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외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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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외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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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중앙대만공작판공실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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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tablewidth=100%><tablebgcolor=#de2910> 중앙대만공작영도소조사무실
(1955년-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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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width=50%> 초대 ||<-3><width=50%> 제2대 ||
||<-3><rowbgcolor=#ffffff,#191919> 치옌밍 ||<-3> 뤄칭창 ||
||<-3> 제3대 ||<-3> 제4대 ||
||<-3><rowbgcolor=#ffffff,#191919> 양인동 ||<-3> 양스더 ||
||<-6> 국무원대만사무판공실
(1988년-1991년)
||
||<-3> 초대 ||<-3> 제2대 ||
||<-3><rowbgcolor=#ffffff,#191919> 딩관건 ||<-3> 왕자오궈 ||
||<-6> 중국공산당 중앙대만공작판공실
(1991년-)
||
||<-2><width=33%> 초대 ||<-2><width=33%> 제2대 ||<-2><width=33%> 제3대 ||
||<-2><rowbgcolor=#ffffff,#191919> 왕자오궈 ||<-2> 천윈린 ||<-2> 왕이 ||
||<-2> 제4대 ||<-2> 제5대 ||<-2> ||
||<-2><rowbgcolor=#ffffff,#191919> 장즈쥔 ||<-2> 류제이 ||<-2> ||
||<-6><:>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




중화인민공화국 제11·13대 외교부장
제2대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
왕이
王毅

파일:왕이_9680B7860A44FF1063D5CC9549E6B582.jpg}}}
이름
한문: 王毅 (병음: Wáng Yì)
한국 한자음: 왕의
국적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출생
1953년 10월 19일 (70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학력
베이징제2외국어학원[1] (일본어 / 학사)
난카이대학 (경제학 / 석사)
외교학원 (국제관계학 / 박사)
정당


종교
무종교 (국가 무신론)
현직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
주요 이력
주일본중국대사
대만 사무판공실 주임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위원
신체
키 171cm[2]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주요 경력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중화인민공화국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현재 중국 외교의 사령탑인 중국공산당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정치국원, 부총리급)과 외교부장을 겸직하고 있다.

시진핑이 권좌에 오른 직후인 2013년부터 외교부장을 맡았고, 시진핑 2기인 2018년부터 2023년까지는 외교담당 국무위원(부총리급)을 겸임했다. 외교부장이지만 중국 내 외교분야 1인자는 아니었는데 18년까지는 외교부장의 상관인 외교 담당 국무위원이었으며 이후에는 정치국원(부총리급)[3] 겸 당의 외사공작위 판공실 주임으로 이동한 양제츠가 있기 때문.

2022년 중국공산당 당대회에서 만 72세인 양제츠가 은퇴하게 되었고, 정치국 진입에 성공한 왕이는 중국 외교 분야의 1인자로 올라섰다. 69세로 통상적 은퇴연령을 이미 넘긴 왕이의 승격은 이례적이라는 평가[4]를 받았는데, 시진핑의 왕이에 대한 두터운 신임 덕분에 이런 파격적 승진이 가능했다. 물론 연령을 넘기고도 정치국원으로 남은 중앙군사위 부주석 장유샤와 마찬가지로 왕이 역시 평생 외교 업무에만 종사한 직업공무원이기 때문에, 시진핑의 입지를 침범하거나 위협할 가능성이 없다[5]는 배경도 작용했을 것이다.


2. 생애[편집]


1953년 10월 19일 베이징시에서 태어났다.[6] 196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문화대혁명 기간이라서 대학은 문을 닫았고, 대부분의 지식 청년[7]들이 그랬듯이 왕이 또한 건설단으로 반강제 입대하여 중국 헤이룽장성 지역 오지로 끌려가 8년간 삽질을 했다.

마오쩌둥 사후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베이징으로 돌아온 왕이는 베이징제2외국어학원에 입학해 일본어 전공으로 학부를 마쳤다. 이후 중국 외교부에 들어가 외교관 생활을 하던 중 저우언라이의 비서이자 중국 외교부 아시아국의 국장을 역임했던 천자둥의 딸과 결혼했다.

