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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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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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 황목 · 황보 · ·
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파일:창녕 조씨 종문.svg
昌寧 曺氏
창녕 조씨

관향
경상남도 창녕군
시조
조계룡(曺繼龍)
중시조
조겸(曺謙)
집성촌
서울특별시 서초구·중구
부산광역시 기장군·중구
대구광역시 달성군·중구
강원도 강릉시
경기도 여주시·파주시
충청북도 옥천군·진천군
충청남도 금산군·보령시
전라북도 고창군·부안군
전라북도 임실군·순창군·장수군
전라남도 담양군·영암군
전라남도 보성군·진도군·화순군
경상북도 고령군·김천시·상주시
경상북도 성주군·영천시·울릉군
경상남도 밀양시·산청군·의령군
경상남도 창녕군·창원시·합천군
황해도 봉산군·옹진군
평안남도 강서군·대동군
평안북도 박천군
함경남도 고원군·홍원군
인구
366,798명(2015년)
링크
창녕조씨대종회[1]

1. 개요
2. 역사
3. 기록
4. 인구 변화
5. 분파
6. 항렬
7. 집성촌
7.1. 서울·경기·강원
7.2. 경상
7.3. 충청
7.4. 전라
7.5. 북한
8. 주요 인물



1. 개요[편집]


창녕 조씨(昌寧 曺氏)는 경상남도 창녕군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조계룡(曺繼龍)이다.

2. 역사[편집]


창녕 조씨의 시조 조계룡신라 제26대 진평왕사위라 전해진다. 조씨 득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한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鼓岩村)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날 밤 꿈에 한 남자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달이 차서 진평왕 48년(626)에 아들이 태어나니 용모가 준수하고 겨드랑이 밑에 조(曺) 자가 붉게 쓰여 있었다. 이것을 본 학사는 이상히 여겨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자 왕도 신기하게 여기며 성은 조(曺), 이름은 계룡(繼龍), 자는 인경(鱗卿)이라 하사하였다고 한다. 뒤에 진평왕이 그를 부마로 삼음으로써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보국대장군 상주국대도독 총지휘제군사(輔國大將軍 上柱國大都督 總指揮諸軍事) 금자광록대부 태자태사(金紫光祿大夫 太子太師)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曺)씨 성을 가진 인물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심지어 필사본 화랑세기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조계룡이 진평왕의 부마라고 하지만 그가 실제 어떤 공주와 결혼하였는지는 도무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진평왕의 딸은 선덕여왕, 천명공주, 선화공주 세 사람이 알려져 있으며, 천명공주김용수에게, 선화공주백제 무왕에게 시집 갔다. 선덕여왕은 삼국사기에는 남편에 관한 기록이 없지만 삼국유사와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남편이 여럿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626년생이라는 조계룡을 진평왕이 사위로 삼았다고 하는데, 진평왕은 632년에 죽었으므로, 이야기대로라면 진평왕은 많아야 7살 난 어린아이를 공주와 혼인시킨 것이 된다.

또한 실제 신라는 부원군이라는 작호를 쓴 적이 전혀 없었으며[2], 조계룡이 받았다는 여러 벼슬 중 하나인 보국대장군 작호는 진평왕 대에도 존재하기는 했으나, 신라가 아니라 당나라에서 쓰던 벼슬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가 받은 작위와 관직은 모두 그보다 후대인 고려의 것에 가깝다. 또한 그의 외조부 이광옥이 한림학사를 지냈다고 하여 한림대(翰林臺)[3]의 직위를 역임한 것으로 보이는데, 한림대의 본래 명칭인 통문박사(通文博士)가 한림대로 개칭된 것이 이광옥이 살던 시대보다 후대인 경덕왕 대이기 때문에, 위 전승은 후대에 조상을 미화할 목적으로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계룡 이후의 세계(世繼)는 실전되어 전해지지 않고[4] 신라 말 아간시중[5]을 지낸 조흠의 아들 조겸이 고려 태조와 신덕왕후의 딸 덕공공주와 혼인하였으며 태악서승[6]이란 벼슬을 지낸 기록이 있어 조겸을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조겸과 혼인했다는 왕건의 딸 덕공공주라는 인물도 고려사 등 정사는 물론 야사에서도 보이지 않는 인물로, 조겸이 정말로 태조의 부마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한 고려사고려사절요에서는 조겸 등의 이름을 찾아보기 어려우며, 그 후손들에 대한 기록도 족보에만 전해질 뿐 다른 사료에는 전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라, 역시 시조로서 미화되었을 뿐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창녕 조씨 인물들이 정사에서 뚜렷하게 행적이 남겨진 것은 고려 후기부터이다. 특히 위화도 회군으로 유명한 조민수를 꼽을 수 있는데, 조민수(曺敏修)는 창성부원군이라는 작위를 받은 바 있으며, 이것은 시조 조계룡이 받았다는 작위의 이름과 동일하다. 그리고 공민왕 때 찬성사에 오른 조익청(曺益淸)과 조민수의 막내 동생으로 밀직부사를 지낸 조경수(曺敬修), 고려 말 태학사를 지내고 여말선초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인 조의생(曺義生)[7]과 역시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으로 제학을 지낸 조희직(曺希直) 등이 있다. 또 조선 전기에 편찬된 삼강행실도언해에는 고려 고종 40년(1250)에 지금의 춘천 지역에서 몽골군에 항전하다 아내와 같이 불속에 뛰어들어 죽은 조효립(曺孝立)의 기록이 실려 있다.

