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박/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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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김재박

1. 코치 경력
2. 감독 경력
3. 평가
4. 스타일
6. 역대 감독 전적



1. 코치 경력[편집]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0970437_STD.jpg
태평양 돌핀스로 건너가 1년을 더 뛴 김재박은 자신의 기량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인정하고 1992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끝낸 뒤 1993년부터 전업 코치로[1] 변신했다.

애초에 몇년간 플레잉 코치로 일하면서 코치 경력이 그럭저럭 있었고 실업야구와 프로야구 초창기 시절부터 유명세를 떨친 슈퍼스타였기에 그에 대한 상징성을 고려해 수석코치 겸 3루 주루 코치라는 중책이 부여된다. 코치 재임 당시 그가 보좌했던 감독은 대구 출신 선배 야구인 정동진.

2. 감독 경력[편집]



2.1. 현대 유니콘스 시절[편집]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kp1_2050830s1956.jpg

현대 유니콘스 No.70
김재박(金在博)

이후 현대 유니콘스가 창단되면서 새 구단에 어울리는 젊고 영리한 감독의 상에 부합한다는 현대그룹 고위층[2][3]의 판단에 따라 감독으로 취임한 후,[4] 11시즌 동안 4회 우승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역대 감독 최단기간 승수 기록을 차례차례 경신하며 한국 최고의 감독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페넌트레이스 전체 승률 6할이 넘어간 시즌이 총 3번(98년, 2000년, 2003년)이다.[5]

사실상 현대의 전성기는 김재박의 감독 커리어 전성기였으며 그의 재임 시기에 플레이오프를 못 나간 횟수가 1997년, 1999년, 2005년 단 3번[6]이고 5할이하는 97, 05년 단 2번이었다. 팀이 서울 이전 추진 및 재정난으로 기울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에 통합우승 2연패를 달성하였고, 해체/매각 기로에 서 있던 2006년에도 정규시즌 2위를 기록하면서 명장으로 이름값을 높였다. 다만 소위 선수빨,돈빨로 야구한다는 비난과 지나친 번트 작전 선호 및 개인 기록 관리와 국대 감독으로서의 도하 참사 삿포로 참사 때문에 안티들도 상당했다.

2017년 강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 당시 감독들은 1~2년하다 잘리는 파리목숨이라서 본인도 그렇게 될 줄 알았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이기는 야구로 팬을 야구장에 불러 모으고 싶었고, 그런 야구가 미국식 야구라 생각해 전지훈련을 미국 플로리다 브래던튼으로 1~1.5개월씩 갔으며, 미국인 인스트럭터, 트레이너를 고용해 효과를 보기도 했고, 코치들이 선진 코칭기법을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7]

김응용 감독의 해태 18년 다음으로 단일구단 최장 기간 감독재임(11년)을 기록하고 있다. 3위는 김인식 감독의 두산 9년.

2.2. LG 트윈스 시절[편집]


LG 트윈스 No.70
김재박(金在博)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99r74102.jpg

그리고 2006년 시즌이 끝나고 기울어져가는 현대와의 계약이 끝난 뒤 계약기간 3년, 계약금 5억에 연봉 3억 5천이라는 당시 역대 최고 대우를 받으며 LG 트윈스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8][9] 이순철 전 감독이 부임하던 기간에 온갖 악재에 시달려온 LG 팬들은 현대 왕조를 이끌었던 김재박이 온다는 소식에 환호했다. 부임 첫 해인 2007년에는 막장 전력에도 불구하고 아깝게 5위에 그치며 팬들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2008년과 2009년에는 연속으로 최악의 추락을 보이며 감독으로서의 역량마저 비판받는 처지에 올랐다.

