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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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의 명장
呂文煥 | 여문환

이름
여문환(呂文煥)
생몰
?~?
주군
송이종
송도종
원세조
출신
남송(南宋) 숙주(淑州) 안풍(安豊)
국적
남송(南宋) → 원(元)
사망지
원(元) 숙주(淑州) 안풍(安豊)

呂文煥
생몰연대 미상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중국 남송 말기의 명장. 양양 공방전의 남송측 총지휘관이었다. 남송이 몽골의 침략을 버틸 수 있는 마지막 힘을 준 인물이었으나 양양 공방전이 계속되고 번성이 함락당하자 중과부적으로 결국 항복했다.


2. 생애[편집]


남송 숙주 안풍(현 안후이성 화이난시의 일부 출신으로, 여문환은 당시 형이었던 여문덕[1]과 함께 양양 수비를 맡았다.

쿠빌라이 칸이 이끄는 남송 원정군이 남송을 침공해오자, 여문환은 형제들과 함께 1267년부터 1273년까지[2] 몽골의 원정대를 상대로 6년 동안 공격을 버텨낸다. 특히 쿠빌라이 칸을 중심으로 침공해온 4차 양양 공방전 당시에도 무려 1년간 방어를 하였고 양양에 원군을 보내려던 남송과 어떻게든 접촉을 하려 하지만 번번히 좌절된다. 그렇게 무려 1년동안 지속된 포위전과 몽골군에서 도입한 새로운 병기인 회회포로 번성과 번성을 잇던 가교가 무너지면서 고립되었고 장병의 사기가 떨어지면서 투항자가 속출한다. 식량은 있었으나 전투 관련 보급부족, 몽골측에서 1년동안 버틴 충성심을 이해하니 이제 항복하라는 항복요구에 부하장수들에게 설득당한 끝에 결국 항복을 하게 된다.

이후 여문환은 당연히 쿠빌라이 칸에게 크게 중용되었으며, 여문환의 항복과 양양의 함락으로 인해 결국 남송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남송의 수도 임안이 함락될 때, 여문환이 항복을 권고하였는데 남송 최후의 승상이었던 문천상은 여문환에 대해 역신이라고 비난하였고 여문환은 문천상의 비난에 크게 부끄러워했다. 이후 중서좌승이 되어 강동을 위무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1279년 애산 전투에서 남송이 완전히 멸망한 이후 1286년에는 자신이 맡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3. 기타[편집]


코에이의 게임 징기스칸 4에서 남송의 장수로 등장. 6년간 원의 공세를 막아냈다는 점에서 전투 78이라는 준수한 능력치를 받았다. 다만, 수성전이 특기였던 사람인데 특기가 기동 + 돌격이라는 게 흠.

여문덕과 여문신[3]을 제외하고, 여문환 본인을 비롯한 여씨 가문의 일원들은, 모두 원에 항복하고 만다.[4]

양양 공방전 와중에도 여문환은 자신의 이득을 중시하여, 고달 등의 원군이 오는 걸 꺼리고 상황이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남송 조정에 유리한 전황이라고 허위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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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용신조협려에서 터무니없이 폄하된 인물중 하나다. 실제 역사상에서는 모국에 충성한 명장이었는데, 소설에서는 주색에 찌들은 소인배로 나온다.[2] 여문덕은 양양 공성전이 벌어지던 중인 1269년에 사망하였다.[3] 제2차 몽송전쟁악주 전투에서 전사했던 여문신과 동명이인으로, 1275년 원나라의 군대와 조우해 전사했다.[4] 대표적으로 여사기, 여문덕의 사위 범문호, 여문덕과 동향인 하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