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락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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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張樂行

1811년 ~ 1863년 4월 28일

염군의 난을 일으킨 염군의 초대 지도자.

고향은 안후이성 보저우시 장노가(張老家)


2. 행적[편집]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고 임협[1]을 좋아했다고 한다. 소금 밀수를 통해서 먹고 살았다. 당시 소금은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 국가 전매로만 생산 및 판매가 허락됐기에 밀수는 사형을 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국가 공인 소금은 가격이 높았기에 몰래 생산한 어둠의 소금(...)은 언제나 수요가 있었고 장락행은 그런 소금을 유통하는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특히 산둥성, 안휘성, 강소성은 바다와 접해 있어서 장락행과 같은 어둠의 소금장수들이 조직을 이뤘는데 이것이 염군의 시초이며 장락행은 염군의 무리들 중 하나의 두목 노릇을 했다.[2]

염군의 세가 커지자 당연히 청나라는 이들을 진압하려 했고 여기에 반발하여 1852년 2월에 18명의 염군 지도자들[3]이 모여서 장락행을 총수령으로 뽑았다.

다만 장락행은 직후 갑자기 이탈하여 청나라에 항복하여 단련(團練)[4] 지도자가 됐다가 다시 염군으로 전향하는 등 구체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마음은 미약했던 걸로 추정된다.[5]

1853년에 태평천국군이 안칭을 점령하고 이개방, 임봉상, 길문원이 북벌을 시작하자 염군이 여기에 호응[6]했다고 하나 실상 활동은 아직 미미했기에 크게 눈에 띄는 활동은 벌이지 않은 모양.

1855년에 드디어 장락행은 치하집(雉河集)[7]에서 열린 염군 지도자들의 회합에서 맹주로 추대되고 스스로를 대한명명왕(大漢明命王)이라 칭했다. 또한 노랑, 흰색, 남색, 검정, 붉은색의 깃발을 총기(總旗)로 삼고 각 휘하에 대기(大旗), 소기(小旗)를 두는 오기군제를 만들고 벼슬 역시 만들었다. 단 장락행은 추대 된 맹주라서 각 총기의 대장은 따로 있었고 그들에 대한 지휘권이나 임명권은 없는 상태였다. 또한 반정부적인 가치는 좀 더 강화됐지만 아직까지는 각 지역의 약탈에 치중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1857년, 염군은 태평천국과 회합을 갖고, 그 지도를 받게 됐으며 장락행은 태평천국의 2세대 명장들인 이수성, 진옥성과 연계하여 회남에서 전투를 벌이는 등 연계를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또한 장락행은 천왕 홍수전으로부터 회북장군(淮北將軍), 정북주장(征北主將), 나중에는 옥왕(沃王)에 봉해졌다.

이 때부터는 주로 진옥성과 연계하여 강소성, 안휘성, 하남성, 산둥성을 주 전역으로 삼아서 싸우게 된다. 단, 장락행을 위시한 염군들은 자체 조직망, 지휘계통은 그대로 유지했기에 독립성은 강했다.

1862년까지는 청나라가 태평천국의 난으로 힘이 빠진 상태라서 장락행은 약탈 및 태평천국군과의 연계를 할 수 있었지만 동년에 안휘성의 태평군이 주요 거점인 안칭을 잃고 진옥성이 죽는 등 연락이 끊어지자 곤경에 처하게 된다.

청나라 중앙정부는 수도인 베이징 근처의 반란군을 그대로 둘 생각이 없었고 1863년에 몽골 왕공족 출신의 승격림심을 진압군의 대장으로 삼아서 장락행을 잡도록 했다. 이미 태평군과의 유대가 끊어져서 고향 안휘성 일대를 떠돌던 장락행의 군대는 치하집(雉河集)으로 물러나서 요충지인 윤가하(尹家河)를 지키고 있었다.

곧이어 3월 23일에 승격림심이 이끄는 20만의 군대가 도달했고 장락행은 와하(渦河)의 북쪽인 장수포(張樹鋪)에서 등뒤로 비수(淝水)를 둔채 결전을 벌였다.

이때 장락행의 군대는 떠돌아 다니느라 많이 지친 상태였고 특히 총기류와 화약이 모자라 화력에서 청군에 크게 밀리게 된다.[8] 또한 승격림심은 몽고 출신으로 기병대인 몽골철기를 이끌고 있었는데 이것 때문에 염군의 주특기인 기병을 통한 측면 공격은 장점을 잃었고 격전 끝에 장락행은 10여 명의 부하들만을 이끌고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장락행은 부양(阜阳)[9]의 마가점(馬家店)으로 달아났다가 밤새 서양집(西陽集)으로 도망쳐 도달했는데 이곳에는 오제군기 중 남기를 이끄는 이가영(李家英)이 있고 산동성으로의 탈출이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가영은 이미 청나라에게 붙은 상태였고 환대하는 척을 하다가 쑤저우으로 가서 안휘성 순무(巡撫)인 영한(英翰)에게 밀고했고 장락행은 영한이 보낸 군대에 잡히고 만다.

장락행은 의문집(義門集)에 있는 승격림심의 지휘부로 압송당했고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지만 오히려 청나라와 승격림심을 호되게 욕하는 등 꺾이지 않았고 4월 28일에 아들인 장희(張喜), 양자 왕완(王宛)과 함께 처형당했다.

하지만 조카인 장종우(張宗禹)는 살아남아서 신염군을 조직했고 숙부의 뜻을 이어서 계속 반란을 이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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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약자를 돕고 강자를 물리치는 정의감 혹은 용맹스럽고 호협한 사람[2] 당시 위의 3성은 가난한 빈민, 음지로 숨어든 백련교 신자들이 많이 유입돼서 염군의 조직들은 통일 된 성격을 띄지 않았다.[3] 포(浦)라고 불렸다.[4] 청나라의 지역 자치 방위 조직[5] 표면상으로는 염군의 총수령이지만 염군은 구성원이 다양하고 그도 추대된 입장이라 절대권력은 없었다.[6] 이때 처음으로 염군이라 자칭했다. 그 전에는 염자(捻子)라고 자칭했다고 한다.[7] 안휘성 보저우 과양현(涡阳县)[8] 진압군은 최신식 대포와 총기를 갖춘 상태였다.[9] 현재 안휘성 푸양 시