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메트리오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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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10대 군주
Demetrius I Soter
데메트리오스 1세


파일:데메트리오스 1세.jpg

출생
기원전 185년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오키아
사망
기원전 150년 6월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오키아
재위
셀레우코스 군주
기원전 161년 ~ 기원전 15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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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
Demetrius I Soter
가족
셀레우코스 4세(아버지)
라오디케 4세(어머니)
라오디케 5세(부인)
데메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장남)
안티오코스 7세 시디테스(차남)
안티고노스(삼남)
참전
마카베오 전쟁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셀레우코스 왕조의 10대 군주. 사촌인 안티오코스 5세를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뒤 마카베오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지만,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에 의해 폐위당했다.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은 왕족들간의 처참한 내전과 여기에 개입하여 이득을 취하려 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아르탁세스 왕조 아르메니아, 로마 공화국 등에 의해 영토가 지중해 동부 연안으로 줄어들어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2. 생애[편집]


기원전 185년경 마그네시아 전투의 참패를 딛고 제국을 재정비한 셀레우코스 4세와 라오디케 4세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큰형은 안티오코스인데 일찍 죽었고, 숙부가 안티오코스 4세였다. 기원전 175년경, 부왕은 로마의 동맹인 페르가몬 왕국과 갈등을 빛다가 로마의 압박을 받게 되자 그를 인질로 보냈다. 이후 셀레우코스 4세가 죽자 숙부인 안티오코스 4세가 왕위에 올랐고, 데메트리오스는 계속 인질 생활을 했다. 기원전 164년 11월 또는 12월, 안티오코스 4세가 병사한 뒤, 안티오코스 4세의 8세된 어린 아들 안티오코스 5세가 왕위에 올랐다.

데메트리오스는 셀레우코스 4세의 차남인 자신이 왕위에 우선적으로 올라야 한다고 여겼고, 원로원에 찾아가서 자신이 왕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는 로마를 자신의 조국이자 보호자로 여기며, 원로원 의원들을 친구로 여긴다고 말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장성한 자보다는 어린 아이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가 되는 쪽이 조종하기 편하다고 여겼기에 기각했다.

기원전 162년, 원로원은 셀레우코스 제국이 기원전 188년에 체결한 아파메아 조약에서 규정된 것보다 많은 군함과 코끼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사절을 보내 항의했다. 어린 왕의 섭정인 리시아스는 감히 로마에 대적하지 못하여 군함을 침몰시키고 코끼리를 죽이는 걸 허용했다. 그러자 백성들이 이러한 굴욕에 분노했고, 사절 중 한 사람이었던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가 라오디케아에서 피살되었다. 이에 원로원이 항의하자, 리시아스는 폭도들이 제멋대로 저지른 것이며 자신은 이와 무관하다며 부인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이 기회를 이용해 조국으로 돌아가기로 했지만, 먼저 자신처럼 로마에 볼모로 들어갔으며 절친한 친구인 폴리비오스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그는 폴리비오스에게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원로원에 출두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폴리비오스는

"사람은 같은 돌에 두 번 걸려 넘어지지 않으며, 딩신이 왕위에 오를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

고 조언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는 그의 다른 친구 아폴로니우스와 추가적으로 상의했는데, 원로원에 출두하는 게 좋겠다는 답변을 듣고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번에도 그의 요청을 기각했다.

이에 폴리비오스의 충고를 따라 운을 시험해보기로 작정하고,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폴리비오스는 친구 알라반다의 메닐로스를 그에게 소개시켜줬고, 메닐로스는 티베르 강 어귀에서 배를 빌려주고 지중해 동부의 티레로 가는 교통편을 제공해 주었다. 마침내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그는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낸 뒤, 기원전 161년 정변을 일으켜 사촌인 안티오코스 5세와 리시아스를 처형하고 왕위에 올랐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제국의 국력을 갉아먹고 있는 마카베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바키데스 휘하의 원정대를 파견하여 유대 도시들을 하나둘씩 공략하면서 유다 마카베오를 압박했다. 기원전 160년, 바키데스는 엘라사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마카베오는 전사했다. 이로써 유대의 지배권을 확보한 데메트리오스 1세는 뒤이어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메디아의 사트라프 티마르코스를 직접 공격하여 전사시켰다. 티마르코스의 폭정에 시달렸던 바빌론 주민들은 그를 구원자라는 뜻의 '소테르'라고 불렀다. 여기에 카파도키아에서 왕을 칭한 아리아라테스 5세까지 폐위시켰다.

그러나 로마 공화국은 셀레우코스 제국이 데메트리오스 1세의 통치하에서 다시 강성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티마르코스의 형제 헤라클레이테스는 원로원에 출두해 자신을 안티오코스 4세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를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원로원은 그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에게 상당한 용병대를 보내줬다. 그는 기원전 153년 페니키아 해안의 프톨레마이스-아케에 상륙한 뒤, 자신을 왕으로 자칭했다.

이리하여 내란이 터지자, 데메트리오스 1세는 유다 마카베오의 동생이자 반란군의 새 지도자였던 요나단 압푸스와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군대를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에게로 돌리려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가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자, 요나단은 마음을 바꿔 데메트리오스 1세의 군대와 전쟁을 이어갔다. 결국 전세는 그에게 불리해졌고, 기원전 150년 6월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의 군대에게 사로잡힌 뒤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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