딘 소장 구출 작전설 (r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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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왜곡의 시작과 국방부의 부정
3. 역사 왜곡에 대한 문제 제기
4. 작전의 실체와 잘못 알려진 사실들
4.1. 김재현 기관사 등이 참여한 작전의 실체와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
4.1.1. 김재현 기관사의 순직일과 작전 일시
4.1.2. 김재현 기관사가 수행한 작전의 목적
4.1.3.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에 탑승했던 미군의 정체
4.1.4. 김재현 기관사가 운전했던 기관차의 모델번호
4.2. 장시경 신호원 등이 참여한 작전의 실체와 잘못 알려진 사실들
5.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잘못 알려진 이유
6. 참고 자료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딘 소장 구출 작전설'은 6.25 전쟁 대전 전투에서 직접 일선에서 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미 제24보병사단 사단장 윌리엄 F.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해 1950년 7월 19일(김재현 기관사 등)과 20일(장시경 신호원 등) 두차례에 걸쳐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운전하는 기관차를 통해 미군 결사대원들이 대전으로 투입되어 특수 작전을 펼쳤다는 한국철도공사가 주장하는 역사 왜곡 영웅담이다.

한국철도공사철도청 시절부터 호국철도의 상징으로 주도적으로 홍보하여 널리 알려진 이 '딘 소장 구출 작전' 영웅담은 흡사 전쟁 영화시나리오 같은 화제성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국가보훈부와 같은 정부기관 및 언론 등이 '구출 작전'이 없음을 단번에 판명할 수 있는 기관차의 대전 진입 시점, 미 제24보병사단의 대전 철수 시점, 딘 소장의 실종 시점 등 공식 전사(戰史)에 기록된 대전 전투의 사건 발생별 시간 순서 비교와 미군 특공대원들의 신원 파악 등 기본적인 팩트체크교차검증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인용하고 무분별하게 확대·재생산하면서 정설처럼 굳어졌다.

세계 전쟁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구출 작전이라는 언론 기사(금강일보 기사# 결론부터 말하자면 딘 소장의 명령에 따라 7월 20일 실행되었던 대전역 안의 대부분 탄약으로 구성된 보급품 적재 화차들을 후방으로 이송하는 이른바 '보급품 후송 작전'에 참여했던 생존 철도공무원들이 작전 목적을 오해하여 생긴 역사 왜곡으로 한국철도공사가 주장하는 전쟁영화의 시나리오 같은 '딘 소장 구출 작전'은 실행된 적이 없었다.

당연히 미군의 대전 전투 공식 전사(戰史)와 당시 미국의 언론자료 등에 기관차 투입을 통한 '딘 소장 구출 작전'에 대한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미군의 대전 전투 공식 전사(戰史)와 당시 미국의 언론자료들은 국내에서 오해하고 있는 이 작전에 대해 딘 소장의 명령에 의하여 한국인 철도공무원들과 미군 호송병들이 함께 수행한 '보급품 후송 작전', 그리고 한국인 철도공무원 및 미군들의 노력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후송에 실패하여 탄약보급품이 적재된 화차들은 7월 21일 오전 8시에 미 공군이 폭격으로 파괴하여 북한군의 노획을 막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덧붙여 이 대전역 화차 폭격은 AP 통신사를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되어 'The Evening Star', 'The Daily Alaska Empire' 등 수많은 미국 신문에 1950년 7월 21일자로 보도되었으며, 화차 폭격에 참여한 머스탱 전투기 조종사는 엄청난 탄약이 적재된 화차가 폭발하면서 발생한 화염을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행사의 상징인 화려한 불꽃놀이 광경에 비유하였다.

  • 'The Evening Star' 1950년 7월 21일자 기사 원문 발췌

"The train blew sky high, It was like the Fourth of July."



2. 역사 왜곡의 시작과 국방부의 부정[편집]


딘 소장 구출 작전설의 시작은 6.25 전쟁 종전 후 교통부가 1953년 12월 발간한 역사책 '한국교통동란기'의 우군을 구출타가 항목 (pp. 326~331)에서 김재현 기관사 등의 공적 그리고 포위망을 뚫고 항목 (pp. 158~161)에서 장시경 신호원의 공적을 기술하면서 시작이 되었다.

