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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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225호
강화 초지진
江華 草芝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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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시설
면적
4\,242㎡
지정연도
1971년 12월 29일
제작시기
조선시대
위치



파일:chojijin_1.jpg
초지진 내 성채 중 초지돈. 1973년에 복원되었다.

1. 개요
2. 내용
3. 외부 링크
4. 사적 제225호


1. 개요[편집]


草芝鎭

17세기 조선에 설치된 방어진. 외부에서 상륙하는 적 수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해안 진지로 만들어진 돈대이다. 당시 기준으로 경기도 강화도호부 동남쪽 해안, 현재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위치해 있다. 초지진은 1971년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편집]


바닷가에 있어서 '나루 진(津)'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방어 시설을 뜻하는 '진지 진(鎭)'이 맞다.

조선은 고려의 군대인 주진군 개념을 분화하여 국경 연안에 변진(邊鎭), 내륙 거점에 제진(諸鎭)을 설치했으며, 양란 이후에는 북벌에 대비하여 더 많은 진지를 구축했다. 초지진의 경우가 바로 이 예로, 조선 효종 7년(서기 1656년)에 강화유수로 있던 홍중보가 처음으로 축조하였다.[1] 숙종 대에는 강화도 전역에 53개의 성채(돈)를 추가로 설치하며 진지를 확장하였으며, 교동도로 이전한 경기수영과 더불어 한양 입구의 중요한 수문장 역할을 하였다.

파일:chojijin_2.jpg
복원된 초지진 성곽의 일부.

초지진이 본격적으로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그보다 몇 백년 후인 1866년, 근대화 초기에 접어든 고종 시절이다. 병인양요병인박해에 항의하여 강화도로 들어온 프랑스군과 이에 맞선 관군의 교전 후 초지진이 함락되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고, 1871년 신미양요미 해병대에 의해 다시 한번 함락당하기도 했다. 1876년에는 일본군이 근대무기를 갖추고 강화도에 포격을 가하고 습격한 끝에 한일 불평등조약을 맺기도 했다.

원래의 초지진은 상술한 불미일(佛美日) 군대와의 전투로 인해서 소실되어 그 터만 남게 됐고, 지금 교과서 등에 사진으로 자주 등장하는 초지진은 1973년, 지금의 자리에 초지돈만을 복원한 것으로 온전한 본모습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현재 초지돈에는 근대에 사용했던 포좌와 총좌가 있고 대포 등이 전시되어 있다. 2021년 7월 1일부터 강화군 전전지 무료화 운영대상에 포함돼 무료입장이 가능하며 하절기에는 저녁 6시, 동절기에는 저녁 5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3. 외부 링크[편집]




4. 사적 제225호[편집]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구축한 요새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초지진 설치에 대한 기사에 따르면 조선 효종 6년(1655)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곳으로 1871년에 미국 해병이 초지진에 침략해 왔을 때 전력의 열세로 패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 뒤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초지돈을 복원하였다.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은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였다.

※(초지진 → 강화 초지진)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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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성보 역시 이 시기 건립되었으며 다음 왕인 현종 시기에는 덕진진 역시 강화도로 이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