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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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2. 대권주자
1.3. 그 후



1. 생애[편집]


1938년 1월 2일 아버지 철학자 고형곤과 어머니 장정자 사이에서 3남 2녀[1]차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6.25 때는 아버지 고향인 전북으로 내려와 전주북중학교를 다녔다.# 이후 경기고등학교[2]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3][4] 1961년 고등고시 행정과(현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에 합격했다.[5] 이후 행정 관료로서 녹화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새마을 운동을 기획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이후 강원도 부지사, 내무부 지방국장을 거쳐 만 37세에 전라남도지사[6][7]에 취임했다. 재임중 함평 고구마 사건을 수습했으며, 영산강 하굿둑 착공과 광주 하남공단, 여수 신항 사업 등을 추진했다.

1979년 박정희 정부의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 제2수석비서관이 되었는데, 이후 1980년 5.17 내란이 발생한 날 군정에 반대해 사임하였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가 완전히 들어서자 지인들의 요청으로 다시 교통부장관으로 들어왔고 민주정의당에 들어갔다.[8] 이듬해 농수산부 장관을 지내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있다가 이듬해 1984년 미국 MIT 국제문제연구소 객원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곧 귀국한다. 1985년 민주정의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으며, 민정당 지방자치제특별위원회 위원장, 1987년 민주정의당 전북도 지부장,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전라북도 군산시-옥구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민주한국당 김봉욱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7년 5월에는 내무부장관이 되어서 6월 민주항쟁의 중심에 서 있기도 했다. 물론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에 2개월만에 물러났다.[9]

하야 후 종로구에 사무실을 하나 내고 정계에 거리를 두던 중 1988년 민주정의당의 군산지구당 위원장과 전라북도 지부장에 임명되었다. 임명 직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전라북도 군산시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평화민주당 채영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또한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노태우 정부의 관선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다. 첫 서울시장 시절 고건은 서울의 교통 분야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실시간 교통 정보 전달을 위한 서울교통방송을 설립했고 서울내부순환도로를 만들었으며 2기 지하철 계획을 추진시켰다.[10] 또한 임기중에 서울올림픽이라는 빅이벤트가 치러졌고 대한제국 황실 인물이었던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의 영결식도 재임기간에 열렸다. 하지만 한보그룹 측 조합들에 알짜배기인 서울 수서지구 택지를 특혜분양하라는 정권의 압력에 원칙을 고수하며 맞서다 1990년 연말에 괘씸죄로 짤렸다. 그리고 그 후임으로 박세직이 시장으로 부임하면서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이 터지게 된다.

1991년 공동체의식개혁국민협의회 공동대표를 지냈고, 1994년부터 명지대학교 제4대 총장직[11]과 한국그린크로스 공동의장을 지냈고 총장 임기 종료 후 명지대학교 석좌교수직에 임명되었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활동하였다.

이후 문민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냈다. 호남계 인사이면서, 군사정권 하에서 승승장구했고, 원만한 대인관계와 넓은 인맥을 가졌으면서, 부패에서도 자유롭다는 점 덕분에 민주화 이후로도 좌우를 가리지 않고 중용되었다. 퇴임 다음 날인 차기 대통령 취임일 각료제청권을 행사한 뒤 물러나는 진기록을 세웠다. 김종필 전 총리 서리가 인준되지 않았기 때문.

1998년에는 새정치국민회의 공천[12][13]으로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민선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당선되어 4년간 시정을 이끌었다.[14] 당시 고건은 서울에 전국 최초로 온라인 민원 처리 공개 시스템을 만들었으며, 시내버스로 CNG(압축천연가스) 버스를 도입했고, 대중교통 환승할인 제도를 마련하고, 서울종합방재센터를 설립하고, 월드컵을 앞두고 공중화장실 선진화와 개방화장실 도입 등 많은 일을 했다. 또한 난지도 재개발과 서울월드컵경기장 건립을 비롯하여 임기 말의 2002 월드컵 개최 기간까지 매우 무난한 행정을 펼쳤다.