그 후 언론 기사 등을 통해 계속 소개되었다가 철도청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딘 소장 구출 작전'을 철도공무원들의 공적으로 소개하였고 국가보훈부도 검증없이 받아들여 대대적으로 현양사업을 진행하면서 '딘 소장 구출 작전' 실제로 실행된 작전이며 완벽하게 검증된 공적처럼 자리잡으며 확대·재생산되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 했지만 사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9년 발간한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 536)의 대전 전투 연구 항목에서 국내와 미국 측 자료를 통해 작전 목적을 비교 분석한 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생존 철도공무원들의 증언에서 모두 이 열차작전의 목적이 딘 소장의 구출에 있다고 하였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며 '딘 소장 구출 작전'은 와전이라고 못 박았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8년에 발간한 현재 시점에서 최신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라고 할 수 있는6.25전쟁사 제4권 금강-소맥산맥선 지연작전 (pp. 161–162, 주석 p. 217)에서는 '대전역 보급품 후송 실패'라는 제목의 단락으로 기술하여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음을 명확히 하였고 국방부 소속 전쟁기념관 역시 2020년에 발간했던 학예지 -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 (pp. 118–123)에서 미군 측 자료와 기록을 근거자료로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보급품 후송 작전'으로 기술하였고 작전 목적의 오해에 대해 각주를 통해 한번 더 자세히 설명하였다.

  • '6·25전쟁 개전의 순간' 각주 발췌

"당시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에 부여된 임무를 두고 거듭되는 오해를 별기한다. 당시 승무원인 현재영·황남호의 수기 증언을 비롯해 국내의 각종 문헌과 현양 행사에서는 당시의 철도 수송 임무를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묘사해 왔다. 그러나 대전 철수작전 당시 작성된 미 제24사단 정보처 보고서와 미 육군,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에서 각각 발행된 공간사, 딘 소장의 회고록 등에 따르면 이들의 임무는 대전역에 적재된 보급품을 영동역으로 철수시키는 것으로 딘 소장의 구조와는 무관한 임무였다.[24th Infantry Division G-2 Journal, Vol. 8, For the Period 191700K July to 221550K July 50 ; Appleman, Roy E., 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lu , Center of Military History, United States Army(1992), 169쪽; Dean,William F. and Worden, William L., General Dean’s Story , the Viking Press(1954), 37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4: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 2008, 161∼162쪽]"


현재도 국민신문고를 통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전쟁기념관에 문의를 하면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은 대전 전투에서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니고 '보급품 후송 작전'에 참여했다는 답변을 받을 수 있는데 한마디로 한국철도공사는 국내에서 가장 권위있는 국방부의 전쟁사 연구 기관들이 부정하는 공적으로 혈세를 들여 현양사업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3. 역사 왜곡에 대한 문제 제기[편집]


'딘 소장 구출 작전설'은 사실 엉성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조금만 자세히 조사해보면 역사 왜곡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작전 일시와 기관차 탑승 미군의 정체를 들 수 있겠다.

파일:General_Dean's_Kill.jpg

위의 사진이 미군의 대전 전투를 상징하는 사진으로 7월 20일 시점 딘 소장이 직접 지휘하며 파괴한 북한군 전차 사진이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 등 한국철도공사 관계자들은 7월 19일 시점 행방불명된 딘 소장을 구출하러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가 대전으로 투입되었다는 언론 기사(매일건설신문 기획칼럼 -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 '제47화')를 작성하고 호국철도기념관에는 7월 19일 시점 북한군에 포로가 된 딘 소장을 구출하러 김재현 기관사가 기관차가 대전에 투입되었다고 설명문에 기재하는 등 기초적인 대전 전투 전사(戰史)도 확인 안 하고 역사 왜곡을 자행하였다.

파일:김재현기관사-호국철도기념관.png

그리고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진실이라면 '딘 소장 구출 작전'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30명의 미군 결사대원의 신원과 소속부대 등이 미군 전사에서 남아 있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고 특수 작전처럼 과장하기 위해 '미군 특공대', '미군 특전단'#, '미 해병 특수부대'#[1] 등으로 확대ㆍ 재생산 되기만 하였다.

실제로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실행되었고 29명에서 32명의 미군 결사대원이 전사한 것이 진실이었다면 이 미군들에게는 비록 작전에는 실패했더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상관을 구하기 위한 희생정신과 용기를 높이 평가하여 명예훈장 등 각종 무공훈장이 추서되고 미국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영웅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실례로 1970년 베트남 전쟁에서 미 육군 특수작전부대(그린베레)가 손타이 포로수용소의 포로 구출 작전(Operation Ivory Coast)을 실행했었는데 비록 미군 포로들이 작전 실행일 이전에 다른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어 실패하였지만 이 작전을 수행한 미 육군 특수작전부대원들에게는 은성훈장 등 각종 무공훈장 등이 수여되었다.

