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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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온두라스 코판 주[3] 에 위치한 마야 문명의 도시이자 유적지. 마야 문명권에서도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어 일반적인 마야 도시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티칼, 치첸 이트사, 팔렝케 등과 함께 잘 알려진 마야 유적들 중 하나이다.
해면보다 600m나 넘는 온두라스 서부의 산맥에 자리잡고 있으며 아름다운 경치와 화려한 건물 장식들로 유명하다. 5세기부터 9세기까지 지속된 고전기 마야 문명의 대표적인 중심도시였다. 특히 코판은 마야 문명권에서도 최남단에 있었던 탓에 인근이 모두 비-마야인들이었다. 때문에 코판의 문화와 건축물들은 일반적인 마야 도시들과는 확연히 달랐고 그 사회 질서도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2. 역사[편집]
코판이 자리한 코판 강 일대의 계곡은 강이 흐르고 토질이 비옥한 지역이라 이미 기원전 9세기 경부터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작은 규모의 부락과 읍들이 이 곳을 거쳐갔지만 특별히 두각을 드러낸 세력은 없었으며 대부분은 그냥 고만고만한 세력으로 남아있었다. 기원후 400년까지도 코판 일대에 사람이 거주는 하고 있었지만 딱히 남긴 석조 유적도 없고 특별한 기록도 없다. 그렇게 뚜렷한 세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코판이었지만, 이러한 상황은 426년에 달라지게 된다.
당시 마야 문명을 주름잡던 대도시들 중 하나였던 티칼에는 키니치 약스 쿠크 모라는 이름을 가진 장군이 있었다. 쿠크 모는 모종의 이유로 티칼에서 떨어져나와 남쪽으로 이동해 코판 지역에 둥지를 틀고 새로운 개척 도시를 세웠다. 이 사건을 도시국가로서의 코판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본다. 쿠크 모는 스스로 마야의 왕을 의미하는 '아하우'로 칭하고, 티칼에서 데려온 무리를 기반으로 자신의 권력을 굳혀나갔다.[4] 또한 기존에 코판 지방을 다스리던 왕족의 딸과 결혼해 자신의 정통성을 다졌다. 이렇게 코판은 뿌리 자체가 티칼에서 기원했던 덕에 개국 이후에도 티칼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개국 얼마 후 인근에 식민도시인 퀴리구아를 새롭게 세웠다.
코판을 건국한 키니치 약스 쿠크 모는 435년에서 437년 사이 그 어느 시점에 승하했다. 쿠크 모가 죽자 코판의 왕위는 아들인 키니치 포폴 홀[5] 에게 돌아갔다. 포폴 홀은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도시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포폴 홀은 코판 시내에 처음으로 구기 경기장을 세우고 도시 중심가를 정리했으며, 수많은 건물들을 겹겹이 쌓아올리면서 코판의 시가지 확장에 열을 올렸다. 이후 포폴 홀의 후계자들에 대한 것은 알려진 게 없다. 그나마 제4대 왕의 이름이 쿠 익쓰고, 중앙 아크로폴리스의 피라미드를 개축했다는 것 빼곤 모든 기록이 정글에 풍화돼서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팽창을 거듭하던 코판은 제11대 왕인 칵 찬 요팟의 치세때부터 급속도로 세력이 확장되었다. 코판의 시가지가 코판 계곡 전역으로 크게 뻗어나갔고, 수많은 신전들이 중앙 아크로폴리스를 중심으로 세워졌다. 칵 찬 요팟 왕이 무려 49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코판을 통치하다가 세상을 떠나자 찬 이믹스 카윌이 제12대 왕으로 즉위했다. 찬 이믹스 카윌은 코판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왕좌를 지켰던 인물로 628년에 즉위할 때 즈음 15세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왕위에 즉위한 찬 이믹스 카윌은 628년부터 695년까지 장장 68년이라는 어마어마한 기간 동안 왕좌에 앉아있었다. 찬 이믹스 카윌 역시 70년에 가까운 재위 기간 동안 꾸준하게 코판의 강역을 넓혀나갔고, 코판은 마야 문명 최남단의 대도시로서 위명을 자랑하며 그 어떠한 도시들도 함부로 무시하기 어려운 패권국으로 성장했다.
전성기 시절 코판의 모습 복원도.
