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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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판락
河判洛


창씨개명
가와모토 한라쿠
河本判洛
가와모토 마사오
河本正夫
별명
고문귀(拷問鬼)

문숙(文淑)
본관
진주 하씨[1]
출생
1912년 2월 15일[2]
경상남도 진주군 성태동면 관지동
(현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3]
사망
2003년 9월 11일 (향년 91세)
부산광역시
학력
진주제일보통학교[4] (졸업)
진주고등보통학교 (졸업 / 3회)
경력
사천경찰서 경찰
부산 외사계 고등경찰
前 우양금고 사장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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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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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고문귀
2.2. 착혈 고문
2.3. 해방 후
2.4. 모든 것이 드러나다
3. 대중매체에서
4. 유사 사례
5. 선거 이력



1. 개요[편집]


그를 만나면 직이뿌라(죽여 버려라). 그는 사람이 아니다. 인두껍을 쓴 짐승이다.

하판락에게 고문 피해를 입은 독립운동가 이광우 선생.[5]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기독교도에 대한 잔혹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던 친일 경찰. 8.15 광복 후에도 처벌을 받기는커녕 부유한 사업가로 살아왔다는 사실까지 밝혀져 더욱 큰 국민들의 공분을 산 친일파이자 인간 쓰레기다. 제5공화국 시절에 박처원, 이근안이 있었다면 일제강점기김덕기, 김태석, 노덕술, 하판락이 있었다. 창씨명은 카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 카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 본관은 진주(晉州)다.


2. 생애[편집]



2.1. 고문귀[편집]


1912년 2월 15일 경상남도 진주군 성태동면 관지동(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에서 아버지 현계(賢溪) 하한운(河漢云, 1887. 5. 24~1962. 8. 16)[6]과 어머니 동래 정씨(1887. 2. 2~1966. 2. 26)[7] 사이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하판락의 형 동전(東田) 하영락(河永洛, 1909. 2. 10 ~ 1979. 4. 6)[8]은 명석면사무소 서기 및 명석면 부면장을 지낸 공무원이었고 남동생 하충락(河忠洛, 1922. 8. 14 ~ ?)은 일본으로 유학하고 좌익 운동에 가담했다가 6.25 전쟁 당시 월북했다.

진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1930년 1월 17일에 진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만세 시위에 참여하다가 진주형무소에 구금된 후 동년 2월 9일에 풀려난 적도 있었고 1932년 진주고등보통학교(3회)를 졸업한 후 진양군청에서 고원(雇員)으로 근무했다. 1934년 2월에 처음 경상남도경찰부 외사계에 순사로 입직하여 일본 제국의 경찰관이 되었는데 1936년 순사부장으로 승진하고 이듬해인 1937년 경부보로 승진하여 경상남도경찰부 고등과 외사주임이 되었다. # 1939년 12월에는 제21회 조선총독부 경상남도 경부·도경부보 고시에 합격해 경부로 승진했다. 이후 수많은 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사천경찰서를 거쳐 부산 수상경찰서 고등과 외사계 등지에 근무하였다. 1940년 2월에 창씨개명령이 실시되자 '가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로 개명했으나 이듬해에 완전한 일본식인 '가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로 재개명했다.

하판락은 일제의 고문 경찰로서 독립운동가, 기독교인, 공산주의자들을 고문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그 악행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당시 항일 투사들이 가장 두려워한 경남 고등경찰 3총사(부산의 하형사, 진주의 강형사, 마산의 박헌병)로 꼽힌 것은 물론 '고문귀'(고문 귀신)가 그의 별명이었을 정도였다. 오늘날 '고문 경찰'의 대명사가 된 자가 이근안이라면 일제강점기 최고의 고문 경찰은 바로 '하판락'이었다.