이후 1997년부터 1년간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방문학자 자격으로 연수를 받았다. 이후 부장조리(차관보)로 승진하고, 2001년에는 부부장(차관)으로 승진하였다. 당시 왕이는 최연소 부부장이었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주일본중국대사를 역임했고, 이후 국무원대만사무판공실 주임을 거쳐 2013년 3월 16일 중화인민공화국 11대 외교부장에 취임하였다.

2018년 3월 19일, 국무위원으로 지명되었다.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로는 전공인 일본어영어가 있다.

대체로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던 역대 중국 외교부장과는 달리 국제사회에 중국의 입장을 강하게 주장하는 강성 외교를 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8] 본인의 성향을 떠나서 시진핑의 등장을 계기로 달라진 2010년대 이래 중국의 패권주의 노선(일명 대국굴기, 중국몽)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22년 10월 22일 발표된 20차 당대회 신임 중앙위원 발표에 이름을 올렸고 양제츠가 퇴임했으므로 양제츠의 직위였던 중앙외사공작위원회[9] 비서장과 판공실 주임에 임명될 가능성이 거의 0순위가 되었다. 7상8하가 깨진 것은 덤. 그가 시진핑의 정책에 얼마나 충성해왔는지 그리고 그의 저돌적 외교 스타일이 시진핑에게 크게 인정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20기 1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예상대로 2023년 1월부로 양제츠에 이어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으로 영전하게 되었으며 외교부장 자리는 주미대사였던 친강(秦刚)이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2023년 7월 25일, 전인대 상무위원회 14기 4차 회의에서 친강 전 외교부장이 해임되고 왕이가 외교부장으로 재임명됐다. # 아무래도 중앙외사공작위원회 주임과 정치국 위원, 그리고 외교부장까지 겸임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기에 외교부장을 오랫동안 맡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3. 기타[편집]


  • 관상학적으로 매우 귀한 상으로 유명하다. 사실 관상을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비범한 인상을 주는 얼굴이다. # #

  • 2016년 6월 3일(현지 시간) 캐나다를 방문해 스테판 디옹 외교부장관과의 자리에서, 아이폴리틱스(iPolitics)라는 정치 전문 보도 사이트의 소속 리포터 어맨다 코널리(Amanda Connolly)가 중국의 인권 탄압에 대해 아느냐는 질문을 하자 분노하여 "당신의 질문은 중국에 대한 편견과 오만으로 가득 차 있다. 대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단 말인가? 납득할 수 없다."라고 기자회견 중에 대놓고 화를 내는 모습을 보여 논란이 되었다. 다음은 왕이 부장 답변 전문과 번역이다.

你的提问充满了对中国的偏见,和所谓不知道从什么地方来的傲慢。我是完全不能接受的。你了解中国吗?你去过中国吗?你知道中国从一个一穷二白的面貌把六亿以上的人摆脱了贫困吗?你知道中国现在是人均8000美元的一个世界第二大经济体吗?如果我们不能很好地保护人权的话,中国能取得这么大的发展吗?你知道中国已经把保护人权列入到我们的宪法当中了吗?我要告诉你,最了解中国人权状况的不是你,而是中国人自己。你没有发言权,而中国人有发言权。所以,请你不要再做这种不负责任的提问。中国欢迎一切善意的这种建议,但是我们拒绝这种无端的指责。

