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무라우시산 조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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トムラウシ山遭難事故

1. 개요
2. 토무라우시 산
3. 사고 경위
4. 사고 과정
5. 사고의 원인
6. 사고 이후
7. 기타
8. 조난한 실존 인물/사건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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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사에서 모객을 모집할 당시의 홍보물.[1]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상

2009년 7월 16일 일본 홋카이도의 토무라우시 산에서 등산객 8명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산악 조난 사고.여름철에 발생한 산악 조난으로는 이례적으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참사이다.


2. 토무라우시 산[편집]


토무라우시 산은 홋카이도 중앙부에 위치한 대설산(大雪山) 남부의 산으로, 토무라우시가 위치한 지역에서는 옛날부터 '카무이민타라(カムイミンタラ)[2]'로 불리며 신앙의 대상이 되었으며 일본 100대 명산 중의 하나로도 손꼽히는 곳이다.

그러나 기상이 나쁘면 한여름이어도 동사하는 사람이 나올 만큼 매우 가혹한 기후의 산이다. 2002년 여름에도 조난 사고가 발생해 2명이 사망하였다.


3. 사고 경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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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발생한 것은 국내외 등산 투어를 기획하여 여행객을 모집하는 어뮤즈 트라베루(アミューズトラベル)이라는 여행사의 기획 상품으로, 7월 14일부터 16일까지 2박 3일의 일정의 토무라우시 산과 아사히타케 등을 종주하는 산악 투어였다.

<가이드 멤버>
・요시카와 히로(吉川寛, 61세) :
가이드의 리더격. 여행관리자도 겸하고 있었다. 업무 경력은 풍부하지만 토무라우시산을 등산한 경험은 없었다. 이 사고로 사망.

・오오타 타카오(多田学央, 32세) :
메인 가이드. 당시 32세의 최연소로 젊은 나이지만 삿포로에 거주하며 토무라우시산의 등산 경력이 있었다. 사고에서 생존.

・마츠모토 히토시(松本仁, 38세) :
서브 가이드. 요시카와 히로와 마찬가지로 업무 경력은 풍부하나 토무라우시산의 등산 경력은 없었다. 사고에서 생존.

참가자는 위의 가이드 3명과 등산객 15명(남성 5명, 여성 10명)이었다. 가이드 중 2명은 초행길이기는 했으나 모두 프로들이었고, 참가자들 또한 등산 경험이 풍부한 55~69세의 중노년 등산객들이었다. 가장 등산 경력이 적은 사람도 6년이었다고 한다. 또한 전원이 등산 장비를 철저히 갖추고 있었으며 첫날에는 날씨도 좋았고 일정대로 순조롭게 코스를 마쳤기 때문에, 이 때까지는 이후 조난을 당할 것이라고는 일행 중 누구 한 사람도 예상하지 못했다.


4. 사고 과정[편집]


  • 7월 13일, 참가자들은 센다이, 나고야, 히로시마의 각 공항에서 홋카이도신치토세 공항에 내린 후 전세 버스를 타고 숙박지인 아사히타케 온천의 시라카바소(白樺荘)에 도착했다. 가이드는 일기예보를 통해 내일은 날씨가 괜찮지만 15, 16일부터는 기상이 악화될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 7월 14일(등산 1일째) : 오전 5시 50분 일행은 네팔인인 쉐르파와 합류하여 예정대로 아사히다케 로프웨이 카타미역(姿見駅)으로 이동해 토무라우시산 정상에 도착했다. 그리고 12km의 길을 건너 하쿠운다케(白雲岳) 피난소 오두막에 숙박하기로 했다. 안개는 꼈지만 날씨는 맑아서 목표 지점인 토무라우시산이 보였다. 등정 과정에서 여성 1명이 고산병으로 인해 구토를 하였고 또 다른 여성(61세)는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해 스프와 차만 마셨다. 첫날은 오두막에서 쉬기로 하고 저녁 식사 후에 가이드와 일행 3명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내일 오후에 한랭전선이 통과하며 기상이 악화된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천둥 번개가 칠 것을 우려하여 30분 일찍 출발하기로 하고 그 날 오후 18시경 일찍 잠이 들었다.

