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순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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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의 왕녀
효순공주 | 孝順公主


효순공주·구사안 합장묘 전경
출생
1522년(중종 17년) 4월 27일
사망
1538년(중종 33년)
(향년 17세)
능묘
효순공주·구사안 합장묘
강원도 춘천시 남면 추곡리 243-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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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옥련(玉蓮)[1]/옥린(玉麟)[2]
부왕
중종
모후
문정왕후
부군
능원군 구사안
(綾原君 具思顔, 1523 ~ 1562)[3][4]
자녀
친자녀 없음(+ 양자 1남)
양자 - 구횡(具宖, 1562 ~ ?)[5]
봉호
효순공주(孝順公主)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조선 중종의 적3녀. 어머니 문정왕후의 차녀로 명종동복 누나가 된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각종 사건 사고를 달고 다녔던 의혜공주, 경현공주에 비하면 별다른 이야기가 없는데, 이는 요절한 탓으로 보인다.

2. 생애[편집]


1533년(중종 28) 11세의 나이로 동갑이었던 감찰 구순의 아들 구사안을 부마로 맞이하였다. 구사안의 증조부인 구수영은 영응대군의 사위였으며, 중종반정을 도운 정국공신이고 또한, 구사안의 어머니 전주 이씨는 의신군 이징원의 딸이었는데, 모계 쪽으로 효령대군의 후손이었던 점 또한 부마 간택에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2]

이 때문인지 공주의 집을 지을 때 효령대군 옛 집의 목재와 돌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중종은 사용할 수 있는 목재와 돌은 사용하라고 승낙한 일이 있다.[3]

1538년(중종 33) 공주는 17세의 나이에 난산으로 사망하였다. 한편 부마는 재혼할 수 없고, 첩을 둘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효순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구사안은 첩을 두고 3남 2녀의 자식을 보았다. 이로 인하여 구사안은 부마의 직첩을 빼앗겼다.


3. 가족 관계[편집]



  • 시증조부 : 구수영(具壽永,具壽永, 1456 ~ 1523)
  • 시증조모 : 길안현주 이억천(吉安縣主 李億千, 1457 ~ 1519) - 영응대군의 장녀
    • 시조부 : 구희경(具希璟, 1488 ~ ?)
    • 시조모 : 거창 신씨(居昌 愼氏) - 신수겸[5](愼守謙)의 딸
      • 시부 : 증 영의정 구순(贈 領議政 具淳)
      • 시모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의신군 이징원[4](義新君 李澄源)의 딸
        • 시누이 : 구진옥(具眞玉, 1524 ~ ?)
        • 시누이 : 구애옥(具愛玉, 1527 ~ ?)
        • 시동생 : 구사증(具思曾, 1528 ~ ?)
        • 시누이 : 구소옥(具小玉, 1530 ~ ?)
        • 시동생 : 능안부원군 구사맹(綾安府院君 具思孟, 1531 ~ 1604)
        • 시누이 : 구계향(具桂香, 1534 ~ ?)
        • 시동생 : 구사중(具思仲, 1535 ~ ?)
        • 시누이 : 구옥순(具玉純, 1539 ~ ?)
        • 시동생 : 구사민(具思閔, 1542 ~ ?

  • 부마 : 능원군 구사안(綾原尉 具思顔)
    • 임신(1538) : 난산으로 사망
    • 양자 : 구횡(具宖, 1562 ~ ?) - 구사맹(具思孟)의 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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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양주 군장리(楊州 群場里)에 위치했지만 지금 위치로 이장되었다.[2] 《만가보》에 따르면, 효령대군 이보(孝寧大君 李補)→(효령대군의 3남) 보성군 이합(寶城君 李㝓)→(보성군의 4남)평성군 이위(枰城君 李緯)→(평성군의 5남)의신군 이징원(義新君 李澄源)으로 이어진다. [3] 중종실록 72권, 중종 27년 2월 2일 신사 1번째기사. # [4] 효령대군의 증손자, 효령대군 → 보성군 → 평성군 → 의신군[5] 신승선의 차남, 폐비 신씨의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