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룡(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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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테크노크라트.

2. 생애[편집]


김일성 시대의 부총리 중에서 행적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1972년에 선박공업부장을 역임했다는 정보가 있다. 1996년에 편찬된 북한인명사전에 따르면 1971년부터 1977년 사이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1977년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고 하는데,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에서 국가계획위원장에 임명된 것을 바탕으로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1977년 12월,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에서 국가계획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78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보선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979년 11월, 로태석이 후임 국가계획위원장에 임명되면서 해임되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대회 서기부에 선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1년 10월, 정무원 부총리 직함으로 행사에 등장함으로 새로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음이 확인되었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1982년 4월 5일, 최고인민회의 7기 1차 회의에서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3년 11월, 6기 8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1986년 2월 4일, 정치국-중앙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에서 해임, 홍성남에게 자리를 내주었으며 1986년 2월, 6기 11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소환되었다. 이후 특별한 직무를 받지 못했는지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도 탈락했다. 이에 대해서 뇌물 수수 때문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이후 다시 사업을 시작했는지 1988년에 조직지도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는 정보가 있다. 1988년 12월 당 비서에 임명되었다는 보도도 있었지만 이는 한성룡과 혼동한 오보이다.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음으로 이중 김일성훈장 수훈자가 되었다. 허나 매우 중요한 직무를 맡지는 못했는지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는 당선되지 못했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장의위원 서열은 당 부부장 정도로 보인다. 1994년 8월 뉴스에서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는 보도도 나왔으나 김일성과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낸 것을 보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

1996년 9월, 부총리 직함으로 나진-선봉 투자포럼 참석이 예고되어 다시 부총리에 기용된 것으로 보였으나 이후 동정보도는 없었으며 해당 포럼에서 홍성룡이 나왔다는 후속 보도도 없었다. #

3. 참고문헌[편집]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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