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식(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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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식
全湜

출생
1563년(명종 18년)
사망
1642년(인조 20년) (향년 80세)

정원(淨遠)

사서(沙西)
시호
충간공(忠簡公)
본관
옥천 전씨
부인
강화 최씨 - 부사(府使) 최거원(崔巨源)의 4세손녀(四世孫女)
남양 홍씨 - 사인(士人) 홍천서(洪天敍)의 딸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에 활동한 조선의 문관이다.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이며 사후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류성룡, 장현광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였으며 훗날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가 홍문관 부제학, 대사간, 대사성, 대사헌 등의[1] 청요직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을 일으켰다. 사후 좌의정에 추증되고 상주 옥동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2. 생애[편집]


1563년 정월 상주에서 전여림(全汝霖)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 전팽조(全彭祖)는 국자감의 진사였으며[2], 조부는 전혼(全焜)이다.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깊어 마을 사람들이 효동(孝童)이라고 칭찬했으며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이라는 사람이 사람보는 눈이 좋았는데 전식을 칭찬하며 나중에 크게 될 인재로 기대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 수십 명을 베는 공을 세워 김응남의 천거로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었다. 1599년에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1603년에 과거에 급제한 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병조의 낭관,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등을 지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 예조정랑, 울산판관, 전라도도사 등을 지냈으나 광해군의 실정에 실망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는데 이때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창석(蒼石) 이준(李埈)과 함께 산수를 유람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상사삼로(商社三老)라고 불렀다.[3]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한 후 예조정랑에 임명되었고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인 기주관(記注官)과[4] 임금의 교서를 작성하는 지제교(知製敎), 경연을 담당하는 관리인 홍문관 수찬과 교리를 지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扈從)하였는데 이때 이귀장만의 잘못을 논죄(論罪)하자 장만의 휘하 장수들이 들고 일어나서 "우리 장군은 아무 죄가 없는데, 실수한 말을 하고 있다."라고 하자 반박하며 꾸짖기를 "종묘와 사직을 몽진(蒙塵)하게 하고 군부(君父)로 하여금 피난을 떠나게 한 것이 누구의 죄이냐? 너희들도 또한 남의 신자(臣子)된 사람들인데 어찌 감히 이렇게 하느냐?"라고[5] 하니 잠잠해졌다고 한다. 이괄의 난이 끝난 후 병조 참의와 동부승지, 좌승지 등을 역임했다. 승지로 있을 때 임금이 김공량(金公諒)에게 절충 장군(折衝將軍)의 자급(資級)을 내려주었으나 전식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반려(返戾)하였는데 여론이 일처리를 잘했다고 칭찬했다. 1625년에 형조 참의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서 다녀왔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후금의 사신인 유해(劉海)가 화친을 맺자고 요구하였다. 이 때 조정의 의견이 화친으로 대부분 기울었는데 전식은 이에 대해 항소(抗疏)하여 화친하는 일의 시각이 절박하지 않다고 지적(指摘)하였다. 정묘호란 후에 예조 참의에 이어 대사간에 임명되어 여섯 가지 조목에 대하여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간쟁(諫諍)을 받아들이라는 것, 치우친 사심을 버리라는 것, 군정(軍政)을 닦으라는 것, 군관(軍官)의 수효를 줄이라는 것, 청(淸)과의 화의(和議)를 믿지 말라는 것, 남의 동정을 기찰(譏察)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1630년부터 이듬해까지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임명된 것이 네 번이었고 이조와 병조의 참의가 된 것이 두 번, 대사간에 임명된 것이 네 번이었는데 나이가 있고 병이 들어서 조정에 있을 수 없으니 간절히 외직을 청하여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임명되었다. 1634년 대사간으로서 논하기를 "옛날에 우리 선왕(先王)께서 경국대전을 만드신 후 비록 왕자(王子), 대군(大君)일지라도 감히 그 제도를 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인평 대군(麟坪大君)은 혼례(婚禮) 때에 의복과 기용(器用)이 너무나 사치스러웠으니 아마도 선왕의 제도에 누(累)가 될 듯합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이를 받아들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고향인 상주에 있었으나 영남지역을 이끄는 의병장으로서 의병을 일으켰다. 전쟁이 끝난 후 곧바로 한양으로 달려가니 왕이 의병을 일으킨 일을 기특하게 여겼다.[6] 병자호란 이후 곧바로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1638년에 대사간에 3번 임명되고 대사헌에 한번 임명되었으며[7] 예조참판, 대사성에도 임명되었다. 이때 차자를 올려 여덟 가지 조목을 논하였는데, 성궁을 조양하라는 것(調養聖躬), 실덕을 힘써 닦으라는 것(懋修實德), 사치하는 풍조를 통렬하게 혁파하라는 것(痛革侈風), 언로를 넓게 개방하라는 것(廣開言路), 기강을 떨쳐 숙정하라는 것(振肅紀綱), 절의를 숭상하고 장려하라는 것(崇獎節義), 백성들의 고통을 부지런히 보살펴 주라는 것(勤恤民隱), 내수사를 혁파하라는 것(革罷內需)이었는데 이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그 뒤에도 대사헌과 대사간에 3번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대신(大臣)들이 임금에게 건의하기를 "전모(全某)는[8] 덕망(德望)이 본래부터 높고 나이가 이미 노년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서둘러서 크게 써야 합니다."고 하였는데 오히려 그 말을 듣고서 더욱 스스로 겸손하게 처신하며 관직에서 물러났다.

