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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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 제3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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فيصل بن عبدالعزيز آل
سعود
Faisal bin Abdulaziz Al Saud
'''

파일:King_Faisal_bin_Abdulaziz.jpg

이름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abdullah bin abdulaziz al saud)
출생
1906년 4월 14일
리야드 토후국 리야드
(現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주 리야드)
사망
1975년 3월 25일 (향년 68세)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주 리야드
묘소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주 리야드 알 우드 공동묘지
재임기간
제2대 총리
1954년 8월 16일 ~ 1960년 12월 21일
제2대 총리2
1962년 10월 31일 ~ 1975년 3월 25일
재위기간
제3대 국왕
1964년 11월 2일 ~ 1975년 3월 25일
종교
이슬람교 (수니파)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사우디아라비아의 제3대 국왕이다.


2. 생애[편집]


초대 이븐 사우드 국왕의 3남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출범하면서 초대 외무대신을 30년간(1930~1960) 역임했다. 2대 국왕 사우드가 즉위한 이후 왕태제로 책봉되었으나 사우드와 갈등이 있었고, 나세르 혁명 세력의 확산과 재정 정책 실패로 결국 사우드 왕이 퇴위당해 망명하자 즉위하였다.

아랍권 군주제 국가들의 중심적 존재로서, 넓게는 이슬람권의 종주국으로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위상을 확실히 세워갔다.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여성 교육을 처음 도입하였다. 또한 1973년도의 오일쇼크를 주도시키며 사우디아라비아를 한동안 세계적으로 잘사는 나라로 만들었고, 막대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한 복지정책으로 웬만한 서민층들도 잘먹고 잘살게 하는 등 사우디아라비아 왕정의 기반을 확고히 한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1975년 정신이상이 있던 조카 파이살 빈 무사이드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후에 이 조카는 참수형에 처해졌다.[1] 죽은 후 왕위는 동생이자 이븐 사우드의 5남인 칼리드가 승계했다.

오일쇼크를 일으켜 미국에 큰 타격을 주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위상을 올린 왕이자 보수적이고 폐쇄적이기로 유명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찾아보기 드문 개혁 성향 군주였기 때문에 암살 당시 음모론이 꽤나 횡행했다. 석유 무기화이스라엘 견제에 분노한 미국과 유대인들이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도 있고, 반대로 개혁에 반대한 와하브 보수파들이 암살에 기여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둘 다 뚜렷한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그냥 미친 조카가 저지른 단독범죄에 의한 참사로 되어 있다.


3. 여담[편집]


그레이트풀 데드 팬(데드헤즈)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레이트풀 데드는 암살 이후 Blues for Allah라는 앨범을 그에게 헌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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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우디의 참수형은 아랍식 전통 참수도샴쉬르를 온갖 제련법으로 예리하게 다듬어 전문가가 딱 한 번 휘둘러 집행한다. 그리고 그 비싼 칼을 날이 휘어져 망가졌을까봐 집행하면 바로 폐기한다. 파이살 빈 무사이드는 왕자 신분이라 특별히 황금으로 만든 칼로 처형했으며, 현재까지 이 칼은 폐기하지 않고 보관중인데, 고위층의 처형에 쓰인 칼은 박물관 등지에 법의 엄정함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보관 및 전시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