위와같이 엉성하기 짝이 없는 '딘 소장 구출 작전설'은 국방부 역사기관들로부터 공식적으로 부정 당하고 전쟁 역사 전문가들로부터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아왔는데 2020년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소장인 임재근 박사가 기밀해제 된 미 제24보병사단 문서 등을 근거자료로 삼아 2021년 8월 언론 기사(오마이뉴스 - '딘 소장 구출 작전'은 사실이 아니었다)를 통해 작전 일시, 작전 목적, 기관차 탑승 미군의 정체, 기관차 모델 번호를 재조사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4. 작전의 실체와 잘못 알려진 사실들[편집]


7월 19일 김재현 기관사,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가 미군 결사대원 30명과 함께 소위 '1차 딘 소장 구출 작전'을 실행하였고 이 작전이 실패하자 7월 20일 장시경 신호원 등이 미군 20명과 함께 2차 딘 소장 구출 작전을 수행하였다는
'딘 소장 구출 작전설'은 미국과 대한민국 국방부의 6.25 전쟁 사료 등을 통해 교차검증해보면 '보급품 후송 작전'의 오해 및 와전으로서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며 상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1. 김재현 기관사 등이 참여한 작전의 실체와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편집]



4.1.1. 김재현 기관사의 순직일과 작전 일시[편집]


현재 김재현 기관사의 공식 순직일은 국립서울현충원 묘비, 국가보훈처 자료 등등에서 7월 19일로 기록하고 있으며,1975년 동아일보 기사처럼 7월 19일을 김재현 기관사의 순직일로 보도한 과거 기사도 존재한다.

그러나 생존 철도공무원들의 최초 증언이 실렸던 1953년 교통부가 발간한 한국교통동란기에서 현재영 부기관사는 7월 20일 16시 40분경에 대전역에 도착했었고 복귀하는 도중 북한군 총격으로 김재현 기관사가 순직했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이는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의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p. 168–169)에 7월 20일 16시 20분에 기관차가 이원역에서 대전역으로 출발하였고 역시 복귀하는 도중 한국인 기관사가 적의 총탄을 맞아 죽었다고 죽었다고 기술한 기록과 거의 일치하며, 미 제24보병사단 정보참모부(G2)의 보고서 역시 7월 20일 16시 30분경에 기관차가 대전역으로 출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딘 장군 회고록 - General Dean's Story (p. 37) 역시 마찬가지로 이렇게 미국 측 자료에서 일관되게 김재현 기관사의 순직일과 작전 일시를 7월 20일 16시 20분부터 17시 사이로 기록하고 있다.

1962년 경향신문 기사 등의 자료에도 7월 20일에 김재현 철도 기관사가 순직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종전 후 미군 측 기록들과 교차검증을 할 수 없었던 시기에 증언에만 의존한 기록들이 후대에 전해지면서 순직일 및 작전 일시에 혼동이 생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4.1.2. 김재현 기관사가 수행한 작전의 목적[편집]


그 동안 국내에서는 1950년 7월 19일 김재현 기관사 등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운전하는 기관차에 30명으로 구성된 미군 결사대가 탑승하여 대전 전투에서 실종된 미 제24보병사단 사단장 - '윌리엄 F.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한 일명 '딘 소장 구출 작전'을 실행하였고 이러한 '딘 소장 구출 작전' 수행 중 김재현 기관사와 미군 결사대원 29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었다.(1953년 교통부 발간 한국교통동란기와 1983년 황남호 본무기관조사와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자필 경위서에서 기관차에 탑승했던 미군의 정체를 '미군 결사대'로 명명하고 총원 30명, 전사자 29명이라고 기록하였지만, 후대에 '딘 소장 구출 작전'을 특수 작전처럼 과장하기 위해 '미군 특공대', '미군 특전단'#, '미 해병 특수부대'#[2] 등으로 확대ㆍ 재생산 되었고 병력과 전사자 기록도 총원 33명, 전사자 32명으로 와전되었다.)

한국철도공사철도청 시절부터 호국철도의 상징으로 주도적으로 홍보하여 널리 알려진 이 '딘 소장 구출 작전' 영웅담은 흡사 전쟁 영화시나리오 같은 화제성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국가보훈부와 같은 정부기관 및 언론 등이 '구출 작전'이 아니없음을 단번에 판명할 수 있는 기관차의 대전 진입 시점, 미 제24보병사단의 대전 철수 시점, 딘 소장의 실종 시점 등 공식 전사(戰史)에 기록된 대전 전투의 사건 발생별 시간 순서 비교와 미군 특공대원들의 신원 파악 등 기본적인 팩트체크교차검증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인용하고 무분별하게 확대·재생산하면서 정설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딘 소장 구출 작전'은 절대 팩트가 아니며, 역사적 사실은 대전역 안의 화차 10량에 적재되어 있던 탄약 등 보급품의 후방 이송 작전이었는데 그 동안 이 작전이 국내에서만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와전되어 한국철도공사를 통해 광범위하게 잘못 알려진 것으로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의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p. 168–169)딘 장군 회고록 - General Dean's Story (p. 37) 등의 과거 자료부터 현재 기밀해제되어 발굴된 미 제24보병사단 정보참모부(G2) 보고서 등 최신 자료까지 모든 미군 측 대전 전투 공식 전사(戰史) 및 기록에서 '보급품 후송 작전'으로 일관되게 기술하고 있다.

