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여진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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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여진 관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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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조선 전기
2.2. 조선 후기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조선여진의 관계.


2. 상세[편집]



2.1. 조선 전기[편집]


금나라가 멸망하고 여진족의 위세가 비교적 약화됐던 고려 말에는 최영과 나란히 여말 최고의 명장으로 명성을 떨친 이성계에게 꽉 잡혀 있었다. 이후 조선을 위협하는 최대 세력인 건주 야인 이만주[1]동맹가첩목아 등이 죄다 이성계 부하 출신이다.

동북면 1도(道)는 원래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킨 땅으로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 되어, 야인(野人)의 추장이 먼 데서 오고, 이란 투먼(移闌豆漫)[2]

도 모두 와서 태조를 섬기었으되,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잠저(潛邸)에 들어와서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었고, 동정(東征) · 서벌(西伐)할 때에도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진(女眞)은 오도리 투먼(斡朶里豆漫)[3]갸온멍거터물(夾溫猛哥帖木兒) · 할아[4] 투먼(火兒阿豆漫)인 고론 어허츄(古論阿哈出) · 타온[5] 투먼(托溫豆漫)인 가망 불어(高卜兒閼) · 하란 도다루가치(哈闌都達魯花赤)인[6] 히탄 하랑캐(奚灘訶郞哈) · 삼산 밍간(參散猛安)인[7] 고론두란터물(古論豆闌帖木兒) · 이란 투먼 밍간(移闌豆漫猛安)인 푀모 월쥬(甫亦莫兀兒住) · 해연 밍간(海洋猛安)인[8] 골야 쾻터물(括兒牙火失帖木兒) · 어두워 밍간(阿都哥猛安)인 아툰 원져(奧屯完者) · 샨춘 밍간(實眼春猛安)인 히탄 타사(奚灘塔斯) · 갸쥬 밍간(甲州猛安) 운 강고(雲剛括) · 홍긍 밍간(洪肯猛安)인[9] 골야 오난(括兒牙兀難) · 해툰 밍간(海通猛安)인 쥬후 퀴툰(朱胡貴洞) · 툴우 밍간(禿魯兀猛安)인[10] 갸온 부허(夾溫不花) · 위허 밍간(幹合猛安)인 히탄 서러(奚灘薛列) · 울후리 밍간(兀兒忽里猛安)인 갸온치후리(夾溫赤兀里) · 아샤 밍간(阿沙猛安)인 쥬후 인다호(朱胡引答忽) · 닌추커시 밍간(紉出闊失猛安)인 쥬후 원져(朱胡完者), 오롱소 밍간(吾籠所猛安)인 넌투 구루(暖禿古魯) · 히탄 보야(奚灘孛牙), 투먼 밍간(土門猛安)인 고론 보리(古論孛里) · 아모라(阿木刺)의 당고 히탄 구유누(唐括奚灘古玉奴)[11]이며, 우량캐(兀郞哈)는 투먼(土門)의 골야 발소(括兒牙八兒速)이며, 혐진 우디거(嫌眞兀狄哈)은 구쥬(古州)[12]의 골야 키무나(括兒牙乞木那) · 다비나(答比那) · 컬덕거(可兒答哥)이며, 남돌 우디거(南突兀狄哈)인 슈핑강(速平江) · 남돌 아라카 바얀(南突阿刺哈伯顔)이며, 콜칸 올적합(闊兒看兀狄哈)은 얀춘(眼春) · 골야 투칭개(括兒牙禿成改) 등이 이것이다.

-

태조실록 총서 (여진 추장들의 각 이름의 한글 표기는 용비어천가를 따름.)


이지란같은 경우는 아예 이성계를 따라 조선으로 넘어와서 후손을 남겼다. 오랫동안 역사학자들 일부에서는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성계를 비롯한 선조들은 우리는 고려인이라는 정체성과 핏줄이 뚜렷했으며, 결정적으로 여진족이 이성계 일족을 동포가 아닌 앙숙으로 취급했다. 이성계의 증조부인 이행리(추존 익조)가 이것 때문에 여진족들에게 죽을 뻔했다. 항목 참조. 때문에 이성계 여진족설은 곧 틀린 주장이다.

저기 나온 이름들 중에 아합출(어허츄)과 갸온멍거터물(아이신기오로 먼터무)이 건주위, 청나라 황실의 조상이 된다. 아합출(어허추)은 이만주의 할아버지고, 갸온멍거터물(동맹가첩목아: 아이신기오로 먼터무)는 누르하치의 6대조이며 이들의 후손이 15세기 말까지 건주3위를 지배했다. 여진족 주요 3부족 중 하나인 건주 야인이 이성계에게 복속된 것은 거의 확실하고 야인 여진은 확실하진 않지만 목단강과 동해 연안지역의 핵심 지역이 이성계에게 복종했다.

이렇게 이성계의 영향력이 매우 높았지만 조선의 건국 이후 명나라가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이성계가 죽기 전부터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명나라가 초기에 우량카이나, 건주야인 등에게 조공을 요구하자 이에 대한 대책회의가 조선에서 열렸다. 왜냐면 이때 여진족은 아예 조선 속국 취급이었기 때문이다.#(실록).