2009년 5월 9일, LG 감독으로서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승리하여 최연소 통산 900승을 달성하였다. 이러한 막장이 된 행보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김재박이 LG에 공헌한 것이 2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2007년을 전후해 대거 돌아온 올드팬들, 두 번째는 스카우트진 개편을 통해 2010년대 LG의 핵심 전력이 될 유망주들을 발굴한 것이다.[10]

3. 평가[편집]


LG 및 국대 감독으로 참담한 실적을 기록하면서, 현대 시절의 실적 또한 실은 모기업의 빵빵한 지원, 프런트의 뛰어난 역량[11]에서 비롯된 것이지 김재박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2000년 이후 현대는 부자팀이 아니었다. 프런트의 능력이 아무리 좋더라도 돈이 없는 팀이 프런트의 능력만으로 예산부족을 커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FA등으로 선수들을 하나둘씩 뺏기며 선수층은 매우 얇아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가 2006년 정규시즌 2등을 했던 것은 지금까지도 기적으로 불릴 정도였다. 이는 분명히 김재박 감독의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또한 현대 초기, 태평양의 약체 타선을 물려받고도 이명수를 중용해 내야와 타선을 강화한 점, 전성기가 지난 최창호를 팔아 당시 저평가돼있던 박종호를 데려와 최고의 2루수로 키워낸 점[12], 신인시절 물방망이질을 자랑했던 박진만을 한국을 대표하는 명 유격수로 성장시킨 점[13], 박경완을 내준 이후 김동수를 과감히 중용해서 제 2의 전성기를 맞게 하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끈 점, 포수였던 이택근의 포지션을 중견수로 바꿔주고 타격 재능을 끌어낸 점 등은 분명히 명감독의 소양이 있어야 가능한 부분들이다. 결국 현대시절의 성적은 프런트와 감독의 시너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건데 이제 와서 김재박의 현대시절 업적을 일방적으로 평가절하하기는 힘들다.

LG시절 팀 성적 추락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부임 첫 해였던 2007년, 전임 이순철 감독이 역대 최악 수준으로 말아먹은 팀에서 우규민[14], 이대형, 최동수를 발굴하여 중용하고, 척박한 불펜진 속에서 김민기마당쇠노릇 시키며 시즌 막판까지 아슬아슬하게 4강 경쟁한 부분은 분명 김재박의 능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후임인 박종훈 감독이 1998년 이래 역대 최강전력을 구축했던 2011년 4강과 한참 동떨어진 성적을 기록한 것을 생각하면 김재박이 감독으로 무능했다고 보긴 힘들다.

오히려 감독 여하 현장 스태프들이 허약한 전력을 잘 활용하여 선전했음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해서 전력보강에 임했어야 하는 구단은 2008년 단 1명의 FA도 잡아주지 않았고[15] 박명환의 부상과 2007년의 주역이었던 우규민, 이대형, 최동수, 김민기, 조인성이 모두 전년도만 못한 성적을 냄에 따라 봉중근, 크리스 옥스프링의 대활약이 더해졌음에도 팀 전체 전력은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결과를 낳았고 원투펀치를 제외하면 총체적으로 무너진 마운드는, 2009년 두 명의 야수를 FA로 보강하면서 타선을 정상화시켰음에도 옥스프링의 부상으로 인한 전력이탈을 버티지 못하면서[16]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못했다. LG 트윈스/2009년 참고.

그런 와중에서도 트레이드를 통해 잉여자원을 정리해서 손인호대타요원으로 활용하고 조인성과는 현격한 기량차를 보였던 최승환이재영으로 바꿔와서 2008 시즌에 중간계투로 요긴하게 활용했다.[17] 무엇보다 최승환 트레이드로 생긴 백업포수 공백을 은퇴한 김정민을 컴백시켜 메꾸고, 조인성의 주전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활용한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라 할 수 있다.[18]