창녕 조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더욱 활발한 활동을 보인다. 조민수의 동생으로 태조 때 경상도병마도절제사를 지낸 조익수(曺益修), 세종 시대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조상치(曺尙治),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영의정을 지낸 조석문(曺錫文), 성종 때 성리학의 대가로 두시언해와 만분가를 지은 대문장가 조위(曺偉), 조위의 동생으로 시에 뛰어났으며 중종의 명으로 2륜행실도를 편찬한 조신(曺伸), 연산군 때 호조참판을 역임한 조계형(曺繼衡), 광해군 때 공조참판을 지낸 조탁(曺倬), 임진왜란에서 의병으로 활동하고 광해군 때 대구부사를 지낸 조응인(曺應仁), 인조 때 합천군수를 지낸 조희인(曺希仁), 인조 때 정주목사를 지낸 조정립(曺挺立), 인조 때 창원부사를 지낸 조정생(曺挺生), 인조 때 예조좌랑을 지낸 조시일(曺時逸), 효종 때 양산군수를 지낸 조시량(曺時亮), 숙종때 문과에 장원 급제한 조효창(曺孝昌), 조선 중기의 대유학자이자 북인의 거두로서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등의 의병장들을 배출한 조식(曺植), 고종 때 동지돈녕부사를 지낸 조진구(曺鎭九)와 조진억(曺鎭億), 고종 때 관찰사를 지낸 조시영(曺始永) 등이 이름을 날렸다.


3. 기록[편집]


  • 조선시대
종류
인원(명)
문과 합격자
113
무과 합격자
202
공신
6[8]
상신[9]
1

4. 인구 변화[편집]


  • 1985년 - 72,213가구, 299,669명
  • 2000년 - 105,282가구, 338,222명
  • 2015년 - 366,798명

5. 분파[편집]


조씨(曺氏)는 창녕 조씨가 단일본이며, 분파는 약 49여 개에 이른다. 같은 조(曺)씨이면서 본관을 달리하는 집안이 있는데, 그 수가 많지 않을 뿐더러 모두 한 집안에서 나왔으므로 단일본으로 본다.
  • 감사공파(監司公派)
  • 낭장공파(郎將公派)
  •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 만호공파(萬戶公派)
  • 문익공파(文翊公派)
  • 문장공파(文莊公派)[10]
  • 문정공파(文貞公派)[11]
  • 문간공파(文簡公派)
  • 목사공파(牧使公派)
  • 밀직사공파(密直使公派)
  • 병조참의공파(兵曹參議公派)
  • 부사직공파(副司直公派)
  • 부위공파(副尉公派)
  • 부제학공파(副提學公派)
  • 병사공파(兵使公派)
  • 부사공파(府使公派)
  • 상호군공파(上護軍公派)
  • 시직공파(侍直公派)
  • 승지공파(承旨公派)
  • 사의공파(司議公派)
  • 사성공파(司成公派)
  • 사정공파(司正公派)
  • 사직공파(司直公派)
  • 송학공파(松鶴公派)
  • 수찬공파(修撰公派)
  • 시랑공파(侍郞公派)
  • 시중공파(侍中公派)
  • 양평공파(襄平公派)[12]
  • 지평공파(持平公派)
  • 직장공파(直長公派)
  • 장양공파(壯襄公派)
  • 좌시중공파(左侍中公派)
  • 중추공파(中樞公派)
  • 지중추공파(知中樞公派)
  • 진사공파(進士公派)
  • 찬성공파(贊成公派)[13]
  • 청구당공파(靑邱堂公派)
  • 청간공파(淸澗公派)[14]
  • 창산군파(昌山君派)
  • 참의공파(參議公派)[15]
  • 참판공파(參判公派)
  • 충간공파(忠簡公派)
  •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 참의공파(參議公派)
  • 충정공파(忠貞公派)
  • 충익공파(忠翼公派)
  • 취원당파(聚遠堂派)[16]
  •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17]
  • 태학사공파(太學士公派)
  • 판윤공파(判尹公派)
  • 헌납공파(獻納公派)
  • 현감공파(縣監公派)
  • 희천공파(熙川公派)[18]
  • 효강공파(孝康公派)[19]

