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연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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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37년부터 238년까지 요동 공손씨 정권조위의 전쟁.


2. 배경[편집]


후한말의 난세에 중국에 온갖 군벌들이 난립할 때, 요동에서도 공손도가 군벌이되어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이 공손도-공손강-공손공-공손연으로 이어지는 요동 공손씨 정권은 삼국이 정립될 때 까지도 칭왕을 하거나 그에 버금가는 권세를 행사하며 세력을 유지해나갔다. 아마도 변방에 위치하여 원정을 하기도 애매하며, 고구려·부여·선비·오환등의 이민족들과 중국 본토 세력과의 완충지대 역할도 하기 때문에 남겨뒀을 수도 있다. 요동을 정벌해서 공손씨를 축출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이민족들과 국경을 접하게 되어 신경써야할 일이 많아지기 때문에 중원 내의 군벌들끼리 싸우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요동 정벌을 실행하기에는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위나라가 요동 정벌을 기획한 시점도 촉한의 승상 제갈량의 사망으로 촉한의 북벌이 잠정 중단되어 위나라에 군사적 여력이 생긴 이후이다.


3. 발단[편집]


요동을 다스리던 공손강이 죽고, 공손강의 아들들인 공손황, 공손연 형제가 어려서 공손공이 그 자리를 물려받게 된다. 공손공은 위나라의 작위를 거절하던 형 공손강을 대신해서 양녕향후 작위를 받기도 하는 등, 다른 요동 공손씨들에 비해서 조위에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20년에 조비가 황제로 즉위했을 때는, 공손공이 거기장군에 가절이라는 높은 관직을 받기도 하며 명목상으로는 조위의 신하임을 인정했다. 그러다가 228년에 장성한 공손연이 공손공을 유폐하고 요동을 장악하게 된다. 비록 마음대로 조위의 신하를 유폐한 격이지만, 상술한 이유[1]때문에 공손연을 달래야 했던 조위의 황제 조예는 공손연을 거기장군에 임명한다.

공손연은 상당히 위나라의 신경을 긁을 만한 일들을 벌였는데, 손권에게 번국을 자청하거나 232년에는 오나라에 숙서손종을 파견하여 칭신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에 오나라 황제 손권이 장미와 허안, 주하 보내서 공손연에게 연왕(燕王)의 작위 및 구석의 지위를 내리면서 회유를 시도했으나, 숙서와 손종은 공손연에게 오나라에 가서 직접 보니 약해서 의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공손연은 오나라 사신들의 보물만 빼앗고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내며 동오와 손잡을 뜻이 없음을 내비쳤다. 위나라는 공손연에게 낙락공이라는 작위를 내리며 이를 치하했다. 하지만 위나라입장에서는 공손연이 그리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공손연은 명목상으로나마 위나라의 신하였던 공손공을 자기 마음대로 유폐시키고 정권을 잡았으며, 위나라와 오나라 사이에서 줄타기를 시도하는 등, 당시 촉한과 동오를 상대하고 있던 위나라 입장에서는 후방의 불안요소였기 때문이다. 다만, 촉한의 제갈량이 호시탐탐 북벌의 기회를 엿보고있는 상황에서 동오까지 상대해야했던 위나라는 요동을 정벌할 군대를 꾸릴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최대한 공손연을 달래며 다른 뜻을 품지 않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237년에 마침내 관구검이 공손연의 토벌을 적극 건의하게 되어, 위나라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예는 관구검을 형주자사에서 유주자사로 전임시켜서 요동 정벌을 지시했다. 234년 제갈량이 죽어 촉한의 북벌이 잠정 중단된 상태에서 여력을 확보한 위나라는 요동 정벌에 나서게 된 것이다.


4. 전개[편집]



4.1. 요수전투: 관구검 VS 공손연[편집]


요수 전투
遼隧之戰

시기
237년
장소
유주(幽州)[2] 요동군(遼東郡) 요수현(遼隧縣)
요하(遼河) 일대
원인
관구검의 적극적인 요동 정벌 건의
교전
위(魏)
공손연군
황제
황제 조예
지휘관
관구검(유주자사)
공손연(거기장군[3])
병력
불명
불명
피해
불명
불명
결과
공손연의 관구검 격퇴
영향
공손연의 칭왕, 연나라 건국. 사마의의 요동 정벌.

조예의 명을 받은 관구검은 이전에 맺어둔 오환족 선우 구루돈과의 국교를 바탕으로 오환족, 선비족을 이끌고 공손연을 공격한다. 그러나 공손연의 저항이 나름 거셌는지, 관구검은 요하(遼河)를 넘지 못하고 요수(遼隧)에서 공손연과 대치하게 된다. 그러던 중 장마철에 비가 많이 내려 요하게 범람하게 되었고, 관구검은 별다른 소득 없이 우북평으로 퇴각해야만 했다.

중원의 강대국 위나라를 상대로 싸워 승리하여 자신감을 얻은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燕王)을 칭하게 된다. 그리고 연호를 소한(素漢)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공손연의 행동은 당연히 위나라를 크게 자극하였고, 위나라 조정은 다시 한번 대규모 요동 정벌을 강행하게 된다.