이렇게 서울특별시를 역대급으로 잘 이끌다보니 임기 마지막 해였던 2002년 초에는 새천년민주당의 서울시의원 다수가 고건을 차기 서울시장 후보로 지지했을 정도였는데, 당시 민주당 내에서 서울시장에 도전하려는 인물이 김원길 의원 / 김민석 의원 / 이상수 원내총무였던지라 고건 본인이 서울시장 재선에 도전한다면 경선을 하든 안하든 무조건 민주당 후보가 되는게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10년 전 관선 시장 시절에 처음 추진했던 2기 지하철을 완전 개통시키는 등의 임무 완수를 보람차게 생각한다면서 불출마를 선언했고, 그 해 지방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이명박이 당선.[15]

그리고 2003년 참여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YS 시절에 이어 두 번째다. 군부-YS-DJ-노무현까지 좌우 가리지 않고 중용된 나름대로 화려한 실적. 국무총리 기록만 놓고 본다면 민주화 이후 각기 다른 성향의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진기록을 갖고 있다.[16][17]

이후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하게 된다.


1.1. 고건 권한대행 체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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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대권주자[편집]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헌재의 탄핵 기각 결정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2004년 5월 24일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여러 정치 세력에서 일한 점과 특히 대통령 권한대행직 수행을 성공적으로 이행한 점을 인정받아 유력한 여권의 대권 후보로 떠오른다. 2006년 중반까지만 해도 차기대권주자 여론조사상 1등이 이명박, 박근혜가 아닌 고건이었을 정도였는데,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2006년 고건 총리의 지지세력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일명 '한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당'(약칭 한미준)이란 당을 창당하기도 했으나 고건 스스로 '한미준은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당'이라고 부인하는 소동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 지지율을 어필할만한 매개체가 없어서인지[18] 대권주자로서 스퍼트를 하지 못하며 이명박 당시 후보에게 지지율이 역전되었다.[19] 이명박 후보가 '경제대통령'이라는 구호로 경제 성장에 대한 화려한 비젼을 내세워 여권 지지층 일부를 흡수했기 때문이었다.

'대권 주자' 고건의 중도 포기는 정권과 여당의 반대가 결정적이었다. 2006년 말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그 유명한 민주평통 연설에서 고건 전 총리를 "사실상 실패한 인사"라 평했는데[20], 이에 맞서 '대통령의 자기 부정'이라며 고건 전 총리가 발끈했고 여권 내에서도 큰 논란이 일어났다.[21] 이후 이런 여권 내 갈등 때문인지 지지율이 10%대까지 떨어진다. 고건은 동력을 잃었다고 느꼈는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07년 1월 16일 스스로 대통령 선거 불출마 선언을 발표한다. 그리고 3년 뒤 정계도 은퇴하며 야인으로 돌아갔다.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그의 불출마를 아쉬워하던 한 지지자가 (고건처럼) 고향이 호남인데도 당선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례를 들어 불출마 철회를 요구하자 "제15대 대통령 선거 때는 이인제가 표를 분산시켰기에 당선될 수 있었다"고 답했다 한다.[22] 실제로 해당 대선에서 호남 출신의 정동영 후보는 큰 표차로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했으니, 고건의 정계 은퇴 결정은 지독히 '합리적'이었던 셈이다.

