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석(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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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東錫
1911년 6월 5일[1] ~ 1968년 6월 5일[2] (향년 56세)

1. 개요
2. 상세
3.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한의사. 본관은 청주(淸州)[3], 호는 두암(斗庵, 斗岩)·동암(東庵, 東岩)이다. 본명은 한국흠(韓國欽)으로, 월남 후에 한동석(韓東錫)으로 개명하였다.


2. 상세[편집]


1911년 음력 6월 5일 함경남도 함주군 하조양면 용안리·추동리(現 영광군 용동리)에서 아버지 한희춘(韓希春, 1885 ~ ?)[4]과 어머니 이씨(李氏, 1891 ~ ?)[5]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상기천면 오로리(現 영광군 영광읍) 오로리보통학교에 입학해 사촌 동생 한광흠(韓光欽, 1913 ~ ?), 한중흠(韓仲欽, 1916 ~ ?)[6]과 함께 다니며 졸업했고, 이후 함흥 영생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7, 18세 때 중퇴했다.

13세 되던 1923년 김정익(金正翊)의 딸 김씨(金氏, 1911 ~ ?)와 처음 정혼해 15, 6세에 결혼했고, 슬하에 딸을 한 명 두었다. 그러나 17, 8세 때 우연히 집안 어른들이 공부를 그만시켜야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이별한 뒤 장진군으로 도망갔다. 이후 만주를 떠돌다가 20대 후반 함흥부로 돌아와 상업에 종사하면서 어느 정도 재력을 쌓았고, 이때 재혼해 슬하에 딸 두 명을 두었다. 그 뒤 두 번째 부인이 폐렴을 앓게 되자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한 이제마의 재전제자인 김홍제(金弘濟)를 찾아가 부인의 병을 치료했는데, 이때 김홍제는 "지금은 이렇게 고쳤으나 나중에 재발하면 못 고친다"고 했다. 이후 두 번째 부인은 1942년 폐렴이 재발해 결국 사망했고, 한동석은 이를 인연으로 32세의 늦깎이로 김홍제 밑에서 한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시작한 지 2년여 만에 주변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고, 뒤에는 북청군의 양경호에게서 한의학을 수학하기도 했다.

8.15 광복조선민주당 함경남도 조직국장 겸 선전부장을 지냈고, 세 번째로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6.25 전쟁 중에 함흥부에서 경찰국장을 지내다가 중공군이 남하하자 처자식을 남겨 두고 함흥부를 떠났고, 삼팔선을 넘어 경상남도 부산시로 내려가 그곳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는 아무개와 동업해 영도에 한방 진료소를 차렸다. 이때 네 번째로 결혼했으나 네 번째 부인은 이후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한편 이때 부산시에 있던 동양의학전문학원에 강사로 출강하기도 했으며, 1953년에는 제2회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해 한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정식으로 인계(仁溪)한의원을 개업, 운영했다. 이 시기에 함흥부에서 장사할 시절부터 인연이 있던 당대 주역의 대가인 한장경(韓長庚)을 만나 그에게서 2개월간 역학을 배우기도 했다.

1956년 이웃에서 산부인과를 개업해 운영하던 이영자로부터 그녀의 여동생 이옥자를 소개받아 결혼했고,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같은 해 12월 서울특별시로 이주한 뒤 종로구 인사동 인사동네거리에 한동석한의원을 개원했고, 1960년부터 현재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의 전신인 동양의학대학에서 시간강사 및 전임강사로 한의학과 역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이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편입해 1963년 2월 졸업했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7]

또한 1963년 4월 1일 초대 대한한의사협회 이사에 취임했고, 1966년에는 종로구 인사동에서 성북구 돈암동 삼선교 부근으로 이사했다. 이후 손발저림, 고혈압, 중풍 등을 얻어 2년여 간 투병생활을 하다 1968년 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임종 직전 천주교에 입교해 루까라는 세례명을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하며, 1968년 음력 6월 5일[A] 후두암으로 타계했다. 사후 유해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도봉산 아래 천주교방학동묘원에 안장되었다.