6. 항렬[편집]


오늘날의 창녕 조씨의 항렬은 비교적 근래에 재정립한 것이다. 창녕 조씨는 조선 중기 이후 각 파에서 항렬자를 엄격히 제정하여 사용하다가, 갑술대동보(1880)를 발간할 때 전국의 종친들이 모여 각 파에서 사용하는 항렬자를 통일하였다. 고려 말기의 인물로 추정[20]되는 갱시조(更始祖) 삼송 형제(송무松茂, 송군松君, 송학松鶴)[21]1세로 하여 세대수를 초기화하고 그 22세손을 ◯승(承), 23세손을 병(秉)◯, 24세손을 ◯환(煥) 자로 정한 후 그 이후 세대부터 각 항렬별로 세 자씩의 돌림자를 정했다. 돌림자의 원칙은 오행(五行)인 목화토금수를 부수로 하는 글자로 정했다. 각 세대당 세 자씩 돌림자를 정한 이유는 같은 이름이 많아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분파마다 상이하지만[22] 오늘날 활동하는 창녕 조씨의 항렬은 대략 24세에서 28세인데, 오랜 역사에 비해 대수가 짧아 보이는 것은 고려 중기를 기준으로 세대수를 한 번 재정립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녕조씨 대종회에서는 각 문중의 파보에 제시되어 있는 항렬자에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을 인지하고 이를 통일하기로 했다. 2016년 6월 초부터 9월 말까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창녕조씨 족보를 비롯하여 중앙화수회, 대구종회 등 여러 종회에 보관된 파보의 항렬자를 조사하여 정리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항렬자를 2017년 전종대회에서 표준항렬자로 확정하였다. 따라서 아래 항렬표는 2017년 창녕조씨 대종회에서 새롭게 제정한 표준 항렬자이다.
22세
◯承(승)
23세
秉(병)◯
24세
◯煥(환)
25세
圭(규)◯, 喜(희)◯, 基(기)◯
26세
◯鉉(현), ◯鎬(호), ◯鐘(종)
27세
永(영)◯, 海(해)◯, 洙(수)◯
28세
◯根(근), ◯植(식), ◯穆(목)
29세
容(용)◯, 炯(형)◯, 然(연)◯
30세
◯載(재), ◯坤(곤), ◯塤(훈)
31세
鎰(일)◯, 鍵(건)◯, 鏞(용)◯
32세
◯泰(태), ◯淳(순), ◯淵(연)
33세
東(동)◯, 相(상)◯, 英(영)◯
34세
◯燮(섭), ◯烈(열), ◯杰(걸)
35세
均(균)◯, 重(중)◯, 垣(원)◯
36세
◯鎔(용), ◯鎭(진), ◯錫(석)
37세
潤(윤)◯, 準(준)◯, 汶(문)◯
38세
◯稷(직), ◯栢(백), ◯杓(표)
39세
熙(희)◯, 煐(영)◯, 螢(형)◯
40세
◯堉(육), ◯墩(돈), ◯培(배)
41세
鐫(전)◯, 銓(전)◯, 鑽(찬)◯
42세
◯浩(호), ◯河(하), ◯洛(락)
43세
和(화)◯, 楨(정)◯, 桓(환)◯
44세
◯勳(훈), ◯黙(묵), ◯愚(우)

7. 집성촌[편집]



7.1. 서울·경기·강원[편집]


  •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 서울특별시 서초구 염곡동: 부제학공파
  •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산리
  • 강원도 강릉시 난곡동
  • 강원도 강릉시 어리미
  •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교항리

