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황단 (r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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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두익의 부캐. 대한민국의 가수.
2. 상세[편집]
안녕하십니까? 항상 시대착오적인 음악을 시대착오적인 매체에 담아서 여러분들께 소개하는 미트볼레코드의 홍보담당입니다.
미트볼레코드 슬로건, 이글루스 블로그 음악 소개 서두
이촌지하차도를 지나갈 때 밖을 보면
현대아파트 복도 끝으로 파란 불이 깜박이지
팔황단의 대표 곡 '파란등'
본체 고두익과는 다른 존재라는 컨셉. 팔황단은 '팔보채와 황금 단무지[4] 들'이라는 1인 밴드로서의 이름이고, 그룹 보컬로서의 고두익만을 가리킬 때는 팔보채로 부른다.
1980년대에 활동하던 현대 인더스트리얼의 거장이라는 컨셉으로 노이즈 뮤직을 한다. 드릴, 철판, 깡통, 믹서기, 사과, 사슬, 의자 등을 주로 사용해 연주하며 정상적인 악기인 키보드, 신디사이저도 사용하긴 하지만 상기한 물건들을 더욱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키치처럼 실험적인 음악이 대부분이고, 일부 곡은 미디, 보코더의 소리가 여과없이 들려 잘못된 음악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사운드 엔지니어링 능력이 뛰어나 불협화음을 내면서도 묘하게 안정적인 것이 특징.
이름의 한자 표기는 여덟 팔(八)자가 아닌 깨뜨릴 팔(捌)자이다.[5] 捌선생님이라고도 부른다. 이 닉네임에 대해 본인은 어렸을 적 아버지의 친구가 중화요리집을 해서 음식을 자주 얻어먹다 보니 익숙해져 팔보채를 이름으로 사용한다고 고백했다는 설정이었으나, 사실 향음악사 게시판, 음반 등지에서 음반평을 남기던 XX채라는 유저의 패러디라고 한다. #
3. 생애[편집]
다큐멘터리 팔보채에서의 설정상 일생을 서술한다.
팔보채는 중촌에서 태어났다. 중앙고에 진학하고 밴드부 활동을 했다. 대학교에 진학하고서는 인디 록 음악을 시작했다.
1984년, 중촌에 활동 기반을 둔 그룹 팔황단이 결성되었다. 데뷔 앨범은 <물은 셀프.>, 별개로 리더 팔보채는 1982년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13년'에 따르면, 팔보채는 '중초니아'라는 기타, 베이스, 드럼 구성의 모던 록 밴드로서도 활동했다. 1년 정도 활동하다가 일본과 중국으로 월드 투어도 가게 되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멤버들 간에 출연료 문제로 다투다 밴드가 해체되었다.
1988년, 팔보채는 고층 건물에서 공중 5회전을 하면서 추락하여 10분간 고통을 호소하다가 사망하고 말았다.[6] 팔보채의 죽음에 당시 정권이 관여했다는 음모론이 유행했고, 음악평론가 이혜원은 "팔보채는 시대를 앞섰고 한국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며 그를 고평가했다. 중촌에는 팔보채의 박물관도 있다.
그런데 2월 30일의 용산 라이브 콘서트를 준비하는 것을 볼 때 아직 살아있는 것 같다. 독자들이 이를 지적하자 본인이 설정오류를 인정했고, '팔황단 다큐멘터리'는 중촌 시네마틱 유니버스, '13년'은 이글루스는 중촌 이글루스 유니버스, 현재는 중촌 SNS 유니버스라는 멀티버스 세계관(...)이라 해명했다. #
페이크 공연 기록만 있는 것 같지만, 실제 공연도 여러 번 했다. 다만 인디 음악 웹사이트에 조용히 알리고 관련 이벤트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식으로 출몰하는 패턴이 대다수. 복고 음악을 한다는 점에서 기린, 박문치, 한받과 같은 인디 뉴트로 가수들과 접점이 있고, 실제 기린의 리믹스 앨범 참여가 있으며, 2012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북조선 펑크 록커 리성웅' 전시회와 앨범에 팔보채라는 이름으로 밤섬해적단, 무키무키만만수, 파블로프, 쾅프로그램와 참여했다. 인디 뮤지션이자 행위예술가인 야마가타 트윅스터[7] 와의 협연을 펼쳤다.
싱어송라이터 재능도 있다. 자신의 보컬곡은 보코더로 살짝 변조한 목소리다.
2018년, CHINABOT이라는 아시아 각국의 인디 아티스트들을 포괄하는 넷레이블에 계약하고 소속되었다.
4월 25일에 첫 앨범 산업선집 카세트테이프가 발매되었다. 밴드캠프 페이지에서 구매 가능. 현재는 품절. 포장 영상 사운드클라우드 곡 중 몇 곡이 수록된다. 기본은 디지털 음원이나 CHINABOT에서는 실물 카세트테이프 반으로도 발매할 계획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레이블이 외국에 있기 때문에 실물반은 한국이 아닌 외국 기준으로 발매될 듯하다.
4. 디스코그래피[편집]
4.1. 정규[편집]
4.1.1. 산업선집[편집]
팔황단의 대부분의 곡들이 있는 첫 앨범. 과거 벅스, 멜론 등에서도 서비스가 되었지만, 국내유통사 문제로 현재는 애플뮤직과 밴드캠프 등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다.[9]
앨범은 카세트테이프로 발매되었는데, 이것은 고두익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Chinabot이 음반을 카세트 테이프의 형태로 발매하기 때문이다.