  • 7월 15일(등산 2일째) : 오전 5시, 오후부터 기상이 악화된다는 일기예보와는 다르게 새벽 일찍 일행이 산장을 출발한 직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점점 빗줄기가 거세졌다. 빗물로 인해 등산로는 이미 강처럼 변해버려 걷기조차 힘들었고 추위를 방지하기 위해 휴게 시간을 5분으로 설정해 쉬었다가 이동할 정도의 악조건이었지만 이때까지는 시야가 확보되었으므로 일행은 지친 기색은 없이 다들 신나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최대 풍속 25m, 최저 기온 6도를 견디며 중노년의 등산객들은 10시간동안 16km의 코스를 거쳐 예정 시간보다 이른 오후 3시가 되기 전에 히사고늪(ヒサゴ沼) 피난 산장에 도착했다. 산장은 이미 다른 등산객 일행이 머물고 있던 관계로 공간이 협소했기에 젖은 옷과 장비를 제대로 말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일행은 모두 방수소재의 등산복을 챙겨입고 있었으나 방수 기능이 달라 옷에 살짝 습기만 찬 정도의 사람도 있었는가 하면 방수복임에도 온 몸이 젖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생존자인 마에다 카즈코(61세)는 옷이 젖었기 때문에 가지고 온 타올 천으로 머리를 넣을 구멍을 뚫어 젖은 옷 위로 덮어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피로로 인해 19시~20시경에 일행은 취침했다.

  • 사건 당일 7월 16일 새벽 3시, 오전부터 내리던 비는 한층 더 거세어져 급기야 폭풍우로 변했다. 빗물이 산장 벽과 지붕 틈새로 새어드는 바람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이 속출했고, 이 상황은 이후의 조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3] 라디오 예보를 통해 가이드는 오후부터 날씨가 좋아질 것이라 예상하고 원래 출발 시간보다 30분 늦게 산장을 출발했다.[4] 가이드의 결정에 일행들의 의견은 갈렸지만 대체적으로 출발하는 것에 불안은 크게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다가 요시카와 가이드는 원래 일정이었던 토무라우시 등산을 포기하고 우회 루트를 통해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저희들의 임무는 산으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을 무사히 산에서 하산시키는 것입니다“라고 등산객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폭풍우 속에서 걸어서 하산한다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여름의 계절에도 눈이 녹지 않은 곳이 있어 아이젠을 착용하였는데, 착용에 익숙하지 않은 참가자도 있어서 얼마간의 시간이 허비되었다. 또, 가이드의 예상과는 달리 예정대로 30분 늦게 출발하여 하산 코스를 가던 중 능선을 빠져 나오자마자 강풍을 동반한 비가 쏟아졌다. 풍속 20~25km의 어마어마한 강풍으로 인해 넘어지는 사람이 속출했고 바람으로 인해 가이드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가이드는 필사적으로 “바람이 강해지면 웅크리세요!!”하고 반복하여 소리쳤다.

  • 출발로부터 3시간이 흐른 오전 8시반 암석 정원에 도착 후 거센 비바람과 함께 도로가 바위로 되어 더욱 더 걷기가 힘들어진 참가자들 중 남성(66세) 한 명이 휘청휘청 어지럽게 걷다가 자리에 앉아 일어나지 못하기 시작했다. 이에 겨우 암석 정원을 지나 일행들은 식사 및 수분 보충을 하며 휴식했다. 그러나 휴식을 취한 곳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언덕도 아닌 평지여서 바람이 그대로 참가자들의 차가워진 몸을 통과했다. 평소 시간보다 3시간이 더 걸린 오전 10시경 북쪽 늪에 도착한 일행들은 빗물로 인해 늪이 강으로 변한 상태[5]에서 그 강을 건너야했다. 가이드 두 명의 도움으로 건너는데 성공하지만 도와주던 가이드 중 한명은 강에 빠졌고 가이드의 도움을 받으려 서서 기다리던 일행들도 그대로 비바람을 맞아 전원이 흠뻑 젖어버려 저체온증을 가속시켰다. 결국 카와스미 나츠에(川角夏江, 여성, 68세)의 상태가 전조도 없이 급격하게 나빠져 의식이 몽롱해진 채 더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미타 히사코(味田久子, 여성, 62세)는 구토와 함께 의미불명의 괴성[6]지르기 시작했다. 우에하라 스즈코(植原鈴子, 62세), 이시하라 모토코(石原大子, 61세), 이치카와 히사코(市川ひさ子, 59세) 3명의 여성이 저체온증에 의해 의식불명에 빠지는 등 하나둘씩 구토, 판단력 저하 등의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남성 참가자가 “이건 조난이야.구조대를 불러!”라고 하는 외침에 가이드 중 한 명은 구조요청을 위해 꺼낸 휴대전화의 버튼조차도 제대로 누르지 못하는 등의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결국 그들을 부축해 줄 참가자 노쿠비 이사오(野首功, 남성, 69세)와 오오타 가이드를 포함한 5명은 이곳에서 비박을 하기로 한다.