3. 여담[편집]


  • 관련 일화가 몇 가지 전해지는데, 한 번은 서독에 거주하는 어느 교포가 자신에게 어떤 병증이 있는데 병원에 가도 정확한 진단을 받을 수 없어 행여나 하는 심정으로 병증을 적어 편지를 보내왔는데, 한동석은 사주를 알려 달라는 답장을 보냈고 이후 환자가 사주를 보내 오자 사주를 살펴 처방전과 첩약을 보내니 이후 환자로부터 거짓말처럼 나아졌다는 답장을 받았다고 한다.

  • 1960년부터 동아일보·조선일보일간지에 한방 관련 기사를 투고하면서 양의사들과 논쟁을 벌이는 글을 싣기도 했는데, 한의사를 푸닥거리하는 무당이라며 까내리는 의사에게 대노하여 "우리 한의가 푸닥거리하는 무당이라면 너희 양의는 칼질하는 백정이다!"며 버럭 호통을 치기도 했다 한다.[8]

  • 1968년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내가 내 생일, 생시인 6월 5일 인시를 넘기면 앞으로 19년 뒤 77세까지는 무탈하게 살 수 있겠지만 넘기지 못하면 죽게 될 것이다. 어떻게 되건 하늘의 뜻이니 내가 죽더라도 너무 슬퍼 말거라."고 말했는데, 결국 인시를 넘기지 못하고 타계했다.

  • 생전에 결혼을 다섯 번 했다. 첫 번째 아내는 집안 어른들끼리 내린 결정에 따라 억지로 한 결혼이라 몇 년 못 가서 이혼했고, 두 번째로 맞이한 아내는 31살에 사망했으며, 세 번째 처는 월남하면서 북에 남겨 두고 왔고, 네 번째 처는 돌연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으며 다섯 번째 처는 부산 피란 시절 이웃집 산부인과 병원 의사였던 이영자씨의 여동생 이옥자였다.

  • 집중력이 대단하여 한번 책을 펴고 공부를 시작하면 바로 옆에 포탄이 떨어져도 모를 만큼 공부에 매진했다고 하며, 그 결과로 1966년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을 저술하여 출간하는데, 요새 한의사들에게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밖에 이제마가 직접 주석한 동의수세보원 주석을 입수하여 이를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 향후 남북통일 전망에 대해 "적어도 지금(1960년대)으로부터 60년 안에는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통일 직전에 남한 내에 큰 혼란이 있을 것이고 이를 넘기면 통일이 되어 남과 북이 각각 8할과 2할씩 지분을 나눠 갖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하며 또한 앞으로 "60여 년 후[9]에는 태어나는 사람보다 죽는 사람이 더 많아질 테니 그 이전에 충분히 인구를 늘려 두어야 할 것이다"고 예측했다 한다.

  • 한봉흠(韓鳳欽, 1927 ~ 2019. 3. 24) 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는 한동석의 사촌 동생이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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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력 7월 30일.[2] 양력 6월 30일.[3] #. 예빈윤공파(禮賓尹公派) 22세 흠(欽) 항렬.[4] 韓希椿이라고 표기한 자료도 있다.[5] 이태흠(李泰欽)의 딸이다.[6] 각각 첫째 작은아버지 한희관(韓希寬, 1888 ~ ?)의 장남과 차남이다.[7] 당시 지도교수는 유승국.[A] 양력으로 6월 30일[8] 사실 당시 의사들 중에는 한의사 집안 출신도 적지 않았고, 한동석의 다섯 번째 처의 처형은 서양 의학을 공부한 의사였다.[9] 대략 2030년대 정도로 추정했으나 현실은 그보다 10여 년 더 빨리 데드 크로스가 도래했다.[10] 둘째 작은아버지 한희방(韓希邦, 1897 ~ ?)의 차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