코판은 695년 7월에 제13대 왕으로 즉위한 우악사클라운 우바 카윌 왕의 재위기에 최전성기를 맞았다. 우악사클라운 왕은 인근 도시들을 연달아 격파하면서 마야 남부 지방을 통째로 지배하는 대왕으로 떠올랐고, 코판은 티칼, 칼라크물, 팔렝케와 함께 마야 문명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4대 도시들 중 하나에 들었다고 한다. 724년에는 속국인 퀴리구아를 침공해 칵 틸리우 찬 요팟을 봉신으로 앉혔다. 또한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하여 코판 시가지 곳곳에 여러 신전들을 신축했는데,[6] 코판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들 중 하나인 상형문자 비문이 새겨진 계단 신전도 이때 세워졌다. 그렇게 우악사클라운 왕의 통치하에 코판의 영광은 영원할 것 같았지만..... 퀴리구아의 봉신인 칵 틸리우 찬 요팟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 전성기도 끝장나고야 말았다.
때는 바야흐로 734년, 퀴리구아의 봉신으로 임명되었던 칵 틸리우 찬 요팟이 12년 만에 종주국인 코판에 대항해 독립을 선포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칵 틸리우 찬 요팟의 뒤에는 마야의 최강대국이었던 칼라크물이 있었다. 코판이 칼라크물의 최대 경쟁도시인 티칼과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코판을 손봐주기 위해 일부러 칵 틸리우 찬 요팟을 꼬드겨 대코판 반란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던 것이다.[7] 결국 4년에 걸친 전쟁 끝에 738년, 우악사클라운 왕이 퀴리구아 군대의 기습에 당해 사로잡혔고, 코판은 퀴리구아 군대에 의해 불타버렸다. 늙은 우악사클라운 왕은 퀴리구아로 끌려가 참수당한 것으로 알려져있다.[8] 그렇게 왕이 포로로 잡혀죽는 치명타를 입은 코판은 그 이래로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악사클라운 왕이 사로잡혀 목이 잘린지 39일 만에 칵 요플라즈 찬 카윌이 코판의 제14대 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이미 코판은 우악사클라운 왕이 죽은 이래 끝장난 분위기였던 탓에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별로 없었고, 그저 혼란을 수습하며 퀴리구아의 추가적인 침략을 막는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몬타구아 강을 따라서 나 있는 무역로조차도 퀴리구아에게 빼앗겨버려서 코판의 경제력은 날이 갈수록 추락했고, 반대로 퀴리구아는 급속도로 성장했다.[9] 칵 요플라즈 찬 카윌이 749년 1월에 승하하자 칵 입야즈 찬 카윌이 제15대 왕으로 즉위했다. 칵 입야즈 찬 카윌에 이르자 코판도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하는 데 성공해 서서히 건물 축조를 다시 시작하는 모습을 보인다.
중흥의 군주였던 칵 입야즈 찬 카윌 왕은 763년에 승하했고 그의 뒤를 이어 약스 파사즈 찬 요팟 왕이 코판의 제16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의 재위기간 동안 코판은 인구 과밀과 자원 태부족에 시달리면서 신음하게 되었다. 일단 우악사클라운 왕의 죽음으로 인해 멸망할 뻔 했던 위기에서는 벗어나는 데 성공했지만, 아무래도 사회가 한번 붕괴할 정도의 참사를 겪고 나니 그 부작용으로 점차 코판 전체가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귀족들의 힘은 날로 강성해졌고 왕의 힘은 이와 반비례하여 작아졌다. 귀족들은 왕에 못지 않게 자신들의 궁전을 호화롭게 장식했고 갈수록 왕을 우습게 여겼다. 한편 인구가 20,000명이 넘어가면서 지나치게 과밀해졌고, 더이상 외부에서 식량을 수입하지 않으면 바로 무너져버릴 수준까지 이르러게 되었다. 게다가 화전 농사의 실패와 전염병의 창궐이라는 대재앙이 겹치자 코판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붕괴해버리기 시작했다.
802년에 약스 파사즈 찬 요팟 왕이 자신의 두 번째 박툰을 기념하여 석비를 세웠다는 내용이 남아있지만 그게 전부일 뿐이다. 이후 코판에 마지막으로 세워진 신전의 기단부에는 '위대한 건국 가문의 파멸'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는데, 맥락상 코판 왕가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전염병이 연달아 코판에 돌면서 인구는 급속도로 줄어들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다른 곳으로 도망치거나 폐허 속에서 근근히 연명하며 살아나갔다. 고고학자들은 대략 800년에서 830년 사이에 코판의 정치, 사회구조가 완전히 붕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록에 남은 최후의 코판 왕은 우킷 툭이라는 인물로, 822년에 왕위에 올라 신전을 착공했지만 미완성인 상태로 남았다. 즉 우킷 툭의 재위기간에 코판이 더이상 작은 신전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할 정도로 무너졌다는 뜻이다. 이후 900년대까지도 코판 일대에 사람은 거주했지만 옛 성세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10세기로 넘어가 후고전기에 이르자 코판은 완전히 폐허로 전락했고, 렌카족이나 피필족같은 인근 원주민들만이 가끔씩 찾아와 조잡한 가옥들을 짓기 위해 석재들을 뜯어갔다.
