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하(1912)

덤프버전 :



[ 펼치기 · 접기 ]
전신 학교 학장
경성인문중등학원
서울여자전문학관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제1대
주영하
수도여자사범대학
제1대
주영하
제2대
최옥자
제3대
주영하
제4대
최옥자
제5대
주영하
세종대학
제1대
김준섭
제2대
정병선
제3대
강영복
제4대
정병선
제5대
원흥균
세종대학교 총장
제1대
원흥균
제2대
박홍구
제3-6대
이중화
제7-8대
김철수
제9대
양승규
제10대
박우희
제11-12대
신구
제13대
배덕효



세종대학교 설립자
주영하
朱永夏 | CHOO YOUNG HA
파일:세종대주영하1.jpg
출생
1912년 4월 10일
함경남도 단천군
사망
2011년 4월 8일 (향년 98세)
아호
대양(大洋)
직업
교육자(교수), 문화예술인(문학인)
학력
단천농업학교 (졸업)
경신학교[1] (졸업)
연희전문학교[2] (문과 / 졸업)
연세대학교 (명예박사)
아주사 퍼시픽 대학교 (명예박사)
중국문화대학 (명예박사)
약력
경성인문중등학원 설립
서울여자전문학관 설립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초대학장
수도여자사범대학 제1·3·5대 학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및 동백장 수훈
독일문화훈장 수훈
배우자
최옥자
자녀
장남 주명건(朱明建)[3], 차남 주장건[4],
장녀 주경란[5], 차녀 주경은[6]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세종대학교를 설립한 대한민국의 교육자.


2. 생애[편집]


1912년 4월 10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출생하였다. 7세 때 부친을 여의고, 이웃에 사는 김병수 장로를 통해 개신교 신앙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7세 때 3.1 운동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독립'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고, 조국애를 느꼈다. 이후 9년 뒤인 1928년 3.1 운동의 소회를 담아 시 실제(失題)버들피리를 썼으며, 이는 동년 4월 조선일보에 소개되었다. 함흥 영생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7명의 학우들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퇴학되어 서울 경신학교에 편입학했다. 경신학교 시절 동아일보가 주최한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하여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이때 주영하는 '한글'과 '교육' 두 가지를 위해 보국(輔國)할 것을 결심하였다.[7]

1935년 4월 연희전문학교 문과(文科)에 합격하였다.[8] 연희전문학교 시절 원한경 교장과 최현배, 정인보, 백낙준 등 여러 스승의 영향을 받았으며, 평생 그들을 존경하고 흠모했다. 졸업을 앞두고 진로 문제로 고민하던 주영하는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조용하고 낮게 살면서 높은 이상을 바라보는 인생의 길을 걸어라'는 주의 음성을 듣고, 교육계에 진출하는 꿈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되었다.[9] 1939년 2월 후일 한양대학교 초대 총장이 되는 과 동기 김연준과 함께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10][11]

1940년 5월 20일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교육기관인 경성인문중등학원을 설립하였다. 1944년 4월 8일 최옥자 박사와 결혼하였으며, 1947년 5월 3일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는 국민의 절반이 되는 여성교육이 절실하다고 여겨 부부가 공동으로 출자해 학교법인 서울여자학원[12]을 공동 창립하였다. 1948년 8월 26일, 경성인문중등학원은 서울여자전문학관을 거쳐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로 승격되었다.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시기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1951년 1.4 후퇴 도중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의 충무로 교사(校舍)가 폭격으로 소실되었기에, 주영하는 교사 재건을 위해 힘썼다. 주영하는 피난길에 하마타면 납북될 뻔하기도 했으며, 부산에서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생사의 위기를 넘나들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을 기도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가르치게 했으며, '쉽고 넓은 길보다 멀고 좁은 길(마 7:13)'로 들어서는 것이 교육의 핵심임을 강조했다. 교양 과정에서 인문학에 비중을 두었으며, 학문과 전문 기술도 중요하지만 인격을 높이는 데 힘써 사회인으로서 훌륭한 봉사자로서 빛과 소금처럼 세상을 위하는 인물이 되기를 갈망했다.[13]

1954년 2월 9일,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는 수도여자사범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주영하는 양성평등주의자였기에,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고 직업을 통해 사회에 참여함으로써 남녀평등의 길로 다가설 수 있다고 믿었으며 우리 사회가 그렇게 변하기를 열망했다. 그 열망이 대한민국 최초의 독립된 사범대학인 수도여자사범대학으로 결실을 맺었고, 이후 수도여자사범대학은 중등교원 양성의 산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14] 1961년 11월 18일, 수도여자사범대학은 문교부로부터 4년제 사범대학으로 승격 개편 인가를 받았다.

1978년 10월 7일, 수도여자사범대학은 '세종대학'으로 교명을 바꾸고 4년제 여자 사범대학에서 4년제 남녀공학 일반대학으로 전환하였다. 세종대왕의 이름에서 따온 '세종대학'이란 명칭은 훈민정신을 계승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그는 평생 세종대왕을 흠모했으며, 교육 사업과 더불어 한글, 국어를 위해서도 헌신했다. 한글문화협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어순화추진회 등에서 그는 설립 멤버나 임원으로서 헌신했다.[15]

