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영(1616)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예술가. 이름은 이정영(李正英), 자는 자수(子修), 호는 서곡(西谷),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본관은 전주(全州)로, 정종의 10남 덕천군의 7대손이자 호조판서를 역임한 이경직의 아들이다
2. 생애[편집]
1616년(광해군 8년)에 태어났다. 21세이던 1636년(인조 14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조선이 패하면서 소현세자가 청나라로 끌려가자 사서 자격으로 같이 갔다. 언제 돌아왔는지는 모르나 1642년(인조 20년) 윤 11월에 정언으로 임명받았다는 《인조실록》 기사를 보아 그 이전에 귀국한 듯 하다. 이후 사서, 부수찬, 수찬, 부교리, 교리 등의 관직을 지냈고 강원도 삼척에 암행어사로 파견나가 삼척부사 장자호를 징죄하기도 했다.#
효종이 즉위한 후에는 헌납 등으로 제수받았다가 교리로 있던 1651년(효종 2년)에 경연에 술마시고 취한 상태로 들어와서 파직당했다.# 이후 다시 부수찬을 거쳐 이조좌랑과 정랑 직을 역임했다.## 효종 말년에는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장 격인 도승지와# 병조참의를 지냈다.#
현종이 왕이 된 뒤에는 우승지를 거쳐 형조참판과 대사간 직을 맡았고 대사간으로 재직하던 중에는 남부 지방에 다녀와 지방 사람들의 민원을 현종에게 전하기도 했다. 호조참판을 지낼 때 진위 겸 진향 정사로서 홍주원[1] 과 함께 청나라 연경에 다녀오기도 했고#, 평안감사로서 평안도에 파견나가기도 했다.# 한성으로 돌아온 후에는 도승지와 이조, 예조, 호조의 참판, 한성판윤과 우윤을 지냈다. 개성 유수로서 개성의 백성들을 다스리기도 했고# 임기를 마친 후에는 형조판서와 공조판서로 임명받았다.
현종의 국상 때 명정서사관으로 봉무했고, 1675년(숙종 1년)에는 이조판서 직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얼마 못가 파직당했다. 이후 다시 형조판서와 한성부판윤으로 임명받았고,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형조판서로 재직하던 중이던 1677년(숙종 3년)에는 시험 출제 관련하여 문제를 일으켜 철원으로 유배갔다.# 풀려난 후에는 판돈녕부사가 되었고# 판의금부사와 공조판서 직을 다시 제수받았으며 예조판서도 지냈다.
1685년(숙종 11년)에는 기로소에 들어갔고 이듬해인 1686년(숙종 12년) 4월 3일에 사망했다. 향년 71세였다.[2]
3. 여담[편집]
- 명필로 유명했으며, 특히 전서와 주서를 잘 썼다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신도비와 비의 글씨를 썼다. 대표적으로는 이순신명량대첩비, 호판이경직비, 영안위홍주원비, 정여창비 등이 있다.
4. 가족 관계[편집]
- 부 : 이경직(李景稷, 1577 ~ 1640)
- 친모 : 보성 오씨(寶城 吳氏) - 오경지(吳景智)의 딸
- 계모 : 고성 이씨(固城 李氏) - 이성길(李成吉)의 딸
- 이복 여동생 : 윤세장(尹世章)의 처
- 정부인 : 청송 심씨(靑松 沈氏) - 심장세(沈長世)의 딸
- 계부인 : 문화 류씨(文化 柳氏) - 류기선(柳基善)의 딸
5. 묘역[편집]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에 이정영의 묘가 있다. 봉분은 하나이며, 묘 앞에는 묘비와 상석이 있고 양 옆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1쌍 씩 서 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4 09:52:34에 나무위키 이정영(1616)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