구성 품목이 참 웃기는데 앨범 + 말랑카우 캔디 2개 + 맛소금 1개 + 신문 혹은 전단지 [10] + 이 내용물을 담은 플라스틱팩 1개로 구성되어 있다.
애니메이션 숲속수학, 콘크리트 방주 등의 OST도 들어있으며 팔황단의 대표곡 파란등, 첫겨울, 미미, 김완선 등이 들어 있다.
4.1.2. 2013-2021 서울[편집]
4.2. 컴필레이션[편집]
4.2.1. 온몸에 뜨겁고 더운물 끼얹네[편집]
더 아웅다웅스가 기획한 인디가수들의 합작 공연 및 전시 기획 컴필레이션 앨범 북조선 펑크 록커 리성웅의 수록 곡이다. 야마가타 트윅스터(한받)과 함께 팔보야마라는 그룹을 결성해 부른 노래.
4.3. 오디오북[편집]
4.3.1. 긴 끈을 위한 읽기[편집]
2019년 출간된 <긴 끈>의 오디오 사운드스케이프를 만들기 위해, 팔황단(Pal Hwang Dan)이 협업하였다. 팔황단은 이여로가 채록한 낭독 음원에, 때로는 덮어 씌우고 또 이상하게 변형된 음조로, 멜로디컬하고 초현실적인 음악을 결합한다. 이여로가 작성한 <긴 끈>은 절반에 가까운 인용을 저술과 교합해, ‘작가’와 ‘주제’ 모두를 불안정하게 만들려고 한다. 한시, 현대비평, 동시대 한국의 시, 철학자들의 노트, 이여로가 거주하는 동네 전봇대에서 채록한 글 등을 출처로 하는 인용문들은 다종적이고 상충되게 뒤섞여 있다. 이여로의 글에는 [주제나 소재가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고서 탈구되고 마는, 불안하고 양가적인 감정이 넘쳐 흐르며 이내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어려움에 가닿는다. 그리고 이 책의 낭독 프로젝트에서는, 단 한 명의 창작자라는 이념으로부터 벗어날 때에 가질 수 있는 협력적 성격, 공동체 기반의 성격을 따라, 21명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페이지를] 읽어 나간다. 그들은 이여로의 오랜 친구, 스님, 학교 선생, 친구의 어린 조카, 동네 가게점원, 몇몇 예술 창작자 등 그의 주변인들이다. 음반을 다운로드하면 낭독되는 텍스트의 영어 번역본을 읽을 수 있다. 이여로의 기획에 공감하며, 팔황단은 2018년 차이나봇에서 발매된 산업선집(Saneopseonjip)에서 보여준 바 있는 기괴한(uncanny) 써니 팝, 바로크 음악, 컴퓨터 게임에서 영감을 받은 블리피(blippy)한 비트, 훵크 기타와 인더스트리얼한 질감을 책의 낭독과 엮어 나갔다. 모든 텍스트는 한국어로 낭독되었지만, 한국어 화자가 아니더라도 반짝이는 팝 음악의 폭발력과 장난스런 질감, 방향감각이 상실되는 강력한 느낌을 이 음반에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CHINABOT의 '긴 끈을 위한 읽기' 앨범 홍보용 글 (이여로 번역) MEATBALL 유튜브채널 커뮤니티
5. weiv 활동[편집]
음악 리뷰 웹진 weiv에 팔보채 명의로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11] 대표적으로 아마츄어 증폭기의[12] http://www.weiv.co.kr/archives/8600 기사 등이 있다. 실제로 한받과 친분이 있어서 자주 교류하는 듯하며 2015년에도 이런 리믹스를 발표한 적이 있다. 불싸조 한상철과도 친분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두익의 페이스북에 한상철의 댓글이 많이 보인다. 초창기 인더스트리얼에 영향을 받은 그의 음악을 보면 알겠지만, 주로 70~80년대 인더스트리얼 및 원시 일렉트로니카에 관심이 많은 듯. [13]
당시 웨이브 유명 인사의 핸들네임이 일부 언급되기 때문에 그 시절의 웨이브를 안다면 좀더 웃을 수 있는 플래시. 제목은 볼링 포 콜럼바인의 패러디.
페이스북의 글들을 보면 큐오넷[14] 의 글들도 종종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 큐오넷에 오래 활동 혹은 눈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5년 전 웨이브 분위기가 디씨스러웠을 때에는 그 사이트에서 칭해지는 소위 '그분'(이아무개)과 더불어 논란의 중심에 선 흑역사가 있었으나[15] 또한 일부 유저들처럼 다른 명의로 활동했다는 의혹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당시 웨이브 게시판 상주인들을 병맛 그림판으로 표현한듯한 그림등으로 유명세를 얻은 '강감찬'이 팔보채의 명의중 하나였다는 설이 있다. 아직도 떡밥이 되는 '그분'에 비하면[16] 지금은 좋든 싫든 웨이브 역사에 비교적 비중있는 족적을 남긴 인물 정도로 인식되는 듯. 그가 떡밥 소재로 잊혀갈 때쯤 그는 조용히 여러가지 유동닉으로 음악 게시판에 음악 정도만 소개하게 된다.
2012년 사이트 리부트 이후에도 기고한다. 보컬로이드와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