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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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0년 5월 22일
조선 황해도 황주목 청수면[1]
(現 황해북도 황주군 청수면)
사망
1930년(향년 51세)
소련 러시아 SFSR 연해주 수청(水淸)
(現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프리모리예 지방 파르티잔스크시)

해산(海山)
종교
기독교
학력
한성사범학교
서훈
건국훈장 애국장, 건국포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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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1차 이사회 기념사진.
앞줄 두 번째 인물이 정재관.


1. 개요
2. 생애
2.1. 미주 시절
2.2. 연해주 시절
3. 여담



1. 개요[편집]


한국독립운동가. 미국연해주에서 활동했다.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 생애[편집]


1880년(고종 17) 황해도 황주목에서 출생했다. 한성사범학교에 재학하다가 1902년 안창호를 따라 미국으로 향했다.

2.1. 미주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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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줄 왼쪽부터 송석준, 이강, 안창호, 임준기, 정재관

1902년 안창호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1904년 안창호 등과 함께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했고, 1905년 11월 22일 기관지로 공립신보를 창간하여 발행인이 되어 편집 겸 발행을 담당했었다. 1907년 4월 서울에서 신민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미주지역에서 활동하였다.1908년 3월일본측이 추천한 대한제국 정부의 미국인 외교고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가 "일본의 한국 지배는 불가피하며 많은 한국인이 일본의 지배를 환영하고 문화도 발전하고 있다.” 등의 일본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는 발언이 신문에 보도되자 이내, 재미 한국인 커뮤니티에도 전해졌다. 감리교 전도사 양주삼[2]이 전해준 기사 내용은 이학현(李鶴鉉)[3]에 의해 곧 한국어로 번역되어 동포 사회를 격분시켰다. 이들은 한국 정부를 위해 일했다는 미국인 외교관이 대놓고 일본의 침략을 옹호했다는 사실에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다.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에서는 논의 끝에 대표단을 꾸려, 스티븐스를 직접 찾아가 망언을 취소하라고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1908년 3월 22일, 정재관, 최정익(崔正益), 문양목(文讓穆), 이학현은 스티븐스가 묵고 있던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Fairmont) 호텔을 찾았다.[4] 영어가 유창했던 이학현과 스티븐스 사이에서 대화가 오갔다. 이학현은 동년 1월에 있었던 13도 창의군의 의거에 대한 스티븐스의 의견을 물으며, 기사를 정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일본이 대한제국과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살도록 돕겠다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왜 일본한테 화살을 돌리느냐는 주장을 고수했다. 계속 반복되는 스티븐스의 무례한 태도와 망언에 4인은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정재관이 먼저 스티븐스의 안면에 주먹을 날렸고, 주먹에 맞은 스티븐스는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며 쓰러졌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에 앉아 있던 일행 모두가 일어서 등나무 의자를 들어 스티븐스에게 휘둘렀다. 의자에 턱을 맞은 스티븐스는 이후 계속 4인의 공격을 피하다 이마가 찢어지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삐었다. 폭력사건 신고를 받은 경찰관 두 명이 사건현장에 출동하였으나, 스티븐스는 이들의 처벌을 원치 않아 호텔을 떠났다.. 하지만 다음날에 더 안 좋은 일이 있었으니 이후 정재관은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재판을 지원하는 활동을 벌이고, 재미 한인 단체의 통합에 나섰다. 1909년 2월에 신민회의 합법적 외곽 단체로서 공립협회를 확대개편해 재미주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고 총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기관지로 종래의 『공립신문』을 『신한민보(新韓民報)』로 바꾸었다.

2.2. 연해주 시절[편집]


1909년 4월에 미국을 순방하고 있던 이상설 일행과 함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으로 가서 신민회 블라디보스토크지회의 책임자를 맡이 이강 등과 함께 재로대한인국민회(在露大韓人國民會)를 조직하여 각 지회를 설치하면서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동시에 블라디보스톡의 『대동공보(大東共報)』의 주필이 되어 언론운동을 전개하고, 『신한민보』의 블라디보스토크 통신원도 겸하였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이 대동공보사에서 수립될 때, 이에 참석하여 안중근하얼빈 의거를 지원하였다. 1911년 12월 19일 이상설, 최재형, 이종호, 김학만 등과 함께 교민단체로서 권업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전에 만주와 연해주에 독립운동단체가 중심이 되어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할 때에는 39명과 함께 서명하였다. 3.1운동 직후 연해주에서 독립부인회(獨立婦人會)가 조직되도록 적극 지원하였다.신민단의 부위원으로 1919년 9월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던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투척한 강우규의 의혈 투쟁을 계획하고 조직하였다. 1920년 봄 수청(파르티잔스크) 다우지미촌에서 장기영, 김경천, 박춘성(독립운동가), 황석태 등과 홍의적 침입에 대비하여 무기를 구입하고 수비대를 모집하여, 김규면, 김경천 등과 창해소년단을 결성하고 참모장을 맡았다. 1920년대 후반 김준, 안영진과 함께 수청의 소자하 지방 한인총회를 조직하여 한인들의 식산을 도모하고 군사와 교육을 후원하였다.

이후 파르티잔스크(Партизанск) 일대의 한인 독립군 부대의 조직, 지도, 사업에 분투하다가 1930년 파르티잔스크에서 병사하였다.


3. 여담[편집]


제국익문사의 해외통신원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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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양이라는 설도 있다.[2] 이 사람은 훗날 친일파로 전향한다. 한국전쟁 이후로 행적이 묘연한데 아마 납북된 것으로 보인다.[3] 영어가 유창했다고 한다.[4] 이 호텔은 2023년 현재까지 그대로 영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