덧붙여 이 '보급품 후송 작전'은 도쿄 미 극동사령부의 7월 21일자(일본 시각) 전황 브리핑에서도 언급되었으며, AP 통신사를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되어 'Journal-Every Evening', 'Spokane Daily Chronicle' 등 수많은 미국 신문에 7월 20일자(미국 시각)로 보도되었다.

  • 'Journal-Every Evening' 1950년 7월 20일자 기사 원문 발췌

"A locomotive crew trying to take a late haul of supplies from Taejon was ambushed en route to the station."


또한 대한민국 국군 측 역시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9년 발간한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 536)대전 전투 연구 항목에서 국내와 미국 측 자료를 통해 작전 목적을 비교 분석한 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생존 철도공무원들의 증언에서 모두 이 열차작전의 목적이 딘 소장의 구출에 있다고 하였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며 '딘 소장 구출 작전'은 와전이라고 못 박았으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8년에 발간한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 6.25전쟁사 제4권 금강-소맥산맥선 지연작전 (pp. 161–162, 주석 p. 217)에서는 '대전역 보급품 후송 실패'라는 제목의 단락으로 기술하여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음을 명확히 하였다. 전쟁기념관 역시 2020년에 발간했던 학예지 -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 (pp. 118–123)에서 미군 측 자료와 기록을 근거자료로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보급품 후송 작전'으로 기술하였고 작전 목적의 오해에 대해 각주를 통해 한번 더 자세히 설명하였다.('6.25전쟁사 제4권 금강-소맥산맥선 지연작전'과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에서 작전 목적을 '딘 소장 구출'이 아닌 '보급품 후송' 그리고 기관차에 탑승한 미군을 '특공대원'이 아닌 '호송병'으로 정확히 기술하였지만 호송병 30명이 탑승하여 29명이 전사했다고 기술한 부분은 향후 개정판에서 총원 6명에 전사자 없음으로 정정해야 할 팩트 오류이다.)

덧붙여 그 동안 북한군에게 포위된 상태의 대전에 남아있던 딘 소장을 구출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철도공사가 제작한 각종 전시물 설명문(한국철도공사 본사 동상 설명문, 호국철도기념관 전시물 설명문), 정부기관 SNS 콘텐츠(국가철도공단 블로그) 그리고 언론 기사(매일건설신문 기획칼럼 -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 '제47화', 대전일보 기사)와 영상 콘텐츠(국립서울현충원 교육용 애니메이션 - '미카 129 )' 등등에서 딘 소장이 아예 1950년 7월 19일에 실종 혹은 포로가 되었고 미군이 이 사실을 인지하여 김재현 기관사가 운전하는 기관차를 통해 특공대를 투입하여 대전역을 수색하는 등 딘 소장 구출 작전을 펼쳤다고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위와 같은 자료들은 관련된 사건들의 발생 시점을 조작하여 끼워 맞춘 이론의 여지가 없는 역사 왜곡으로 다시 말해 이러한 영화같은 구출 작전은 시간 순서상 원천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작전이었다.

왜냐하면 첫번째로 딘 소장은 7월 20일 18시경 대전에서 최종적으로 철수하기 전까지 대전 시내에서 부하들과 함께 북한군 탱크를 공격하며 정상적으로 제34연대 등 잔류 부대들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7월 19일에 실종 혹은 포로가 되었다는 기본적인 사실관계부터가 완전히 틀렸으며(딘 소장의 직접 지휘하에 7월 20일에 격파된 탱크 사진), 두번째로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의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p. 168–169)딘 장군 회고록 - General Dean's Story (p. 37)에 딘 소장이 7월 20일 16시경에 영동에 위치한 사단지휘소에 보급품 후송 명령을 하달했고 이 명령 때문에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가 대전역으로 출발한 것이며, 기관차가 대전역에 도착은 했지만 화차 견인에는 실패 후 복귀하는 도중 김재현 기관사가 순직했다는 사실까지 딘 소장과 수송장교 햇필드 대위가 보고 받았으며 그리하여 한번 더 보급품의 후송을 위해 기관차를 다시 보내라고 딘 소장이 재차 사단지휘소에 명령을 하달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의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p. 169)에는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를 대전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수송장교 햇필드 대위에게 김재현 기관사가 대전역에 도착한 이후 기관차(탄수차) 손상에 이은 동력 부족으로 화차 견인이 불가능함을 직접 보고하고 복귀하는 상황까지 기록되어 있다.