하판락이 이 같은 악명을 얻게 된 계기는 1942년 9월 평안남도를 중심으로 신사 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70여 명을 검거하고 집단 고문한 끝에 투옥하면서부터였다. 1943년 경상남도 진주부에서 배돈병원(培敦病院) 원장을 지내던 김준기(金準基, 1913~?)는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회 선교사들과도 친분이 있어 같은 시기 부산부에 있던 장로교회의 관리인도 겸직하고 있었는데 하판락은 이를 빌미로 김준기를 '황국신민 정신이 결여된 연합국의 간첩'으로 몰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한 뒤 고문을 가했다. 1994년에 출판된 김준기의 회고록 '의학의 길목에서'에 의하면 하판락은 본인 역시 한국인이면서도 '조센징' 운운하며 심한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이에 김준기는 "같은 동족의 몸에 그렇게도 심한 고문을 할 수 있었던 그의 행동에 대해 나는 심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차라리 그것은 비극이었다."며 분개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경상남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반일 투사를 색출해 탄압에 앞장섰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따로 있었다. 그가 한 고문 행위가 얼마나 극악했던가에 대한 또 다른 독립운동가의 고발이었다. 하판락이 경상남도경찰부 고등과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43년 3월에 일제의 침략 전쟁 방해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1942년 5월에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군사 시설 및 군수 공장을 파괴하고 항일 전단을 살포하며 군자금 모집을 계획한 이른바 '친우회 불온 전단 사건'으로 검거된 이광우 등 천우회 회원 3명과 여경수 등까지 합해 7~8명을 고문한 사건이었다. 참고로 여경수 등은 그로부터 1주일 전에 '울산 부산 마르크스 레닌 연맹'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는데 하판락은 사회주의자들의 항일 운동을 친우회 활동과 엮어 '청소년들도 사회주의 운동이 가담했다. 기성 사회주의자들이 청소년들까지 포섭하여 불온 전단을 살포토록 사주했다.'고 날조해 이들을 고문했다.

당시 하판락은 독립투사 여경수(呂敬守, 1912?~1945)에게 자백을 강요하면서 그가 거듭 부인하자 온몸을 화롯불에 달궈진 쇠젓가락으로 지졌으며 이어진 구타[9], 전기고문, 물고문, 머리카락 뽑기, 손가락 비틀기, 압슬 고문[10] 끝에 여경수는 3년 후, 즉 해방 직전에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채 하나뿐인 목숨을 잃었다. 참고로 하판락은 고문 당시 만 17세의 청소년이라 몸에 되도록 열상 자국을 남기지 않게 한다고(???) 이광우에게 고춧가루 물고문을 가했는데 이광우는 무려 10개월 동안 고문을 당했으며 광복으로 석방된 후 몸을 추스르는 데만 1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나마 살아남은 이광우 선생을 비롯한 같은 사건 관련자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판락의 잔혹한 고문 때문에 모두 신체 불구자가 되었다. 실제로 이광우는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 근육이 파열되어 30대 초반부터 다리를 절게 되었으며 심지어 이렇게 고문받아 만신창이가 된 그들은 이후 재판에 넘겨져 4년 이상의 감옥 생활을 또 겪어야 했다. 한편 이러한 잔혹한 고문 덕에 하판락은 더 높은 자리로 승진했다.


2.2. 착혈 고문[편집]


파일:친일경찰 하판락.jpg

주사기로 착혈하는 고문귀 하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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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자 죄상기

하지만 이 같은 죄상이 '하판락의 모든 것'이 아니었다. 독립운동가에게 자백을 강요하면서 자행한 이른바 '착혈 고문'이 그것이었다.

2007년 사망한 독립운동가 이광우의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하판락의 고문 행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이광우는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내가 고문 당할 순서를 기다리는 것과 또 하나는 다른 이가 고문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했으며 하판락이 가한 '착혈 고문'을 고발했다.

1943년 하판락은 당시 사상운동 조직 사건으로 체포되어 온 이미경 등을 고문했다. 어떻게 고문했냐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는 이미경의 팔 여기저기에 주사기를 삽입한 후 혈관을 찾으면 주사기 한가득 피를 뽑아낸 후 다시 그 피를 고문 피해자인 이미경을 향해 뿌리고 나서 다시 물었고 거부하면 또 주사기로 착혈한 후 고문 피해자의 얼굴이나 몸, 벽에 피를 뿌리는 행위를 반복했다. 이것이 바로 '착혈 고문'.


