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적혀 있는 찻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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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글이 적혀 있는 찻잔.jpg

1. 개요
2. 내용
3.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한글. 17세기 초, 일본 야마구치 현하기() 지방에서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인 도공이 만든 한글 다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편집]


한글묵서다완(한글墨書茶盌), 추철회시문다완(萩鐵繪詩文茶碗) 등으로도 부른다.

조선시대 후기, 임진왜란 종전 직후인 1600년대 초에 일본 야마구치 현으로 끌려갔던 한 이름 모를 한국인이 만든 찻잔이다. 현재 일본이 자랑하는 국보 이도다완의 초기 모습이기도 하다.

하기 지역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인 도공들이 정착한 곳으로, 이 곳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귀하게 여기는 조선의 막사발 모양의 찻사발을 만들어 명성을 얻었으며, 이후 이곳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를 하기야키(萩燒)라 부르고 훗날 시간이 지나 하기야키 중에서도 조선의 막사발 같은 모양을 이도다완()이라 특징하게 되었다. 현재 다수의 이도다완이 일본의 국보가 되어 있다.

특히 하기 지방의 이도다완은 한국만의 전통 도자 기술로 인하여 사용하면 할수록 사발의 색깔이 변했기 때문에 '하기의 일곱 변화(萩の七化)'라고 불리며 일본 고위귀족층에게 칭송받았다.

이 찻잔은 일본에 끌려간 한 한국인 도공이 만든 다완으로, 한글시조 1수(首)가 씌었다.

개야 즈치 말라 / 밤살ᄋᆞᆷ / 다 도듯가 / ᄌᆞ 목지 호고려 님 지슘 ᄃᆡᆼ / 겨ᄉᆞ라 그 / 개도 호고려 / 개로다 / 듯고 ᄌᆞᆷ즘 / ᄒᆞ노라

개야 짖지 마라. 밤(에 다니는) 사람이 다 도둑이냐? / 저 목지 호고려님 계신데 다녀올 것이다. / 그 개도 호고려 개로다. 듣고 잠잠하노라.


호고려()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을 현지 일본인들이 부르던 호칭으로, 밤중에 한국인 동포를 만나러 가는데 개가 짖자 이렇게 달랬더니 잠잠한 것을 보고 '이 개도 조선의 개인가 보다' 하는 이야기이다. 임진왜란 당시 잡혀가 고향에도 못 돌아가는 도공들의 고향 그리워하는 애절한 마음이 담겨있는 시다.[1]

"다니다" 대신 "댕기다" (ᄃᆡᆼ겨ᄉᆞ라) 등 동남방언 어휘가 나타나기 때문에 경상도 출신 포로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 'ᄌᆞ목지', '지슘' 등 난해어가 많다.

흔히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기존에 존재하는 작품의 변형이라는 것이다. 18세기 초반 시조집 <古今名作歌>에 실린 이본은 원작에 더 가까울 것이라 추정되며 조선 후기의 평범한 애정시조에 불과하다.

개야 줏지 마라 밤 ᄉᆞ람이 다 도적가 / 두목지(杜牧之) 호걸(豪傑)이 님 츄심(推尋) 단니노라 / 그 개도 호걸의 집 갠지 듯고 ᄌᆞᆷᄌᆞᆷ ᄒᆞ더라


개야 짖지 마라, 밤 사람이 다 도적이냐? / 두목지 호걸이 님 찾아 다니노라 / 그 개도 호걸의 집(의) 개인지 듣고 잠잠하더라


두목지당나라 시대 유명한 미남으로, 두목지가 함께 정을 나눌 여자를 찾아 다니는데 개가 짖지 않는 것을 보고 저 개도 두목지의 개인지 궁금해하는 내용이다.

'ᄌᆞ목지', '지슘' 등 해석 불가능한 단어는 원래 시조 뜻을 잘 몰랐던 도공이 '두목지', '추심'을 오기한 듯하고, '호고려'는 원작 시에 있는 '호걸'을 객지에 끌려간 상황에 맞게 일부러 변형한 것이다.

파일:한글이 적혀 있는 찻잔2.jpg

일본에서 제작된 만큼 원래는 일본 지역의 전통 문화재로서, 근대 들어 교토의 고미술 수집가 후지이 다카아키(藤井孝昭)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훗날 그의 가족들이 찻잔에 새겨진 한글의 내력을 알게 된 후 한·일 양국의 화합을 기원하며 2008년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 무상 기증한 것이다.동아일보 : 한글 망향시 적힌 茶사발 400년만에 일본서 귀향


3.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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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때문에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의 훌륭한 대우 때문에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원했다는 인식이 재고되기도 했다. 실제로 조선인 포로들 중 성공한 사람도 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억류되어 있었으며 대다수는 노예로 매매당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