  •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ul' (pp. 168–169) 원문 발췌

"The locomotive had been sent to Taejon as the result of General Dean's telephone request to the 24th Division a little earlier. In midafternoon, Captain Hatfield tried to send a rolling supply point of ten boxcars of ammunition out of the Taejon railroad yard to Yongdong. Returning to the rail yard at the northeast side of Taejon, Hatfield discovered that the Korean crew had uncoupled the locomotive from the supply train and fled south in it. It was then that Dean had telephoned the division to dispatch a locomotive immediately to Taejon to pull out this train. The nearest rail yard was at Iwon-ni, fifteen miles southeast of Taejon. Only armed guards had kept the Korean train crews there on the job. Enemy fire on the locomotive from Iwon-ni punctured the water tender."


"Though under sniper fire at the railroad yards, Hatfield awaited the arrival of the locomotive. When it pulled into the yards more enemy fire hit it. The engineer said the locomotive was so damaged that it could not pull the train out. To Hatfield's dismay, the Korean engineer threw the locomotive in reverse and backed speedily southward out of the yard. At the tunnel southeast of Taejon enemy fire again swept over the locomotive and grenades struck it, killing the engineer. The fireman, although wounded, took the train on into Okch'on. Some American soldiers rode the train out of Taejon. According to 24th Division records, the time was 1645."


"Informed of this untoward incident, Dean again telephoned the division, and at 1700 he received a telephone call that it was sending another locomotive, this time under guard. Dean informed Hatfield of this and the latter waited at the rail yard. Hatfield was killed by enemy soldiers there while waiting for the locomotive that never arrived. The next morning at 0830 a U.S. Air Force strike destroyed the trainload load of ammunition and supplies still standing in the Taejon rail yard."


마지막으로 딘 소장이 실제 실종되고 포로가 된 시점 역시 자세히 살펴보면 딘 소장은 7월 20일 오후 5시 이후 대전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한다는 내용의 전보문을 영동에 위치한 사단지휘소에 보내고 오후 6시부터 미 제24 보병사단 34연대의 잔류 병력과 함께 차량 대열로 부대 건제를 유지한 채 대전에서 철수하였는데 그 후 북한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차단선을 돌파하지 못 하고 차에서 내려 도보로 철수하던 중, 함께 가던 부상병에게 물을 떠다 주기 위하여 어둠 속에서 계곡을 내려가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실신하면서 7월 21일 실종되었다. 당시 미 제24보병사단 대변인(공보장교)이 "7월 20일 한국 시각 오후 9시 20분(미국 동부 표준시 오전 7시 20분) 기준 대전 지구에서 철수하는 병력 중 50퍼센트가 질서정연한 철수에 성공했으며, 딘 소장 행방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실종자(Missing in Action)로 확정할 수는 없다."이렇게 발표하였고, 이 발표는 AP 통신사를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되어 'The Central New Jersey Home News', 'The Boston Globe' 등 수많은 미국 신문에 1950년 7월 20일자로 보도되었으며, 미군에서 딘 소장을 공식적으로 실종자(Missing in Action)로 확정한 것은 7월 22일이었다.

그리고 딘 소장이 포로가 된 시점도 낭떠러지로 떨어져 실신하면서 홀로 낙오된 이후 본대로 복귀하기 위해 36일 동안 산천을 헤매다가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8월 25일이 되어서야 한두규와 최종봉의 밀고로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었고 후술 부분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딘 소장이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미군에서 명확하게 인식한 시점이 1951년 12월 24일 이후로 이 시점까지 미군에서는 딘 소장을 실종전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당시 미군이 딘 소장의 실종 혹은 포로가 된 것을 인지한 후 특공대를 편성하여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를 통해 대전으로 투입시켜 '딘 소장 구출 작전'을 펼쳤다는 한국철도공사 등의 자료들은 완벽한 역사 왜곡이다.

한편 1950년 10월 북진 중 평양 부근에서 딘 소장 심문시 통역을 맡았던 북한군 징집병 이규현이 귀순하여 진술함으로써 미군에서도 이때 딘 소장이 생존하여 북한군에 포로가 된 것을 인지하였는데6.25 전쟁사 제4권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 (p. 166) 그래도 미군에서는 이규현의 진술보다는 정황상 전사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을 하였는지 1951년 2월 16일에 명예훈장을 추서하였다.#

그 후 생사여부를 계속 조사 중 1951년 12월 21일 북한군이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공산계 언론사 소속 월프레드 G. 버체트(Wilfred Graham Burchett) 종군기자를 초청하여 인터뷰를 시켰고, 1951년 12월 24일 딘 소장의 사진과 함께 전세계로 기사가 배포되면서 포로 상태인 딘 소장의 상황이 명확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4.1.3.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에 탑승했던 미군의 정체[편집]


