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달(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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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제2차 양양 전투
2.2. 서류관 전투 및 백하 전투
2.3. 제3차 양양 전투
2.4. 악주 전투에서
2.5. 원에 투항하다


1. 개요[편집]


高達, 생몰년 미상.
남송 말기 명장. 1259년 악주 전투에서 맹활약하지만, 나중에 에 투항한다. 사서에는 기록이 있으나 독립된 열전이 없다. 《송사》, 《원사》, 《신원사》에는 그의 열전이 있다고 한다.


2. 생애[편집]



2.1. 제2차 양양 전투[편집]


1251년 벌어진 제2차 양양 전투에서는 이증백[1]의 명으로 형, 악 막부를 지낸 왕등과 함께 형호 지역의 2만1000명을 이끌고 양, 번에 주둔한 몽골군을 공격했다. 그 해 6월, 행원군자사 권지양양부, 관내무마에 오른다. 경호제치사는 표를 올려 고달 등에게 다시 양과 번을 지키게 하고, 조서를 내려 공을 세운 장병 32,700여 명이 각 관을 돌며 관전 350만을 포상했다.


2.2. 서류관 전투 및 백하 전투[편집]


1252년 몽골군이 한수를 건너 만주에 주둔한 뒤 서류관에 주둔하자, 고달은 장병들을 이끌고 하관을 장악하여 산으로 올라가 대전을 벌이고 별강, 석비항에 이른 뒤 귀환했다. 이후 1253년에는 양양을 지킨 공으로 상을 받는다.

1254년 3월 양성공이 되었고, 환위관이 되었으며, 원군단련사를 거느릴 정도로 직책을 유지하였다.

1257년 백하 전투에서 몽골군의 동문위를 격파한 공으로 우무대부·대원군 방어사에 올랐다.


2.3. 제3차 양양 전투[편집]


이후 양양성을 지켰고, 몽골군을 여러 번 격파하여 군대에서 신망이 높았다. 몇 년 후 조정은 그를 다시 기용하였는데, 호북무마사, 제치사 등의 직책을 맡아 호광 일대의 방어를 담당하게 했다. 제3차 양양 전투에서도 뛰어난 군사력과 작전능력을 다시 한번 과시했고, 그 공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아 여러 차례 발탁된다.


2.4. 악주 전투에서[편집]


1258년 쿠빌라이의 군대는 양라보(지금의 우한 시 신저우 구 양라진)를 탈취하고 송군의 강상 방어선을 뚫고 악주로 진군하였고, 1259년 악주[2]가 쿠빌라이의 군대에 공격을 받자 임안의 남송 조정은 당황하여 파촉과 강소 일대의 관군을 긴급 파견하여 구원하였다. 여기서 악주의 장수 장승, 여문신[3]은 몽골군의 공세를 잇달아 막아냈으나 몽골군의 포위망을 막지 못하고 장렬하게 순국했다. 하지만 악주 군민은 굴복하지 않고, 후임 수장인 고달의 인솔하에 완강히 성을 지키고 있었다. 수개월에 걸친 공방전 동안 악주의 방어선은 이미 많이 파괴되었고, 쿠빌라이 휘하의 용장 장유 등은 몇 차례 성 안으로 쳐들어왔으나 모두 격퇴되었다. 고달은 이 과정에서 몽골군의 장수 공언휘를 계략으로 주살했고 몸소 돌격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전투 틈틈이 교묘하게 계획을 세우고, 시간차를 이용해 빠르게 성벽과 공사를 보수해 군기를 저하시켰다. 이후 가사도는 송군의 주력을 이끌고 악주성 밖으로 나와 몽골군과 대치했고, 여문덕의 군대도 배를 타고 강을 따라 악주 부근으로 내려왔다. 쿠빌라이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 칸 자리를 놓고 싸우려다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양번을 수복하고 권지양양부, 관내무마, 군마절제 등의 직위에 오르고, 호북무마부사로 승진하여 강릉부에 50만 전을 하사한다.

그러나 자신의 공로를 믿고 권신 가사도를 여러 번 들이받아 가사도의 미움을 받았고 결국 파직되어 수년 후에 다시 관직에 오른다.

1263년 성도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들었고, 1261년 몽골에 투항한 유정[4]이 군대를 이끌고 왔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도망쳐 동천 지역을 공격하려다 금강에서 패했다.

그러나 제4차 양양 전투 와중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한 여문환에 의해 고달의 원군이 오는 것을 거절당하고 만다.[5][6]


2.5. 원에 투항하다[편집]


양양 함락 이후 원나라의 군대가 대거 남침하자, 고달이 지키던 강릉은 외부의 지원이 없어 결국 아릭카야의 권유로 원에 항복하고 만다. 이후 1275년 4월 쿠빌라이에 의해 참지정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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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번지역의 방어를 중시했다.[2] 오늘날 후베이성 우한 시 우창 구. 양양과 함께 남송 정권의 또다른 요충지였고, 악비와 악가군이 중원 회복을 위해 이 곳에 주둔했다.[3] 여문덕의 아우이자, 1275년 원의 군대에 의해 죽은 여문신과 동명이인이다.[4] 1261년 여문덕의 무시 및 암해와, 자신과 사이가 나쁜 유흥이 사천제치사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자 이에 위험을 느껴 노주를 바치고 원에 투항한다. 가사도는 이 소식을 듣고도 아무 조치가 없었다.[5] 여문환과 고달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6] 남송 조정에서 양양성에 고달을 파견하는 건 어떨지 논하였는데, 여문환은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하여 양양 전선에서 승전을 거두고 있다고 허위 보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