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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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
金宗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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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31년(세종 13) 6월
조선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북면 제대리
(現 대한민국 경상남도 밀양시)
사망
1492년(성종 23) 8월 19일 (향년 61세)
조선 경상도 밀양도호부 명발와
(現 대한민국 경상남도 밀양시)
본관
선산 김씨
가족
아버지 김숙자
배우자 초배 조씨 부인 (사별)
계배 남평 문씨 부인 (재혼)
슬하 5남 3녀
신장
약 161cm 미만[1]

계온(季溫)
효관(孝盥)

점필재(佔畢齋)
시호
문충(文忠)
대표작
조의제문

1. 소개
2. 생애
3. 기타
4. 관련 문서



1. 소개[편집]


조선 초기의 문신.

길재의 제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사림에 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후에 사림의 시대를 열도록 해준 인물 중 1명이자 성종 때 진출한 많은 사림들의 스승. 하지만 그의 조의제문으로 많은 사림이 후대에 죽었으며 그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자였다. 때문에 이황, 허균 등 많은 후대에 유명한 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2. 생애[편집]


야은 길재의 제자 중 한 명이었던 강호 김숙자(金叔滋)의 아들로, 살아있을 때에는 정계에서 그다지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세조 대에서 출사했으나 실무를 위해 잡학을 익히라는 세조의 권유를 "잡학은 유자(선비)의 일이 아닙니다."라는 논리로 비판하다가 파직당하기도 했고 <조의제문>으로 세조를 비판하기도 하는 점을 보면 애시당초 세조를 좋아하지 않은 것 같다.[2] 근본적으로 사림이 가지고 있는 폐해의 전례이자 원흉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린아이처럼 키가 작았지만 글을 잘 썼고 조선 제9대 임금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좌천 당시 상관이었던 유자광과 사이가 안 좋았는데 서얼이라는 이유로 유자광을 멸시했다.[3] 이와 관련된 일화 역시 유명하다.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은 유자광이 쓴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걸어놓은 것을 보고는 그것을 떼어 불에 태워버리게 명했다고 한다. 비유를 들면 경상도지사가 내린 시문이나 그림을 태워버린 것이다.[4] 전하는 말로는 김종직 자신보다 8살 어리고 출사 시기도 9년이나 늦었으면서도 서자 주제에 빠른 출세를 한 유자광을 김종직이 평소 고까워했기 때문이라는 것.[5] 또한 하루는 어느 모임에서 김종직의 제자들이 자신들보다 관직이 높고 나이도 많은 유자광을 대놓고 서출이라고 비웃는 등 알아서 화를 자초한 면이 있다.

다만 현판 사건은 진위 여부가 의심이 되는게 일단 이 부분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것은 맞지만 <연산군일기>에 후일담처럼 짤막하게 쓰여진 내용이다.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재직하던 시절은 성종 원년(1469년)부터 성종 6년(1475년)까지로 당시 김종직은 세조에게 개소리[6]하다가 개털되어 두각을 드러내기 이전이었다. 반대로 유자광은 한창 남이의 난을 고발한 공으로 잘나가던 전성기 시절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반인(수행원) 박성간에게 모함을 당해 성종 원년에 의금부에 수감되는 일이 있었는데도 하루만에 정희왕후가 석방을 지시할 정도로 조정의 신임을 받던 인물이었다.[7] 그런데 이런 시기에 김종직이 유자광의 현판을 불태운다? 박성간은 모함 사건으로 본인은 능지처참에다 멸족까지 당할뻔 했다가 간신히 본인만 참형에 처해지는 것[8]으로 끝났는데 현판 사건이 알려진다면 박성간 모함의 배후로 찍힐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김종직이 죽고 무오사화로 전방위 공격을 당할 때도 현판 사건을 논하는 사람은 1명도 없었다.[9]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김종직 생전에는 유자광과 갈등이 없었고 오히려 유자광이 현석규를 탄핵한 것 때문에 사림파에게 탄핵되었다가[10] 복귀했을 때 이를 지지해준 사람 중 하나가 김종직이었으며 현판 사건도 근거없이 사관의 평으로 넣어둔 사건이다.