1642년에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급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하고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를 겸임하게 하였는데 이는 이성구의 건의에 따른 것 이었다. 곧이어 대사헌에도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그해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부고가 알려지자 인조는 3일 간 조회를 중지하고[9] 부의(賻儀)와 사제(賜祭)를 정해진 예의(禮儀)대로 내렸으며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追贈)하였다. 이후 맏아들인 전극항(全克恒)이 병자호란의 원종공신(原從功臣)에 포함된 공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세자부 감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左議政兼領經筵事世子傅監春秋館事)로 증직되었다.

시간이 지나 숙종 때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는다.[10]

3. 여담[편집]


  • 전식은 장남인 규천(虯川) 전극항(全克恒), 차남인 창주(滄洲) 전극념(全克恬)과 함께 삼 부자가 모두 문장으로 명성이 있어 666년 역사를 지닌 상주의 유명 시회(詩會)인 낙강시회에 삼 부자가 참석하였다.[11]

장남인 전극항(全克恒)은 당대에 명문장가로 명성이 높았으며 인조 때 과거에 급제한 후 대교,예문관검열 등을 역임하고 예조정랑을 지냈다. 예조정랑으로 있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서 호종하던 중 한성을 지키라는 명을 받고 가서 수십 일을 머물며 지키다 결국 전사했다. 게다가 셋째 아들인 전극연도 행방불명되어 전식은 1637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간 좌의정 이성구에게 전극연의 행방을 알아봐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세 아들 중 차남만 남게 되어 문중을 돌볼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차남인 창주(滄洲) 전극념(全克恬)이 어쩔 수 없이 역임하던 관직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은거하며 문중을 이끌어 나갔다.

  • 역덕들이 한반도에서 가장 고생한 세대로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모두 겪은 16세기 중후반에 태어난 사람들을 뽑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 그 세대에 태어나 활약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으며 정묘호란 때는 당시 임금인 인조를 호종했고 병자호란 때는 나이가 74세인데도 불구하고 고향인 상주에서 영남지역 전체를 대표하는 의병장으로 참전했다. 심지어 병자호란으로 인해 두 아들을 잃는 슬픔까지 겪었다.

  •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 육로는 후금이 막고 있어서 해로를 통해 다녀왔다. 사신으로 다녀온 일을 기록한 사행록(槎行錄)에 따르면 이때 태풍으로 배가 흔들려 주변 사람들이 동요했는데도 불구하고 태연히 자리에 앉아 시를 읊으니 모든 사람들이 경탄했다고 한다. 태풍이 불어 함께 간 4척 중 하나는 침몰되었는데 침몰된 배에 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도 지었다. 이때 지은 시들은 모두 자신의 문집인 사서문집(沙西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 경연관으로 있을 때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이 "경연관 중에 고금에 통달한 사람은 정경세(鄭經世)요, 사리(事理)에 통달한 사람은 전식(全湜)이다.”라고 항상 칭찬했다.[12]

  • 최명길이 왕과 국정을 논하던 자리에서 "전식(全湜)은 충성스럽고 순후한 자입니다. 성상께서 항복(下城)하였을 초기에 사대부들은 모두 달아나고 흩어졌는데, 전식은 끝까지 남아 있었으므로 영남 사람들이 이의가 없이 모두 와서 공직(供職)하였습니다."라고 말하며 칭찬했는데 인조가 답하기를 "전에는 전식을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이제서야 훌륭한 사람인 줄을 알았다."라고 답했다.

