딘 소장 구출 작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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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왜곡의 시작과 국방부의 부정
3. 역사 왜곡에 대한 문제 제기
4. 작전의 실체와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
4.1. 김재현 기관사 등이 참여한 작전에서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
4.2. 장시경 신호원 등이 참여한 작전에서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
5.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잘못 알려졌던 이유
6. 참고 자료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딘 소장 구출 작전설'은 6.25 전쟁 대전 전투에서 행방불명된 미 제24보병사단 사단장 '윌리엄 F.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해 1950년 7월 19일(김재현 기관사 등)과 20일(장시경 신호원 등) 두차례에 걸쳐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운전하는 기관차를 통해 미군 결사대원들이 대전으로 투입되어 특수작전을 펼쳤다는 역사 왜곡 영웅담이다.

한국철도공사철도청 시절부터 호국철도의 상징으로 주도적으로 홍보하여 널리 알려진 이 '딘 소장 구출 작전' 영웅담은 흡사 전쟁 영화시나리오 같은 화제성으로 말미암아 오랜 세월에 걸쳐 국가보훈부와 같은 정부기관과 언론사 등에 의해 '구출 작전'이 허위임을 단번에 판명할 수 있는 기관차의 대전 진입 시점, 미 제24보병사단의 대전 철수 시점, 딘 소장의 실종 시점 등 공식 전사(戰史)에 기록된 대전 전투의 사건 발생별 시간 순서 비교와 미군 결사대원들의 소속과 신원 파악 등 기본적인 팩트체크교차검증이 생략된 채 그대로 인용되고 '세계 전쟁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구출 작전'# 등으로 무분별하게 확대·재생산되면서 정설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딘 소장 구출 작전' 영웅담은 작전에 참여했던 생존 철도공무원들이 작전 목적을 오해하여 생긴 역사 왜곡으로 진실은 딘 소장의 명령에 따라 7월 20일에 실행되었던 대전역 안의 대부분 탄약으로 구성된 보급품 적재 화차들을 후방으로 이송하는 이른바 '보급품 후송 작전'으로, 한국철도공사가 주장하는 '딘 소장 구출 작전'은 대전 전투에서 실행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미군의 대전 전투 공식 전사(戰史)와 당시 미국의 언론자료 등에 기관차 투입을 통한 '딘 소장 구출 작전'에 대한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미군의 대전 전투 공식 전사(戰史)와 당시 미국의 언론자료들은 국내에서 오해하고 있는 이 작전에 대해 딘 소장의 명령에 의하여 한국인 철도공무원들과 미군 호송병들이 함께 수행한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으며, 한국인 철도공무원 및 미군들의 노력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후송에 실패하여 7월 21일 오전 8시 미 공군보급품이 적재된 화차들을 폭격으로 파괴하여 북한군에 의한 노획을 방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덧붙여 이 대전역 화차 폭격은 AP 통신사를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되어 'The Evening Star', 'The Daily Alaska Empire' 등 수많은 미국 신문에 1950년 7월 21일자로 보도되었으며, 화차 폭격에 참여한 머스탱 전투기 조종사는 엄청난 탄약이 적재된 화차가 폭발하면서 발생한 화염을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행사의 상징인 화려한 불꽃놀이 광경에 비유하였다.

  • 'The Evening Star' 1950년 7월 21일자 기사 원문 발췌

Capt. H. Moreland of Mobile, Ala., leader of the mission, said

"The train blew sky high, It was like the Fourth of July."

He said Taejon looked very still and deserted.



2. 역사 왜곡의 시작과 국방부의 부정[편집]


딘 소장 구출 작전설의 시작은 6.25 전쟁 종전 후 교통부가 1953년 12월 24일 발간한 역사책 '한국교통동란기'에서 김재현 기관사 공적(우군을 구출타가 항목, pp. 326~331)과 장시경 신호원 공적(포위망을 뚫고 항목, pp. 158~161)을 소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한국철도공사가 철도청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딘 소장 구출 작전'을 철도공무원들의 공적으로 소개하였고 국가보훈부도 검증없이 받아들여 대대적인 현양사업이 진행되었고 흡사 미군 장성 구출 작전이라는 전쟁 영화시나리오 같은 화제성 때문에 언론을 통해서도 자주 보도되면서 '딘 소장 구출 작전'은 실제로 실행된 작전이며 완벽하게 검증된 공적처럼 자리잡으며 확대·재생산되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들은 물론 언론사에서도 모르고 있었지만 철도공무원들의 '딘 소장 구출 작전' 수행은 대한민국 국방부의 역사기관들이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전사(戰史)로서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9년 발간한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 536)의 대전 전투 연구 항목에서 국내와 미국 측 자료를 통해 작전 목적을 비교 분석한 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생존 철도공무원들의 증언에서 모두 이 열차작전의 목적이 딘 소장의 구출에 있다고 하였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며 '딘 소장 구출 작전'은 와전이라고 못 박았으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8년에 발간한 현재 시점에서 최신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라고 할 수 있는6.25전쟁사 제4권 금강-소맥산맥선 지연작전 (pp. 161162, 주석 p. 217)에서는 '대전역 보급품 후송 실패'라는 제목의 단락으로 기술하여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음을 명확히 하였다.