3. 발굴 작업[편집]
그렇게 코판 유적은 10세기 이래로 600년 넘게 돌무더기 가득한 폐허로 남아 점차 정글의 어둠 속에 침식되어갔다. 그렇게 600년의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1576년 3월 8일에 처음으로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였던 디에고 가르시아 데 팔라치오가 재발견했다. 팔라치오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장대한 유적을 발견했다'라고 썼고, 그 이래로 여러 고고학자나 탐험가들이 간간히 다녀가는 유적지가 되었다. 19세기 초에는 프랑스인 발굴가 발덱이 코판을 방문해 몇 달을 살면서 유적들의 스케치를 남겼고 1834년에는 장 갈린도 대령이 찾아와 여러 언어로 탐험기를 써서 출판했다.
이후에도 수많은 고고학자들이 코판을 방문했다. 존 로이드 스티븐스와 프레데릭 캐서우드가 코판의 유적들을 자세히 소개한 삽화책을 1841년에 출판해 서양 사교계에서 대단한 관심을 끌었고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모슬레이를 포함한 수많은 학자들이 코판을 찾아왔다. 198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고, 현재는 온두라스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이자 유적지로 많은 관광객들을 받고 있다. 다만 온두라스의 치안이 좋지 않고 유물들에 대한 보존 작업도 미비한 탓에 유적 훼손과 도굴꾼들의 난립으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는 말이 있다.
참고로 코판 유적은 600년 넘게 정글 속에서 침식되어가던 터라 훼손이 상당히 많이 되어버렸다. 인근의 코판 강의 지류가 바뀌어 강이 코판 유적을 그대로 뚫고 지나가는 모양이 되어버렸고, 그 과정에서 아크로폴리스의 동부 부분 상당수가 물살에 유실되어 쓸려내려가버렸다. 최소 중정 1개와 신전 10여 개 쯤이 강물 때문에 무너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20세기에 카네기 재단의 후원을 받아 추가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 강의 흐름을 다시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고, 현재는 강물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코판 유적 내부에 강이 흐르던 곳은 모두 흙과 자갈로 채웠다고 한다.
4. 유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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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2]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다른 기준과 함께 적용 권장)[3] 이 코판 유적에서 이름을 따왔다.[4] 아마 당시 티칼의 왕이었던 시야즈 찬 카윌 2세로부터 지원받았던 것으로 보인다.[5] 실제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포폴 홀'이라는 이름은 그냥 고고학자들이 추정해낸 것이다.[6] 코판은 마야 문명에서도 최남단에 위치한 덕에 마야 문명의 타 대도시들과는 확연히 다른 건축 양식을 가지고 있다.[7] 애초에 코판을 건국한 키니치 약스 쿠크 모부터가 티칼 출신이었다.[8] 당시 코판은 퀴리구아보다는 훨씬 강성한 대도시였다. 그런데도 퀴리구아에 패배한 것을 보면 아마 칼라크물이 퀴리구아에 군대를 파견했거나 코판이 칼라크물을 두려워해 소극적인 대응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9] 이 시기, 코판에 새롭게 지어진 건물은 단 하나도 없었고, 반대로 퀴리구아에는 수많은 신전과 건물들이 들어섰다.[10] 영국의 삽화가인 프레데릭 캐서우드가 출판한 탐험기에 수록된 삽화다.[11] 앞서도 말했지만 기존의 건물 위에 새 건물을 통째로 덧씌워서 짓는 건축법은 마야 세계에서 굉장히 흔했다.[12] 계단 바로 앞의 석상은 'M 석비'라고 부르고 칵 입야즈 찬 카윌 왕의 모습을 새겨놓았다.[13] 총 2,200여 자의 마야 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마야 유적들 가운데 단일 규모로는 최대의 상형문자들이 새겨져 있는 유적이다. 현재의 모습은 무너져 내렸던 것을 학자들이 하나하나 다시 복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