  • 12시 이후의 상태는 매우 심각했다. 하산하던 나머지 참가자 10명과 가이드 2명은 토무라우시산 정상을 우회하여 내려가던 중 키무라 타카시(木村隆, 남성, 68세)와 타케우치 타미코(竹内多美子, 여성, 69세) 두 명이 늦어져서 히시나 신지(斐品真次, 남성, 61세)와 나가타 쥰코(長田純子, 여성, 68세)가 각각 같은 성별인 그들을 부축하느라 일행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다른 여성 참가자가 ”아무도 따라오고 있지않아요. 기다려야 하지 않나요?“라고 하자 마츠모토 가이드는 “구조를 불러야 하니까 빨리 내려가야 한다”며 빠르게 걸어갔다.[7] 이 과정에서 먼저 늦어지던 타케우치를 부축하던 나가타가 마침 앞에 쓰러져 있던 또 다른 여성 참가자를 보고, 지나가던 남성 참가자에게 함께 옮겨 내려가자고 부탁하여 내려가던 도중, 남성이 갑자기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고 말하며 여성들을 버리고 혼자 내려갔다.(...) 여성 참가자들은 비박을 하려던 남성 참가자에게 "여기서 멈추면 죽는다. 함께 힘내서 내려가자"고 얘기하고 걷다가 지쳐 주저앉아버린 가이드에게 “일어나요. 자식도 있잖아요?”라고 격려하며 그 말에 정신을 차린 가이드는 다시 일어나 걷는 등 일행은 포기하지 않았다.

  • 오후 3시가 넘어 비바람이 약해지고 전파가 통하자 마츠모토 가이드의 뒤에서 걸어오던 참가자 마에다 카즈코(前田和子, 64세)의 휴대전화로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전파 신호가 좋지않아 전화는 몇번이나 끊어졌지만 4시가 되가는 시각 처음으로 110(우리나라의 112)에 신고 전화를 걸었다. 신고 직후 휴대전화는 배터리가 꺼져버렸고 긴장이 풀린 탓인지 마츠모토 가이드는 그 자리에 웅크려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마에다는 하는 수 없이 마츠모토를 놔두고 뒤따라오던 카메다 츠우코우(亀田通行, 64세)와 함께 하산했다. 뒤따라오다가 늦어버린 그룹들도 저체온증에 의해 자력 이동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 중 마나베 키요코(真鍋記余子, 55세)는 도중에 합류한 오카 메구미(岡恵子, 64세)와 함께 힘을 내어 하산했다. 하지만 이들 중 오카 메구미는 안타깝게 토무라우시 공원 근처에서 힘이 다해 털썩 주저앉아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는데 대화는 커녕 발도 매우 차가워져 있어 마나베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천만다행히도 마나베는 의식이 돌아오고 체력을 회복하여 “한밤중에 움직이는 건 위험하니 여기서 비박을 하자”고 생각하고 힘이 다한 오카의 옆에서 가볍게 식사를 하고 밤을 지샜다.

그 후 하루가 지나가기 직전인 밤 11시 50분경 선두에서 자력으로 하산한 카메다와 마에다 두 명이 지나가던 보도 기관의 차에 발견되어 경찰에 구조를 요청, 날짜가 지난 밤 12시 50분경 나가타와 히시나도 자력으로 구조되었고 몇시간 후인 새벽 4시경 혼자 하산하던 토다 신스케(戸田新介, 65세)도 무사히 구조되었다. 다음날인 7월 17일 아침부터 즉시 수색이 시작되었다. 비박하던 마나베와 지나가던 등산객에게 발견된 마츠모토 가이드도 구출되었고 오오타 가이드, 노쿠비와 이시하라 세 명도 육상자위대의 구조 헬기에 의해 구출되었다. 육상자위대 30여명이 파견되어 대대적인 구조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이들 중 등산객 7명, 가이드 1명, 총 8명은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5. 사고의 원인[편집]


한여름에, 그것도 8명이나 되는 인원이 동사했다는 것은 일본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언론에서도 이 사고를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사고 다음날인 7월 17일자 NHK 뉴스의 탑으로 뽑힌 타이틀이 'なぜ夏山で?(왜 여름 산에서?)'였을 정도.