2.3. 해방 후[편집]


해방되었음에도 친일 경찰 하판락은 '오히려' 더욱 잘 나갔다. 해방 후에도 하판락은 미군정의 '일제 관리 재등용 정책'에 따라 여전히 경찰로 근무했으며 미군정 제7경찰청 회계실 주임으로 일하면서 일본인 적산 재산 처리에 관여하며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고 1946년 6월에는 경상남도 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승진해 일제 고등경찰 '하 형사'로서의 '실력'을 발휘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1949년 1월 16일까지 차석수사관 자리를 유지했다.

그러한 하판락에게 잠시나마 역사적 단죄가 찾아온 것은 1949년이었다. 하판락의 고문으로 순국한 독립투사 여경수의 어머니가 그를 고발하여 하판락이 경찰 일을 그만둔 8일 후인 1949년 1월 24일 부산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뒤 마포형무소에 구금되었다. 1949년 당시 고원섭이 쓴 <반민자 죄상기>에 따르면 하판락을 체포한 반민특위가 그를 서울로 압송하려고 하자 부산 시민들이 "당장 여기서 우리들이 처리하겠으니 맡겨 달라"며 애원했을 정도로 하판락에 대한 분노가 충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판락이 체포된 후 이광우가 자신의 항일 활동과 하판락의 고문 사실 등에 대한 조서를 보내고 반민특위로부터 증인 소환장을 발부받자 하판락의 아버지는 뻔뻔하게도 이광우의 생가를 찾아가 보자기로 싼 돈 보따리를 건네면서 이광우의 아버지에게 '당신 아들이 하판락을 모른다고만 해 달라'는 요구까지 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광우의 아버지는 이 뻔뻔한 요구를 거부했고 이광우도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격분했으며 체포된 하판락을 만나러 갔을 때 주먹다짐을 하면서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서울로 압송된 하판락은 반민특위로부터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으나 자신이 저지른 독립투사 살해 및 착혈 고문 사실 등을 끝끝내 부인했다. 그러다가 1949년 6월 6일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친일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 후 반민특위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결국 1949년 8월 26일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하판락은 자신의 모교인 진주고등학교 동창회의 초대 감사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부산진체육회 이사장[11], 1956년 지방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 후보로 경상남도의회 의원 진양군 제1선거구에 출마했다. 다만 당시 막강했던 하씨 문중의 영향력과 금품 살포를 동원한 선거 운동에도 불구하고 면민들과 유권자들은 그를 낙선시켰다. 이후 부산시의회 의원에도 도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했다.

파일:external/imnews.imbc.com/DN20020071-00_01340003.jpg

[12]

결국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형성한 재력과 미군정 도경찰부에서 회계업무를 본 경험을 가지고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자리잡았는데 사업 초반에는 목재사업을 한 것으로 보이며 그 목재사업으로 많은 돈을 모았는지 그 돈을 바탕으로 금융업자로 변신해 1973년 '우양금고'라는 이름의 신용금고를 설립하고[13] 엄청나게 많은 돈을 모으며 은퇴한 후 이 돈으로 고향인 명석면 청사를 신축하는데 기금을 희사하거나 크고 작은 고향 일에 기부금을 내는 등 생색을 내며 출향 인사로 자리잡았고, 부산에서는 대한노인회 수영구 지회장을 수 차례 역임하고 장수학교도 운영하면서[14] 1997년 어버이날에 문정수 부산시장에게서 표창을 받는 등 노인복지 공로자로 신분세탁을 제대로 했다. 이렇게 하판락은 무려 반 세기 가까이 과거의 악행이 크게 공론화되지 않은 채 평온한 노년과 부귀영화를 누렸다.[15]


2.4. 모든 것이 드러나다[편집]



자신의 악행을 부정하는 노년기의 하판락.