특히 국방부 소속 전쟁기념관에서는 2020년에 발간했던 학예지 -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 (pp. 118123)에서 기밀해제된 미 제24보병사단 정보참모부(G2) 보고서를 국내 최초로 입수하여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음을 이론의 여지없이 입증하여 기술하였고, 작전 목적의 오해에 대해 각주를 통해 한번 더 자세히 설명하였다.[1]

  •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 각주 발췌

"당시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에 부여된 임무를 두고 거듭되는 오해를 별기한다. 당시 승무원인 현재영·황남호의 수기 증언을 비롯해 국내의 각종 문헌과 현양 행사에서는 당시의 철도 수송 임무를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묘사해 왔다. 그러나 대전 철수작전 당시 작성된 미 제24사단 정보처 보고서와 미 육군,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에서 각각 발행된 공간사, 딘 소장의 회고록 등에 따르면 이들의 임무는 대전역에 적재된 보급품을 영동역으로 철수시키는 것으로 딘 소장의 구조와는 무관한 임무였다.[24th Infantry Division G-2 Journal, Vol. 8, For the Period 191700K July to 221550K July 50 ; Appleman, Roy E., 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lu , Center of Military History, United States Army(1992), 169쪽; Dean,William F. and Worden, William L., General Deans Story , the Viking Press(1954), 37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4: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 2008, 161∼162쪽]"


현재도 국민신문고를 통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전쟁기념관민원으로 문의하면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은 대전 전투에서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보급품 후송 작전'에 참여했다는 공식적인 답변을 받을 수 있는데 한마디로 한국철도공사는 국내에서 가장 권위있는 국방부의 전쟁사 연구 기관들이 부정하는 공적으로 혈세를 들여 현양사업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3. 역사 왜곡에 대한 문제 제기[편집]


'딘 소장 구출 작전설'은 사실 조금만 자세히 조사해보면 역사 왜곡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엉성하기 짝이 없는데 대표적으로 작전 일시와 기관차 탑승 미군의 정체를 들 수 있겠다.

파일:General_Dean's_Kill.jpg

위의 사진이 미군의 대전 전투를 상징하는 사진으로 7월 20일 시점 딘 소장이 직접 지휘하며 파괴한 북한군 전차 사진이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 등 한국철도공사 관계자들은 7월 19일 시점 행방불명된 딘 소장을 구출하러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가 대전으로 투입되었다는 언론 기사(매일건설신문 기획칼럼 -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 '제47화')를 작성하고 딘 소장이 실제 포로가 된 시점은 8월 25일인데 호국철도기념관에는 7월 19일 시점 북한군에 포로가 된 딘 소장을 구출하러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가 대전에 투입되었다고 전시물 설명문에 기재하는 등 기초적인 대전 전투 전사(戰史)도 확인 안 하고 역사 왜곡을 자행하였다.

파일:김재현기관사-호국철도기념관.png

그리고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진실이었다면 '딘 소장 구출 작전'의 작전 명령권자, 작전 계획서 등 상세한 관련 자료와 이 구출 작전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30명의 미군 결사대원의 소속과 신원 등이 미군의 대전 전투 전사(戰史)와 미 제24보병사단 자료에 자세히 남아 있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

국내에서는 1953년 교통부 발간 한국교통동란기와 1983년 황남호 본무기관조사와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자필 경위서에서 기관차에 탑승했던 미군의 정체를 '미군 결사대'로 명명하고 총원 30명, 전사자 29명이라고 기록하였지만, 후대에 '딘 소장 구출 작전'을 특수 작전처럼 과장하기 위해 소속은 '미군 특공대', '미군 특전단'#, '미 해병 특수부대'#[2] 등으로 확대ㆍ 재생산되었고 병력과 전사자 기록도 한국인 철도공무원 3명과 합산 과정에서 혼돈을 일으켜 총원 33명, 전사자 32명으로 와전되었던 기록만 찾을 수 있을뿐 전후 70여년이 지났지만 소속과 신원 등 밝혀진 구체적인 기록이 전무하다.