7.2. 경상[편집]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수리리
  • 대구광역시 중구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송정리
  • 부산광역시 중구
  •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23]: 태복경공파
  •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24]·신리·예지리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매호리: 태복경공파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흥산리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삼호리·오계리[25]·원기리
  •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병암리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귀호리·금호리·삼창리[26]
  •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27]
  •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화산리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연금리
  •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웅동리
  •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대하리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28]
  • 경상남도 의령군 화정면 상정리[29]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도야리
  •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간상리·대암리·원촌리
  • 경상남도 창녕군 대합면 이방리
  • 경상남도 창녕군 유어면 세진리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감계리[30]
  •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도옥리·봉곡리·안성리: 태복경공파
  •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김봉리·압곡리: 태복경공파
  •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덕봉리

7.3. 충청[편집]


  •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 도둔리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기전리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신동리
  •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제원리
  • 충청남도 보령시 주포면 봉당리
  •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 마량리

7.4. 전라[편집]


  •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황산리
  • 전라북도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동전리
  •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산수리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봉덕리
  • 전라북도 장수군 천천면 삼고리
  •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 금산리
  • 전라남도 나주시 동강면 월양리
  •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내리
  •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대곡리
  •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대안리
  • 전라남도 신안군 팔금면 당고리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31]·남풍리
  •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오산리
  •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
  •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용호리
  • 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앵무리[32]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감도리[33]·수만리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대포리·백용리·복암리·서성리·운농리·장동리·청궁리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남치리·수리·옥리·용곡리
  •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면 대비리[34]
  •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한계리
  •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백학리[35]
  •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천마리[36]

7.5. 북한[편집]


  • 황해도 봉산군 영천면 가산리
  • 황해도 옹진군 부민면 광평리·부암리
  •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37]
  •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원로리
  • 평안북도 박천군 남면 남송리
  • 함경남도 고원군 하발면 대수곡리
  •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 도룡리