주영하는 교육, 한글·국어 외 호텔, 문화재, 개신교 등 여러 분야에서도 활약하였다. 학교법인을 위한 재단 수익 사업으로 강원여객자동차주식회사, 춘천세종호텔과 서울세종호텔을 설립하였다. 관광 사업의 기반이 열악했음은 물론 그 개념과 인식조차 흐릿했던 1960년대, 주영하·최옥자 부부는 우리나라 관광 사업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춘천과 서울에 세종호텔을 지었으며, "우리는 세계인을 형제애로 대접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호텔을 경영하였다.[16] 주영하는 한국 문화재에도 각별한 애정과 관심이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수집한 민속품과 서화, 도자기, 목공예, 의상, 장신구 등을 수집하였으며, 1973년 수도여자사범대학 교내에 박물관을 세웠다.[17] 또한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이사장, 도덕재무장운동(MRA) 이사장을 지냈다.[18]

1987년 8월 8일, 세종대학은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었으며 이에 따라 세종대학교로 개명되었다. 주영하는 학교법인 대양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주영하가 후임자로 생각했던 장남 주명건(현 대양학원 명예이사장)이 세종대학교 교수로 부임하고 주요 보직을 거치면서,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세종대학교 학원자주화투쟁이 이어졌다. 이후 2000년대 초, 주영하·최옥자 부부는 대양학원의 경영권을 두고 아들이자 재단 이사장이었던 주명건과 상호비방을 하였으며, 결국 주영하는 주명건을 동부지검에 비리 혐의로 직접 고발하였다. 이로 인해 세종대학교 총학생회에 의해 '교육자로서 모범을 보여야 할 이들이 오히려 천륜을 저버렸다'고 비판받았다.[19] 2011년 4월 8일 사망하였다. 분향소는 세종대학교 애지헌 교회였으며,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다.

3. 여담[편집]


  • 단천 출신으로 건국대학교 설립자 유석창 박사와 고향이 같다. 심지어 같은 경신학교 출신이다.
  • 한양대학교 설립자인 김연준 박사와 연희전문학교 문과(文科) 동창이며, 서로 뜻이 맞는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주영하 박사가 대학교를 세운다고 하자, 김연준 박사는 자기도 대학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연준 박사는 1939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로부터 거금을 받아 1939년 7월 한양대학교의 전신인 동아공과학원을 개원하였다. 주영하 박사도 뒤이어 1940년 5월 세종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인문중등학원을 개원하였다.
  • 배우자이자 서울여자학원 공동 설립자인 최옥자 박사와 같은 함경도 출신 실향민이며, 부부 모두 향년 98세, 99세로 장수하였다.
  • 장엄한 생을 살고 싶어 산더미 같은 파도를 보고 푸른 바다를 의미하는 청양(靑洋)이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20] 이후 아호는 청양에서 아주 넓고 큰 바다를 의미하는 대양(大洋)으로 개칭되었다. 아호 대양은 학교법인명(대양학원) 및 세종대학교의 교양대학명(대양휴머니티칼리지), 건물명(대양홀, 대양AI센터), 장학금 이름(대양인재 장학금) 등 세종대학교와 관련된 여러 곳에서 활용되고 있다.
  • 1928년 4월 조선일보에 소개된 주영하 박사의 (실제(失題), 버들피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3.1 운동을 목격했던 소회가 담긴 시 실제(失題)에서는 한반도를 '이 江山(강산)', 일제강점기를 '그 눈', 광복을 '꼿(꽃)'으로 비유하여 일제를 간접적으로 비판하였다.

실제(失題)

먼 산에 싸힌 눈은
봄오니 살아자나
이 江山(강산)에 그 눈이야
봄 왓다 꺼질소냐

들뫼의 草木(초목)은
봄 오니 꼿이 피나
이곳에
봄 온들 꼿필소냐

端川農校(단천농교) 朱永夏(주영하)
(조선일보 1928.04.13)[21]

버들피리

느러진 버들 밋해서
빌-빌- 부는 버들피리 소리
고요한 이 마을에
煙氣(연기)와 가티 퍼진다
아아 지나간 녯날이여!
홀러간 녯날이여!
홀리어 보낸 저 피리를
내 입에 가저다우
홀러간 그 曲調(곡조)를
가저다다우
홀러간 녯날이여!
그리웁다 저 曲調(곡조)
마듸마다 녯날의 追憶(추억)일세

端川(단천) 朱永夏(주영하)
(조선일보 1928.04.26)[22]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7 10:35:53에 나무위키 주영하(1912)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경신중·고등학교.[2]연세대학교.[3] 1947.5.3. 출생, 세종대학교 명예이사장 역임[4] 전 세종호텔 대표이사[5] 세종대학교 명예교수[6] 전 세종초등학교 교장[7]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8] 조선일보 - 各學校合格者(각학교합격자)/延禧專門學校(연희전문학교), 동아일보 - 今年度各校(금년도각교) 合格者(합격자) 延禧專門學校(연희전문학교)[9]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10] 이후 연세대, 아주사 퍼시픽 대학교, 중국문화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11] 조선일보 - 새봄·새卒業生(졸업생) 알범特輯(특집)/延禧專門學校(연희전문학교) 文科(문과)[12] 지금의 세종대학교 학교법인인 대양학원의 전신[13]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14]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15]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16] 세종호텔은 당시 수도여자사범대학 관광경영학과와 호텔경영학과 학생들의 실습 현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17]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18] 조선일보 - 해방 후 여성교육에 앞장· 세종대 세워…주영하 박사 별세[19] 오마이뉴스 - 세종대 총학생회 총장실 점거 농성[20] 매일경제 - 나의書齋(서재) (35) 靑洋朱永夏(청양주영하)[21] 조선일보 - 실제(失題)[22] 조선일보 - 버들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