기존에는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에 탑승했던 미군들의 정체가 '딘 소장 구출 작전'을 위한 '미군 결사대'로서 총원 30명에 구출 작전 중 29명의 결사대원들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었다.(1953년 교통부 발간 한국교통동란기와 1983년 황남호 본무기관조사와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자필 경위서에서 기관차에 탑승했던 미군의 정체를 '미군 결사대'로 명명하고 총원 30명, 전사자 29명이라고 기록하였지만, 후대에 '딘 소장 구출 작전'을 특수 작전처럼 과장하기 위해 '미군 특공대', '미군 특전단'#, '미 해병 특수부대'#[3] 등으로 확대ㆍ 재생산 되었고 병력과 전사자 기록도 총원 33명, 전사자 32명으로 와전되었다.)

그러나 미 제24보병사단의 정보참모부(G2)병참부대 보고서에 따르면 기관차에 탑승했던 미군들의 실제 정체는 '보급품 후송 작전' 지원 및 기관차 호위 임무를 맡았던 미 제24보병사단의 병참부대 소속의 일반 병사들로 하사 스몰우드(Sergeant Elmo Smallwood), 상병 맥컬럼(Corporal James McCallum), 상병 르모앙(Corporal Lemoine), 상병 슈와르츠(Corporal Schwartz), 일병 시콜라(Private first class Cicola), 이병 마호니(Private Mahony) 이렇게 6명이었으며 미군 사상자는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4]


4.1.4. 김재현 기관사가 운전했던 기관차의 모델번호[편집]


현재 김재현 기관사의 유품은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철도박물관에 소장, 전시 중이며 그가 운전했다고 알려진 미카 3형 증기기관차 129호(모델번호: 미카3-129호)2008년 10월 17일 등록문화재 제415호로 지정되었으며 한 때 대전철도차량정비단에 정태 보존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대전현충원 내 위치한 호국철도기념관에서 야외전시 중이다.

그런데 과거 사료 및 증언들의 기관차 모델번호를 조사해보면 김재현 기관사가 실제로 운전했던 기관차는 '미카3-129호'가 아니고 '미카 3-219호'로서 먼저 UP 통신사(현 UPI 통신사) 소속 피터 칼리셔(Peter Kalischer) 종군기자가 1950년 7월 20일 단독으로 보도하고 'Buffalo Evening News', 'The Atlanta Constitution' 등 수많은 미국 신문에 전재(轉載) 및 재배포되었던 대전 투입 기관차 관련 기사에서 기관차를 'Old 219'(낡은 기관차 219호 의미로 추정)로 특정하였고, 1953년 교통부 발간 한국교통동란기에서도 김재현 기관사가 운전하여 대전에 투입되었던 기관차를 'M3 二一九호'로 기록하였으며, 황남호 본무기관조사와 현재영 보조기관조사는 1983년 7월 20일 작성한 자필 경위서에서 한번 더 'MK3 219호'로 증언하였으며 특히 황남호 본무기관조사는 '미카3-219호'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구체적인 증언 기록을 남겼다.

  •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1983년 7월 20일자 자필 경위서 원문 발췌

"제가 혼자 살아 운전한 기관차 MK3 219호는 김천기관차 사무소에서 수리한 후 다시 전투에 수송업무를 한 후 20여년 사용되었으나 디젤화로 폐차되었습니다."