8. 주요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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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홈페이지 체제에서 다음 카페 체제로 바뀜[2] 무열왕 때까지 갈문왕이라는 칭호를 썼다.[3] 통일신라시대 왕명을 문서로 작성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던 곳으로 신라의 한림대는 당나라의 한림원(翰林院)을 모방하여 경덕왕 대에 종래의 통문박사(通文博士)를 개칭한 것으로, 거기에는 한림랑·한림대조(翰林待詔)·한림서생(翰林書生) 등의 관원이 있었다. 이들은 이른바 한림대의 학사직(學士職)으로, 이 관직에는 문장과 학문에 능한 사람들이 주로 임명되었다. 특히 한림대의 최고 관직인 한림랑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당대의 문사(文士)들로써 충당하였고, 6두품 출신이 이 관직에 많이 진출하였다. 한림랑에는 관등이 사찬(沙飡) 정도인 사람이 임명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4] 창녕 조씨 족보에 따르면 조계룡으로부터 조겸까지는 기록이 실전되어 조계룡-조응신-조수형-조돈-조흠-조겸 겨우 6대만 있다. 진평왕의 재위기(579~632)에서 신라 말까지의 시간적 간격은 약 300년 정도인데, 한 세대를 30년으로 계산하면 겨우 180년밖에 안 되고 교차검증이 어려우므로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다. 다만 족보 문서에도 나와 있듯 다른 많은 집안들 또한 시조와 그로부터 몇 세대까지는 전설이나 설화의 영역에 가깝게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전승은 오늘날에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으니, 조선 중기의 사람인 김종직마저도 자신의 선조에 대한 고찰에서 이렇게 전승된 자신의 시조를 확인할 길이 없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비단 족보가 아니어도 행장록 등에서도 김억추와 같이 실제 역사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서술되는 경우가 많으니, 조상에 대한 기록을 무조건 역사적 사실로 믿기보다는 양반가에서 조상을 존숭하려는 의도로 기술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다.[5] 아간(阿干) 또는 아찬(阿飡)은 신라 17관등 중 여섯 번째 등급으로,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상위 관등이었다. 아찬으로서 시중에 임명된 사람은 898년(효공왕 2) 아찬(阿飡)의 관등으로 시중에 임명된 계강(繼康) 등이 있다.[6] 태악서(太樂署)는 고려 시대에 음률의 교열(校閱)을 맡아보던 관아로, 충렬왕 34년(1308)에 전악서로 고치고 뒤에 여러 차례 전악서라는 이름과 번갈아 가면서 바뀌었다.[7] 자는 원촌(遠村)[8] 세조 때 영의정 조석문은 3차례 공신(적개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에 책록되었다. 중종 때 문신 조계형은 정국공신에 책록되었으나 삭훈되었다.[9]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10] 경상북도 김천출신인 문장공 매계 조위(曺偉)를 파조로 한다.[11] 문정공 남명 조식을 파조로 한다.[12] 고려 후기 연저수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좌정승에 올라 하성부원군에 봉해진 양평공 조익청(曺益淸)을 파조로 한다. 창녕조씨 대종회 추산 전국 40만 창녕조씨 중 약 65% 정도가 양평공의 후손이라한다.[13] 조민수의 동생으로 단성좌명공신 좌찬성 조경수(曺敬修)를 파조로 한다.[14] 고려 때 시중(侍中)을 역임한 조한룡(曺漢龍)을 파조로 한다.[15] 조민수의 동생 찬성공 조경수의 막내 아들로 김천입향조인 참의공 조심(曺深)을 파조로 한다.[16] 조선 중기 평안도도사를 역임한 조광익(曺光益)을 파조로 한다. 조광익의 호(號)가 취원당(聚遠堂)이다.[17] 고려 후기 종3품 태복경(太僕卿)을 역임한 조흥(曺興)을 파조로 한다. 항렬에서 1세로 삼는 갱시조 삼송 형제(송무松茂, 송군松君, 송학松鶴) 중 송군(松君)의 후손으로는 태복경공파가 유일하다. 과거합격자 수십명을 배출한 명문가였지만 이인좌의 난에 가담해 일부 계대의 후손들이 몰락했다.[18] 조선 태조 때 판희천군사(判熙川郡事)를 지낸 조신충(曺信忠)을 파조로 하며, 주로 경상북도 영천시 일원에 세거한다.[19] 경상북도 김천출신으로 매계 조위의 동생 효강공 적암 조신(曺伸)을 파조로 한다.[20] 1세대를 30년으로 보는 경우가 일반적이고, 2020년 현재 창녕 조씨는 24~28세까지 생존해 있다. 24×30=720이므로, 2020-720=1300, 즉 고려 말기가 된다. 중시조 조겸으로부터 계산해도 같은 결과를 얻는다.[21] 이들 3형제는 중시조 조겸의 12대손(=13세손)이다. 조겸으로부터 이들 3형제까지의 계보는 태복경공파보(1990) 등에 나와 있다.[22] 일부 분파에선 27~32세가 현재 활동 중인 경우도 있다.[23] 성리학자 봉강 조상, 4선 국회의원 조일환이 이 마을 출신이다.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 창녕조씨 태복경공파 집성촌, 우리 집안이 이인좌의 난 때문에 몰락함[24] 작사·작곡가인 고려성·나화랑 형제의 출신 지역이자 형제그룹 조트리오의 본적지다.[25] 사기꾼 조희팔이 이 마을 출신이다.[26] 희천공파(熙川公派)-사의공계(司議公系) 후손들이 주로 세거하는 마을로, 독립유공자 조병화·조재만, 조규설·조규창 전 국회의원, 정치인 조병환이 이 마을 출신이다.[27] 독립유공자 조병진·조재복이 이 마을 출신이다.[28] 남명 조식의 묘소가 이 마을에 있다.[29] 독립유공자 조재학이 이 마을 출신이다.[30] 독립유공자 조윤호조희순이 이 마을 출신이다.[31] 독립유공자 조문환이 이 마을 출신이다.[32] 트로트가수 송가인이 이 마을 출신이다.[33] 조국현 전 국회의원이 이 마을 출신이다.[34] 독립유공자 조병의가 이 마을 출신이다.[35] 국가등록문화재 영광 창녕조씨 관해공 가옥 (靈光 昌寧曺氏 觀海公 家屋)이 있다.[36] 조암부락, 금자부락에 창녕 조씨 선영이 있다.[37] 독립운동가 조만식이 이 마을 출신이다.[38] 법적인 본명이자 실제로 사용하는 이름은 조국이지만, 창녕조씨 태복경공파보(1990)에는 항렬자를 맞추어 조국현으로 기재되어 있다.[39]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40] 매계 조위의 15대손이다.[41] 집현전의 수장은 대제학이지만, 대제학은 겸직이라 부제학이 실질적인 수장이었다.[42]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