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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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 라틴어: Tiberius Coruncani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43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투스쿨룸 또는 카메니움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조부) 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아버지) 가이우스 코룬카니우스(아들) 루키우스 코룬카니우스(아들) |
참전 | 피로스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80년 |
전임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동기 |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사베리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
1. 개요[편집]
로마 공화국 집정관. 피로스 1세에 대적했으며, 평민 최초로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맡았다.
2. 행적[편집]
투스쿨룸 또는 카메니움 출신의 평민 집안인 코룬카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티베리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280년 가문 최초로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로마에 대적하는 타라스를 돕기 위해 이탈리아에 건너온 에페이로스 왕국의 국왕 피로스 1세를 격퇴하는 임무를 맡았다. 코룬카니우스는 2개 군단을 이끌고 에트루리아를 압박해 피로스와 동맹을 맺지 못하게 하는 임무를 맡았고, 라이비누스는 2개 군단을 이끌고 피로스 1세를 직접 상대하기로 했다.
그는 에트루리아의 도시인 볼시니를 성공적으로 공략했지만, 동료 집정관 라이비누스가 헤라클레아 전투에서 피로스 1세에게 패배했으며, 피로스가 에트루리아인과 합세하기 위해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로마로 귀환한 뒤 피로스에 대적하려 했다. 피로스는 아나그니 시에 도착했을 때 코룬카니우스가 요충지에 군대를 배치시키고 방비를 굳건히 하는 모습을 보고 쉽게 뚫기 어렵겠다고 여겼다. 여기에 라이비누스가 패잔병들을 수습한 뒤 자신을 추격해오자 협공당할 것을 우려애 타라스로 철수했다. 코룬카니우스는 피로스를 쫓지 않고 로마의 수비에 전념하다가 지휘권을 이듬해 집정관들에게 넘겼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의 <개선장군 목록>에 따르면, 그는 볼시니 공략의 공적을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별로 전해지지 않지만, 변호사로서 명성을 떨쳤고 로마 시민들에게 로마법에 관한 강의를 최초로 했다는 이야기는 전해진다. 기원전 254년 파트리키의 전유물이었던 폰티펙스 막시무스에 선임되어 종교 행사에 전념했다.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종신직이었고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기원전 243년 폰티펙스 막시무스에 선임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그즈음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들 가이우스 코룬카니우스와 루키우스 코룬카니우스는 기원전 230년 일리리아 왕국의 여성 섭정 테우타에게 사절로 파견되어 아드리아해에서 해적질을 일삼는 일리리아인들을 단속해달라고 요청했다. 테우타는 해적질은 자신의 왕국에서 불법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이에 두 사절이 그녀를 모욕하는 발언을 하자, 테우타는 분노해 그들을 죽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원로원은 일리리아에 전쟁을 선포해 일리리아를 공략하고 속국으로 삼았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두 사절의 동상이 포로 로마노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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