하지만 하판락의 친일 행적은 독립투사 이광우의 아들 이상국의 노력과 이광우의 증언으로 다시 한 번 까발려지게 되었다. 이상국은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10년 동안 제대로 된 기록을 찾지 못했던 상황에서 우연히 하판락을 알게 되었고 이에 1999년 10월에 KBS 기자들과 함께 하판락의 집을 찾아갔다. 하판락은 이광우를 체포했다는 것만은 인정했으나 이광우에게 가한 고문에 대해 '나는 고문을 지시했을 뿐, 직접 고문한 것은 내 부하인 김소복이었다.'는 거짓말을 했는데 이 증언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던 기사와 이광우의 반민특위 증인 출두 서류와 함께 아버지의 독립운동 공적을 입증할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하판락은 전직 친일 경찰로서 뉴스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이광우가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되고 2000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족상을 받으면서 하판락의 평판은 다시 한 번 추락했다. 친일 죄상과 고문 사실이 재조명되면서 국민적인 공분과 비난 여론이 불같이 타오르자 하판락은 2000년 1월 17일 정운현 대한매일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일경의 간부를 지낸 과거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분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며 마지못해 잘못을 시인했다. 사실상 하판락의 사회적 생명은 이때 끝이 났다고 봐도 무방하다.[16]

한편 2000년 12월에 하판락의 고향 명석면에서 발간된 <명석면사>에서 이 자의 집안인 진주 하씨 문중의 반발로 하판락의 친일 죄상이 모조리 삭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명석면사를 쓴 김경현이 밝힌 바로는 하씨 문중이 마을회관으로 자신을 불러서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썼냐. 근거를 대라.", "하판락은 단지 경찰이었다. 고등계 형사가 아니다.", "광주 놈이라 경상도를 저렇게 쓴다.", "외지인 주제에 지역 사정을 뭘 안다고 그렇게 막 쓰냐."는 등의 망언과 비난을 해 댔다고 한다. 결국 <명석면사>에서 하판락에 대한 내용은 삭제되었지만 김경현은 편찬 후기에 '명석면 출신자 중에 반민특위 관련자에 대해서는 면사편찬위의 결의로 삭제했다.'고 적어 시간차 공격을 날렸다. 진주 하씨 일동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펄펄 뛰었지만 책은 이미 인쇄가 끝난 뒤였다.

하판락은 당연히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친일파 708인 명단에 들어갔는데 이 명단을 발표할 때 명단에 든 대상자 중 유일하게 생존한 인물이었다. 2002년 3월 10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53년만의 증언, 친일 경찰 노덕술' 편에서도 얼굴을 비췄고 2003년 9월 11일 향년 91세의 천수를 누리면서 살다가 부산광역시에서 죽었다. 2009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 1990년작 MBC 8.15 특집 드라마 <반민특위>에선 배우 김영인[17]이 연기했다.




4. 유사 사례[편집]


  • 사실 반인륜 범죄자가 별다른 처벌 없이 부유한 사업가로 신분세탁을 하는 경우는 은근히 흔하다. 고문기술자 중에는 '리옹의 도살자'로 불리던 게슈타포 전범 클라우스 바르비, 우스타샤 전범 딘코 사키치가 망명 후 사업가로써 부유하게 살았으며[18] 고문기술자는 아니었어도 아이티의 비밀경찰 통통 마쿠트의 수장이던 루크네르 캉브론과 홍위병의 수장격이던 쑹빈빈도 부유한 사업가로 살았으며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주범 중 한 명인 제브뎃 베이도 고국에서 무역회사를 설립하며 부를 축적했다.[19]

  • 하판락의 몰락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케이스로는 오스트리아쿠르트 발트하임이 있다. 이쪽은 무려 UN 사무총장까지 역임했을 정도로 명망이 높은 외교관이었고 그 기세를 이어나가 1986년에는 오스트리아 대통령으로 당선되기도 했으나 대선 무렵이던 1985년나치 돌격대 대원이었다는 것이 폭로되면서[20] 거의 모든 서구권 국가들과 미국에 의해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규정되면서 오스트리아 국내에서의 일부 옹호 여론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는 완전히 매장되었다.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6
1956년 지방선거 (경상남도의회 의원)