결론적으로, LG 감독 시절 성적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는 어렵겠지만, 감독으로서의 능력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현대 시절에는 최고의 프런트와 함께하여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고, LG 시절에는 전임 감독의 삽질과 수준의 프런트 때문에 본인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망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선수 및 지도자는 커리어로 증명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김재박은 충분히 명장으로 불릴 좋은 커리어를 기록한 감독이다. 비록 감독 말년 LG에서 5-8-7을 기록하며 아쉬운 모습을 보였지만 성적을 내지 못하면 바로 경질되기 쉬운 프로 스포츠 및 프로야구에서 현대 유니콘스의 초대감독으로 무려 11년을 재임하여 한국시리즈 4회 우승을 달성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대업적이다. 김응용 감독의 해태 18년 다음으로 단일구단 최장 기간 감독재임(11년)을 기록했다는 거에서부터 이미 감독으로서 역량은 검증되었다는 것.[19]

다만 국대 감독으로서의 삽질은 커버 치긴 어려운 수준. 그가 감독을 맡은 대표팀은 즉즉 를 일으켰다. 김재박은 국대 감독으로서 선수 선발 및 관리, 팀 케미스트리 유지 면에서 문제를 보였다. 삿포로 참사 때 보였을 당시에 상대였던 일본 대표팀은 1군급 전력을 자랑했던 터라 쉴드의 여지가 있었으나, 도하 참사 당시 상대였던 일본 대표팀은 그보다 한참 떨어지는 수준이었는데도 같은 문제점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실드도 다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20]

4. 스타일[편집]


현대시절부터 번트작전을 하도 시켜 김번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덕분에 야구판이 재미없어졌다면서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당시 현대 팬들은 김재박의 경기운영에 대해 그다지 비판적이지 않았고 우호적인 반응이 많았다. 다만 현대팬의 수가 적었다보니[21] 실드가 안 쳐진게 김재박의 불운이라면 불운.

위에 링크된 기사에서는 김재박이 06년 번트를 많이 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빈약한 타선과 투고타저의 시즌 흐름에서 찾고 있지만, 당시 번트 신기록을 세웠던 06년 현대는 경기당 득점은 물론이고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등등 주요 공격 지표에서 모두 1위를 한 팀이었다. 다시 말하면 김재박은 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력을 지닌 팀을 운영하면서도 누구보다도 많은 번트를 댔다는 의미이다.

원인을 투고타저에서 찾는 것도 역시나 말이 되지 않는데, 99년은 김재박이 감독으로 있던 시즌 중 가장 타고투저가 심했던 해이나 이 시즌의 번트 1위 팀은 127개로 2위인 99개의 롯데를 크게 앞서는 현대였다. 물론 이 시즌의 현대는 공격력이 하위권이긴 했지만, 김재박은 리그의 투타 흐름이나 본인이 맡은 팀의 득점력과는 관련 없이 언제나 번트를 선호하는 감독이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심재학의 회고에 의하면 팀의 최전성기였던 00년에도 자신을 4번으로 박아놓고 번트를 댈 상황이 아닌 거 같은데도 번트를 자주 지시했다고 한다.

도하에서의 실패가 비난받은 것은 물론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이 일차적인 이유지만, 강력한 국대 타선을 운영하며 객관적으로 전력이 훨씬 떨어지는 팀을 상대로도 초반부터 번트 일변도로 나가다가 패했다는 점 때문에 더욱 더 많은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특정 선수를 편애한다는 인상을 줄까봐 의도적으로 선수들과의 사적 교류를 피하고, 시즌 중 단체 미팅도 거의 소집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수들에게 전달 사항이 있으면 코치들을 통해 전달하였다고 한다.[22]

본인은 선수 시절 홈런을 잘치는 타자가 아니었는데, 감독이 된 후에는 홈런을 너무 좋아해서 인천 숭의야구장의 펜스 높이를 낮추고[23] 수원야구장의 외야 펜스 앞에 이중펜스를 쳐서 100-125-100 규모의 경기장을 95-120-95로 만들었으며 LG 감독 시절에는 전설의 X-존을 만들어 잠실 홈런난무에 일조하기도 했다.

기록 브레이커라는, 기록 관련 악명이 높았기로도 유명한데 이는 본문서를 참조 바란다.