후일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은유와 화려한 문장 속에 숨겨진 뜻을 연산군의 명을 받은 유자광이 풀이하자 이에 진노한 연산군에 의해 김종직의 제자들이 모두 사형이나 유배를 갔고 이미 죽은 김종직 본인도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3. 기타[편집]


  • 수많은 를 남긴 뛰어난 문인이었고 정몽주에게서부터 내려오는 도학의 계승자였다. 그의 스승이자 아버지인 강호 김숙자(1389~1456)는 야은 길재의 제자로 그는 길재의 손제자가 된다. 그는 김굉필[11], 김일손, 정여창, 남효온, 남곤, 김전, 손중돈 등 많은 제자를 육성했다. 그런데 다만 제자 교육에서는 애매하다. 이들이 이후 사림의 기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오사화의 배경이 된 김일손의 야사 드립치기나 남효온의 전기 소설 <육신전(六臣傳)> 등은 유교술이부작(述而不作)[12]과는 많이 차이가 난다. 후대에 사림이 집권하면서 스승이라고 높이지 않았으면 오히려 사림의 존재 자체를 없앨 뻔한 위기 상황을 초래한 원흉이라고 볼 수도 있다.

  •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이른바 '영남학파'의 시초가 되는 인물이다. 당대에는 경상도 사당(선비당)이라고 불렸다. 초기 유학에서는 붕당, 당이라는 단어가 별로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었지만[13] 송나라대 이후 성리학 체제에서는 오히려 이익을 탐해 모인 소인당에 맞서 도학을 중심으로 군자당이 결집해야 한다는 논리로 전환되었고 성리학을 완성시켰다고 평가받는 주자는 임금까지도 군자당으로 끌어와야 한다는 인군위당(引君爲黨)을 주장했다.[15] 사당이라고 불린 것 자체가 이미 훈구척신들과는 구별되는 사림의 정체성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육성한 제자들은 훈구파와 갈등을 일으켜 몇 차례 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16] 남곤은 스승과 같이 노골적으로 유자광을 조롱하거나 멸시하였는데 그 이유는 유자광이 노비 출신의 어머니를 둔 얼자 출신 주제에 고위직에 오른 것을 건방지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 현대에는 일반적으로 조선 초중기 사림파의 거두로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그의 후학들인 사림파가 득세한 조선 중기부터도 평가가 좋지만은 않았다. 이황은 말년에 '김종직의 평생 사업은 시화(詞華)'였다고 평가했다. 경전을 탐독하며 성리학의 도를 깊게 닦은게 아니라 문장을 아름답게 쓰는 것에만 평생을 바쳤다는 뜻이다. 성호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김종직은 하나의 문사(文士)일 뿐이다.'라고 김종직을 비판했다. 특히 허균은 그를 몹시도 싫어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김종직론》에서 '<조의제문>을 쓰고도 세조에게서 벼슬을 한 것은 가소로운 일'이라면서 김종직을 맹비난했다.[17]

사실 결정적인 계기는 수제자 김굉필이 김종직이 문장에만 치중한다고 스승과 갈라선 것이었다. 이후 조선 성리학의 전통이 정통 성리학 공부에 몰두한 제자 김굉필, 정여창,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로 이어지면서 이들과는 달리 김종직은 조선 문묘배향 18현에서도 제외된다. 송시열을 비롯한 후대 성리학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정몽주와 김굉필을 이어주는 중간다리 정도. 김굉필이 조선 성리학의 정통 주자로 인정받다보니 후대 유학자들은 김굉필이 스승과 결별한 것도 다 진정한 학문의 길을 가기 위함이었다고 옹호해 주는 분위기이다. 그래도 현대에서는 사림의 계보표에서 정몽주와 길재의 학풍을 이어받은 사림의 조상격인 신료로 확실히 인정해주는 인물이다.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가 길재의 제자였고 김숙자는 김종직의 아버지이자 스승이었기 때문. 사림파의 전신이 되는 인물들도 대다수 이상이 김종직의 제자였던 것도 있었다. 다만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사림파의 거두라고 평가받는 것과는 달리 그의 행보는 유학의 원칙이나 선비의 덕목 중 하나인 '절의'에 충실했다고 보기도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이 있었기에 이후 조선의 후대 사림들조차도 비판을 하기도 했고 오늘날에는 조선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선비라는 조선시대 지식인 계층의 이중성과 위선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들기도 한다.[18]



4. 관련 문서[편집]



