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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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투 과정
2.1. 남송군의 악재
2.2. 가사도의 화의 요청
2.3. 원나라군의 기만 전술
2.4. 무너지는 남송군
3. 이후



1. 개요[편집]


원 지원 12년(남송 덕우 원년, 1275년) 2월 쿠빌라이의 남송 격멸전에서 원군이 정가주(지금의 안휘 동릉 북)에서 송의 수군과 육군을 격파하고 송군의 주력을 와해시킨 전투이다.


2. 전투 과정[편집]



2.1. 남송군의 악재[편집]


원군이 악주(지금의 우한 시 우창 구)를 공략하여 함락한 뒤 형호행성 좌승상 바얀이 이끄는 보군 10여만 명은 송 항장 여문환을 선봉으로 장강을 통해 동진하였는데, 장강을 지키던 무장들은 대부분 여씨 가문과 친분이 있어서 원군이 도착하자마자 모두 투항했다. 지원 12년 정월 초, 원군이 황주(黃州, 지금의 호북 황강)에 이르러, 강을 따라 부사인 지황주(知黃州) 진혁(陳革)이 항복하였다.11일에는 치저우 수장이 항복하였다. 13일에는 강주에서 여사기, 예창문이 항복한 데 이어 16일 지안경부 범문호[1]가 원에 투항하고 말았다. 이처럼 사태가 심각해지자 태학생들은 가사도가 싸움에 나서기를 청하였고, 남송의 사도청은 승상 가사도로 하여금 노군 13만, 전함 2500척을 거느리고 원군과 맞서 싸우게 하였다.[2]


2.2. 가사도의 화의 요청[편집]


2월 무호(지금의 안휘)에 진격하여 적군과 맞서기는커녕 원나라 전쟁 포로들을 먼저 돌려보내는 등 바얀에게 화의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3] 보군 지휘사 손호신에게 정병 7만 명을 주둔시켰고, 자신은 하귀[4]와 함께 전함 2500척을 강에 가로놓아 노항(魯港)에 주둔했다.[6]


2.3. 원나라군의 기만 전술[편집]


초여섯날 바얀은 군사를 이끌고 지주에 이르러 그 곳의 모든 성이 투항하였다. 16일에 바얀이 군대를 이끌고 정가주까지 나아갔는데 송군과 몇 리 떨어져 있었다. 송군의 진용을 보고 바얀이 중과부적이라 느껴 계책을 세웠다.남송 측이 방어선에 들어앉아 일체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안 바얀은 남송의 방어선을 무너뜨리려면 남송군이 방심하도록 하는 게 효과적이겠다는 판단을 하고, 휘하 병사들에게 수십 척의 대형 뗏못을 만들도록 명령을 내렸다. 뗏목이 완성되자 바얀은 뗏목을 모두 불살라 버렸는데, 이는 기만 전술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얀은 남송군들의 방심을 고의적으로 유도했고, 이에 남송군은 경계 태세가 해이해져서 바얀은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먼저, 장강 남북 양쪽에 기병대를 배치해서 기병대 특유의 빠른 속도를 이용해 남송군에게 충격을 주는 동시에 장강 양안의 주요 거점을 장악해서 준비해 둔 화포들을 이 곳에 배치한 후 기병대의 공격을 받고도 잔존한 남송군을 완전히 섬멸하려고 했다.


2.4. 무너지는 남송군[편집]


21일 바얀이 이끄는 기병이 강 양안을 따라 진격해와 송군으로 돌진했고, 신무기로 송군을 혼란시킨 데 이어 원군이 송군이 패했다고 외치는 등 남송군을 공황에 빠트렸다. 이에 송군의 강재가 군을 수습하여 원군과 접전하지만, 손호신이 결국 애첩과 함께 도망가서 송군은 보수가 도망한다고 외치는 등 혼란에 빠져 제군들은 궤멸되었다. 아술[7]은 수천 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바람을 타고 급진하여 송군의 진영에 뛰어들어 송의 전선을 횡격하였다. 하귀는 악주의 패배로 인한 공포 때문에 싸우지 않고 도망쳤고[8], 가사도는 혼란에 빠진 군대를 수습하려고 애썼지만,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결국 가사도는 손호신과 함께 급히 금을 울려 군사를 거두어 배를 타고 양주(지금의 강소)로 도망쳤다. 송군은 지휘를 잃었고, 패군은 강을 가로막고 내려왔다. 아술이 이를 추격했고, 백안은 좌우로 협공해 150여 리를 추격하여 송군의 전함이 많이 침몰하였고, 사상자가 많았다. 원군은 대량의 군자금 기구를 획득하여 승승장구하였다.


3. 이후[편집]


가사도는 양주로 도주한 뒤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려 애썼으나 오히려 병사들에게 욕설과 비아냥을 듣고, 결국 조정에서 탄핵되어 유배되던 와중 정호신에게 죽고 말았다. 손호신장세걸의 군대와 합류하여 원군과 싸우던 와중 죽었으며, 강재는 양주 지역으로 도주하여 이정지와 함께 아술이 이끄는 원나라의 군대와 맞서나, 부장의 배신으로 인해 이정지와 함께 처형당하였고, 회서로 도주한 하귀는 은연중에 원에 투항하기로 마음먹은 뒤, 남송이 항복한 해인 1276년 회서를 바치고 원에 투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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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양 공방전에서는 매일마다 처첩을 거느리고 술만 마시는 등 전투에 소극적이었고, 이후 제2차 여원연합군의 일본 원정에서 강남군을 이끈 그 범문호 맞다. 별명은 상패장군.[2] 유정이 출전한다는 말을 듣고 출전을 꺼렸으나, 유정 분사 이후 출전에 나서게 된다.[3] 바얀은 이를 남송군의 시간끌기 작전이라는 것을 눈치챘다.[4] 양라보를 지원했으나 패하고, 악주에서도 원을 막으려 했으나 패했다.[5] 대략적인 내용은 송나라가 개국 320년 후에 끝난다는 내용이다.[6] 이 과정에서 하귀는 가사도에게 송의 멸망을 예언한 책을 보여주었고[5], 가사도는 이에 답하지 않았다.[7] 수부타이의 손자이자 우량카다이의 아들.[8] 자신은 회서에서 후일을 도모하겠다고 말한 뒤, 가사도에게는 어가를 보필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후 암암리에 원에 투항하기로 마음먹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