당신의 질문은 중국에 대한 편견과 어디에서 온 지 모를 오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로서는 전혀 납득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중국을 이해하십니까? 중국에 와 본 적은 있습니까? 중국이 가난한 후진국에서 출발해서 6억 명이 넘는 인구를 가난에서 해방시켜 준 것은 아십니까? 현재 중국이 1인당 국민소득이 8천 달러인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인 것은 알고 있습니까?[10] 중국이 인권을 합당하게 보호하지 못했다면 중국이 이렇게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11] 중국이 헌법에 인권 보호를 규정[12]그리고 당신에게 말하건대 중국의 인권 기록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이들은 중국인이지[13],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여기에 대해 말할 권리가 없습니다. 중국인만이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무책임한 질문들을 다시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우리 중국은 모든 건전한 제안을 환영합니다만, 근거 없는 비난은 거부합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중국의 인권 수준은 매우 낮고 인권 탄압 역시 심각한 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중국의 인권 기록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중국인이다", "당신은 말할 권리가 없다"는 발언으로 언론의 자유를 정면으로 공격하고 자국의 문제라 하여 외신에서 보도하고 질문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해 중국의 언론 상황이 후진적임을 스스로 보여줬다.
파일:external/pbs.twimg.com/Cj-0UGXUgAEmn0t.jpg

기자: 중국의 인권 침해에 대해 어떻게...

왕이: 저 여자를 체포하시오!

이에 대해 코널리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이런 그림을 올리며 왕이를 비판했고, 캐나다 내에서도 비난 여론이 들끓었으며 캐나다 수상 쥐스탱 트뤼도 또한 유감을 표명했다. 중국의 고압적이고 오만한 외교 태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라 해도 무방할 듯. iPolitics에서도 이 사건을 깠다.
중국인과 영미권 사람들의 키배로 댓글창에는 헬게이트가 펼쳐졌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중국인들도 영어로 어맨다 코널리를 비난하는 상황. 영상의 질문과 답변 원문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6072502339_0.jpg
이 자리에서 그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미국이 한반도 사드 배치에 나선 이유에 대해 "유방 앞에서 칼춤 춘 항장"이라고 비유하며 중국의 안보를 침해한다고 맹비난했다. 또한 한중 간 신뢰 기조를 해쳤다고 강하게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나 중국은 이미 2016년 2월부터 헤이룽장성에 탄도미사일 감시 용도로 초대형 레이더 '페이브 포스(Pave Paws)'를 배치해 한반도 전역을 감시해왔기에 중국이 사드 배치에 불만을 드러낼 자격이 없다는 비판도 거세다. 페이브 포스에 대한 설명
파일:d11877.png


  • 강경화 당시 외교부장관과의 회담에서 지각을 한 이력이 있다. #


  •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푸틴과 처음 만났을때 푸틴이 왕이를 보고 ‘내 친구’라고 부르며 반갑게 대하였다. # 푸틴이 시진핑을 보고 친구라고 지칭하기도 했지만 외교관에 친근한 대접을 한 적은 이례적이다.


4. 주요 경력[편집]


중화인민공화국 역대 외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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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국 국장.svg
10대

11대

12대
양제츠
(2007~2013)

왕이
(2013~2022)

