과의 비공개 다년 재계약을 해버린 것. 분명 선수 영입에는 늘 힘을 실어주고 있지만 하필 감독이 감독인지라 경기력과 결과 둘다 못 챙겨오는 최악의 상황이다. 만약 지금보다 더 낮은 성적을 기록했을 때도 경질을 선택하지 않으면 평가가 김상식급은 아니더라도 감독보는 눈이 없는 회장으로 평가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나마 김상식이 자진 사퇴하면서 정의선에게도 불똥이 튈 가능성은 다소 줄었다.


8.3. KIA 타이거즈[편집]


정의선은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야구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으며 그의 구단 운영은 형식적인 운영에 지나지 않는다. 오너로서의 능력 자체는 무능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구단주직을 맡고 있지 않고[11] 여러모로 야구단에 드는 돈을 아끼기 위한 노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2014년 시즌 후 뜬금없이 야구 팬들에게 주목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3년 연속 KBO 포스트시즌에 실패해 계약이 만료돼야 할 선동열 감독이 2014년 10월 19일 2년 재계약을 맺었고 그것이 정의선의 지시라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거의 무명이었던 정의선이 나무위키에 등재된 시기도 이 시기다. 구체적인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야구에 무관심한 탓에 선동열의 이름값만 믿고 재계약을 강행하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 또는 선동열이 고대 선배이기 때문에 밀어준다는 소문도 있었다.

다만 성적이 잘 나오면 가끔 관심을 가져주기도 하는데 2009년 KIA 타이거즈가 우승했던 당시 야구단에 무관심했던 정의선[12]을 비롯한 구단 상층부에게 적극 지원과 투자 약속을 받아냈고 그 결과가 바로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기아 챌린저스 필드다. 여기에 1, 2군에 재활시설을 확충한 것도 현장 및 프런트가 아닌 그룹 고위 관계자 측에서 필요에 의해서라고 한다.

FA 계약으로 어중간한 선수 대신 S급 선수에게 확실한 거금을 투자해서 데려오는 유형이다. 2011년 당시 S급이었던 이범호를 FA로 데려왔고 2012년 시즌 종료 후에는 FA 외야수 김주찬을 4년 50억에 영입한 바 있다. 2015년 3월에는 미국에서 돌아온 윤석민에게 무려 4년 90억이라는 거금을 안겨 줬다. 2016년 시즌 종료 후에는 더욱 과감한 투자를 보여줬는데 당시 FA 최대어였던 최형우와 4년 100억에 계약하면서 사상 첫 100억대 계약을 이뤄냈고 구단 내 FA였던 나지완을 4년 40억에 잔류시켰으며 양현종 또한 1년 22억 5000만 원에[13] 잔류시킨 것이 예시이다. 결국 KIA는 2017년 통합 우승에 성공했고 한국시리즈 1차전과 5차전에는 직접 방문했다. 정치인들과 야구를 관전했으며 5차전 우승 직후 김기태 감독과 포옹하는 장면도 보였다.우승 직후 김기태 감독과 포옹하는 정의선

이후로는 이만하면 충분히 해 줄 만큼 해줬다고 여긴 것인지 다시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인지 KIA가 신세계그룹에게 타이거즈 구단을 매각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한동안 돌았으나 결과적으로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졌다.[14]

그렇다 해도 정의선은 야구단에 무관심한 것과는 별개로 야구단을 구입하겠다는 타 기업이 없으면 2040년까지는 야구단을 포기할 수가 없는 상태다. 광주광역시와 체결한 계약상 2040년까지는 의무적으로 챔피언스 필드 구장 운영을 해야함과 동시에 야구장 관련 이권이 걸린 지역 유지들의 이해관계가 엮여있는 탓에 마음대로 야구단을 해체할 수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2021 시즌이 끝나고 갑자기 과감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단장, 사장, 감독을 싸그리 물갈이하는 것은 물론 사장 자리에 기아 부사장인 최준영을 앉힌 것을 시작으로 FA 시장에서도 500억 원을 투자한다는 소문이 돌더니 실제로 당해 최대어이자 NC 다이노스에 잔류할 것이 유력해 보였던 나성범에게 과감하게 배팅해서 6년 총 150억이라는 거대 계약으로 영입에 성공했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미국에서 돌아온 양현종에게 103억을 안겨주는 등 이전과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며 KIA 팬들을 놀라게 했다. 이러한 정의선의 투자 끝에 KIA는 4년 만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다.


