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아드리앵 엘베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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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베시우스
Helvétius


파일:Claude Adrien Helvétius_1.jpg

본명
클로드 아드리앵 엘베시우스
Claude Adrien Helvétius
출생
1715년 1월 26일
프랑스 파리
사망
1771년 12월 26일 (향년 56세)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
display: none; display: 프랑스 왕국"
행정구
]]

직업
철학자
사상
계몽주의

1. 개요
2. 생애
3. 저서
4. 여담



1. 개요[편집]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유물론과 공리주의를 주장하였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제일 처음 말한 사람으로서 "공리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2. 생애[편집]


엘베시우스는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종교전쟁 때문에 네덜란드로 도망간 독일 출신 가문으로서, 할아버지는 네덜란드 군대의 유명한 의사이자 연금술사였고, 그 후 루이 14세 군대의 의무대에서 복무하기 위해 프랑스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프랑스 여왕을 담당하는 왕실 의사가 될 정도로 성공했고, 주목할만한 몇몇 의학서를 쓰기도 했지만 추기경의 음모에 휘말려 재산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는 가문의 부를 재건하기 위해 아들 엘베시우스를 캉에 세금징수원 감독으로 있는 부유한 친척에게 견습보냈다.

아버지의 여왕 인맥으로 23살의 엘베시우스는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국세청의 세금징수원에 발탁되었고, 곧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어린 나이에 부자가 된 엘베시우스는 결코 사업이나 궁정 생활에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고, 대신 그의 여가 시간 대부분을 사변적인 철학이나 시 그리고 수학을 공부하는데 보냈다고 한다. 이 때 존 로크를 접했고 스스로를 열렬한 로크의 제자라고 생각하기도 했다고. 그러던 중 1748년 그의 친구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이 성공을 거두자, 그 책에 동의할 수 없었던 엘베시우스는 자신이 직접 책을 써서 반박하기로 결심한다. 그러기 위해 엄청난 돈을 손에 쥐어주었던 세금징수원 자리마저 걷어차고는 철학 공부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수년간의 고독한 연구 끝에, 엘베시우스는 마침내 1758년에 그의 대표작인 『정신 (De l'esprit)』을 출간했다. 그 책은 즉시 광범위한 반향을 일으켰을 정도로 널리 퍼졌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공리주의 개념을 퍼뜨린 문제작으로 다뤄졌다. 하지만 급진적인 유물론에 바탕을 둔 종교 비판 때문에 교황청과 파리 의회에 의해 비난을 받았고 그 책은 금서로 지정되어 불태워졌다.

그런 까닭에 엘베시우스는 생전에 다시는 책을 출판하지 않았다. 종교와 결코 타협하지 않은 그의 작품들은 그가 1771년 12월 26일 파리에서 사망한 후에야 『인간 (De l'homme)』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3. 저서[편집]


제목
발간 연도
정신
De l'esprit
1758년
인간
De l'homme
1773년[1]
계몽주의 유물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이고 공리주의를 최초로 주창한 인물 중 한명이지만 국내 인지도는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한국어 번역은 아직 한 권도 되지 않았다.


4. 여담[편집]


  • "고양이(Minette)"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매력적이었던 그의 아내 앤 캐서린은 당시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드나들던 살롱을 운영하면서 수많은 인맥을 쌓은 것으로 유명하다. 엘베시우스가 죽은 뒤 미망인이 된 캐서린은 프랑스를 방문한 벤저민 프랭클린의 청혼을 받기도 했다. 한눈에 반한 벤자민 프랭클린이 끈질기게 쫓아다녔지만 그의 끈질긴 제안에 도리어 겁을 먹은 캐서린은 청혼을 거부하고 한동안 도망다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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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후에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