친강
(2022~2023)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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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문명은 "Beijing International Studies University"로, 전문적으로 외교관을 양성하는 대학이다.[2] 파일:기시다윤병세왕이.jpg 173cm의 기시다 후미오, 185cm의 윤병세와 셋이서 찍은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기시다 후미오보다 작다.[3] 원래 외교부장과 외교 담당 국무위원은 서로 다른 인물이 맡으며 중국 외교분야의 투톱 역할을 했는데, 19차 당대회부터는 G2로 등극한 중국의 대외적 위상에 걸맞게 외교 분야에 힘을 주기 위해 투톱이라는 기본 골격을 유지하면서 변화를 주었다. 양제츠를 정치국원으로 승격시키고, 국무원에 비해 우위에 있는 당중앙의 외사공작위 판공실 주임으로 임명하면서 왕이가 국무위원을 겸직하게 된 것이다. 같은 부총리급이어도 당 서열이 우선이기 때문에 국무위원이지만 당에서는 중앙위원(정원 205명)인 왕이에 비해 정치국원(정원 25명)인 양제츠가 의전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더 우위에 있었다. 한국 개념으로는 양제츠를 국가안보실장, 왕이를 외교부 장관으로 보면 된다.[4] 물론 당대회가 가까워지는데도 왕이의 후임으로 유력시되던 후보군들이 승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좌천되거나 다른 부서로 전보되는 등 왕이의 입지가 더 확고해졌기 때문에 2022년에 들어와서는 왕이의 승진은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상태였다.[5] 외교관이나 군인은 자신의 전문분야를 벗어날 일이 없고, 성위서기나 시장 등의 지방 고위관료를 지내거나, 중앙판공청이나 중앙조직부 등에서 당 업무 전반을 관장할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다. 때문에 중앙군사위 부주석과 같은 정치국원급까지가 실질적인 승진 상한선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정치국 상무위원이나 최고지도자를 노리기는 어렵다. 물론 중국도 피해갈 수 없던 육방부화를 견제하는 한편 혁명 1세대의 퇴진 이후 당중앙에 대한 영향력 감소를 우려하던 군부에 대한 회유책으로서, 정치국 상무위원까지 승진한 해군상장 류화칭같은 인물도 있는 만큼 이런 법칙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6] 시진핑 주석과 같은 연도에 태어났다.[7] 당시 중국은 전반적으로 인민의 학력이 낮았기 때문에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지식 청년으로 불렸다.[8] 이러한 중국의 공격적인 대외 행보를 가리켜 "전랑 외교"(Wolf warrior diplomacy)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국에서 흥행 대성공을 거둔 액션영화 "전랑 2"(일명 '중국판 태양의 후예')에서 유래한 용어이다.[9] 주임을 총서기-주석, 부주임을 당조서기-총리가 맡는 중국 외교의 톱 기구이며 비서장과 판공실 주임은 실무 총책임자다.[10] 중국의 경제발전은 공산당의 공로라고 하기도 힘들다. 중국 공산당의 한 일이라고는 높게 쳐주어야 자신의 경제적 실책을 잘 치운 것 뿐이다. 과거 중국의 국민소득이 낮았던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중국의 국가경쟁력은 마오쩌둥 당시에도 그렇게 낮지 않았다. 대약진운동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원래 중국의 국가 경제규모는 대약진운동 직전에도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 이은 세계 5위였다. 또한 196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인의 1인당 소득은 한국인의 1인당 소득보다 높았다. 만약 정상적인 경제 정책을 실시했다면 중국의 국민소득은 한국보다는 높아야 정상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인의 1인당 국민소득금액은 중국인의 3배 정도 더 높다. 악조건 때문이라고 해도 변명이 안 되는 것이, 당시 중국은 한국에 비해 서구화 적응도가 그나마 잘 되어 있었다. 일본의 본격적인 제국주의 국가로의 성장 이전까지 한국은 서구의 것들을 대부분 청나라를 통해 접했다. 물론, 일본이 한반도에 세력을 떨칠 때도 중국과 일본 모두에게서 서구의 것을 들어왔고,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전까지 이어졌다. 당장 'Republic'에 해당하는 중국어 번역어인 대한민국의 '민국'부터가 중화민국의 국호의 영향을 받았으며, 천주교도 청나라 북경을 통해 들어왔다. 또 소현세자가 서양 문물을 처음 접한 곳도 중국 청나라였다. 