덧붙여 실제로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실행되었고 29명에서 32명의 미군 결사대원이 전사한 것이 진실이었다면 이 미군들에게는 비록 작전에는 실패했더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상관을 구하기 위한 희생정신과 용기를 높이 평가하여 명예훈장 등 각종 무공훈장이 추서되고 미국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영웅 대우를 받았을 것이며, 미군 역사에 있어서도 비록 실패했지만 영웅적인 특수작전 사례로 기록되어 엄청나게 많은 관련 자료가 남아있었을 것이다.

실례로 1970년 베트남 전쟁에서 미 육군 특수작전부대(그린베레)가 손타이 포로수용소의 포로 구출 작전(Operation Ivory Coast)을 실행했었는데 비록 미군 포로들이 작전 실행일 이전에 다른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어 실패하였지만 이 작전을 수행한 미 육군 특수작전부대원들에게는 은성훈장 등 각종 무공훈장 등이 수여되었다.

위와같이 엉성하기 짝이 없는 '딘 소장 구출 작전설'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쟁기념관국방부 역사기관들로부터 공식적으로 부정 당하고 전쟁 역사 전문가들로부터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아왔는데 2020년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소장인 임재근 박사가 기밀해제 된 미 제24보병사단 문서 등을 근거자료로 삼아 2021년 8월 언론 기사(오마이뉴스 - '딘 소장 구출 작전'은 사실이 아니었다)를 통해 작전 일시, 작전 목적, 기관차 탑승 미군의 정체, 기관차 모델 번호를 재조사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4. 작전의 실체와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편집]


7월 19일 김재현 기관사,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가 미군 결사대원 30명과 함께 소위 '1차 딘 소장 구출 작전'을 실행하였고 이 작전이 실패하자 7월 20일 장시경 신호원 등이 미군 결사대원 20명과 함께 2차 딘 소장 구출 작전을 수행하였다는 '딘 소장 구출 작전설'은 미국과 대한민국 국방부의 6.25 전쟁 사료 등을 통해 교차 검증을 해보면 '보급품 후송 작전'의 오해 및 와전으로서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며 상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1. 김재현 기관사 등이 참여한 작전에서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편집]


자세한 내용은 김재현 기관사 문서의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 문단을 참고하십시오.


4.2. 장시경 신호원 등이 참여한 작전에서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편집]


1950년 7월 20일 장시경 신호원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기관사 2명 그리고 미군 결사대원 20명이 참여했다는 '딘 소장 구출 작전'에 대한 사료들은 1953년 발간 한국교통동란기(항목명: 포위망을 뚫고, pp. 158~161)와 장시경 신호원의 인터뷰를 담은 1979년 동아일보 기사 정도로 극소수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시경 신호원 역시 김재현 기관사 등이 수행한 작전과 동일하게 대전역 안의 대부분 탄약으로 구성된 보급품 적재 화차의 후방 이송 작전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한국교통동란기에서는 "딘 소장 이하 다수의 장병 및 군수물자를 구출키 위하여",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딘 소장이 대전에서 철수하지 못 했으니 신호조작을 위해 구출대원 20명과 함께 대전으로 가달라는 요청을 받고", "실탄적재화차 7량을 연결" 이런 증언 내용에 비추어 장시경 신호원 역시 작전 목적을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그래도 실제 작전 목적이었던 '보급품 후송'과 관련된 부분도 어느 정도 기억을 하고 있다.

장시경 신호원이 수행한 작전의 목적은 7월 20일에 김재현 기관사 등이 수행한 '보급품 후송 작전'과 별개로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운전하는 기관차에 미군 호송병 6명이 탑승하여 또다른 '보급품 후송 작전'을 수행하였고 이 작전에서도 기관차 운행 도중 북한군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고 보도한 미국 신문 기사를 통해 교차 검증이 되었다.

부연하자면, International News Service 통신사 소속 필립 딘(Philippe Deane Gigantès) 종군기자가 1950년 7월 21일 단독으로 보도하고 'South Bend Tribune', 'The Daily Times (New Philadelphia, Ohio)' 등 수많은 미국 신문에 전재(轉載) 및 재배포되었는데, 이 기사에서 한국인 철도공무원 중 'switchman'이 등장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 'South Bend Tribune' 1950년 7월 21일자 기사 원문 발췌
"A nervous quartermaster coprs officer kept trying to get a local switchman to move our engine into position"

그리고 미국 신문 기사에 의하면 장시경 신호원이 수행한 작전에 등장하는 미군들 역시 '딘 소장 구출 목적으로 투입된 '결사대원'이 아닌 호송병이었다. 즉 '보급품 후송 작전' 지원 및 기관차 호위 임무를 맡았던 미 제24보병사단 소속의 일부 병사들로 세부 소속 부대는 기사상에서 특정되어 있지 않다.

