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트의 조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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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트 여백작 & 웨일스 공비
켄트의 조앤
Joan of Kent


파일:Joan_of_Kent.jpg

출생
1328년 9월 29일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셔 우드스톡 궁전
사망
1385년 8월 7일 (향년 56세)
잉글랜드 왕국 버크셔[1] 월링포드 성
장례식
1386년 1월 27일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스탬퍼드 그레이프라이어스
배우자
켄트 백작 토마스 홀랜드 (1340년 결혼 / 1360년 사망)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태규
(134?년 결혼 / 1349년 무효화)
흑태자 에드워드 (1361년 결혼 / 1376년 사망)
자녀
토마스, 존, 조앤, 모드, 에드먼드, 에드워드, 리처드 2세
아버지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
어머니
리들의 웨이크 여남작 마거릿 웨이크
형제
에드먼드, 마거릿, 존
종교
가톨릭 (세례명:요안나)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결혼
2.3. 말년
3. 여담



1. 개요[편집]


영국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내이자 리처드 2세의 어머니.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에드워드 1세의 막내아들인 초대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와 리들의 웨이크 여남작 마거릿 웨이크의 차녀로 태어났다.

우드스톡의 에드먼드는 에드워드 1세와 두번째 부인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자신의 이복형인 에드워드 2세의 충복이자 충실한 지지자였다. 이로 인해 에드먼드는 에드워드 2세의 아내인 프랑스의 이사벨라, 그녀의 정부인 로저 모티머(Roger Mortimer, 1st Earl of March)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1327년 에드워드 2세가 폐위되고 의문사한 뒤 로저 모티머는 에드먼드마저 무고하여 처형하고, 스스로 에드먼드의 작위인 켄트 백작이 되었으며 이사벨라마저 그를 옹호했다. 당시 겨우 두살이었던 조앤은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아룬델 성에 억류되어, 죄인의 자식으로 감시당하면서 자랐다. 그러나 사촌 에드워드 3세가 성인이 되고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로저 모티머를 처형하면서 조앤과 그녀의 가족들은 처지가 나아졌다. 에드워드 3세는 조앤과 가족들을 잘 돌봐주었고 조앤은 궁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2.2. 결혼[편집]


1330년에 12살의 조앤은 14살 연상인 젠트리 출신의 토마스 홀랜드와 비밀리에 결혼했다.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토마스는 해외 원정에 나섰다. 그때 조앤의 가족들은 조앤에게 솔즈베리의 윌리엄 몬태규와 결혼할 것을 권유했다. 자신이 결혼한 사실이 들통나면 토마스가 체포될 것이 두려웠던 조앤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고, 윌리엄 몬태규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 후 윌리엄 몬태규는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아 2대 솔즈베리 백작이 되었다.

금의환향한 토마스는 솔즈베리 백작부인이 된 조앤을 보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토마스는 곧바로 왕에게 사실을 고하고 교황에게 조앤은 자신의 아내라고 호소했다. 조앤 또한 원래의 남편에게 돌아가고 싶었지만 윌리엄 몬태규는 그녀를 구속했다. 1349년에 클레멘스 6세가 조앤과 토마스 홀랜드의 결혼을 인정하면서 솔즈베리 백작과의 결혼은 무효화되었다. 토마스의 곁으로 돌아온 조앤은 5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중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사망한 막내 에드먼드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성인으로 성장했다. 그후 조앤의 형제들이 모두 사망하면서 조앤은 켄트 백작령과 리들의 웨이크 여남작 자리를 물려받았다. 토마스는 아내의 지위 덕분에 켄트 백작위를 받을 수 있었다.

1360년에 토마스는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361년에 조앤은 에드워드 3세의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와 재혼했다. 조앤과 에드워드의 결혼은 정치적으로 별 이득이 없었기에 정말로 사랑해서 한 결혼으로 추측된다. 조앤은 에드워드보다 2살 연상이었으며 그의 당고모였다. 비록 조앤에게 지위와 재산이 있다고는 하나 차기 국왕인 에드워드는 얼마든지 더 좋은 신붓감을 얻을 수 있었다. 에드워드 3세와 왕비 에노의 필리파는 조앤을 좋아했지만 두 사람의 결혼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여러 말이 많았지만 결국 교황의 승인 하에 두 사람은 결혼해 2명의 아들을 낳았다.

2.3. 말년[편집]


1376년에 남편 흑태자 에드워드가 사망하고 그 다음해인 1377년에 시아버지인 에드워드 3세도 사망하면서 조앤의 아들 리처드 2세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조앤은 한번도 왕비가 된 적은 없었으나 어린 왕의 어머니로써 큰 영향력을 가졌다. 1385년에 조앤이 토마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가 다툼 끝에 백작의 아들 랄프 스태퍼드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리처드 2세는 곧바로 이부형 존의 영지를 몰수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조앤은 며칠동안 리처드 2세에게 존의 용서를 구하다가 쓰러져 숨졌다.[2] 조앤은 그레이프라이어스에 있는 첫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3. 여담[편집]


일설에 의하면 흑태자 에드워드가 조앤을 오랫동안 짝사랑했다가 조앤이 과부가 되자 바로 청혼했다고 한다.

가터 기사단의 이름의 유래와 관련있는 인물로 추정된다. 기사단의 유래로 가장 유명한 것은 솔즈베리 백작부인의 가터에 대한 이야기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국이 칼레를 점령한 후 열린 무도회에서 솔즈베리 백작부인이 춤을 추다 가터가 흘러내려 궁인들이 보고 웃었다. 왕이 이를 주은 후 가터 기사단의 구호인 '이를 삿되이 여기는 자에게 수치 있으라(Honi soit qui mal y pense)'라고 한 것에서 기사단의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여기서 솔즈베리 백작 부인이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태규와 결혼했을 당시의 조앤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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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옥스퍼드셔.[2] 이후 리처드 2세는 존의 사형 선고를 취소하고 그를 추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