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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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공산당 당수직 전반에 대한 내용은 서기장 문서 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2023년 현재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시진핑이다.
2. 법적 근거[편집]
3. 연혁[편집]
1925년 4차 당대회에서 최초로 총서기 직함이 신설되었다. 4차 당대회 2장 10조는 1인의 총서기의 존재를 명시하였으며, 기존 중앙국 위원장 천두슈를 초대 총서기로 선출하였다. 이후 당규약에서 총서기의 직함은 사라졌지만, 6차 당대회까지 총서기는 계속해서 선거되었다. 하지만 이미 1930년대부터 코민테른의 개입으로 총서기는 유명무실한 직위였으며, 소련 유학파들이 당권을 장악하였고, 1931년에 총서기 샹중파가 국민당에 체포된 이후 1931년 9월, 상하이에 임시중앙정치국이 재구성되었으며, 보구가 당의 수장을 맡았으나 총서기 직함을 쓰지 않고 그저 '총책임인(总负责人)'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썼다.[2]
그러다가 1943년 3월 20일 정치국 회의에서 서기처가 도입되면서 서기처 주석 직함이 도입되었다. 서기처 주석은 당의 최종정책결정권을 쥐고 있는 당의 수위였으며, 1945년 7차 당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직함이 도입되면서 수위 자리는 중앙위원회 주석에게 넘어갔지만, 중앙위원회 주석이 서기처 주석도 겸직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므로 여전히 당의 수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격하가 이루어지면서 9월, 8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주석과 서기처 주석 직함이 분리, 서기처 주석이 총서기로 개칭된다. 그 후 이 보직은 2인자로서 덩샤오핑이 맡지만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생하면서 서기처는 무력화되었고 1969년 9차 당대회에서 폐지되어버렸다.
그러다가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문혁의 광풍이 잦아든 1977년 8월, 11차 당대회에서 당을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중앙서기처가 부활, 후야오방이 총서기로 선출되면서 다시 총서기 직제가 도입되었으며, 1982년 9월, 12차 당대회에서 당 주석과 당 부주석 직함이 폐지되면서 다시 당의 수위로 오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록 총서기 후야오방, 자오쯔양이 숙청되는 부침은 있었으나 원로들이 모두 은퇴하고 덩샤오핑과 장쩌민 시대의 당의 제도화가 이루어지면서 총서기는 국가주석을 겸직하는 명실상부한 당의 일인자로 기능하고 있다.
덩샤오핑 시대의 개혁으로 종신제, 10년 임기제, 정년은퇴제가 도입되면서 총서기들은 10년씩만 하고 내려오는 관행이 정착되는 것으로 보였으나, 시진핑 시대에 2018년 헌법개정을 통해 국가주석과 부주석의 10년 임기 제한을 삭제하여 3연임을 시도할 것이라는 관측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고 실제로 20차 당대회에서 3연임에 성공하였다.
4. 역대 총서기[편집]
5. 같이보기[편집]
6. 참고문헌[편집]
- 김정계, 중국공산당 100년사 1921~2021(서울: 역락, 2021).
- 조영남, 「중국 마오쩌둥 시대의 엘리트 정치: ‘일인지배’의 사례」 『중소연구』 43(2) (2019.8).
- 本书编委会编, 中国共产党历次党章汇编(1921 ~ 2012) (北京: 中国方正出版社,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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