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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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생애
2.1. 남송의 명장
2.2. 절조를 지키지 않은 만년
3. 여담


1. 소개[편집]


夏貴, 1197~1279
자는 용화(用和), 안풍(安豊·지금의 안휘 수 현) 사람으로[1] 송말원초 명장이다. 맹공 사후 남송의 호국대장 중 하나였으나, 남송 조정이 항복한 뒤 원에 회서를 바치고 투항했고, 그로 인해 《송사》에는 그의 열전이 없다.[2]


2. 생애[편집]



2.1. 남송의 명장[편집]


1197년 출생으로 평민 출신인 그는 병졸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타고난 기질이 뛰어나 밤에 활이 떨어지는 곳을 볼 수 있어 '여름밤의 눈'이라 불렸을 뿐만 아니라 어릴 적에 죄가 있다고 하여 쌍기를 얼굴에 새겼는데, '하기아(夏旗兒)'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용맹함으로 여문덕[3]의 인정을 받았다.

1234년, 단평의 입락 시기 조범[4]이 낙양을 수복할 때 그를 따라 전선에서 활약해 비장으로 승진한 이후 안풍(安豊)의 포위를 풀어 장교로 올랐다. 그 뒤 사방에서 전투하다 불리해지기도 했지만, 매번 작전에 성공하였다.

가희 3년(1239), 군사를 이끌고 수춘의 포위를 푸는 등 두고, 여문덕, 여개[5] 등과 함께 활약한다. 1246년에는 조규의 명령으로 고우(高郵)를 구했다. 비록 조범, 조규 형제와 여문덕 등과 함께 관계를 맺었으나, 이 당시에는 무명의 장수였다.

1257년 길주자사, 지회원군(知會遠軍)으로 승진했다.

보우 6년(1258), 하남초무사(河南初務使)를 겸하고, 곧 수춘군 개국백(開國伯)에 봉해져 7백 호의 식읍을 받았다.

1259년 백여 일 동안 회원을 수비하여 금띠 하나, 은 오백 냥을 하사받았다.

1260년 몽골의 우량카다이가 북으로 귀환하였고, 그는 위원(偉源)에 진출해 300여 척의 전선을 확보했다. 또 황석항에서 싸워 말 3백여 마리를 얻고 수창을 탈환하였다. 또 대승원은 황주 단봉에 올랐다. 지회안주로 옮기고, 경동초무사를 겸임하였다. 이단의 남침을 막아냈고, 이단은 단기로 도망쳤다.

1261년 연수군과 동해군, 해주를 탈환하고, 백만관과 금대일, 여양전 3천 묘와 금구를 하사받았다.

1264년 사천무마제치사 겸 중경부로 임명되어 장각과 함께 호소산을 공격하였으나, 거호에서 실패하였다.

1265년 몰래 군사를 이끌고 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불시에 유정[6]이 이끄는 군대 수천 명을 참했다.

1267년 광안군을 수복하고, 그 공으로 영무군절도사(寧武軍節度使)에 봉해졌으며, 식읍 500호를 받고, 이백 호를 하사받았다.

1268년 연강제치부사(延江制治副使)로 황주(黃州)를 지냈다.

1269년 권형조·제치대사, 호광총영사, 사천책응대사, 지악주를 지냈다. 이 와중 양양성을 구원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봄철에 한수가 불어난 틈을 이용해 양양을 지원하려 했으나, 몽골군에 대패했다. 그해 7월 5만 군대와 3천 척의 전선을 이끌고 양양을 다시 증원하나, 녹문산에서 몽골군의 맹렬한 공격에 부딪혀 실패하고 만다.

1270년 황주로 후퇴했고, 그 이듬해 은퇴하려 했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2.2. 절조를 지키지 않은 만년[편집]


1273년 회서선무제치대사를 지내면서 황주(黃州)를 겸하였다. 12월에는 아술이 양라보를 공격했고 하귀는 군사를 이끌고 이를 구원하려 하자, 아술은 이를 듣고 휘하 삼백 척을 이끌고 돌아왔고, 하귀는 대패하고 도망치고 만다.[7]

1275년 가사도는 정병 7만명으로 손호신에게 지휘를 담당하여 지주의 정가주에 주둔했고, 하귀는 전함 2천500여 척을 강가에 두고 가사도를 전후로 삼았다[8]. 하귀는 원래 호북 지역에서 대패한 이래 적극적으로 싸우려는 의지가 없었다.[9] 원군이 기만전술로 송군을 안심시킨 뒤, 신무기로 송군을 혼란시키자 선봉 강재가 혼란에 빠진 군사들을 수습해 싸웠으나 그 와중 손호신이 애첩을 이끌고 가사도가 주둔한 곳으로 도주하자, 이에 원군이 심리전으로 송군이 무너졌다고 외치고 병사들은 보수가 도주한다고 외치는 등 송군의 혼란이 가중되었고 하귀는 싸우지도 않고 도주하여 아군은 소수이고 적의 수가 많아 불리하다고 외친 다음, 본인은 회서로 가서 후일을 도모하겠다고 한 뒤 가사도에게는 어가를 모시고 피신하라고 했다.