4.2. 사마의의 요동정벌[편집]


요동 전투
遼東之戰

시기
238년 ~ 8월 23일[4]
장소
유주(幽州)[5] 요동군(遼東郡)일대
원인
공손연의 칭왕
교전
위(魏)
연(燕)
군주
황제 조예
공손연
지휘관
사마의(태위)
공손연(연왕)
비연(대장군)
지원세력
고구려,(동천왕),
오나라,(손권),
장수
관구검(유주자사)
우금(후장군)
호준
장정(도독영사)
진규(사마)

양조
필성(장군)
왕건(상국)[6]
유보(어사대부)[7]
공손수(태자)
지원군 지휘관
-
정주(선신교위)[8]
병력
약 40,000명+@[9]
수만명
지원군
고구려군 1,000 명[10]
불명
피해
불명
불명
결과
공손연이 죽고 동연 멸망, 양평성 학살 자행
영향
사마의의 위상 증가.요동지역 조위에 편입


4.2.1. 사마의의 출격, 오나라와 연나라의 연계[편집]


위나라 조정은 공손연의 칭왕에 대해 사마의를 급파하여 이를 토벌하게 한다. 사마의는 1년안에 요동을 정벌하겠다고 말하고는 우금, 호준을 부장으로 삼아 수도에서 출병하여 우북평에 이르러 관구검의 군세를 휘하에 편입시켜서 요동으로 진군한다. 공손연은 사마의가 대군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에 자신이 했던 짓이 있음에도 손권에게 칭신하며 구원을 청한다. 손권은 공손연에게 뒤통수 맞은전적이 있기 때문에 처음엔 이를 거부하려했으나, 신하 양도의 설득에 선신교위 정주를 지원군으로 파견한다. 위나라 역시도 선비족과 고구려를 끌어들였는데, 고구려 동천왕은1,000명을 파견하여 사마의를 지원한다.


4.2.2. 2차 요수 전투: 사마의 VS 비연[편집]


공손연은 대장군 비연과 부장 양조를 파견하여 사마의를 막게 했다. 연나라 군사들은 요수(遼水)에 의지하여 튼튼한 벽을 남북으로 60~70여리에 걸쳐 위나라에 대항했고, 주위 20리 이상의 참호를 파는 등, 수비로 일관하며 전투에 임한다. 그러나 사마의가 보낸 호준에 의해서 비연이 격파당하고 만다.

사마의는 대군을 결집해 많은 기치를 펼쳐 남쪽으로 출군하자 연나라는 정예병을 다하여 사마의를 영격했다. 그 틈에 사마의는 몰래 배를 띄워서 강을 건너서는 북쪽으로 나아가, 연나라군의 둔영과 가까워지자 배를 가라앉히고 다리를 불태운 뒤 요수(遼水)가에서 길게 포위한다. 그러나 사마의는 포위한 연나라군을 내버려두고 양평으로 향했다. 이에 연나라군이 다시 이를 요격하자 사마의는 맞서싸웠는데, 세 번의 전투에서 모두 연나라군을 대파한다. 즉, 사마의의 우회기동에 비연이 당한 것이다. 비연의 대군이 요수에 묶여있는 틈에 사마의는 비어있는 양평으로 향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비연은 양평이 함락될 것을 걱정하여 둔영에서 나와 이를 막으려다가 사마의의 군대에 대파된 것이다.


4.2.3. 양평성 전투[편집]


비연의 군대를 격파한 사마의는 양평성에 이르러 참호를 파고 공손연을 포위한다. 그러나 마침 또 비가 30여일이나 거세게 내려 한동안 공성을 하지 못하다가, 비가 그치자 거센 공격을 퍼부었다. 결국 사마의의 공성과 식량의 바닥으로 곤궁함에 처한 공손연은 크게 두려워하며 상국 왕건, 어사대부 유보를 사자로 파견하여 항복을 청했으나, 사마의는 사자들을 모조리 참수하고 거부한다. 공손연은 또 다시 시중 위연(衛演)을 사자로 보내 볼모를 보내겠다는 뜻을 전하나, 사마의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날리며 이 역시 거부한다.

"軍事大要有五,能戰當戰,不能戰當守,不能守當走,餘二事惟有降與死耳。汝不肯面縛,此為決就死也,不須送任。"

("전쟁에서 중요한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싸울 수 있을 때는 싸워야 하고, 싸울 수 없을 때는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없을 때는 달아나야 한다. 나머지 두 가지는 항복 아니면 죽음뿐이다. 너희들은 항복하려 하지 않으니 이는 죽기로 작정한 것일 터, 인질을 보낼 필요는 없다.")


마침내 공손연은 아들 공손수와 함께 사마의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보려 했으나, 결국 붙잡혀 아들과 함께 참수당하고 만다.


4.2.4. 결과[편집]


사마의는 연나라의 수도인 양평성에 입성하여 나이 15세 이상의 남자 7,000여 명을 죽이고, 그 뼈로 탑승 쌓아 전승을 기념하였으며, 연나라 장군 필성을 포함하여 공손연이 임명한 연나라의 신하들 2천여 명을 처형한다. 그리고 공손연에 의해 유폐된 공손공을 석방시켜주고 공손연의 반란을 반대한 윤직 등의 묘를 높게 쌓아주고, 그 자손들에게 작위를 준다. 조예는 사자를 보내 유주 광양군 계현에서 사마의와 위나라 군사들을 위로하고, 사마의의 봉읍을 늘려 예주 영천군 곤양을 수여하여, 예전에 사마의가 받은 봉읍과 합쳐 2개 현 사마의의 봉읍이 되었다. 사마의 휘하에서 요동 정벌에 동참한 관구검도 이 공로로 안읍후에 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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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히 날카롭게 관중을 위협하는 제갈량만만치 않은 오나라의 군사력 때문에 이 당시의 위나라는 군사적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2] 혹은 평주(平州)[3] 혹은 대사마[4] 임오일[5] 혹은 평주(平州)[6] 사자로 파견되었다가 사마의에게 처형당한다. [7] 사자로 파견되었다가 사마의에게 처형당한다. [8] 사실상 도달하기도 전에 공손연이 패망했다.[9] 우북평에서 합류한 관구검의 군세[10] 신채호는 수만명이라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