1.3. 그 후[편집]


2009년부터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지냈다가, 2013년 중앙일보에 자신의 공직자 시절을 비롯한 불출마 뒷이야기 등을 회고록으로 묶어 연재하였는데,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한 이유를 민주당계 정당 후보는 영남과 충청지역에서 어느정도 지지를 받아야 당선될 수 있는데, 자신이 호남 출신[23]이라 그런지 여론조사상 그 영남과 충청에서 지지율이 별로 나오지 않는 것 같아 당선 가능성이 높지 않아보여 포기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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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둘째형(고경)은 요절.[2] 김우중, 이종찬, 신구 등과 같은 학교 동창 사이이다.[3] 회고록에서 법학과보다 정치학과가 입학점수가 10점 더 높았다고 한다. 동숭동 캠퍼스 다리 건너 법학과는 육법전서를 붙잡고 씨름하는 등 학업에 열성이었는데, 정치학과는 공부는 하지 않고 토론이나 발표 등 문화생활에 열중했다고 회고했다. 재학 중 학생회장을 하는 등 정치 참여에 뜻을 두었으나 현실 정치에 회의감을 느끼고 고시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4] 아버지인 고형곤과는 1학년 때만 같은 캠퍼스에서 교수이자 학생으로 지냈다고 한다. 이후 2학년 때 고형곤은 전북대 총장으로 가게 되어 헤어진다.[5] 처음 본 시험은 낙방했고, 재수를 해서 합격했다.[6] 당시는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되지 않아 각 지방단체의 장은 관선으로 차관급 직위이었다.[7] 고시출신이라고 하더라도 통상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굉장히 빠른 승진인데(비군인 출신 최연소) 이는 고건이 새마을 운동을 실제로 기획하고 성공시킨 사람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이 정권 차원에서 추진한 사업이었으니 그에 대한 일종의 보상 인사인 셈.[8] 이 점 때문에 훗날 민주진영에 들어온 고건을 운동권 계열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고건은 충분히 비판 받을만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정치인이 아닌 관료의 길을 걷는 입장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해명을 하였다.[9] 그러나 제대로라는 건 어디까지나 5공 정권과 전두환의 입장에서이다. 고건 전 장관은 명동성당 경찰 투입을 각종 명분을 들이대며 피했는데, 역사에 민주화 시위 진압 지시자로 남지 않기 위한 정무적 판단이 개입했을지라도 이것이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전두환 정부 '부역'만으로도 욕을 먹었는데, 명동성당 진압까지 했으면 민주화 시대에 관료 생활을 이어가는 데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았을 것이다.[10] # [11] 임기: 1994. 03. 17 - 1997. 03. 05[12] 새 정부 각료제청에 협조했다지만, 사실 YS 정부의 마지막 총리를 새 여당('DJ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낸다는 것은 고건 본인은 물론이고 새정치국민회의 내부에서 이미 출마를 선언했던 한광옥노무현에게도 충격 그 자체였다. 이걸 2020년대로 비유해보자면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김부겸 전 총리가 국민의힘 서울시장으로 출마하는 격이니, 실제로 DJ의 가신이었던 한광옥이 격하게 반발했을 정도.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 술 더 떠서 IMF 사태의 수습 명분으로 입각했던 문민정부의 마지막 경제부장관 임창열 전 부총리를 경기도지사로 공천했다. 처음엔 경악하던 임창열 전 부총리는 아예 자민련 출마를 거부하며 극구 새정치국민회의 출마를 고집하기도 했다. 그만큼 YS-DJ 두 정부가 중도 성향 정부로서 차이가 적었고, 국민들에게도 고건과 임창열이 철새라기보다는 안정적 관료 출신 단체장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시대상의 증거다. 물론 야당이 된 한나라당으로서는 난처하고 또 분통스러운 일이었다.[13] 당시 정권 상층부에서는 임기 초반에 정치인 출신 서울시장이 등장하면은 사실상 소통령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여당장악에 문제에 생길 것으로 우려했다고 한다.