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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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고려 의종의 부마
광릉공 왕면 | 廣陵公 王沔

작위
광릉후(廣陵侯)
광릉공(廣陵公)
본관
개성 왕씨

면(沔)
부모
부친 공화후 왕영
모친 승경궁주 왕씨[1]
형제자매
1남 1녀 중 장남 [ 펼치기 · 접기 ]

배우자
화순궁주 왕씨[2]
생몰연도
? ~ 1218년(명종 16년) 5월 14일[3]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고려의 왕족.

이름은 왕면(王沔), 작위는 광릉공(廣陵公)이다.


2. 생애[편집]


조선국 양헌왕의 후손인 공화후 왕영인종의 딸 승경궁주의 아들이다. 왕면은 성품이 순하고 인정이 두터우며 침착하고 조용했다.

왕면의 누나(兄姊)인 왕영녀 왕씨는 혼기가 찼지만 결혼하지 못하고 결국 명종 15년인 1185년에 병사하는데, 왕면은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이듬해에 직접 묘지의 비문을 짓는다. 비문에는 품행이 아름다운 누이의 장수와 그 자손의 번성을 바란 왕면이 누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內守貞明兮端正其心, 外發英華兮肅雍▨德

何皇天兮忍令不扶, 乃鬼神兮忽然無良

先朝露兮浮生大夢, 飛舟旐兮九原荒莫

天長地久兮有時盡, 此恨綿綿兮無絶期

안으로는 곧고 밝음을 지켜 그 마음 단정하고, 밖으로는 영화를 드러내니 ▨(그) 덕은 엄하지만 화목하다

어찌 황천은 차마 도와주지 못하는가, 이에 귀신 돼 홀연히 아름다움은 없어진다

아침 이슬[4]

보다 먼저 가니 덧없는 큰 꿈이여, 배에 깃발[5] 휘날리고 구천은 황망하다

하늘은 길고 땅은 멀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이 한은 계속 이어져 끊임을 기약할 수 없구나

왕영녀 왕씨 묘지명」


고려사》에 따르면 왕면은 글씨를 잘 쓰고 기술적인 능력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의술(醫術)에 정통하여 약(藥)을 쌓아두고서 사람을 살리는 것을 자기 일로 삼았다. 특히 종기(腫氣)를 앓는 자들은 모조리 그의 집 문을 드나들었는데, 전혀 꺼리는 얼굴빛을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다들 탄복하였다고 한다. 왕면이 의술을 행해 백성들을 구했다는 말은 《고려사절요》 등에도 기록되어 있다.

雅性嗜縑緗之學, 千金購書, 餘事精服餌之方, 百藥濟衆.[원주(한문)]

有德不飮, 受福何涯.

본래 성품이 겸상(縑緗)의 학문을 즐기시어 천금으로 서적을 구입하시고, 여사(餘事)로 복식(服食, 단약을 만드는 도가의 양생법)의 방법에 정통하시어 백약으로 백성을 구하셨습니다.[원주(국문)]

덕이 있음을 숨길 수 없으니 복을 받으심에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동인지문사륙』 권13, 목도호부사(牧都護府使)가 종실(宗室)에 신년을 하례하는 장(狀)


왕면은 의종의 딸 화순궁주와 혼인하는데 이 덕에 신종 즉위년인 1197년에 수사도 상주국 광릉후(守司空 上柱國 廣陵侯)에 임명되고 후에 광릉공(廣陵公)으로 승진한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개천사청석탑기명」에 따르면 왕면은 충청남도 천안시 풍세면에 있던 개천사(開天寺) 중창(重創)[6]에 시주하는데 그 덕에 고종 1년인 1214년 개천사에 석탑이 건립된다. 이후 고종 5년인 1218년 5월에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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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종의 장녀[2] 의종의 삼녀[3] 양력 6월 8일[4] 조로(朝露) 역시 인생의 덧없음을 의미한다.[5] 旐는 검은 깃발로 시신을 운구하는 앞에 세우는 깃발을 의미하기도 한다.[원주(한문)] 公嘗製藥施人.[원주(국문)] 공은 일찍이 약을 조제해 사람들에게 베풀었다.[6] 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짓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