5.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편집]


현대 감독 시절인 2005년, 시즌 초반에 전년 우승팀이면서 심정수, 박진만 등 주축이 이탈해 일시적으로 현대가 꼴찌를 하고, 전년도 꼴찌팀 롯데 자이언츠가 잠시 1위를 한다. 이에 대한 질문이 들어오자 "5월이 되면 내려가는 팀이 나온다"며 천천히 올라가면 된다는 긍정론을 폈다.

이 말이 와전되어 그 유명한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가 되었고, 널리 퍼졌다.

6. 역대 감독 전적[편집]


역대 감독 전적
년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96
현대 유니콘스 [24]
126
67
54
5
4위 [25]
준우승[26]
1997
126
51
71
4
6위
-
1998
126
81
45
0
1위
우승
1999
132
68
59
5
3위[27]
-
2000
133
91
40
2
1위[28]
우승
2001
133
72
57
4
2위
3위[29]
2002
133
70
58
5
3위
4위[30]
2003
133
80
51
2
1위
우승
2004
133
75
53
5
1위
우승
2005
126
53
70
3
7위
-
2006
126
70
55
1
2위
3위[31]
통산
1427
778
613
36
­
연도
소속팀
경기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07
LG 트윈스
126
58
62
6
5위
-
2008
126
46
80
0
8위
-
2009
133
54
75
4
7위
-
통산
385
158
217
10
­
총계
1812
936
830
46
­