손호신: 저의 병사들은 명령을 따르는 자가 단 한명도 없었사옵니다.

가사도: 이를 어떻게 해야 하오?

하귀:각 군이 이미 겁을 먹었으니 우리가 어떻게 싸우겠습니까? 당신은 양주에 가서 궤멸된 군사를 모집하고, 해상으로 황제를 보호하러 가십시오. 그래야 저는 회서를 사수할 수 있습니다.


가사도가 퇴각하여 송군이 크게 패했다. 하귀는 여주로 떠났고, 아술[10]은 승승장구하여 송군을 잇따라 투항시켰다.[11] 그 뒤 하귀는 암암리에 바얀에게 투항하려 했다. 하귀는 추밀부사로 입조하였으나, 하귀는 황명을 어기고 취임하지 않았다.

남송 정부가 항복한 해인 1276년 2월, 회서 지역을 바치면서 원에 투항하였다. 홍복은 따르지 않아, 결국 하귀에게 유인되어 투항하고 아술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4월에는 수개부의동삼사참지정사, 행중서성사(行中書省事)를 지냈다.

1276년 6월에는 주복(周福) 등을 다자이후에 보내 전쟁의 이해를 설득시켰으나 주복은 그 무례함을 탓한 호죠 도끼무네에 의해 처형당했다.

1278년 승진하였고 그 이듬해 10월에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2]



3. 여담[편집]


  • 오자양장 중 하나인 우금과 비슷한 면이 있다. 우금은 관도대전 등 조조군 진영에서 초반에 엄청난 활약을 했으나, 번성 전투에서 관우에게 항복한 것으로 인해 공신 목록에서 빠졌고, 하귀는 몽원 군대에 맞선 남송의 호국 대장이었으나, 만년에 원에 투항한 것으로 인해 송사 열전에서 빠졌다.

  • 《송사》가 편찬될 때[13], 몽원 군대와 싸운 남송의 호국대장이었으나 만년에 절조를 지키지 않고 투항하였다는 이유로 편찬 시 몽원 사관들이 그를 빼고 기록했다고 한다.

  • 양주에서 이정지강재가 원의 군대에 의해 처형되기 직전, 강재가 그를 보고 이를 갈면서 말했다.
나를 보면 차라리 죽는 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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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문덕과 동향 출신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평민 출신으로 경력을 시작했다.[2] 송사가 원대에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몽원 군대와 지속적으로 싸워왔던 하귀가 만년에 절조를 지키지 못하고 투항했기 때문에 몽원 사관들은 그를 고깝게 보았다.[3] 하귀와 동향이다.[4] 조규와 함께 조방의 아들이다.[5] 여개는 뒷날 사천 지역에서 몽골군을 막아내나, 1254년 참소를 믿은 남송 조정으로 인해 급사한다.[6] 본래 북방 한인 출신으로, 이후 남송군에 항복한 뒤에는 맹공의 수하로 활약했으나, 여문덕의 무시 및 박해로 인해 1261년 노주를 바치고 몽골에 투항한다. 그의 항복으로 인해 몽골군은 수군을 육성할 수 있게 된다.[7] 이 때부터 하귀는 송을 위해 목숨 버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8] 그 이전 가사도는 바얀에게 화의를 요청하나, 거절당한다.[9] 그 와중 가사도에게 송의 끝을 예언한 책을 보여 주었고, 가사도는 이에 고개를 숙이고 답하지 않았다.[10] 수부타이의 손자이자 우량카다이의 아들이다.[11] 참고로, 정가주 전투 이후 가사도는 남송군을 수습하려고 하나 군사들에게 비아냥과 욕설을 들은 뒤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유배되던 와중 정호신에게 살해당하고, 손호신은 장세걸과 함께 원나라의 군사와 싸운다.[12] 남송이 멸망한 지 7개월 후였다.[13] <요사>,<금사>와 함께 원말 토크토에 의해 편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