5.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잘못 알려졌던 이유[편집]


위에서 자세히 설명한대로 김재현, 황남호, 현재영, 장시경 등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참가한 작전은 명백하게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국내에서는 한국철도공사(철도청 시절 포함)와 국가보훈부(국가보훈처 시절 포함) 등에 의해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잘못 알려졌는데 그 이유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딘 소장 구출 작전'에 대한 근거자료는 1차 작전과 2차 작전을 막론하고 모두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 장시경 신호원의 증언 그리고 당시 철도 군사수송담당관이었던 류기남 철도참전유공자회 회장의 증언 이렇게 오로지 관련 철도공무원들의 증언들뿐으로 황남호 본무기관조사와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1953년 교통부 발간한 '한국교통동란기'(우군을 구출타가 항목, pp. 326~331)에 실린 내용이 시초이며 그 후 관련 철도공무원들이 언론사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여 '딘 소장 구출 작전' 영웅담이 지속적으로 보도되었고 미군 측 공식 전사 등 미국 측 자료들과 교차 검증을 할 여건이 되지 않았던 당시 상황과 맞물려 아무런 의심없이 공식적인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결국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잘못 알려졌던 이유는 철도공무원들의 잘못된 증언에 기인한 것으로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 장시경 신호원 등이 통역 등의 부재로 기관차가 투입되던 시점의 대전 전투 상황과 미군들이 실행할려던 작전 목적을 오해한 것인데 그 정황으로 한국교통동란기 p. 327에서 이원역에 있던 미군 장교가 기관차를 통해 대전으로 출동할 것을 지시하면서 아래와 같은 이유를 말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 한국교통동란기 (p. 327) 원문 발췌
"대전지구서 행방불명이 된 딘 소장을 위시하여 수많은 미군을 구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술했다시피 딘 소장은 7월 20일 6시에 대전에서 철수할때까지 영동에 위치한 사단지휘소와 계속 교신을 했었고 ㅈ즉 행방불명 상태가 아니었으며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가 대전으로 투입된 이유가 딘 소장의 보급픔 후송 명령 때문이어었기 때문에 위에 이유는 철도공무원들의 오해이다.

즉 당시 긴박한 상황에서 미군들이 철도공무원들에게 대전 전투 상황과 작전 목적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거나 혹은 자세하게 설명을 했더라도 통역이 없어 철도공무원들이 정확한 대전 전투 상황과 작전 목적을 이해하지 못 하였던 것이다. 특히 보급품 후방 이송은 당시 딘 소장이 영동에 위치한 사단지휘소에 직접 내린 명령이었기 때문에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딘 소장의 이름이 언급이 되었고 이로인해 철도공무원들이 딘 소장이 행방불명되어 구출 작전을 하러 대전으로 투입되었던 것으로 오해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두번째, 1950년 7월 20일 작전 당시 시점에서는 정확한 작전 목적을 몰랐지만 이후 '딘 소장'이 대전 전투에서 실종되었고 포로가 된 사실을 뒤늦게 인지하였던 철도공무원들이 1953년에 이 작전에 대해 증언하면서 자신들이 대전 전투 당시 긴급하게 기관차를 몰고 대전으로 투입되었던 이유를 딘 소장이 실종되고 포로가 되었던 결과에 비추어 역으로 추론하면서 자신들이 '딘 소장' 구출 목적으로 대전에 투입되었던 것으로 착각하였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위와같이 의사소통 문제 및 정보 부재로 철도공무원들이 작전 목적에 대한 오해 내지 착각을 하여 자신들이 '딘 소장 구출 작전'에 참여했다고 잘못된 내용을 발언한 증언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어 보이지만, 탑승하지 않았던 미군 결사대원 30명과 구출 작전 중 29명이 전사했다는 증언에 대해서는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존재한다.


6. 참고 자료[편집]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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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25전쟁사 제4권 금강-소맥산맥선 지연작전'과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에서 작전 목적을 '딘 소장 구출'이 아닌 '보급품 후송' 그리고 기관차에 탑승한 미군을 '결사대원'이 아닌 '호송병'으로 정확히 기술하였지만, 철도공무원들의 증언에서 작전 목적과 호송병을 '결사대원'으로 오해한 점 이외에는 진실로 추정하여 호송병 30명이 탑승하여 29명이 전사했다고 기술한 부분은 향후 개정판에서 총원 6명에 전사자 없음으로 정정해야 할 팩트 오류이다.[2] 6.25 전쟁에서 미 해병대의 한국 전개는 제1임시해병여단이 8월 2일에 부산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