[1] 사실 이미 LG 트윈스 말년부터 플레잉코치로 뛰었다.[2] 정확히는 초대 단장이었던 김용휘의 판단이었다. 원래 구단에선 김용휘의 고교 선배인 백인천의 영입을 검토했었다고. 물론 이 때까지만 해도 백인천 감독의 평은 LG를 우승시키고 삼성 감독으로 취임한 뒤에도 구단 내 파벌싸움을 뿌리뽑은 뒤 기존의 노장들을 정리해버리고 그 자리에 젊은 선수들을 파격적으로 기용해 대대적인 리빌딩에 성공하는등 나름 좋은 편이었다.[3] 참고로, 이 젊고 영리한 감독의 목록엔 허구연 해설위원도 있었다. 당시 허구연의 나이는 만 44세로, 넥센 히어로즈의 감독으로 취임한 염경엽의 나이와 같았다. 여담으로 허구연은 현대의 전신인 청보 핀토스의 감독을 35세의 나이에 역임했던 적도 있었다.[4] 96년 현대 감독 부임 당시 나이가 만 42세로, 부임 기준 나이로 치면 허구연(35세), 김용희(39세) 다음으로 빨랐다.[5] 김재박의 공도 컸지만 김용휘의 공도 무시할 수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김용휘 항목 참조.[6] 그러나 1999년은 5할 플러스를 찍었다.[7] 여담으로 조용훈박명환야구TV에서 술회하기를 신인 김세현(당시 김영민)과 조용훈이 1군 전훈멤버에 포함됐는데 미국 출국 전 김재박 감독이 있는 공항 흡연실에서 태연하게 둘이서 담배를 피다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선배들한테 집합이 걸렸다고 한다.[8] 당시 구단 수뇌부는 김재박 영입을 반대했으나, 당시 LG스포츠 사장인 김영수가 강하게 밀어붙여 성사시켰다.[9] 당장에 LG는 프론트 야구 및 신바람 야구를 캐치프라이즈를 내세웠기 때문에 당시 이와 상반되게 스몰볼 야구, 쥐어짜내기식 야구를 하는 김성근이 2002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했음에도 경질을 한 사례가 있는 만큼 스몰볼 및 번트야구를 추구하는 김재박 역시 탐탁지 않게 여겼을 가능성 또한 높았을 것이다.[10] 물론 당시 하위 성적으로 인한 신인 드래프트 상위 순번을 얻은 것 또한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11] 여기서 말하는 역량이란, 선수단의 문제점을 정확히 집어내어 감독이 말하기 전에 알아서 지원해주는 능력을 말한다. 실제로 당시 현대 유니콘스 스태프들은 야구계에서 이구동성으로 으뜸이라 불리는 조직이었다. 비록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지만, 김재박은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 성장하고 길들었기에 정작 그 시스템을 벗어났을 때 성적이 말이 아니었다는 것도 충분히 일리있는 말이다.[12] 당연 LG팬 입장에서 생각하면 통탄할만한 트레이드다 [13] 신인 시절 박진만은 포수 장비를 착용하고 펑고를 받는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 펑고를 김재박이 직접 쳐줬는데 김재박 본인 손에서 피가 날 정도로 쳤다고 한다.[14] 우규민을 김재박 감독이 발굴했다고 보기엔 어렵다. 이미 김재박 부임전인 2006 시즌부터 마무리로 1점대방어율과 17세이브를 기록한 선수였기 때문이다.[15] 당시 김재박 감독은 차마 비싼 선수 질러달라는 말은 못하고 하다못해 자신이 현대시절 가장 요긴하게 써먹었던 불펜요원인 조웅천이라도 잡아주길 구단에 요청했었다. LG의 불펜 사정은 그만큼 심각했었다. 물론 조웅천은 안 잡았다.[16] 그리고 프런트에선 늘 그렇듯 대체용병으로 최악의 선택을 했다 - 제레미 존슨릭 바우어[17] 덕분에 LG의 포스트 조인성감이 사라졌다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최승환은 조인성과 3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1978년생. 빠른 생일이어서 학번으로는 고작 두 학번 차이.) 기량차는 현격하다. 그렇게까지 아쉬운 선수였다고 보기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백업으로 준수하게 해준 김태군도 있다.[18] 이듬해 김정민이 부상당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반쪽짜리 성공이 되어버렸다.[19] 이후 김재박의 뒤를 이어 장기간 팀의 감독을 맡은 인물이 김인식이며, 두산의 감독을 맡아 9년의 임기 기간 동안 5번의 가을야구 및 한국시리즈 2회 우승을 기록하며 명장의 반열에 올라섰다.[20] 한편 두 경기 모두 프로야구 시즌 직후에 치러져 선수들의 피로도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라는 쉴드가 있는데,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에 치러졌던 광저우 아시안 게임이나 2015년 프리미어 12에서의 호성적이 설명되지 않는다. 즉 감독의 선수 피로도 관리에 문제가 있었다는 소리다.[21] 이는 원래 연고지인 인천을 버리고 서울로 튀려고 한 현대 유니콘스의 뻘짓이 결정타였다.[22] 주로 정진호 수석코치를 활용하였다.[23] 숭의야구장의 외야 펜스는 1.5m 높이의 콘크리트 펜스 위에 높은 철망을 덧대는 형태의 펜스였는데 김재박은 부임 전까지 5m였던 철망의 높이를 3.5m로 낮췄다. 김재박의 이같은 전략과 대척점에 있는 사람은 김성근으로 그의 부임 시 숭의야구장 펜스는 콘크리트 펜스 1.5m에 철망 높이만 7m로 전체 펜스 높이가 8.5m에 달했다. 그 시절만 해도 태평양 돌핀스가 타력은 물론 투수력도 영 좋지 않은 상태였기에 어렵사리 짜낸 묘안이었다.[24] 97, 99, 2005 세 시즌을 제외하면 모두 포스트시즌을 진출했다. [25] 전기시즌은 1위였다[26] 3위 한화, 2위 쌍방울을 꺾고 코시진출.[27] 드림리그[28] 드림리그[29] 페넌트레이스 3위였던 두산에게 패배[30] 페넌트레이스 4위였던 lg에게 패배[31] 페넌트레이스 3위였던 한화에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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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6 19:00:35에 나무위키 김재박/지도자 경력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