한편 2008년 미카3-129호의 국가등록문화재 지정시 심의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이 언론 기사(매일건설신문 기획칼럼 -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 '제49화')에서 한국교통동란기의 페이지 스크린샷을 첨부하여 "기관차 모델번호 3-129호를 세로쓰기 한자로 기록하여 3-219호로 읽을 수도 있으나 한자 모양을 자세히 보면 『三-一二九』임이 확인되어" '미카3-129호'가 김재현 기관사가 운전했던 기관차의 모델번호가 맞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언론 기사에 첨부된 한국교통동란기의 페이지 스크린샷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스크린샷은 대전 전투에서 김재현 기관사 등이 수행한 '보급품 후송 작전'과 별개로 대전역에서 근무하던 역무원 등과 함께 보급품 후송 시도 후 탈출했다고 알려진 장시경 신호원의 공적을 서술하는 항목(항목명: 포위망을 뚫고)이며 이 항목의 160페이지에서 장시경 신호원이 대전역에서 탈출할 때 탑승했던 기관차의 모델번호를 '미가三二二九호'로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김재현 기관사가 운전했던 기관차의 모델번호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즉 상술했다시피 한국교통동란기의 김재현 기관사의 공적을 서술하는 항목(항목명: 우군을 구출타가)의 330페이지에서 김재현 기관사가 운전했던 기관차의 모델번호를 'M3 二一九호'로 명확하게 표기하고 있으며,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주장이 맞다고 가정하더라도 장시경 신호원이 탑승했던 기관차의 모델번호가 미카3-229호가 아니고 미카3-129호가 정확하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김재현 기관사가 운전했던 기관차의 모델번호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참고로 미카형 증기기관차의 모델번호에서 -(대시)를 사용한 구분 표기는 공식적인 표기도 아니며, 기관차 모델번호를 한자 수사로 세로쓰기 표기시 혼란을 유발할 수 있는 -(대시)를 모델번호 사이에 의도적으로 넣을 이유도 전혀없으며,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9년 발간한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 536)에서도 한국교통동란기의 장시경 신호원의 증언을 요약하여 실었는데 여기에서도 '미카 3229호'로 표기하였으다. 즉 1979년에 한자를 많이 사용하던 그 시대의 국방부 전사편찬위원들도 한자 세로쓰기로 표기된 기관차 모델번호를 『三-一二九』로 해석한 것이 아니고 『三二二九』로 해석하였다.

결론적으로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한국교통동란기에 기재된 한자 모양을 자세히 보면 『三-一二九』임이 확인되어 '미카3-129'호가 맞다는 주장은 역사 왜곡으로 김재현 기관사가 운전했던 기관차 모델번호 논란에서 고려할 대상이 전혀 아니며, 교통부 발간 한국교통동란기를 통해 1953년 최초로 김재현 기관사 등 철도공무원들의 대전 전투 공적을 사료로 남길 때는 분명히 '미카 3-219호'로 정확히 기록하였으며 1962년 경향신문 기사, 1969년 동아일보 기사, 1975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이때까지만 해도 언론 기사상에서도 '미카3-219호'로 기록이 정확히 전해내려왔지만 1981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미카3-129호'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렇게 기록이 전해지던 도중 129219 모델번호 기재 과정에서 착오가 생기면서 잘못 알려진 모델번호가 굳어지고 그 결과 전혀 상관없는 기관차가 국가등록문화재로까지 지정되는 어처구니없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4.2. 장시경 신호원 등이 참여한 작전의 실체와 잘못 알려진 사실들[편집]


장시경 신호원이 참여한 작전에 대한 사료는 1953년 발간 한국교통동란기(항목명: 포위망을 뚫고, pp. 158~161)와 본인의 생전 인터뷰를 담은 1979년 동아일보 기사 정도로 극소수인데 한국교통동란기 "포위망을 뚫고" 항목에서는 "딘 소장 이하 다수의 장병 및 군수물자를 구출키 위하여", 동아일보 기사에는 "딘 소장이 대전에서 철수하지 못 했으니 신호조작을 위해 구출대원 20명과 함께 대전으로 가달라는 요청을 받고", "부상병을 싣고 남하", "실탄적재화차 7량" 이런 설명에 비추어 장시경 신호원 역시 대전역에서 투입된 작전 목적을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그래도 실제 목적이었던'보급품 후송 작전'과 관련된 부분도 어느 정도 기억을 하고 있다.

한편 7월 20일에 김재현 기관사 등이 수행한 '보급품 후송 작전'과 별개로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운전하는 기관차에 미군 호송병 6명이 탑승하여 또다른 '보급품 후송 작전'을 실행하였고 이 작전에서도 기관차 운행 도중 북한군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는 미국 신문 기사가 존재한다.

부연하자면, International News Service 통신사 소속 필립 딘(Philippe Deane Gigantès) 종군기자가 1950년 7월 21일 단독으로 보도하고 'Miami Daily News', 'South Bend Tribune' 등 수많은 미국 신문에 전재(轉載) 및 재배포되었는데, 이 기사에서 주목할 점은 한국인 철도공무원 중 'switchman'이 등장한다는 것으로 교통부 발간 한국교통동란기에서 김재현 기관사 등이 수행한 '보급품 후송 작전'과 별개의 '보급품 후송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장시경 신호원으로 추정된다.

결론적으로 김재현 기관사 등이 참여한 보급품 후송 작전과 비교하여 현재까지 발견된 미국 사료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세부적인 사항들까지 교차검증은 어렵지만 장시경 신호원도 대전역에서 '보급품 후송 작전' 참여는 틀림없는 사실로 보여진다.