[1] 당대 조선 평균 키는 161cm 였는데 키가 어린아이처럼 작았다는 묘사를 보아선 대략 평균에서 10cm 이상은 작을 것이므로 161cm 이하로 보인다.[2] 의문인 점은 김종직은 성종 앞에서 대놓고 성삼문을 찬양한 적도 있는데 성삼문은 사육신 중 하나이며 성종은 세조의 손자이다. 따라서 김종직의 말은 성종의 입장에서는 할아버지모욕당한 셈이다. 근데 정작 본인은 세조와 성종을 섬겼다.[3] 남이를 모함해 죽게 만든 간신이기 때문에 싫어했다는 설도 있다.[4] 다만 유자광이 경상도 관찰사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 일화는 실록에는 있지만 전후 관계를 비추어 보면 신빙성이 매우 떨어지는 일화다.[5] 성학(聖學)으로 심신을 수양한다는 선비를 자처한 사람의 태도라고 하기에는 곤란하다. 원래 사림파의 행태를 보면 내로남불이 심하기는 하다.[6] 위의 7학 이야기[7] 정희왕후는 세조 시절에는 자신의 친족들을 등용하려는 세조를 말렸고 성종 시기에는 친족인 윤호가 죄를 저지르자 벌할 정도로 나름 공정했다. 그런 정희왕후가 이 정도의 모습을 보였다는건 유자광에게 죄가 없거나 아니면 중요한 인물이거나 둘 중 하나다.[8] 의금부에서 박성간은 능지처참하고 일족도 죽일 것을 청했는데 성종이 박성간 본인만 참형으로 다스리는 것으로 처결했다.[9] 관점을 달리 해서 보면 탄핵과 처벌을 주청하면서 신하들간의 갈등을 끄집어내면 속보이는 짓이 된다. 이미 대역죄 혐의가 걸린 자에게 괜히 그걸 꺼내서 사감이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물론 유자광이 안 드러낸다 해도 김종직의 개인 처신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려는 사람들이 끄집어낼 수는 있다.[10] 정작 사림파가 현석규를 적극적으로 탄핵했다. 그야말로 이중잣대가 따로 없다.[11] 김굉필은 스승이 현실 타협적인 면을 보인다고 비판하여 사이가 나빠졌는데 김종직이 죽었을 때도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12] 공자의 말, “나는 전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을 기술할 따름이지 새로운 것을 지어내는 것은 아니다. 옛 것을 믿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마음 깊이 은(殷)의 현인 팽(彭)을 본받고자 하는 것이다.” 子曰 述而不作(술이부작) 信而好古(신이호고) 竊比於我老彭(절비어아노팽)에서 유래한 말이다. 없는 사실이나 불명확한 사실은 배제하고 사실 그대로만 기술한다는 뜻과도 통한다.[13]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의 죄목 중 하나가 붕당을 이루었다는 이유고 성종 때도 임사홍이 처벌받은 이유 중에도 붕당을 맺었다는 것이 있다. 조선 전기만 해도 붕당은 금기였던 것이다.[14] 이 때 무려 주자를 실언했다고까지 말하였다! 주자를 비판하는건 조선 초기에나 볼수 있을법한 일인데 중기의 임금인 인조가 이런 것. 나중에는 좀 낮춰서 주자의 말이 지나쳤다 정도로 말햇지만. 그만큼 인조가 붕당을 싫어했다는거다. 물론 인조반정의 주역이 서인인 만큼 붕당에 대한 경계와는 별개로 인조시절은 서인집권기였다.[15] 인조 시기에 이런 주장이 경연에서 나온 바 있었는데 이 때 인조는 설령 군자의 당이라 해도 당이란 용어는 옳지 않다고 말했다. 나중에는 아예 당이라는 소리는 듣기도 싫다고 일갈했을 정도인데[14] 인조 시절이 서인 중심이기는 했어도 인조 개인은 대북만 싸고 돌다가 권력이 너무 집중되어 문제가 생긴 광해군 때문인지 내내 붕당을 경계했다.[16] 남곤이 기묘사화의 주범이라면서 까이고 있는 판이다.[17] 다만 허균도 당대나 후대나 유학자들에게는 이단아로 취급받은 인물이었는지라 역으로 "네놈이 뭔데 김종직을 까냐?" 라는 식으로 맹비난당했다.[18] 김종직은 세조에게 등용되어 그의 봉록을 받아먹으면서도 그의 집권을 비판하는 <조의제문>을 남겼다. 문제는 전근대 왕정 국가에서 벼슬을 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벼슬을 준 왕에게 충성해야 할 의무가 있고 그 중 하나는 왕에 대한 지지다. 단종에 대한 의리를 다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벼슬하지 말아야 했고 벼슬을 하고 싶었다면 <조의제문> 같은걸 남기지 말아야 했는데 벼슬이라는 실익과 신의도 지켰다는 명예를 같이 얻고 싶었는지 2가지를 동시에 하는 매우 어이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나마 벼슬을 했더라도 세조 때는 몰라도 성종 때라도 단종의 복위를 끈질기게 청했다면 이 정도로 비난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김종직을 따르던 이들로 김종직의 이런 모순된 행위를 모르지도 않았을텐데 그저 충의지사로 떠받드는 모습은 이는 김종직 하나만이 아닌 당시 김종직과 가까운 선비들의 전반적인 모습이 이랬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들의 위선과 모순이 김종직이라는 인물을 통해 고스란히 노출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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