-
낙선

1960
1960년 지방선거 (부산시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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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직공파(司直公派)-충순공(忠順公) 기곤(起崑)파 27세 락(洛) 항렬.[2] 음력 1911년 12월 28일.[3] 진주 하씨 집성촌이다.[4] 現 진주초등학교.[5] 참고로 이광우는 하판락의 착혈 고문을 폭로한 이이기도 하며 1999년에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인정받기 위해 증거를 수집하려는 목적으로 하판락을 만나러 간다는 아들 이상국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6] 자는 응장(應章). 명석면협의원과 명석면학교비 평의원을 지낸 지역 유지였다.[7] 정성영(鄭成永)의 딸이다.[8] 자는 창숙(昌淑).[9] 천장에 손과 발을 묶고는 주먹과 몽둥이, 와이어로프로 무자비한 구타를 가했다고 한다.[10] 종아리 사이에 야구 방망이를 끼우고 무릎 위에 올라가서 힘껏 구르는 방식이었다.[11] 출처[12] 참고로 하판락 왼쪽에 있는 사진 속 인물은 박춘금인데 이쪽도 악랄함으로는 손에 꼽을 만한 최악의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13] 1972년 8.3 사채 동결 조치에 의거한 상호신용금고법 개정으로 전국에서 신용금고가 우후죽순으로 설립되었는데 그 중 하나이다. 그 신용금고는 얼마 안 가 하판락의 먼 친척에게 넘어갔으며, 90년대 말 차명대출, 서류위조 등 위법행위를 일삼다가 예금지급불능상태에 빠져 1998년 파산하고 타 신용금고에 흡수되었다고 한다.[14] 1996년 기준으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15] 사실 그의 악행은 당대에도 알게 모르게 알려지긴 했다. 상술한 것처럼 1994년에도 하판락의 만행을 언급한 책이 출판되기도 했고 1977년 6월 28일자 경향신문 기사에는 반민특위에 대해 다루는 연재 기사에 아예 반민특위에 연행되는 하판락의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부산에서도 하판락의 악행은 잊혀지지 않았다. #1 #2[16] 당시는 환단고기가 유행하고 쇠말뚝, 일본의 Korea 표기 조작설 같은 괴담이 사실인 것마냥 퍼질 정도로 지금보다 민족주의/반일 감정이 강경했을 때였다. 그런 시절에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친일 경찰이 아무런 처벌도 안 받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있었다는 게 발각되었으니 주변으로부터 엄청난 손가락질을 당하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되었을 것만큼은 안 봐도 뻔하다.[17] 심영 역으로 유명한 김영인과는 동명이인이다.[18] 특히 바르비는 망명지인 볼리비아의 군사 정권의 악행들을 돕거나 직접 가담하기도 했다.[19] 그나마 이들 중 상당수는 생전에 어느 정도 악행의 죗값을 치르긴 했다. 캉브론은 부정축재로 얻은 돈으로 현재 가치로 1천억 원 이상의 거액을 가진 갑부가 되었으나 그 돈을 도박 중독과 사업 실패로 불과 10년 남짓만에 다 탕진했으며 바르비와 사키치는 아예 모든 악행이 밝혀진 후 감옥에서 죽었다. 하판락과 쑹빈빈은 감옥에서 죽거나 파산하지는 않았어도 나름의 사과를 하긴 했지만 보여주기식 사과라는 평가가 절대다수다.[20] 심지어 후에 밝혀진 정보에 따르면 발트하임은 단순(?) 입대 정도가 아니라 포로와 민간인에 대한 처형을 조력하거나 직접 지시하기까지 한 악질적인 전범이었다고 한다. 비록 발트하임이 직접 포로와 민간인을 처형한 것은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살상 행위에 가담한 것 자체가 하판락이랑 하나도 다를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