사고 조사에 참여했던 전문가들은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가장 큰 원인을 저체온증으로 꼽았다. 여름철 토무라우시 산의 기온은 평상시에는 영상 10℃ 안팎으로 이 일대에서는 등산 가능한 온도였으며 참가자들도 방한용품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전날 내린 비에 젖은 장비와 의류를 충분히 건조시키지 못했다는 것. 이로 인해 미처 말리지 못한 채 그대로 입은 젖은 옷이 서서히 체온을 빼앗았고, 그 상태에서 강풍을 동반한 폭우까지 쏟아졌기 때문에 체온이 더욱 급격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어 이것이 저체온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사망자들은 방한용품을 갖추고는 있었으나 배낭 안에 그대로 넣어둔 채로 쓰러져 있었다고 하는데, 전문가들에 따르면 저체온증으로 인해 사고력이 저하되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 것이 원인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게다가 도중에 폭우로 인해 등산로가 물길로 변한 구간을 지나갈 때 주변에는 비바람을 막아주는 것이 전무했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그대로 강풍과 폭우에 장시간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흔히 하기 쉬운 오해 중 하나가 저체온증섭씨 0도 이하의 온도와 같은 저온에서만 일어난다고 여기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 저체온증의 근본적인 원인은 신체 내의 열이 빠르게 빠져나가서 정상 체온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과 강풍은 열을 빠르게 빼앗기 때문에, 설령 주변 온도가 높더라도 체온이 빨리 내려가서 저체온증으로 연결되기 쉽다.

또 하나의 커다란 이유로 일본 산악가이드협회에서는 안전불감증과 함께 가이드의 판단 착오가 이 사고의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악천후임에도 불구하고 출발을 강행했다는 점, 안전 문제를 등한시한 채 일정을 소화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다는 점을 문제로 지목한 것. 애초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 시점에서 일정을 전면 취소하고 하산했다면 이같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산악가이드협회의 견해였다.[8] 사고가 일어난 산에서 2002년 조난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임에도 토무라우시산에 경험이 없는 가이드 2명을 고용했고 예상치 못한 사고에 대응할 생각도 없이 2박 3일의 짜여진 일정을 그대로 행하려고만 했다. 그리고 모객을 위해 ‘등산 초보자들도 환영’한다는 책임감없는 문구를 내건 사실도 문제로 지적되었다.

덧붙여 아무리 철저하게 방한 용품과 산행에 대비하여도 여름이라 산행을 가볍게 여기고 의상도 가볍게 입어서 “지금 패딩을 입는 게 좋아요”라는 권유까지 들은 사망자도 존재했던 만큼 참가자들의 인식 부족도 하나의 이유로 꼽히기도 한다. 게다가 당시에는 저체온증의 그 위험성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이 전무했다는 것이 사고에 한 몫을 했다고 보는 해석도 많다.


6. 사고 이후[편집]


사고 발생 이후 여행사들의 산악 투어 상품이 줄줄이 취소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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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인 토다 신스케(戸田新介, 65세)가 구조 당시 입고있던 파란색 몽벨(montbell, 일본의 아웃도어 브랜드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져있다.) 최강설이 생겨나서 몽벨의 등산복 판매량이 늘었다는 일화도 있다.


7. 기타[편집]


후지 테레비의 다큐멘터리 예능 '기적체험! 언빌리버블' 2016년 8월 11일 방영분[9]에서 이 사고를 다루었다. 해당 방영분에서는 참가자들의 생과 사를 가른 결정적인 요인을 방수 및 방한 대책 외에도 충분한 수면과 휴식을 취했는지의 여부와 칼로리 섭취량의 차이로 분석했다. 방송에 따르면 사망자들 중에는 사고 전 산장에서 숙박할 때 충분히 수면을 취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고[10], 등산 장비와 함께 초콜릿이나 사탕 등의 비상식량을 준비하고는 있었으나 이 역시 그대로 가방에 넣어둔 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수면부족과 열량 섭취 부족이 곧 체온을 올리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부족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저체온증을 가속화시켰다는 분석이었다.[11]

이 조난 사고를 기획했던 어뮤즈 트라베루는 도쿄 치요다구에 존재했던 이 여행사로 이 사건 이후에도 약 3년 후인 2012년 4월 중국 만리장성 투어에서 3명이 사망하는 조난 사고를 일으킨 끝에 2012년 12월 여행업 등록이 취소되었고 2021년 최종적으로 망했다.