하지만 이성계 이후 여진족에 대한 조선 왕실의 영향력은 사실상 사라져 조선은 명나라 와의 충돌을 거부하고 여진족 통제권을 사실상 포기하여 명나라에 넘긴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상실된 것은 아니다. 일부 조선에 우호적인 여진족들은 선조 때까지 조선에 복종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조선에서는 번호(蕃戶)라 불렀다. 선조 때 일어난 니탕개의 난에도 조선을 공격했던 우을지의 선동에 호응한 니탕개를 비롯한 여진족들의 추장들의 경우 처음부터 조선에 적대적인 인사들이 아니라 오히려 벼슬까지 받은 자들이었다.

정말로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끝장난 것은 후금-청나라의 두 번에 이은 공격 이후 청나라가 야인여진과의 관계를 끊을 것을 협상 조건으로 요구하면서였다. 야인여진은 청나라를 세운 건주여진과 적대관계였는데, 어찌 보면 병자호란의 간접적인 피해자인 셈이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야인, 오랑캐, 되놈 등으로 불리며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충돌했다. 지금 한국 북쪽 국경선인 압록강, 두만강세종 대에 이들과의 투쟁(4군 6진)에서 얻어냈다. 세력이 약해지면 조공을 바쳐왔으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백그라운드로 여진족 출신이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상술된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이다. 명과 조선이 몽골 제국 이후 모든 오랑캐에 대한 경계가 노이로제급이 된 이유도 있다. 또한 끊임없이 싸우는 와중에도 여진족의 많은 수는 조선으로 계속 귀화했다.

조선 전기에는 여진족의 세력을 방치했다가 금나라가 세워져 안보에 위협을 받았던 고려시대의 교훈을 삼아서 빈번하게 명나라 및 조선에 침입해오는 여진족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지속적으로 예방전쟁을 펼쳤다.[13] 자세한 내용들은 여진정벌조선의 여진 정벌(建州女眞征伐)을 참조.

태종 때부터 시작된 조선의 여진정벌은 특히 세종 이후 부터 본격적으로 토벌전을 펼쳐 세조 때에는 남이 장군의 활약으로 그야말로 건주여진을 중심으로 여진은 가루가 되도록 갈린다. 이후 여진에는 청나라 만주족 통일 전까지 100년간 강력한 추장이 나타나지 못할 정도. 임진왜란 때 전사한 신립 또한 니탕개 등 여진족을 아작낸 명장이다. 아마 조선 전기 때 당시 조선인들은 나중에 이 여진족이 반란으로 작살난 명나라를 접수하는 청나라까지 세울 정도로 성장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14] 그만큼 당시 상황이 임진왜란, 이괄의 난, 이자성의 난, 흉년 등 정말 천운스럽게 후금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던 것이다.

한반도 북동부에 살던 재가승이란 민족종교집단이 여진족의 후예라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이에 관해서는 논란이 다소 있으며, 설령 여진족의 피가 약간 섞였을지라도 재가승은 기본적으로 토종 한국인이며 단순한 지역적 풍습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있다. 다만 재가승의 지역이 지역인 만큼 혈통적으로는 여진의 피가 꽤 섞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15]

2.2. 조선 후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청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관련 문서[편집]



[1] 이만주 할아버지 아하추는 실록에는 아합출(阿哈出) 혹은 어허추(於虛出)로, 중국기록엔 아합출로 나오고 해당 목록의 두 번째이다.[2] 이란(일란)은 '3', 투먼은 ‘1만(萬)’을 의미하는 만주어로 이란두만은 곧 삼만호(三萬戶)를 이른다.[3] 오도리(吾都里)라고도 불렸던,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군 인근 두만강 유역. 이하 '투먼(두만)'이라는 건 만호(萬戶) 즉 만호장이다.[4] 만주어로 후르하(虎爾哈)라고 부르며 지금의 무단강(목단강) 유역이다.[5] 알타리와 후르하, 타온 셋을 합쳐서 이란 투먼(삼만호)라고 부른다.[6] 합란은 함주(咸州)로 지금의 함경북도 함주군이다. [7] 삼산은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지역으로 고려에서는 이곳에 영주(英州)을 설치하였고, 공양왕 2년(1390년) 길주에 합쳐졌다.[8] 해양(해연)은 지금의 함경남도 길주군이다. 밍간이란 천호장(千戶長)을 뜻한다.[9] 홍긍은 고려의 웅주(雄州)로 훗날 길주에 합병되었다. [10] 독로올(툴우)은 단주(端州)로 지금의 함경남도 단천군이다. [11] 당고(唐括, 당괄 씨)는 과거 금나라의 황후 가문이었으며, 금 태조 아골타의 황후였던 성목황후 역시 당고 씨였다. [12] 지금의 영고탑 일대.[13] 아무리 그래도 여진족의 잠재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서, 세종은 이들과 왜구를 만만히 볼 것이 아니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14] 조선 후기 조선인들이 자신들이 상국으로 섬기던 청나라의 지배민족인 만주족이 훗날의 신해혁명을 기점으로 나라 없는 민족으로 몰락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구도인 셈이다.[15] 다만 이북 지역만 혈통적으로 여진과 가깝다고 착각해서는 안되는게 조선조 500년간 귀부한 여진인들 가운데 경기, 삼남 등으로의 이주도 꾸준히 이루어졌다. 이들은 백정이라는 계급으로 자리잡아 조선 사회에서 멸시받기는 했으나(물론 모든 백정이 여진이나 북방민족 출신은 아니다.) 단순히 4군 6진 지역 정도가 아니라 조선 8도 전반에 분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4군 6진 지역과 관련 없는 현재 남한인들에게도 여진족의 핏줄이 남아 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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