그래서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은 중국에 비하면 서구화에 대한 지식이나 인식이 중국보다 한발 늦을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은 세계 5위의 경제규모를 갖고 있던 나라를 세계 13위로 떨어졌고, 중국 기준으로 일개 도시에 불과하던 홍콩이 중국 전체 규모의 25%를 따라잡히게 하고, 마오쩌둥이 죽고 1995년대의 한국이 중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자원, 인구, 국토, 국가인지도를 가졌음에도 전체 경제규모가 중국의 전체 경제규모의 76%까지 따라잡을 수 있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가 바로 중국 공산당이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중국에 비하면 후발주자였는데 현재는 국토 때문에 국가경제규모는 차이가 있어도 국민 개개인의 면과 적어도 국민소득에서는 G7의 일원인 이탈리아 수준까지 끌러올렸는데, 중국은 더 좋은 조건에서 시작했는데도 소득은 여전히 개발도상국 수준이다. 따라서 한국인의 1인당 국민소득과 중국인의 1인당 국민소득의 격차를 벌리고 상하위치를 완전히 역전시킨 것 역시 중국공산당이 만든 결과이다. 만약 국민당이 중국을 통치했다면 지금 중국은 물론이고 국민소득이 못해도 한국과 비슷하거나 더 높았을 것이다. 장제스 역시 독재체제를 유지하긴 했으나 장제스/평가에서 장제스의 업적 중 하나로 경제성장을 꼽고 있다. 대약진운동으로 농촌을 싸그리 파괴시킨 마오쩌둥과 다르게, 장제스는 안정적인 농업 부분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지도자다. 공업정책도 마오쩌둥에 비하면 훨씬 획기적이라는 평을 받았으니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없었다면, 중화민국은 분명히 중국 공산당이 만든 현재의 중국보다 미국이 진지하게 경쟁해야 할 막강한 경쟁국으로 자리가 확고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환율조작으로 미국에게 번번히 찍히는 현재의 중국과 달리, 장제스 시기의 중국은 1936년 런던 채권 시장에서는 중국 국채의 이자가 일본 국채의 이자보다 더 저렴한 조건으로 발행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중국이 일본보다 돈을 더 잘 갚을 수 있는 나라라고 평가받았다는 뜻이다. 이런 개혁들을 바탕으로 중화민국은 가장 풍족한 재정을 보유했다. 그러므로 국공내전 없이 이러한 추세가 지속되었다면 중국은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 천안문 학살 같은 착오 없이 비교적 순탄히 발전했을 것이다. 한국이나 장제스에 대한 평가만 봐도 중화인민공화국이 경제부분에서 특출나게 잘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제발전은 나름 자립경제를 목표로 삼고 경제나 기술을 질적으로 개선시키려는 시도를 한 장제스나 한국과 달리, 기술 무단도용이나 돈으로 타국 기업을 인수하는 식으로 발전해왔다. 한국, 미국, 중국을 레슬러의 체급 상태로 비교하자면, 한국은 덩치가 상대적으로 좀 작지만 몸이 적당히 잘 만들어져서 선제공격을 날리는 기술은 다소 부족하지만, 그래도 자기 몸을 강력한 힘에도 충분히 방어할 수준은 되고, 미국은 거대한 덩치에 근육까지 고루 발달되어있는 상태이지만, 중국은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는 있지만 근육보다 지방이 훨씬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이 진행해왔던 경제정책의 방향은 중국이라는 거인을 만들기 위해 지방흡입만 집중적으로 시킨 셈이다. 아무리 중국의 경제발전 과정을 좋게 평가해줘도, "중국의 경제를 후퇴시켰던 것도 중국 공산당이였고, 후퇴시켰던 경제를 2위로 만든 것 역시 중국 공산당이다.'', 간단히 말해 "본인들이 망친 경제를 본인들이 복구시켰다." 정도의 평가가 타당할 지경이다.[11] 왕이가 이 발언을 하고 5년 뒤, 중국은 북한에서까지 석탄을 수입해야 할 정도로 자국 경제가 취약함을 만천하에 드러냈다.[12] 왕이의 논리대로라면, 북한 헌법 제8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회제도는 근로인민대중이 모든것의 주인으로 되고있으며 사회의 모든것이 근로인민대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사람중심의 사회제도이다. 국가는 착취와 압박에서 해방되여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된 로동자, 농민, 군인, 근로인테리를 비롯한 근로인민의 리익을 옹호하며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한다.'라고 비슷한 조항이 명시되어 있으니 북한의 인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발언해도 문제없다. 사실 중국에서 최상의 법 규정은 중국 헌법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규약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공산당이 국가의 우위에 있기 때문. 그래서 공산국가 헌법에서 헌법조항 운운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13] 정작 같은 중국인인 장제스는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 망한다면 나라없는 국민으로는 살 수 있지만 공산주의에 의해 망한다면 노예로조차 살 수 없다는 명언을 남긴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