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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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공국 제3대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Filippo Maria Viscon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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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Filippo Maria Visconti)
출생
1392년 9월 3일
밀라노
사망
1447년 8월 13일 (향년 54세)
밀라노
재위
밀라노 공국의 공작
1412년 5월 16일 ~ 1447년 8월 13일
배우자
베아트리체 라스카리스 디 텐다
사보이아의 마리아 (1428년 결혼)
자녀
비앙카 마리아(사생아)
아버지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어머니
카테리나 비스콘티
형제
잔 마리아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밀라노 공국의 제3대 공작.

성격도 비열하고 변덕스러운데다가 인성도 그닥이어서 개인적인 인기는 없었지만 정치적 능력 하나만큼은 당대 북이탈리아에서도 손꼽히는 최고의 정치가였다. 초대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영지들을 다시 되찾아오기 위해 피렌체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령과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패배했다. 최후의 비스콘티 가문 통치자로 이 뒤를 이은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부터는 비스콘티가 아니라 스포르차 가문이 밀라노를 통치하게 된다.


2. 생애[편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초대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와 카테리나 비스콘티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는 끊임없는 정복 사업을 통해 피렌체볼로냐 등을 무릎꿇리고 이탈리아 중북부를 정복하기 직전에 열병으로 사망하고야 만다. 그의 뒤를 이은 2대 밀라노 공작 잔 마리아 비스콘티는 무능한데다가 포악하기 짝이 없는 성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의 10년 집권기 동안 밀라노 공국은 영토가 확연히 줄어버렸다. 게다가 성격이 어찌나 안좋았는지 제 어머니를 직접 살해하는 패륜을 저지르면서 완전히 인심을 잃었고, 결국 잔 마리아 비스콘티가 암살당하면서 새롭게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밀라노 공작으로 즉위하게 된 것이다.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이미 1402년부터 파비아를 다스리고 있었다. 동생 잔 마리아 비스콘티가 살해당하자 실권자였던 파치노 카네는 필리포 마리아를 새 공작으로 지명하고 얼마 못가 사망한다. 필리포는 파치노 카네의 아내이자 과부가 되어버린 베아트리체 라스카리스와 결혼하며 기반을 굳건히 함과 동시에 50만 플로린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지참금을 그대로 손에 넣는다. 하지만 베아트리체가 지나치게 야심이 많아서 정치에 공공연히 개입하려 들자 이를 불쾌하게 여기고 1418년에 비아스코 성에서 그녀를 참수(...)해 죽여버렸다.

아내를 목잘라 죽여버린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필리포 마리아는 굉장히 변덕스럽고 성질도 더러운데다가 개인의 못생긴 외모에 엄청난 컴플렉스로 똘똘 뭉친 불쾌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능력 하나만큼은 대단히 뛰어났는데 당대 이탈리아에서 정치력으로는 탑급에 들어가는 수준이었을 정도였다. 그는 잔 마리아 비스콘티가 잃어버렸던 제 아버지의 영지들을 다시 되찾아오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콘도티에리, 즉 다국적 용병대장들을 고용했다. 이 콘도티에리들 중에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자' 역시 끼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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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공화국밀라노 공국의 전투 장면[1]

한참 영토를 확장할 기회만을 눈에 불을 켜고 노리던 필리포 마리아에게 1423년 천금 같은 기회가 주어진다. 북이탈리아의 도시 로마냐의 영주가 어린 후계자 하나만을 남겨놓고 죽어버린 것이었다. 필리포 마리아는 어린 후계자 텔라도 오르델라피의 보호자를 자청하면서 대놓고 로마냐를 밀라노 아래로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밀라노가 그 거대한 로마냐 땅을 꿀꺽하는 꼴만큼은 볼 수 없었던 피렌체 공화국베네치아 공화국은 동시에 밀라노의 로마냐 합병에 반발하며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은 1425년 삽시간에 롬바르디아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필리포 마리아는 휘하 용병대장 '프란체스코 부소네'가 반란을 일으키며 골머리를 앓았다.[2]

베네치아 공화국은 프란체스코 부소네가 필리포 마리아 뒤통수를 치면서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다. 덕분에 베네치아는 본토 영토를 가르다 호수 인근까지 상당히 넓힐 수 있었을 정도였다. 상황이 영 꺼림칙하게 돌아가자 필리포 마리아는 본인을 지지하고 있던 신성 로마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도 딱히 밀라노를 도와줄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결국 교황 마르티노 5세가 베네치아 쪽에 유리하게 조정한 평화 중재안을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이면서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온다. 교황이 굳이 베네치아 편을 든 이유는 당연히 교황 역시 이탈리아에 밀라노의 영향력이 커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 교황의 편파적인 중재안에 불만을 품은 필리포 마리아는 합의안을 뒤집고 다시 전쟁을 재개했지만, 1427년 10월 마클라디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결국 페라라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평화 합의안을 다시 받아들여야만 했다.

필리포 마리아는 전쟁이 어느 정도 소강된 이후에도 교황과 으르렁거리면서 살았다. 그는 사보이아 공작이자 동맹이던 아메데오 8세의 딸 사보이아의 마리아와 결혼했다. 아마데오 8세는 밀라노의 암묵적인 지원 덕분에 훗날 한때나마 '펠릭스 5세'라는 이름으로 10년 정도 대립교황 자리를 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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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가 그리려다가 실패한 '안기아리 전투'의 스케치

필리포 마리아는 북이탈리아 패권에 대한 꿈을 벌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피렌체, 베네치아, 교황령 등과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소규모 전투들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개중 가장 유명한 건 1440년 치러진 '안기아리 전투'.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훗날 그리려다가 실패한 걸로도 유명하다. 어쨌든 안기아리 전투에서 밀라노가 피렌체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피렌체는 이탈리아 중부에 대한 패권을 지킬 수 있었으며, 반대로 밀라노는 더이상 독자적인 북이탈리아 패권을 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밀라노를 강력하게 휘어잡고 통치하던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1447년 사망했다. 그가 사망함에 따라 비스콘티 가문의 남계 정통 혈통이 단절되어버리고 말았고, 때문에 후계자가 나타나지 못하자 밀라노는 잠시 혼란기에 휩싸인다. 이때 잠시 밀라노 공국이 단절되면서 '암브로시아 공화국'이 탄생한다. 하지만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가 필리포 마리아의 딸 '비앙카 마리아'와 결혼해 이걸 근거로 공작위를 물려받으면서 암브로시아 공화국은 거의 세워지자마자 멸망하고 다시 밀라노 공국이 재건되게 된다. 다만 이때 이후로부터는 더이상 비스콘티 가문이 아니라 스포르차 가문이 밀라노를 통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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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히 말하면 필리포 마리아가 고용했던 용병대장 프란체스코 부소네가 브레시아에서 그의 뒤통수를 치고 폭동을 일으켜 베네치아 군대를 맞아들이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2] 프란체스코 부소네는 앞서 필리포 마리아가 고용한 여러 콘도티에리들 중 하나인데, 원하는 권리를 주지 않았다고 반란을 일으키고 베네치아 공화국 쪽으로 붙었다. 베네치아가 밀라노와 전쟁을 벌여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서 베네치아를 전쟁에 끌어들인 것도 이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