8.4. 현대 모터스포트[편집]


현대자동차의 모터스포츠 활동 역시 정의선이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2014년 월드 랠리 챔피언십 재도전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17년 10월부터는 TCR까지 참가하고 있으며 2018년부터 TCR 컨스트럭터 월드챔피언과 WRC 매뉴팩처러 2연패 등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는 중이다.


9.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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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사 1, 2[2] 現 압구정중학교[3] 2023년 포브스 기준. 대한민국 부자 순위 11위.[4] 일본 5대 상사의 일각인 초대형 종합상사.[5] 현대 가문은 정주영 회장 대부터 자녀들에게 자유로운 연애를 허락하던 풍조로 인해 다른 재벌 가문보다 연애 및 결혼에 대한 집안의 간섭이 덜한 편이다.[6] 현대 일가는 종법의 풍습을 그대로 유지한 집안인데 남자들이 앉는 밥상과 여자들이 앉는 밥상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정의선이 소위 '헤드 테이블'에 앉은 것은, 집안의 장손이었기에 사실상 특별 대우를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82년 타계한 큰아버지 정몽필은 슬하에 아들이 없었고 딸만 둘이었다.[7]기아[8] 물론 자신이 직접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거물 디자이너엔지니어를 영입한 것만으로도 경영자로서의 능력은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리더도 사람인 만큼 모든 일을 다 만능으로 잘 할 수는 없다. 각 분야의 뛰어난 사람을 데려와 잘 사용하는 것도 뛰어난 리더로서의 덕목이라고 볼 수 있다.[9] 다만 정의선 본인은 이게 그다지 내세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현대차그룹 임원들은 정의선 앞에서는 가급적 군대 이야기만큼은 일체 꺼내지 않는다고 한다.[10] 다만 2021년 들어 SK 와이번스를 인수한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의 등장으로 존재감이 밀려났고 본인 역시 모기업대형 사건에 연루된 데다가 야구팀에서도 선수들의 방역수칙 위반 사건이 터져 평판이 크게 내려갔다. 거기에 사실상 본인이 직접 꽂은 임선남 단장이 트롤짓만 연달아 저지르며 사람 보는 눈이 너무 없다고 구단 팬들에게조차 이미지가 급격히 안 좋아지고 있다.[11] 구단주직은 2021년까지 정몽구 명예 회장이 맡았다가 2022년부터 구단주 대행을 맡던 송호성 기아 사장이 담당하고 있다.[12] 참고로 당시 구단주 대행은 서영종 당시 기아 사장.[13] 금액만 두고 보면 양현종이라는 이름값에 비해 적어 보이지만 사실 이는 당시 양현종이 해외 진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우선 KIA와 잔류 계약을 맺었고 이후 선수 본인이 해외 재진출 의사가 있을 경우 자유롭게 풀어주는 조건을 넣은 단년 계약이라 그렇기 때문이다. 이후 2018년~2020년에는 3년 동안 연봉으로만 매년 23억을 받으면서 결과적으로는 4년 총 91억 5000만 원 계약인 셈이 됐다.[14] 결정적으로 신세계가 접근한 구단이 두산, 키움, SK 이 세 곳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확히는 두산과 키움을 먼저 찾아갔다가 거절 당하고(특히 키움은 키움증권과 스폰서십 계약을 체결한 지 얼마되지 않아 매각하기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세 번째로 찾아간 게 SK였고 결국 SK 와이번스를 인수해 SSG 랜더스를 출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