5.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잘못 알려진 이유[편집]


위에서 자세히 설명한대로 김재현, 황남호, 현재영, 장시경 등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참가한 작전의 목적은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니고 대전역 안의 대부분 탄약으로 구성된 보급품 적재 화차 10량을 후방으로 이송하는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국내에서는 한국철도공사국가보훈부 등에 의해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잘못 알려졌는데 그 이유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딘 소장 구출 작전'에 대한 증거자료는 오로지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 장시경 신호원의 증언 그리고 당시 철도 군사수송담당관이었던 류기남(철도참전유공자회 회장)의 증언 이렇게 오로지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의 증언들뿐으로 30여명의 미군 특공대와 함께 '딘 소장 구출 작전'에 참여했다는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증언이 1953년 교통부 발간한 '한국교통동란기'에 실린 것이 시초이다. 그 후 언론 기사 등에 '딘 소장 구출 작전' 영웅담이 지속적으로 언급되었는데 미군 측 공식 전사 등 미국 측 자료들과 교차 검증을 할 여건이 되지 않았던 당시 상황과 맞물려 아무런 의심없이 공식적인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결국 철도공무원들이 잘못된 내용의 증언을 한 것으로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 장시경 신호원 등이 통역 등의 부재로 기관차가 투입되던 시점의 대전 전투 상황과 미군들이 펼치려던 작전 목적을 오해한 것인데 그 정황으로 한국교통동란기 p. 327에서 이원역에 있던 미군 장교가 기관차를 통해 대전으로 출동할 것을 지시하면서 아래와 같은 이유를 말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 한국교통동란기 (p. 327) 원문 발췌
"대전지구서 행방불명이 된 딘 소장을 위시하여 수많은 미군을 구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술했다시피 딘 소장은 7월 20일 6시에 대전에서 실제로 철수할때까지 영동에 위치한 사단지휘소와 계속 교신을 했었고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가 대전으로 투입 된 이유가 딘 소장의 보급픔 후송 명령 때문이어었기 때문에 위에 이유는 철도공무원들의 오해이다.

즉 당시 긴박한 상황에서 미군들이 철도공무원들에게 대전 전투 상황과 작전 목적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거나 혹은 자세하게 설명을 했더라도 통역이 없어 철도공무원들이 정확한 대전 전투 상황과 작전 목적을 이해하지 못 하였던 것이다. 특히 보급품 후방 이송은 당시 딘 소장이 영동에 위치한 사단지휘소에 직접 내린 명령이었기 때문에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딘 소장의 이름이 언급이 되었고 이로인해 철도공무원들이 딘 소장이 행방불명되어 구출 작전을 하러 대전으로 투입되었던 것으로 오해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두번째, 1950년 7월 20일 작전 당시 시점에서는 정확한 작전 목적을 몰랐지만 이후 '딘 소장'이 대전 전투에서 실종되었고 포로가 된 사실을 뒤늦게 인지하였던 철도공무원들이 1953년에 이 작전에 대해 증언하면서 자신들이 대전 전투 당시 긴급하게 기관차를 몰고 대전으로 투입되었던 이유를 딘 소장이 실종되고 포로가 되었던 결과에 비추어 역으로 추론하면서 자신들이 '딘 소장' 구출 목적으로 대전에 투입되었던 것으로 착각하였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위와같이 의사소통 문제 및 정보 부재로 철도공무원들이 작전 목적에 대한 오해 내지 착각을 하여 자신들이 '딘 소장 구출 작전'에 참여했다고 잘못된 내용을 발언한 증언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어 보이지만, 탑승하지 않았던 미군 결사대원 30명과 구출 작전 중 29명이 전사했다는 증언에 대해서는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존재한다.(1953년 교통부 발간 한국교통동란기와 1983년 황남호 본무기관조사와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자필 경위서에서 기관차에 탑승했던 미군의 정체를 '미군 결사대'로 명명하고 총원 30명, 전사자 29명이라고 기록하였지만, 후대에 '딘 소장 구출 작전'을 특수 작전처럼 과장하기 위해 '미군 특공대', '미군 특전단'#, '미 해병 특수부대'#[5] 등으로 확대ㆍ 재생산 되었고 병력과 전사자 기록도 총원 33명, 전사자 32명으로 와전되었다.)


6. 참고 자료[편집]




7. 관련 문서[편집]




[1] 6.25 전쟁에서 미 해병대의 한국 전개는 제1임시해병여단이 8월 2일에 부산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2] 6.25 전쟁에서 미 해병대의 한국 전개는 제1임시해병여단이 8월 2일에 부산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3] 6.25 전쟁에서 미 해병대의 한국 전개는 제1임시해병여단이 8월 2일에 부산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4] 미군 병사의 한글 이름과 계급은 배은선 철도박물관장이 저술한 한국철도 역사책 '기차가 온다' (pp. 187–188)에서 차용[5] 6.25 전쟁에서 미 해병대의 한국 전개는 제1임시해병여단이 8월 2일에 부산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