  • 1656년 유형원이 편찬한 지리지 동국여지지 상주목 인물란에 언급된다. 또한 18세기 중반 무렵 편찬된 여지도서 상주목 인물란에도 언급되며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푼 덕에 여지도서 경주부 명환(名宦)란에 언급된다.[13]

  • 남인의 계보인 남보(南譜)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가문인 옥천 전씨도 기록되어 있고 기록된 인물로는 전식 외에도 송정(松亭) 전팽령(全彭齡)과 전팽령의 형인 송오(松塢) 전팽수(全彭壽)가 기록되어 있다.

  • 고향인 상주에는 전식이 과거시험 보러가는 길에 들린 주막집 주인이 꾼 용꿈의 기운을 받아 급제했다는 설화가 전해져 온다.

  • 사후 지역의 유림들의 추대로 대대로 지역에서 대대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특권인 향불천위로 지정되어 현재까지도 후손들이 제사를 모시고 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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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제학은 홍문관을 이끄는 실질적 수장이다. 대사간은 임금께 간언을 하여 항상 올바른 행동을 하게 이끄는 사간원의 수장이다. 대사성은 성균관의 수장으로 현재의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비유가능하다. 대사헌은 관리를 감찰하고 언론 역할을 하는 사헌부의 수장이다. 이 관직들 특히 부제학과 대사간, 대사헌은 언론 역할을 하는 삼사의 수장 중 하나로 이 자리에 임명되는 것 자체가 학자로서 큰 영광이자 목표였다.[2] 과거시험 과정인 소과와 대과 중 소과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했다는 의미이다.[3] 기록에 따라 상산삼로(商山三老)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 단어 모두 의미는 거의 같다.[4] 기주관으로 역임하면서 선조실록 편수(編修)에 참여하였다.[5] 쉽게 말해 이귀와 장만이 정말로 아무 잘못이 없었다면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이괄을 피해 한양을 떠나는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인데 같은 임금을 모시는 자들이 어찌 잘못한 사람을 감쌀 수 있나라는 의미이다.[6] 인조가 말하기를 "경(卿)이 창의(倡義)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내가 매우 가상(嘉尙)히 여기는 바이다. 영남(嶺南)의 군대가 부래(負來)한 뒤에 재차 집결(集結)한 것은 참으로 영남의 사대부들이 나라가 어려울 때 임금을 뒷전으로 여기지 않는 의리를 아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니, 호남(湖南)은 이에 대하여 부끄러운 바가 없겠는가?"라고 하였다.[7] 대사헌으로서 병자호란 동안 김자점의 무능함을 벌할 것을 주장하였다.[8] 과거 유교 문화권에서는 다른 사람의 본명은 임금과 부모, 스승이 아니면 한참 어린 사람에게만 쓸 수 있었다. 특히나 임금 앞에서는 더욱 엄하게 지켜야 했기 때문에 본명을 말하지 않고 '모'라고 돌려서 칭한 것이다.[9] 대신의 죽음에 3일 동안 조회를 중지하는 것은 매우 높은 직급의 재상이거나 당대에 명망이 두터운 대학자 또는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에 한해서 임금과 신하들 모두가 예의를 갖추어 죽음을 애도한다는 의미로 매우 명예로운 대우였다.[10] 시호를 하사하는 교지가 현재까지 남아있는데 교지에 따르면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들었다(危身奉上)하여 '충'이요. 정직하여 간사함이 없다(正直無邪)하여 '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11] 이 시회의 시작은 1196년 최충헌의 난을 피해 상주에 살았던 백운(白雲) 이규보부터이다. 시회는 1862년까지 총 51회 열렸는데 시회의 개최자나 참석자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규보, 김종직, 유호인(兪好仁), 김일손, 이황, 이준(李埈), 채득기(蔡得沂), 홍여하(洪汝河), 신석번(申碩蕃), 이만부(李萬敷), 정종로(鄭宗魯) 등의 인물이다. 이 인물들은 모두 한국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문장가이므로 낙강시회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시회임을 알 수 있다. 시회의 역대 내력은 다음을 참고[12] 원문: 學士任叔英 常稱 經筵官 通古今鄭經世 達事理全湜[13] 인물 설명에 따르면 경주부윤으로서 자신의 학식을 통해 지역의 학문을 일으켰고 선정을 베풀어 지역민들이 유애비를 건립해 주었다고 한다.[14] 불천위는 원래 국불천위만 인정되는데 조선중기부터 대부분의 세월을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며 동인 계열 인물에 대한 불천위가 안 내려지자 동인이 강성한 지역인 경상도에서는 지역의 유림들이 추대하여 지역을 대표할 만한 인물의 제사를 향불천위라는 이름으로 지정하여 계속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하였다. 불천위로 모셔진다는 것은 생전에 매우 명망있는 인물이며 불천위를 모시는 가문은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