토무라우시 산에서는 이 사고가 일어나기 7년 전인 2002년 7월에도 비슷한 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에서는 등산객 8명이 태풍으로 인해 산 속에서 조난당했다가 2일 후 구조되었으나, 이들 중 여성 2명이 뇌경색과 동사로 사망했으며, 일시적으로 비바람이 잦아든 것을 보고 안이하게 판단한 가이드가 출발을 감행했다는 점이 2009년의 조난 사고와 유사했다. 한편 이 사고에서 조난당한 등산객과 도중에 사망한 사람의 시신을 목격하고도 그대로 방치한 채 등산을 속행한 등산객이 적지 않게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지역 언론에서 이를 크게 비판했다.

그러나 사실 사망자가 나올만큼 악천후라면 남이 죽어 있더라도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그냥 지나치는 수밖에 없다. 시신이나 조난자를 다 구해주고 수습해줘야 한다면 에베레스트 등 고산지에서 조난당한 일행을 두고 살아온 사람, 남아 있는 수많은 시신들을 보고 지나치는 사람도 비난받아야 한다.

이 사고를 계기로 저체온증의 위험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저체온증으로 인한 산악 조난 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으며, 토무라우시산 조난 사고와 비슷한 사례 중 하나로 2012년 5월 황금연휴 기간에도 나가노현의 시로우마산에서 등산을 하던 의사 6명이 갑작스러운 악천후에 미처 대비하지 못해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사고가 있다. 한국의 경우는 1998년 4월 초에 민주지산에서 훈련중이던 특전사 병력들 중 일부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사고가 있는데, 이처럼 악천후에 의한 저체온증은 아무리 여름 날씨와 훈련받은 인력이라고 해도 매우 위험하므로 언제나 주의를 요한다.


8. 조난한 실존 인물/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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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가비 15만 2천엔이라고 쓰여있는 부분이 해당 사고의 광고이다.[2] 아이누어로 '신들이 노니는 뜰'이라는 뜻.[3] 후술되겠지만 이 시점에서 일정을 전면 취소하고 내려갔다면 조난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4] 여기서 네팔인 쉐르파는 여행사 소속이었으므로 다른 일행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것을 맞이하기 위해 산장에 머물렀다.[5] 폭 2m, 깊이는 무릎까지.[6] 체온이 35도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하면 인간은 급격하게 추위를 느끼고 33도 이하에선 인식장애가 온다. 그에 따라 헤모글로빈에서 산소가 방출되기 힘들어지고 에 산소부족이 일어나 대뇌피질의 기능도 떨어진다. 그리하여 괴성을 지르거나, 또는 아기의 옹알이 같은 언어를 내뱉으며 이성이 사라지는 경우가 나타난다.[7] 그는 자신의 몸도 흠뻑 젖어 상태가 점점 악화되는 걸 스스로 느끼고 있었고 1분 1초가 급박한 참가자들을 인솔하느라 오오타 가이드와 협상할 시간도 없다고 느껴 빨리 구조를 요청해야겠다고만 생각했다.[8] 또한 사고 조사단의 일원이자 이후 출판된 관련 서적의 저자는 한 방송 프로의 인터뷰에서 당시 가이드가 투어 일정 변경으로 인한 여러 가지 손실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견해를 내놓았다.[9] 2016년부터 새로 지정된 '산의 날' 특집으로 진행되었다.[10] 서로 여행 이야기를 하면서 밤을 새는 사람도 있었는가 하면 위에 언급된 것처럼 비가 새는 바람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수면부족을 겪은 사람도 있었다.[11] 당시 생존자 중 한 명인 60대 여성도 도중에 저체온증으로 한 차례 가벼운 정신착란 상태가 되었으나, 등산복 주머니에 초콜릿과 사탕 등을 넣어두고 이동 중 틈틈이 꺼내 먹으면서 열량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증세가 심하지 않고 빨리 회복될 수 있었다.[12] 근대 일본군 199명이 얼어죽은 참사. 문서에 동사체 사진이 있으므로 열람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