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 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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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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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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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州 石氏
해주 석씨
}}}
관향
황해도 해주시
시조
석성(石星)
중시조
석담(石潭)[1]
집성촌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인구
2,664명(1985년)

1. 개요
2. 역사
3. 인물



1. 개요[편집]


황해도 해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석성(石星)은 명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에 원병을 파견하는 데 기여하였으나, 명나라 국운이 쇠하여진 책임을 지고 투옥(投獄)되자, 그의 아들 석담(石潭)이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2. 역사[편집]


시조 석성(石星)은 위군(魏郡) 동명(東明) 사람으로, 1559년(가정 38년) 진사가 되고, 이과급사중(吏科給事中)에 발탁되었으며, 신종(神宗) 때 호부(戶部)와 공부(工部)의 상서(尙書)를 지내고,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다. 1584년(신종 12년) 종계변무에 힘써 성공시켰으며, 임진왜란 때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에 원병(援兵)을 파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해주석씨족보》(海州石氏族譜)에 따르면, 석성의 계부인(繼夫人) 류씨(柳氏)는 남경 호부시랑(戶部侍郞)의 딸로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곤란을 당하던 중 조선의 역관(譯官) 홍순언의 구호를 받은 바 있어, 그 보은의 뜻으로 조선의 종계변무와 임진왜란 때의 원병을 지원하게 하는데 숨은 공적이 컸다고 한다. [4]

그 후 명나라 신종(神宗)은 사신(使臣) 심유경을 조선에 보내 왜군과의 화의를 추진했으나 실패하자, 막대한 군비 조달로 국운이 쇠하여진 책임을 석성에게 물어 투옥시켰다.

석성의 옥중(獄中) 유언에 따라 그의 아들 중 장남 석담은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어머니 류씨를 모시고 해주에 이르자 이 수양군(首陽君)에 봉하고 수양산 아래의 땅을 식읍으로 하사하여 해주로 사적(賜籍)하였다. 그 후 석담의 작은 아들 석귀당(石貴棠)과 손자 석난(石亂 : 귀실의 아들)이 청나라 사람을 피하여 산음현(山陰縣) 모호리(毛好里 :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평촌리 추내동)에 이거(移居)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3. 인물[편집]


  • 석담(石潭): 석성의 장남으로 수양군(首陽君)에 봉(封)해졌다.

  • 석난(石亂): 담(潭)의 장남 귀실(貴實)의 아들로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냈고, 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되었다.

  • 석중립(石仲立): 난(亂)의 아들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 석진번(石進繁): 중립(仲立)의 아들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냈다.

  • 석관기(石冠琦): 효행으로 널리 알려진 영옥(榮玉)의 아들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 석명구(石鳴球): 1848년(헌종 14) 무신(戊申)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39위로 합격하였다.

  • 석준옥(石俊玉): 1884년(고종 21) 선공감 가감역관(繕工監假監役官, 종9품)을 역임하였고, 이후 1885년(고종 22) 80세가 된 조관(朝官)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에 초자(超資)되었다.

  • 석태동(石泰東): 1861년(철종 12) 오위장(五衛將, 정3품)·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 행 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등을 역임했다. 또한 1874년(고종 11) 석 상서의 후손으로서 선전관(宣傳官)의 후보자에 올랐다. 1884년(고종 21)에는 석 상서의 봉사손으로서 수령 자리가 나면 관직의 후보자로 검의(檢擬)하라는 고종의 명령이 있었다.[5]

  • 석태로(石泰魯): 1860년(철종 11) 이세익(李世翊)ㆍ김병익(金炳翊)ㆍ이운필(李雲弼)등과 함께 직부전시(直赴殿試) 되었고, 1874년(고종 11)엔 형 태동과 함께 선전관(宣傳官)의 후보자에올랐다. 이후 1877년(고종 14) 부장(部將. 종6품)을 거쳐, 같은 해 5월 부사과(副司果, 종6품)에 임명되었고, 1880년(고종 17)에는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 종6품), 훈련 주부(訓鍊主簿, 종6품)에 임명되었다. 1886년(고종 23)에는 수문장(守門將, 종6품), 판관(判官, 종5품)을 역임, 이후엔 훈련원 첨정(訓鍊僉正, 종4품),웅천 현감(熊川縣監, 종6품), 전라도 병마우후(全羅道兵馬虞候, 종3품)에 임명된 기록이 있다.

  • 석상룡(石祥龍, 1870. 10. 29 ~ 1920. 10. 26)[6]: 석준옥(石俊玉)의 아들로 항일의병장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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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나라에서의 휘는 무은(茂恩)이다. 조선에서의 휘는 재운(在雲). 참고로 석담은 명나라에서 정4품에 해당하는 지휘첨사(指揮僉事)에 임명된 기록이 있다. 남동생 석재금(石在錦)은 조주, 성주 석씨 중시조이다. 여동생은 명나라 장수 만세덕에게 출가. [2] 셋다 중국 조정이나 병부 앞에서 밤낮으로 울며 청병했다고 한다.. 정곤수는 심지어 피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였다고 한다.[3] 이러한 내용 또한 실록 및 정사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홍순언과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4] 다만 홍순언과의 일화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왜냐하면 홍순언과 있었던 모든 일화는 다 잡기에만 나오는 내용이고, 또 종계변무 당시 석성은 장거정의 일 때문에 낙향하였던 상태여서 종계변무를 석성이 해결해줬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석성이 조선에 원병을 파견하는데 숨은 공적이 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석성이 얼마나 원병 파병에 진심이었는지는 옛 고문서와 조선왕조실록에 검색해보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석성이 조선에 원병을 파병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서천 부원군(西川府院君) 정곤수(鄭崑壽)와 사신 신점(申點), 유몽정(柳夢鼎)의 외교노력으로[2] 인하여 석성이 그들의 뜻에 감동해 원병 파병의 뜻이 굳어져 말 많던 중국 조정 대신들의 반대를 뚫고 명 만력제를 설득하여 원병 파병을 이끌어내었다는 내용이 정설이다.[3] 따라서 사실 확인도 어려운 홍순언과 있었던 일화 때문에 종계변무를 해결해주고 조선에 원병을 파병하는데 힘써줬다는 말도 안되는 얘기는 그냥 야사로만 보는 것이 좋다.[5] 1884년(고종 21) 3월 19일 고종실록 기사에도 같은 내용이 나타난다.[6]龍이라고도 표기한다.[7]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 항쟁이 치열해져 갔다. 석상룡은 인근의 화전민과 산포수 50여 명을 모아 의병대를 조직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의병들과 함께 지리산을 근거지로 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비호장군으로 불린 석상룡은 양한규(梁漢奎)·고제량(高濟亮)·문태수(文泰洙) 등 의병장들과 제휴하여 경상남도 함양·산청과 전라북도 남원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실상사 전투, 성삼재 전투, 벽소령 전투, 쑥밭재 전투 등을 거치며 일본의 진영을 급습하여 다수의 일본군을 살상하였다. 석상룡 부대는 1910년 일제의 국권 강탈 이후에도 지리산을 배경으로 계속 의병 항쟁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결국 무기 결핍과 병력 열세로 석상룡은 1912년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5년 옥고를 치르고 1926년에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