[14] 서울특별시의 무리한 요청으로 인해 군인 3명이 사망한 육군 CH-47 올림픽대교 추락 사고가 이 시기에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나 사과가 없었다고 2년 뒤 총리 취임 청문회에서 야당 한나라당임인배 전 의원에게 추궁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목받지 못하였다.[15] 이 때 민주당 후보로는 김민석 의원이 출마해서 한 때는 이명박을 여론조사에서 앞섰지만, 월드컵 기간으로 인한 정치적 무관심에다가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3명 모두 모두 비리에 연루되는 일명 '홍삼 게이트'까지 겹치면서 결국 10%P가 넘는 표차로 이명박이 과반 득표 당선되었다. 만약 이 때 고건이 민주당 후보로 나섰다면 박빙으로 이길 수도 있었고, 그러면 이명박이 5년 뒤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도 불투명해졌을테니 이래저래 정치적인 역사에 간접적으로 관여한 셈.[16] 김종필도 제3공화국(말기)-제4공화국-국민의 정부(제6공화국)에 국무총리를 역임하기도 했으나, 이쪽은 민주화 정부에서만 국무총리로 역임한 건 아니다.[17] 이후 한덕수 총리가 참여정부의 마지막 총리이자, 윤석열 정부 초대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두 총리가 모두 거쳐간 것이 참여정부라는 것이 흥미로운 대목. 두 총리는 권력 교체기까지 재직하여, 고건 전 총리는 국민의 정부의 각료 제청권을 행사하고 물러났으며 한덕수 총리도 이명박 정부의 국무회의에 참석했으니 역시 3개 정부 타이 기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한덕수와 고건 둘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각각 주미대사와 통합위원장직 달고 공직생활을 했다는 점이다.[18] 다른 사례로 2017년 19대 대선 정국 당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여론조사에서 대권주자 지지율 1, 2위를 달리고 있었으나, 유엔 사무총장 퇴임 뒤 한국으로 귀국하여 대권 행보를 이어가던 중 미숙한 모습을 여러 차례 보이며 지지율 하락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2017년 2월 관료 출신 정치인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다. 이처럼 정치적 기반이 미약하고 안정적인 사회 생활을 해왔던 관료 출신이 여러 험난한 정치적 길을 뚫고 대통령이 되기에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19] 박근혜와의 양자 대결에선 오차범위 내 접전이었다.[20] 좌우대립 속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길 기대해서 좌우 여러 진영을 거친 그를 총리로 지명한 것인데, 그 부분에서 실패하고 고립된 것 같아 아쉽다고 평했다. 문구 그대로만으로는 강경한 발언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대통령 연설로서는 저격 발언이나 다름 없었다. 여담으로 그 유명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발언과 같은 자리에서 나온 발언이다.[21] 이에 대해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통합신당파 견제를 위해 선전포고를 했다는 설이 나오기도 했다. 또 비노인 고건보단 그래도 친노계인 이해찬, 유시민, 한명숙 같은 인물들을 차기 대권주자로 염두에 뒀기 때문에 일부러 이런 말을 한 것 아닌가 하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22] 사실 17대 대선 과정을 보면 보수가 분열해 이회창, 이인제 후보가 죄다 출마했긴 했다. 그러나 이미 집권 열린우리당의 심각한 분열과 낮은 정권 지지율탓에 당시 한나라당 경선은 '경선만 이기면 누가 나가도 당선'이라고 할 정도로 대세는 기울었으니 저 판세 분석이 틀렸다고 보기도 어렵다. 더구나 고건의 중도보수적 관료 성향은 무소속 출마지만 15% 득표를 한 이회창과도 차별화를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황급하게 진보적인 성향을 드러내봤자 당시 '범여권'과 민주노동당과 정권 내내 사이가 안 좋았으니 진보 표가 갈라질 가능성도 컸다.[23] 본인은 서울특별시 출신이지만 본적지 즉, 아버지의 고향이 군산시이다. 지금이야 고향이라고 하면 출생지를 우선하지만 1990년대~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부분 '고향'이라고 하면 본적지를 뜻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출생지는 이북이고 자란건 서울인 이회창도 본적이 충청도라는 이유로 충청 지역 정당인 자유선진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또한 고건은 어릴 적 집이 잠시 전주로 내려와 중학교도 전주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