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우키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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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켈레아이 - 타울란티 왕국 10대 군주
Γλαυκίας | 글라우키아스
제호
한국어
글라우키아스
그리스어
Γλαυκίας
라틴어
Glaucias
존호

생몰 년도
미상 ~ 미상
재위 기간
기원전 335년 ~ 미상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엥켈레아이 - 타울란티 왕국 10대 군주.

2. 생애[편집]


기원전 344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주 필리포스 2세를 상대로 맞서 싸웠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봉신이 된 플루라토스 1세의 아들이다. 기원전 337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아버지 필리포스 2세와 갈등을 벌인 뒤 어머니 올림피아스를 친정인 에페이로스 왕국에 맡기고 일리리아로 망명했을 때, 그는 왕자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기원전 335년, 일리리아인들이 마케도니아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치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바르딜리스 1세의 아들 클레이토스와 함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두 사람은 아루티리아타족의 군주 플레우리아스와 동맹을 맺고 알렉산드로스 3세에 대항했다. 그와 클레이토스가 펠리움에서 알렉산드로스 3세를 대적하는 사이, 플레우리아스는 마케도니아군의 행렬을 급습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전에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알렉산드로스 3세는 자신과 동맹을 맞은 아그리아니아의 왕 랑가로스에게 플레우리아스를 치게 하고, 본인은 펠리움으로 진군해 클레이토스와 글라우키아스를 대적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펠리움 공방전에서, 클레이토스와 글라우키아스는 참패하고 펠리움을 불태운 뒤 글라우키아스가 이끄는 타울란티 족의 영역으로 달아났다.

알렉산드로스는 클레이토스의 영역을 합병한 뒤 도주한 두 사람을 추격하려 했지만, 테베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대를 돌렸다. 이후 일리리아인들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맞설 생각을 접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알렉산드로스가 동방 원정을 떠날 때 부대를 파견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가 헬레니즘 제국을 건국하는 동안, 그는 왕위를 조용히 유지했다.

파일:아기 피로스를 보호하기로 한 글라우키아스.jpg
장 샤를 르바세르 작, <피로스를 보호하기로 한 글라우키아스>, 1760년대.

기원전 317년, 카산드로스올림피아스를 도와 자신을 대적한 에페이로스 왕국의 군주 아이아키데스를 축출하고 네오프톨레모스 2세를 왕위에 세웠다. 아이아키데스의 추종자들은 아이아키데스의 유아 피로스 1세를 데리고 에페이로스를 탈출한 뒤 그를 찾아가 보호를 간청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글라우키아스는 처음에는 카산드로스와 갈등이 생길 것을 우려해 주저했지만 아기 피로스가 네 발로 그에게 다가가 망토를 움켜쥐다 넘어진 뒤 다시 일어나 자신의 발을 붙잡는 걸 보고 마음이 풀어져서 아내 베로에게 아기를 자기 자식들과 함께 키우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카산드로스는 200달란트를 줄 테니 피로스를 넘기라고 제안했지만, 글라우키아스는 단호히 거부했다.

317년, 그리스 식민도시인 에피담노스, 아폴로니아, 코르기라와 동맹을 맺고 카산드로스에 대적했다. 기원전 314년, 카산드로스는 아폴로니아를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 북쪽으로 진격하여 게누스 강을 건넌 뒤 글라우키아스를 물리쳤다. 이후 패퇴하는 척해 에피담노스군을 유인해 물리친 뒤, 에피담노스에 수비대를 배치했다. 이후 글라우키아스는 다시는 마케도니아에 적대적인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왕위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312년 조약을 파기한 글라우키아스는 에피담노스와 아폴로니아를 잇따라 탈환하고 마케도니아 수비대를 내쫓았다.

기원전 307/306년, 알케타스 2세의 폭정에 분노한 에페이로스 백성들이 봉기하여 왕을 시해했다.이에 당시 11세 또는 12살이었던 피로스 1세를 에페이로스의 군주로 옹립했다. 이리하여 에페이로스 왕국을 자신의 봉신으로 삼는데 성공했지만, 기원전 302년 피로스가 그의 아들 중 한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궁정으로 갔다가 일리리아인에게 복속된 왕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네오프톨레모스 2세를 복위시키는 바람에 왕국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글라우키아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된 피로스 1세는 그리스를 장악하고 있던 데메트리오스 1세의 진영으로 망명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피로스 1세가 기원전 297년 에페이로스 왕위에 복귀하기 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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