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안현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秦安
영어 Qinan
중국 서부 간쑤성 톈수이시의 현. 톈수이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후루 강 동안의 협곡 분지에 위치하고, 인구는 약 42만명이다. 옛 지명은 약양 (略陽)이었고, 서북쪽 40km 지점의 룽청진에서는 삼국지의 가정 전투가 벌어졌다. 일대에는 대지만 (大地湾), 흥국사 (兴国寺), 문묘 (文庙) 등의 볼거리가 있고 특산물로 복숭아가 있다.
2. 역사[편집]
복희와 여와의 마을인 희리여향 (羲里娲乡)으로도 불리는데, 간쑤성 중에서도 중원과 가장 가깝기에 양사오 문화 유적지가 발견되는 등 역사가 유구하다.
2.1. 고대[편집]
진나라 시기부터 약양 (略陽)이라 불렸고, 농서군(隴西郡)에 속했다가 전한 말엽 천수군 산하 약양현 (略陽縣)이 설치되었다. 후한 시기 천수군은 한양군 (漢陽郡)으로 개칭되었고, 193년 그 북부가 영양군(永陽郡)으로 분리될 때에 약양현도 그에 속했다. 비슷한 시기 약양현의 치소가 현 룽청진으로 옮겨졌다. 214년 영양군이 폐지되며 약양현은 재차 한양군에 속했고, 한양군은 곧 조위 건국과 함께 천수군으로 개칭되었다. 그 상태에서 제갈량이 북진하여 일시 점령했고, 약양현은 가정 전투 후 영양군의 후신으로써 신설된 광위군(廣魏郡)에 소속되었다.
2.2. 중세~[편집]
서진 건국 직후인 265년, 광위군은 약양군 (略陽郡)으로 개칭되었다. 다만 치소는 여전히 현 톈수이 동쪽 마이지구인 임위현에 있었다.[1] 298년 제만년의 난과 5호 16국의 난세에 약양군 주민들이 대거 한중으로 피신했고, 유송 시기 한중 및 형주 (샹양시)에 각각 약양군과 남천수군 약양현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북위 시기 기존의 약양현은 농성현 (隴城縣)으로 개칭되었고, 약양군은 수나라 시기인 582년에 폐지되었다.
이때 농서현도 하양현 (河陽縣)으로 개칭되었다가 586년 농성현으로 돌아와 진주(秦州) 혹은 농서군에 소속되었다. 북쪽 40km 지점에 있던 성기현 (成紀縣)[2] 은 서량과 당나라 황실, 시선 이백을 포함하는 농서이씨의 고향이다. 한편, 598년 현 시가지 북쪽에는 위주 (渭州) 산하 장천현 (長川縣)이 세워졌지만 당나라 건국 직후인 621년에 폐지되어 농성현에 속했다. 농성현 자체는 619년 문주 (文州)로 분리되었다가 625년 진주로 돌아왔다.
8~10세기 토번과 탕구트의 침공으로 농성현은 수난을 겪다가 50km 남쪽의 옛 임위현 (현 마이지구) 위치로 이전되었다. 북송 시기 일대에는 진채 (秦寨), 계천채 (鷄川寨)、농성채 (隴城寨)의 세 요새가 있었다. 금나라 시기인 1157년에 이들은 각각 진안현 (秦安縣), 계천현 (鷄川縣), 농성현 (隴城縣)으로 편성되었다. 원나라 시기인 1270년에 계천, 농성 두 현은 진안현에 병합되어 진주 (秦州)에 속했다. 명청대에는 공창부 (巩昌府) 진주에 속했고, 근래 들어 톈수이시에 소속되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4-04-16 23:26:43에 나무위키 친안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부견의 고향이자, 가정 전투의 전장으로 여겨지기도 한다[2] 서량의 창건 군주이자 당나라 황실인 농서이씨의 중시조로써 당고조 이연의 7대조인 이고가 당시의 성기현 출신이다. 그의 가문은 서량이 멸망한 후로도 계속 농서군 성기현에 살았고, 이연의 부친인 이병 역시 이곳 출신이었다. 따라서, 성기현은 당 황실의 본적지였다. 한편 서량 왕실은 적도 (린타오현) 출신이고, 그들이 조상이라 여긴 이광과 이릉은 옛 성기군 (징닝현) 출신이다. (이고 - 이흠 - 이중이 - 이희 - 이천석 - 이호 - 이병 - 이연) 이호 537년 농서군공 (隴西郡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